그날을 기다리며
미국에 사는 남동생의 연락을 받았다.
시차로 인해 주로 문자를 주고받는데, 모처럼 음성통화를 했다. 요즘 들어서 형제들이 생각난다면서 골고루 안부를 챙기며 내년쯤에 나오겠다고 한다. 삼십 년이 넘도록 미국에 거주한 그와 만난 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타국에 사는 이와의 만남은 며칠이나 몇 달 후가 아닌, 몇 년 단위로 기약한다. 부모님이 계신다면 더 자주 볼 수 있었을까. 설령 고국에 온다 해도 사업 때문에 며칠 만에 돌아가기에 바빴다. “내년에 나오게 되면 시간을 여유 있게 잡고 여행도 다니자.”란 말을 전하며 끊었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작년에 서로 통화하다가 동생이 내게 미국에 다녀가길 청했다. 사실 그때 장거리 여행을 떠날 상황이 아니었다. 망설였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볼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바람처럼 스쳤다. 동생이 여비를 보내서 일주일 만에 미국행이 이뤄졌다. 관광지는 예전에 다녔고, 동생이 사는 도시 근교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가 직접 운전하며 산과 바다, 공원 등 많은 곳을 구경시켜 주고 각국의 음식도 맛보게 했다. 평소에 가고 싶었던 미술관의 전시도 관람했고, 두 시간 거리의 ‘세컨드 하우스’에도 가서 하룻밤 묵었다. 감각이 뛰어난 동생이 시간 날 때마다 직접 인테리어 한 세련되고 편한 집이다. 그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며 따로 매입한 토지도 보여줬다.
나와 동생이 미국에서 갑자기 만났던 건, 어떤 예견 때문이었을까. 그곳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올케가 보낸 사진에서 동생이 여러 가닥의 호스를 매단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무기력한 그의 모습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났을 때도 많이 피곤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병세가 깊었을 텐데 본인도 알지 못했다. 이곳의 형제들은 멀리서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동생은 몇 달간의 사투 끝에 소생했지만, 회복의 속도가 더딘 편이다. 이제 회사 일을 조금씩 하면서 지낸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사업 규모도 줄이고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중이라 한다. 생사의 기로에 섰던 동생은 이곳의 안부를 자주 묻고 그리워한다. 삶의 언저리에 작별의 시간도 머물러 있음을 느끼는 듯하다. 그는 건강 때문에 장거리 여행이 어렵다고 한다. 일 때문에 고국 방문을 미루는 줄 알았는데. 동생이 회복되어서 이곳에 올 수 있다면,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으리라. 즐겁고 행복한 추억만 간직하며 돌아갈 수 있도록.
글로벌한 시대라 해도 먼 타국에서 지내는 동생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없어서다. 열심히 살면서 많은 것을 누렸다 해도 옛 정서의 감각은 그대로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동생이 감성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 그 동생과 내가 각별한 건, 첫 자취생활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누나인 내가 밥도 해주고 지각하지 않게 깨워줬다. 다른 형제도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 할 나이가 되었다. 우리는 언젠가 영영 헤어질 시간이 올 것이다. 서로 안부를 챙기며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마음으로 지낸다.
나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내 곁에 있는 이들이 정말 소중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가족과 지인에게 좋은 말씨로 대하려고 노력한다. 기분 내키는 대로 하지 않고 온화한 말씨로 대하면 상대방도 부드러워진다. 주변 사람에게 많은 걸 바라고 요구했는데, 언젠가부터 기대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동생과 통화하고 무거워진 마음을 애써 돌린다. 가깝게 있다고 해서 자주 만나는 건 아닌데, 아픈 동생이 마음에 걸린다. 그도 젊을 때는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꿈을 펼치며 앞만 보고 걸었는데. 뒤돌아볼 겨를이 없던 그가 요즘 들어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제를 자주 챙긴다. 고국의 산천에서 동생과 옛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언제일까. 아무쪼록 속히 회복되고 형제들이 다 모여서 지난날의 회포를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첫댓글 지송 선생님의 글, 마음으로 읽었어요. 동생을 향한 혈육의 정.공감대가 크군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소식이 뜸해진 동생을 챙기면서 보고싶을 때 불쑥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동생이 오시는 날 정담 원없이 나누시고 추억 많이 간직하시기를.....
좋은 글 반갑게 읽었습니다.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즘 지송 선생님 글이 막걸리 마시듯 술술 읽히고 매끄러운 건 글 솜씨가 많이 향상 되었다는 증거이겠지요.
동생의 빠른 회복을 기원합니다.ᆢ
한없이 착하고 성실한 동생을 두신 누나의 옛 추억을 들으니 뭉클하면서도 부럽네요^^.
누나를 초청해 정성을 다해 구경시켜준 미국 여행도 부럽습니다.
건강 회복 중이신 동생의 삶을 써 내려가신 구절을 읽으니 잠시 가슴을 찌르르하게 하는 무엇을 느낍니다.
"나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내 곁에 있는 이들이 정말 소중하다." 지송 김영신 선생님의 이 문장에선 더욱 그런 감정이 솟아납니다. 미국 동생 분과 가족분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