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당시 91세 우리 어머니 치매 5등급 받아 약 타러 병원 모시고 가면서 떠오른 추억을 글로 적어봅니다
요즘 30대 때 읽었던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다시 읽고 있다.
30년 세월의 강물이 흘러 다시 읽으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느껴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슴에 와닿는다.
어제 3부 3권(11권) 중 트럭 운전수 홍이 어린 손주들이 불쌍해서 비럭질을 해서라도 믹여 살리겠다고 하는 노파를 진주까지 태워주고 아이들 떡이나 사다 주라고 내민 지폐 한 장에 떠오른 두 사람의 죽음.
홍이 눈앞에 생모 임이네의 얼굴이 떠오른다.
임종 때의 그 비참한 얼굴, 눈을 뜬 채 숨을 거둔 얼굴, 생명의 빛을 잃은 눈동자.
왜 좀 따뜻하게 못했을까?
난생처음 보는 저 노인을 위해서 내 마음이 이리 아픈데 생시 어머니를 위해 이만큼이나 맘 아파한 일이 있었을까?
견딜 수 없는 죄책감, 죽은 어미를 생각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
어쩌면 일본으로 간 이유 중에는 모친에 대한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참한 죽음을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병석에서 병으로 갔지만 임이네의 죽음은 월선의 죽음과는 달랐다.
이 두 죽음에서 비로소 홍이는 월선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놓여났으며, 월선이 점령했던 자리에서 생모의 죽은 모습이 낙인과 같이 찍혀버렸던 것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죽음과의 무참한 투쟁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체념 못한 죽음과의 투쟁이었다.
애증을 넘어선 그 모습은 견딜 수 없는 연민으로 종전까지의 홍이를 파괴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과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확대되어간 허무의 깊이 모를 심연이었다.
월선이 축복받은 죽음이라면 임이네는 저주받은 죽음이요, 근원적으론 죽음이란 저주받은 것일 거라는 공포는 홍이 마음 깊이 지배하였다.
또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불쌍한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실까?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어느 모임에서 죽음을 앞두고 무슨 유언을 남길 것인가를 이야기했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당신 때문에 행복했소. 행복한 인생을 보냈소. 고맙소!"
"얘들아, 서로 사랑하며 남들에게 베풀며 살아라!"
주는 것이 베푸는 것이 행복이더라.
오늘은 91세 우리 어머니 치매 5등급 판정받아 약 처방을 받은지 한 달이 지나 노원을지대학병원에 가는 날이다.
병원에 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지금 치매 초기이고 그것 더 나빠지지 않도록 약을 먹고 있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리고 치매라는 병은 나이가 들면 많은 사람들이 걸리고, 나이가 들면서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것처럼 치매도 아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의사 선생님에게 한 달 동안의 어머니의 증세를 말하니 한달 전보다 인지능력이 더 떨어졌다고 하며 2배 크기의 약을 처방해 준다.
어머니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치매 안 걸리고 돌아가셨는데 하신다.
내가 어렸을 때인데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위로 아들 둘과 막네로 어머니를 둔 외할아버지는 한동네에 딸을 두고 보며 살겠다고 징검다리 냇물 건너 동네로 시집간 딸을 3년 시집살이가 끝나자 데리고 와 한 동네에 살았다.
한동네에 살았는데도 외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던 기억은 없는데 돌아가시기 3일 전 평소에 한량처럼 입고 다니시던 하얀 모시옷에 지팡이를 짚고 사립문을 들어오셨다.
돌담 아래 두엄에 있는 염소와 소를 보시고 돼지들과 토끼를 들여다보고 초가지붕보다 몇 배 높이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지나 뒤안 대나무밭에서 발로 땅을 후비며 지렁이를 찾고 있는 닭들을 유심히 바라보셨다.
그리고 정제 앞에 있는 장독도 만져보시고 마루에 앉아 꼬리치는 개를 쓰다듬으며 딸이 해준 호박죽을 “참 맛나다”하시며 드시고 가셨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3일 후 주무시듯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외삼촌도 외할아버지처럼 그렇게 고통 없이 주무시다 가셨다.
어머니도 외할아버지 외삼촌처럼 그렇게 잠자듯이 갔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왜 하나님은 나를 안 데려가신다냐 하시면서.
우리 어머니 매일 치매약 빠뜨리지 말고 드시고 요일과 날짜를 아시라고 달력 날짜 위에 약봉지를 하나씩 붙여놓았다.
아직 저녁 6시도 안 되었는데 어머니가 저녁밥을 먹고 가라고 하시면서 먹을 것이 없다고 달걀 프라이를 세 개나 하신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러하듯이 자식을 많이 먹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60을 훌쩍 넘긴 자식을.
어머니에게 달걀 프라이 하나 드시라고 했더니 세 개 다 먹으라고 하면서 밥도 내가 먹는 량의 두배를 퍼준다.
아들이 많이 먹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을 알기에 계란 프라이 세 개와 그 많은 밥을 다 먹었다.
치매가 아무리 심해져도 자식을 알아보기만 한다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모두 다 이렇게 하시리라.
91세 우리 어머니 건강하게 사시다가 저 천국으로 아픔 없이 떠났으면 좋겠다.
첫댓글 어머님이 참 인자하게 생기셨어요
밥상을 보니 정갈하고 건강식이네요
치매라고 믿기가 어려워요
달력에 붙은 약을 보니 어머님이 확실히 복도 많으시고요
무엇보다 가슴을 멍하게 하는말
‘버리고 갈것만 남아서 홀가분 하다’
돈 많은 사람들은 떠나갈 때 괴로울 것 같습니다.
너무도 아까워서
우리 사무실 근방에 5층 빌딩을 가진 90이 가까워오는 어르신이 계신데 그분을 보면 이런 걸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는 이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너무 맛있어 보이는 밥상입니다. 어머니 아직 살아계신가요.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아직 건강하십니다.
지금도 혼자 지내시려고 하십니다.
누님이 옆에서 보시고 매주 형제들이 돌아가며 가고 있지요.
나무님의 사모곡의 글 잘 읽었습니다. 밥상에 차려진 미역국, 달걀부침, 깻잎, 조림 등이 정겹고 어머니의 수줍은 미소가 아름답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도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는 때가 되었나 봅니다. 추천 꾸욱
아~ 이런 것이 사모곡이었네요.
학교에서 배울 때 사모곡을 배웠는데
제가 사모곡을 쓰다니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사진에서 사랑이 넘쳐나네요.
어머님이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직 건강하십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한 여행 되세요.
인생의 여행을 포함해서
시냇가에나무 님이 담담하게 써 내려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아마도 이 글을 읽은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셨을겁니다.
제 모친은 파킨슨병을 앓으시다 돌아가셨는데... 멀리 살고 있는 큰 아들인 저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까스로 발인 전날 도착했으니까요.
저희 미국 사는 막네 제수씨도 코로나 기간에 안사돈이 돌아가셨는데 오지 못했지요.
영상으로 발인하는 것을 봤지요.
대신 저희 가족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인사이트 어머님 마음이 너무 아프셨겠습니다.
저 세상은 아프지도 않고 슬픔도 없는 곳이니 그곳에서 잘 지내고 계실것입니다.
하늘에서 항상 지켜보고 계시겠지요.
어머님을 직접 뵌적이 있어서 그런지 더욱 생생하게 읽힙니다.
어머님의 건강이 유지되시길 바라며 가족 모두를 응원합니다.
Thank U 철이!
우리 모두의 건강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두 부모님이 모두 갑자기 돌아가셔
임종을 보지못해 늘 마음한켠에 죄를 지은듯 하고 살고있어요.
그래도 꿈에 나타나시는 부모님의 행복하고 따스한 표정을 보면 많은 위로가 되더군요. !!
어머님의 달력 약봉투
자제분들의 사랑이 느껴져요.!!
꿈에 나타나시는 부모님의 행복하고 따스한 표정의 모습이 수국님을 지금 바라보고 계시는 양부모님의 모습입니다.
꿈에는 말을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다 알지요. 왜냐하면 영의 세계는 직관이 되기 때문에 굳이 말이 필요없는(제 나름의 생각)
미국에 사는 막네동생 우리 제수씨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코로나 때문에 오지 못했지요.
우울해 있는 제수씨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저 천국에는 병든 것도 아픔도 슬픔도 없으며 지고의 기쁨만이 있다고요. 그리고 하늘에서 엄마가 내려다보며 슬퍼하고 있는 딸보다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