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를 새로 만들려 합니다.
2007년 (정해년)에 동섭회장이 수안이씨 강화파 세보를 발간하여 온 집안에 배포했는데 이 족보(정해보)는 수안이씨의 시조이신 견웅(堅雄)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원류분파도(原流分派圖)에 비로서 강화파 시조이신 26대 기용할아버지가 중화파의 25대 정직할아버지의 아들로 확인된 것을 근거로 수안이씨의 새 분파로 강화파가 분파됨을 기록한 첫 족보이다.
온 집안이 기쁜 마음으로 새 족보를 받아보게 됐는데 그동안 주위에서 근본도 모르는 돌이가(돌맹이 이씨 가문)라고 멸시받던 지난날 설움을 잊게 하는 가문의 경사였던 것이다. 정해보에는 종환고문이 작사한 수안이씨 아리랑도 수록되어 종가(宗歌)의 위상까지 드러냈으니 집안의 자랑이다.
이 일이 있기 10년 전에 강화파 초대 승환회장은 강화파의 입도 조상이 중화파의 25대 정직 할아버지임을 찾아낸 후 1997년(정축년) 1월 18일 대종회 수안이씨 신년하례식에서 이 사실을 발표하여 모든 참석자로부터 환영의 박수로 강화파의 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해 6월 승환회장은 당시의 원류분파도에 나름대로 강화파의 분파도를 삽입하여 수안이씨 강화파세보(정축보)를 발간하여 집안에 배포했는데 당시 정축보의 원류분파도는 대종회에서 공식 인증이 있기 전이었다.
정축보에는 정해보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종친회의 공식 격려사도 없이 단지 초대 승환 회장의 자료 중심으로 발간된 것으로 족보로서는 다소 미흡한 여러 곳이 있었다.
정축보가 발간된 때 본인은 직장이 있는 대전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여서 족보에 큰 관심이 없었다.
2006년 강화파의 신년 모임이 김포 대명리 삼준 아저씨 댁에서 있었는데 그날 교육장 종환 고문이 대종회에서 강화파가 인증된 원류분파도가 배부되자 그 감격을 한참이나 말씀하시던 것을 기억하여 그 원류분파도를 집에 보관하던 정축보에 잘 간직했었다.
그해 4월 갑자기 교통사고로 아버지인 승환 초대회장이 세상을 떠나가신 후 본인은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의 유품 중 여러 기록을 간간히 살펴오고 있는 중이다.
집에 두 권의 정축보가 있는데 그중 한 권은 아버지가 그 안에 여러 가지 자료를 넣어두기도 했고 군데군데 고치거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해놓으셨다.
누가 언제 누구와 결혼을 했고, 누가 언제 누구를 낳았고, 누가 언제 돌아가셨고, 누구 네가 어디로 이사를 갔고,.........
족보 책갈피에는 살무니의 지적도에 기록된 동내 가가호호 현황이나 지역별 산소 위치를 정리한 자료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리해 놓은 내용들을 살피다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여기에 정리해본다.
그중의 몇 가지는 족보의 내용을 수정해야하는 정도의 기록도 있어 여기 정리해본다.
생전에 아버지가 남기신 수안이씨 강화파 비화라는 글도 참고하기 바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선달할아버지
통정대부란 당상관 정3품의 지위라고 하던데 정축세보의 67쪽에 38대 석주(錫柱)할아버지가 통정대부라고 기록되어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2007정해 년 발간된 수안이씨 강화파 세보에는 그 기록이 이어지지 않았다.
기록된 곳이 눈에 잘 띄는 곳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서 기록이 누락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버지가 남기신 수안이씨 강화파 비화에 이선달 할아버지에 대해 ‘조선말기 관리들이 부패했던 시절 초시에는 급제하셨지만 돈 안 쓰면 관직에 발령이 안 될 때라 선달이란 이름만 받고 벼슬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삼흥리 지역에서는 대감 노릇을 했다.’라는 글을 남기신 것을 보아 통정대부란 기록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이에 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이야기다. 혹 집안에 다른 근거가 확인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족보에 당당히 선달 할아버지의 통정대부란 품계를 남기고 싶다.
성완(成完)할아버지(35대)가 족보에 누락됨을 확인
계달(啓達)할아버지(34대)의 아들은 다섯 분으로 알고 있었다.
위로부터 진오, 석주, 성근, 성율, 원석
이렇게 다섯 형제가 계달 할아버지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이중 원석 할아버지는 후손이 없어 대가 끊겼다.(정축보에는 원석조의 기록은 있으나 정해보에는 원석조의 기록이 누락됨)
그런데 정축보 55페이지에 계달 할아버지의 장남 진오할아버지(35대) 우측에 선을 긋고 ‘성완(成完) 무손절가(손이 없어 대가 끊김)이라는 기록을 아버지는 별도로 남기셨다.
즉 진오할아버지의 형으로 성완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자손이 없어 대가 끊겼다는 기록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놀라운 기록이 그 옆의 우측 여백에 적혀있었는데 그 내용은 성완 할아버지의 부인이 빈곤함을 비관해서 동서인 진오 할아버지의 부인과 함께 팔자타령 하다가 둘이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성완 할아버지는 재가하지 못했다고도 적었다. 그리고 진오할아버지는 재가하여 아들인 경일 할아버지(36대, 춘재 형님의 할아버지)를 얻었다는 기록을 다른 곳에서 확인했다.
계달할아버지의 아들이 다섯이 아니라 여섯 분이었다는 사실은 족보에 다시 적어놓은 그 기록 뿐 아니라 아버지의 다른 기록에서도 학인이 된다. 성완 할아버지의 산소에 대한 기록이 다른 곳에서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이런 사실을 확인했으니 성완 할아버지의 이름을 계달할아버지의 장남으로 해서 새 족보에는 올려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아버지의 덕바위 산소 약도에 상윤(36대)의 동생 창일(36대)의 아들 더벙이가 15세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더 살펴보니 더벙이는 족보에 기록된 두봉(杜鳳, 37대)아저씨임을 알 수 있었다. 창일 할아버지는 두봉 아저씨가 젊은 나이에 죽어 대가 끊겼지만 지금도 집안에 대가 끊기는 경우가 여러 곳에서 생기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태일할아버지(36대)의 장모 이야기
족보 98페이지는 불우리로 이사한 태일할아버지와 후손의 기록이 적혀있는데 왼편의 여백에 태일할아버지의 장모인 인순이 어머니가 죽기 전에 태일할아버지의 큰며느리(김연숙, 삼준아저씨(37대)의 부인))에게 들려줬다는 이야기라고 적혀있다.
태일 할아버지의 장모는 원래 기여진이란 사람과 결혼했다가 새살 된 딸을 데리고 흥천의 전주 이씨에게 개가를 했는데 그 딸도 전주 이씨로 입적시켰고 이후 장모는 전주이씨 사이에서 삼남(인순, 인덕, 인선)을 낳았다고 했다.
족보에 적힌 기록은 이 뿐이나 수안이씨 강화파 비화를 보면 그 딸이 태일 할아버지와 결혼하여 2남 5녀를 보았고 살무니에서 불오리로 이사했다고 했다.
어쩌면 어른들의 잊혀진 힘들었고 고달팠던 옛 이야기지만 그것은 선조들의 역사다.
연초 강화파 신년하례식에서 새로 강화파의 족보를 새로 발간하기 위해 종문의 협조를 바란다고 했 습니다
정해보가 발간된 지 10년이 더 지났으니 새로 기록할 내용이 상당합니다.
거기다 기존 족보에 누락됐거나 혹 틀린 부분이 있다면 살펴 고쳐야합니다.
세월이 다른 지금 반드시 옛 방식대로 해야할 지 아니면 시대에 맞는 새 방식을 도입해야 할지 막연히 생각도 해보고 있는 중이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집안의 적극적인 협조입니다.
많은 관심과 협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