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대회는 그룹 사운드 붐을 증명하는 동시에 촉진했다. 사진은 1970년 플레이보이컵 쟁탈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특별 출연한 신중현의 퀘션스(Questions).
지난 번에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대해 소개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을 되새기면 1969년 5월 17일부터 4일간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되어 17팀의 출연진과 총 4만 여명의 청중들이 관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그 행사다. 시민회관이 3,000석 규모의 공연장이었다면 4일 동안의 공연이 매진이었다고 해도 끽해야 1만 2,000명일 텐데 어떻게 4만명이? 관객이 하도 많이 쇄도하고 암표도 난무하자 마치 영화상영처럼 입장권을 하루에 네 번 받았다고 한다. 이 대회가 1971년까지 지속되었다는 것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이 정도의 열기라면 1970년대 중후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방송국 주최의 대학가요제, 1990년대 중후반 여기저기서 개최한 정기 록 페스티벌 못지 않다. 사실일까? 사실이 아니라고 믿을 이유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는 여러 밴드('그룹' 혹은 '팀')가 나오는 공연, 요즘 말로 하면 '떼 공연'이었다. '떼 공연에는 관객이 좀 꼬여도 단독공연은 파리 날린다'는 한국 특유의 관행은 그때도 마찬가지였을까. 다음 기사를 보고 판단해 보자.
"'사이키 사운드'(환각음악)를 시도한다는 두 엘레키 그룹 김홍탁의 히 파이브(He 5)와 신중현의 퀘션스가 지난 3일 밤 6시 30분부터 명동 소재 '살롱 코스모스'에서 열렸다. 일부 주간지의 예보 탓인지 판탈롱 차림의 10대 등 예의 '명동파'들로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변두리 극장 쇼 무대를 연상케 하는 소음과 소란 속에 2시간 이상 진행되었다 … [중략] … '사이키도 아니고' '사이키 아닌 것도 아닌' 종별미상의 음악 … [중략] … 최근 일본서 수입해 들였다는 '스트로브 스코프'(환각 조명기)도 선전과는 달리 가동되지 않아 시종 어둡고 컴컴한 속에서의 시끄러운 쇼였을 뿐. 히 파이브의 연주는 그런 대로 수준급을 지켰던 편. 17분 10초 짜리 "In-A-Kadda-da-Vida"를 상당히 비슷하게 연주해냈지만 연주 도중 구경꾼의 '눈요기 거리'로 출연했던 소녀 무용수의 몸부림에 가까운 광무는 오히려 객석을 피곤하게 했다. 사회적 입지조건이 전혀 다른 우리나라에 외국의 환각 음악이 직수입돼야 할 이유도 없지만 '관객 겁주기 식 엉터리 모방'이 전위인양 착각하는 일부의 사고는 뜻 있는 관객의 입맛만 씁쓸하게 했다."([일간 스포츠], 1970년 2월 5일자(일부 문구 수정))
히 화이브와 퀘션스 단 두 밴드만 출연한 공연이 '초만원'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야기한 관행이 적어도 이 시절에는 예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공연을 취재한 기사의 논조에는 초만원을 이룬 공연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소음'과 '소란'과 '광무(狂舞)'에 대한 뜨악함이 뒤섞여 있다. 영미권에서 종종 사용하는 '모럴 패닉(moral panic)'에 가까운 현상이 한국에서도 발생한 것이다. 이런 패닉의 대상은 '싸이키 사운드'라고 불렸다.
그런데 위 기사에는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생경한 용어들이 등장한다. '싸이키 사운드'는 '싸이키델릭 사운드'로 대충 이해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더 하겠다. 그런데 싸이키 사운드를 연주하는 '엘레키 그룹'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엘레키란 'electric'이라는 영어 단어를 일본어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나온 문헌을 뒤지면 '에레키 구루푸(エレキ·グル-プ)'란 벤처스(The Ventures)로부터 영향받은 인스트루멘틀 중심의 그룹을 뜻하고, 보컬이 추가된 형태의 그룹은 '구루푸 사운도(グル-プ·サウンド)'라고 구분해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은 일본의 용어법을 수입했지만, 두 용어의 구분이 그리 엄밀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용어법에 대한 시시콜콜한 시비는 그만 두자. 한국의 신문기자들이 언제 엄밀한 음악 용어를 구사했던가. 좌우지간 여기서 말하는 '엘레키 그룹'이란 문자 그대로 '일렉트릭' 악기를 가지고 '일렉트릭'한 느낌의 사운드를 연주하는 소규모 편성의 밴드라고 이해해 두자. 부연하면 관악기, 현악기, 건반악기가 망라된 대규모 편성의 '악단'이 아니고(참고로 악단에는 '지휘자'가 있다), 소규모 편성이긴 하지만 관악기의 비중이 크고 아무래도 일렉트릭한 느낌이 적은 '캄보'도 아닌 형태의 연주 단위를 말한다.
그 다음 더욱 생경한 용어는 '살롱'이다. 아니 룸 살롱이 그때부터? 아니다. 당시 신문 잡지들을 뒤져보면 살롱이란 생음악 살롱의 줄임말이고, 생음악의 '생'이란 한자로 '生', 즉 살아 있다는 의미로 라이브 연주를 감상하는 장소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생음악이란 말은 아직도 교외나 변두리 카페의 홍보문구에서 만날 수 있는 단어다). 또 당시 생음악 살롱이 청년들의 주요 음악 공간으로 새롭게 떠올라 우후죽순 생겨났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근데 클럽이란 말도 있는데 하필이면 살롱이란 말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따지다 보면 얘기가 길어질 테니, 이 시대의 라이브 문화와 공간으로 관심을 집중해 보자.
라이브 문화의 번성: 생음악 살롱과 고고 클럽
재론할 필요도 없이, 1960년대 새로운 한국 대중음악 조류의 수원지(水源池)는 미8군 무대였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국내의 미8군 무대는 점차 사양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미8군 쇼단의 구성이 빅 밴드(풀 밴드)에 가수와 무희들이 가세한 전통적인 대규모 쇼단에서 캄보(소규모 편성의 연주 밴드)에 가수와 무희가 더해진 10명 안팎의 소규모 형태로 변화한 것도 로큰롤(밴드)의 영향만이 아니라 미8군 연예 시장의 축소와 연관되어 있다. 1960년대 후반 미8군의 축소와 쇼 무대의 사양화에 따라 적지 않은 수의 미8군 쇼단 출신 음악인들이 이를 대체하는 무대로 진출했다. 하나는 월남 위문 공연 무대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무대였다. 신중현 역시 월남 위문 공연단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려고 했고(펄 시스터즈의 "님아"가 터지는 바람에 계획을 접었다), 많은 미8군 쇼단 출신 뮤지션들이 월남에 근거지를 틀거나 몇 차례 그곳에 다녀왔다. 많은 미8군 무대 출신의 가수, 뮤지션은 일반 무대로도 진출했다. 이들은 가수로, 연주자로, 작곡가로 활약하며 가요계에 변화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일반 무대는 1960년대 중반만 해도 그룹 사운드가 설 자리가 거의 없었지만 1960년대 말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크게 두 가지 형태의 공연장이 풍미했는데, 생음악 살롱과 고고 클럽이 그것이다. 두 가지 중에서 시대가 앞선 것은 생음악 살롱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등장한 음악 다방,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풍미한 음악감상실은 전축도 음반도 귀하고 방송도 거리가 멀던 시절, 청년들의 안식처이자 거의 유일한 새로운 음악을 공유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음악감상실 열기가 한풀 꺾이고 생음악 살롱이란 공연장이 생겨나 각광을 받았다. 일상적 음악 공간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1964년 문을 열어 1960년대 말에 전성기를 구가한 생음악 살롱 '미도파 살롱'. 사진은 1969년 '미도파 살롱'의 모습. 공연하는 밴드는 쟈니 5의 후신인 디 엔즈(The Ends)이다.
생음악 살롱은 서울의 도심, 즉 명동, 종로, 충무로 일대에 분포해 있었다. 생음악 살롱이 음악감상실과 다른 점은 음반의 재생이 아니라 가수/그룹 사운드의 실제 연주를 하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라이브 연주를 감상하는 생음악 살롱의 등장은 그룹 사운드가 처음으로 내국인을 대상으로 연주할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제 그룹 사운드는 미군 부대 주변의 기지촌 클럽을 전전하거나 미군 영내 클럽에서 미군을 상대로 무대에 오르지 않더라도, 연주활동을 펼칠 수 있는 일반 무대를 갖게 된 것이다(물론 미8군 쇼단에서 활동하는 게 수입 면에서는 더 유리했다). 생음악 살롱의 연주자들이 거의 대부분 미8군 무대 출신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룹 사운드가 공연할 수 있는 최초의 일반 무대였던 '미도파 살롱', 한국 록과 포크를 이끈 쟁쟁한 뮤지션들이 공연한 '오비스 캐빈'('코스모스 살롱')주), 그리고 은성 살롱은 당시 대표적인 생음악 살롱이었다. 생음악 살롱을 통해 비로소 로큰롤과 싸이키델릭 록이 한국 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소통되고 확산되었다.
주) 오비스 캐빈: 생음악 살롱의 메카 '오비스 캐빈'은 이지재가 운영하던 곳이다. 1층은 스탠다드 음악, 2층은 포크 음악, 3층은 록 음악을 위한 공간이었다. 양희은, 송창식, 서유석 등의 포크 가수, 히 식스 등의 그룹 사운드가 공연을 하는 당대 최고의 생음악 살롱이었다. 3층 입구에는 히 식스의 실물 크기의 대형 캐리커처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생음악 살롱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여러 번 말로 듣는 것보다 실제로 한번 보는 게 낫다'고 하지만, 시대가 달라 직접 경험해볼 수 없으므로 [가요생활](1970년 9월호)이란 잡지에 나온 당시 '미도파 살롱'의 하루 모습을 좀 길더라도 정리해보자. 오전 11시엔 비교적 클래시컬하고 스탠더드한 조용한 음악을 틀어주고, 낮 12시에는 CBS 라디오 [정오의 휴게실] 공개방송이 위키 리의 사회와 이길봉 악단의 반주로 진행된다. 오후 1시에는 더 비스의 무대가 벌어지는데 이쯤 되면 젊은 관객은 약 4-5백명을 헤아리게 된다. 더 비스는 관객의 신청곡을 연주하는데 최신 인기 외국곡("필링 소 굿", "쓰끼쓰끼", "헤이 쥬드", "퍼플 헤이즈", "예스터미, 예스터유, 예스터데이", "잇츠 어 맨스맨스맨스 월드" 등)과 국내 가요곡("사랑했는데", "초원", "파도" 등)을 연주한다. 더 미도파스, 더 비스, 이길봉 악단이 교대로 4시 20분까지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 후, 관객들을 대상으로 "고고 댄싱 경연대회"가 벌어진다. 2인 1조로 신청을 받아 '고고' '소울' '팝콘 '브로드웨이 펑키' '저크' '스위밍' 등 당시 모르면 멋쟁이 소릴 들을 수 없는 춤을 추게 한 후 입상자를 선출하고 등위별로 상금 수여하면서 5시를 맞이하는데, 이는 하루 프로그램의 끝을 의미한다(1970년 이후 고고 클럽이 생겨나 급속히 확산되면서 그룹 사운드와 라이브 연주 공간의 전성기가 계속되지만, 고고 클럽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생음악)살롱은 춤추는 공간이 아니고 (고고)클럽은 음악도 즐기며 춤도 추는 공간이란 점은 미리 알아두면 좋을 정보다. 고고 클럽이 대부분 호텔의 부속물이었다는 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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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시기 가장 큰 무대는 서울 시민회관이었다.주) 1970년을 전후해 그룹 사운드의 단독 공연인 리사이틀이 자주 개최되었다. 일종의 페스티벌인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도 이 곳에서 단골로 열려 한국 그룹 사운드의 중요한 연주 공간 구실을 했다. 1968년 처음 열린 경연대회는 플레이보이컵 쟁탈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1회는 1969년) 그룹 사운드의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 경연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광화문 앞까지 입장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였고 암표도 기승을 부릴 정도였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서울 시민회관. 196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요람.
주) 1961년 지하 1층, 지상 4층에 3천 석 규모로 준공된 시민회관은 대중문화의 요람 역할을 하던 행사장 겸 공연장이었다. 시민회관은 정상급 가수, 쇼단, 그룹 사운드의 공연이 자주 열려 시민들의 친근한 문화공간으로 사랑 받았다. 하지만 1972년 12월 MBC '10대 가수 가요제'를 하던 중 화제가 발생하여 완전 소실되었다. 그 자리에 1978년 들어선 것이 오랫동안 완고한 순수예술 공연장의 보루 역할을 한 세종문화회관이다.
이처럼 1970년 경 청년 중심의 라이브 문화가 꽃을 피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단지 뮤지션의 문화가 아니라 팬들의 문화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시 일반 무대에서 활동하는 그룹 사운드가 1백여 팀에 육박했지만, 그렇다고 그 수가 1960년대 미8군 쇼 무대가 한참 전성기를 구가할 때 미8군 쇼단과 기지촌 클럽에서 활동하던 그룹 사운드의 수보다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수용자가 미군이어서 완전한 한국 라이브 문화라고 볼 수 없었던 미8군 무대와 달리, 1970년 무렵의 그룹 사운드 음악의 수용자는 한국 청년 수용자였다.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라이브 문화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룹 사운드의 일렉트릭 음향은 음악 수용자의 세대 분할을 가져왔다. 그룹 사운드의 음악에 기성 세대가 눈살을 찌푸렸을 거라는 점은 부연할 필요 없는 사족일 뿐이다. 펄 시스터즈, 김추자 등의 '소울 가요'가 그룹 사운드 반주로 만들어졌지만 절충적인 음악 구조와 효과를 가졌던 반면(세대 구분 없는 대박이 증명하듯), 그룹 사운드의 크고 시끄러운 일렉트릭 음악은 오직 청년들에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룹 사운드 음악(싸이키)이 청년 라이브 문화의 꽃이었다는 건 그런 맥락에서다. 실제로 인기 그룹 사운드는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가 열리면 특정 그룹 사운드의 팬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찍부터 나와 줄을 섰고, 생음악 살롱은 출연진을 따라 이동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팬 클럽이 결성되고, 관광버스를 여러 대 대절하여 정기적으로 야외 행사를 갖는 히 식스 같은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그룹 사운드 군웅할거(群雄割據)
1969년을 기점으로 가요계에서 급부상한 신조류의 간판은 소울이었지만, 소울 선풍의 이면에는 그룹 사운드가 있었다. 이는 단지 그룹 사운드가 '소울 가요 열창'을 반주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본 것처럼 그룹 사운드는 이미 스스로 저변을 갖추고 하나의 '장'을 형성했다. 지금으로 치면, 수 백여 개의 록 밴드들이 라이브 클럽에서 매일 밤 열광적인 공연을 벌이고, 대형 체육관 단독 콘서트나 야외 페스티벌 무대를 거뜬히 매진시키는 것과 같다.
1970년을 전후해 많은 미8군 쇼 무대 출신 그룹 사운드들이 일반 무대로 진출했다. 사진은 1971년 5월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참가했을 당시 김트리오의 모습. 왼쪽 서있는 이가 최이철(g, b), 가운데 앉아있는 이가 김대환(d), 오른쪽 서있는 이가 조용필(g, b, v). 1970년대 중반 이후 최이철은 사랑과 평화로 대중적 명성을 얻었고, 조용필은 솔로 및 위대한 탄생을 통해 슈퍼 스타에 등극했다.(사진 제공: 윈드버드 www.windbird.pe.kr 여운택 님)
키 보이스, (김홍탁의) 히 화이브/히 식스, (신중현의) 덩키스/퀘션스, (윤항기의) 키 브라더스, (김명길, 연석원이 이끈) 데블스, (김태화가 소속된) 라스트 찬스, (차도균이 이끌던) 가이스 앤 돌스, (이남이가 이끌던) 챠밍 가이스, 자니 5/드래곤스, 바보스, (최헌이 있던) 미도파스, (이필원의) 타이거스, (김훈의) 트리퍼스, (심형섭이 이끈) 피닉스, 더 비스, 파이오니아스, (이후 사랑과 평화를 만든 최이철의) 아이들, (조용필이 있던) 김 트리오 등은 그 때를 명멸한 대표적인 '작은 영웅'들이었다. 이런 나열은 1990년대 초중반 댄스 그룹 나열하는 것이나 비슷할 것이다. 멤버 간의 이합집산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많은 그룹 사운드가 수시로 이합집산을 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들이 먹고 살 데가 많아졌다는 걸 증명한다(고상한 말로 일반 무대에서 수요가 많았다). 이 중에서 이번 호에서는 1960년대부터 활동했던 그룹들(또는 그들이 활약한 밴드들)에 집중하자. 키 보이스 계보와 신중현 계보의 그룹 사운드의 인기가 절정을 구가하던 때가 이때다.
키 보이스는 차례로 오리지널 멤버들이 탈퇴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조영조를 중심으로 재편한 후기 키 보이스는 좀더 대중적인 접근으로 오히려 인기를 배가시켰다. 흔히 후기 키 보이스로 일컫는 이 시기의 키 보이스는 "바닷가의 추억"(1969), "해변으로 가요"(1970), "님 떠나갈 시간"(1971)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인기 정상을 유지했다.
키 보이스가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그룹 사운드였다면, 키 보이스의 오리지널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김홍탁이 주도한 히 화이브/히 식스도 그에 못지 않았다. "초원"(1969), "초원의 사랑"(1970) 등 초원 시리즈를 히트시키며 대중적 인기도 높았고, 1970-71년 2년 연속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차지한 데서 알 수 있듯 연주력 역시 정상을 달렸다. 또 다른 오리지널 키 보이스 멤버 윤항기가 결성한 키 브라더스도 "별이 빛나는 밤에", "목이 메여"(이상 1971)를 연달아 히트시킨 인기 그룹이었다.
신중현은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는 동시에 그룹 사운드 활동도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덩키스(1968-69), 뉴 덩키스(1969), 퀘션스(1970)는 이 시기 신중현이 리드한 그룹 사운드이다. 신중현의 그룹 사운드 결성과 해체는 이후 신중현 오케스트라(1971), 신중현과 그의 캄보 밴드(1971), 더 맨(1971-73), 엽전들(1973-75)로 이어졌다. 그런데 신중현이 리드한 그룹의 음반은 그가 키운 가수들의 음반이 대박 난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 성과가 못 미쳤다. 덩키스가 반주한 펄 시스터즈, 김추자, 김상희의 음반은 모두 히트했지만, 덩키스의 데뷔작이자 이정화의 데뷔작인 [싫어/봄비](1969)는 상업적으로 실패했다(이 음반은 "봄비"와 "꽃잎"의 오리지널 레코딩을 담고 있다). 덩키스 해체 후 과도기 밴드인 뉴 덩키스를 거쳐 결성한 퀘션스의 데뷔작(1970) 역시 박인수가 부른 "봄비"가 히트했지만 음반 판매에서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공연에서는 달랐다. 신중현 개인 리사이틀이나 덩키스, 퀘션스의 공연은 많은 청중들을 동원했고, 초대한 여러 객원 뮤지션(주로 가수)과 함께 성공적으로 싸이키델리아 여행을 주재했다.
이들 그룹 사운드 1세대 뮤지션들이 1970년경 선보인 음악은 '언니'들의 소울 가요와는 달리 '싸이키'란 이름으로 불렸다. '싸이키'로 명명되었다고 해서 앞서 열거한 이 때의 그룹 사운드의 음악이 모두 싸이키델릭 록이었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1960년대 중반 비틀스가 그랬듯, 1960년대 말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싸이키델릭과 플라워 무브먼트의 진앙이 한국 그룹 사운드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In-A-Gadda-Da-Vida"(아이언 버터플라이), "Born To Be Wild"(스테픈울프), "Purple Haze"(지미 헨드릭스), "You Keep Me Hainin' On"(바닐라 퍼지), "Light My Fire"(도어스) 등은 한국 그룹 사운드의 주요 연습곡이자 공연 레퍼토리가 되었다. 환각적인 조명, 퍼즈와 와와 이펙트의 사용, 특유의 몽환적인 오르간 연주는 당시 그룹 사운드의 공연장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요소들이었다. 생음악 살롱과 고고 클럽을 기반으로 한 그룹 사운드의 정기적 활동으로 그룹 사운드 팬들도 증가했고 신진 그룹 사운드 결성도 뒤를 이었다. 일반 무대에서 활동하는 그룹 사운드의 양적 증가와 질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사이, 싸이키델릭 록에 이어, 하드 록, 브라스 록 성향의 음악이 그룹 사운드와 그 팬들 사이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편성의 변화(관악기를 추가한 브라스 록), 레퍼토리의 변화(로큰롤, 싸이키델릭에 하드 록, 브라스 록 추가)도 있었는데 자세한 건 다음 글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그룹 사운드 음악, 싸이키 음반
이상의 이야기는 자료로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남아 있다면 음반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있다. 그 당시 그토록 융성했다는 그룹 사운드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음반은 별로 신통치 않다'는 의견 말이다. 이건 타당한 지적일까 아니면 당대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지적일까. '시대를 초월한 감상용이 아니다'는 의견도 마찬가지다. 자세히 보자.
이 시기에는 음반 기획자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은 1968년 시행된 <음반법>이다. 일정 시설을 갖춰야 음반사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한 규정 때문에 50여 개에 달하던 음반사들 중 정식 등록을 마친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시설 요건 때문에 음반사 정식 등록이 어렵게 되자 이전에 음반사를 운영하던 사람들은 프로덕션 형태의 회사를 만들어 대명제작을 하거나 독자적인 음반 기획자로 활동하게 된다. 킹 레코드의 킹박, 그랜드 레코드의 황우루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음반법> 시행 후에도 한국은 불법복제 음반이 성행했지만, 곧 국제 음반저작권협회에 가입하여 1971년 최초의 라이선스 음반이 나오기도 했다(여전히 빽판으로 불리는 불법복제 음반은 적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 정권의 검열이 갈수록 집요해지면서 가사 제출이 의무화되고 결국 팝 음반의 발매가 위축되었다. 이는 역으로 로열티를 따로 지급하지 않는 국내 음반에 대한 투자와 제작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아무개 작편곡집'이란 명칭에 이어, '어디 기획' 또는 '누구의 기획작품'이란 문구가 음반에 종종 나온다. 작편곡자가 아닌 음반 기획자가 활약하고, 스테레오 음반의 사운드도 나날이 진보해나갔으며, 일반적이진 않지만 실험적 음악을 담아내기도 했다. 사진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히 식스의 실험적인 연주 음반 [He 6와 함께 고고를](1971). 코스모스 시리즈, 황우루 기획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 시기 음반에 담긴 사운드를 규정하는 건 무엇보다 스테레오 음반(LP)이다. 물론 스테레오 음반이 처음 등장한 건 1960년대 중반이다. 그렇지만 스테레오 음반과 모노 음반과 병행되었으며, 자세히 들어보면 스테레오라 하더라도 '진짜 스테레오냐'하는 의혹이 뒤따랐다. 멀티 트랙을 얘기할 계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0년을 전후로 해서 스테레오는 일반적인 포맷이 되었고, 점차 멀티 트랙 레코딩으로 만들어진 음반이 늘어났다. 멀티 트랙 레코딩 장비가 스튜디오에 도입되었고, 레코딩 기술도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운드가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떠올랐다. 이 시기 음반들을 듣다 보면, 불과 1-2년 사이에도 모노 음반과 스테레오 음반의 차이만큼 사운드의 질감이 확연하게 차이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히 화이브와 히 식스의 음반들을 비교해 들어보라). 이 시기 대부분의 음반은 장충동 스튜디오(녹음 기사 최성락), 마장동 스튜디오(녹음 기사 이청), 남대문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이 시기 그룹 사운드 음반의 특징은 우선 기존의 옴니버스(요즘 말로 컴필레이션) 형태에서 탈피하여 독집 혹은 스플릿 음반(두 음악인이 반씩 분담한 음반)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후자는 양미란, 이승재, 쥰 시스터즈와 각각 반분한 음반을 낸 히 화이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룹 사운드 음반에 담긴 곡들은 창작곡의 비중이 높아졌다. 음반 전체를 번안곡으로 꾸민 음반도 있었고(히 화이브와 쥰 시스터즈의 스플릿 음반), 번안곡(또는 원어 가사의 커버곡)이 감초처럼 들어가는 게 보통이었지만, 주류는 창작곡이었다. 하지만 신중현의 밴드들을 제외하고는 창작곡과 번안곡 편곡의 주체는 대부분 신진 직업적 작곡가였다. 김희갑(키 보이스, 히 화이브, 라스트 챤스), 정민섭(히 화이브), 김인배(히 화이브), 정기선(키 브라더스), 김영종(데블스) 등이 이 시기 그룹 사운드의 음반의 작편곡자였다. 이처럼 아직 그룹 사운드 스스로 자작곡을 만들어 연주하고 레코딩하는 풍토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당시는 포크 가수들도 번안곡을 부르던 시절이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물론 경력과 역사에 있어서 그룹 사운드가 미8군 시절부터 치면 훨씬 길지만, 미8군 무대는 자작곡의 필요성이 없는 환경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음반의 대중성을 고려해야 하고 또 그룹 사운드 스스로 자작곡을 만들어 녹음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음반(의 주로 B면)에서 한두 곡 즉흥 연주를 이용한 긴 연주곡(혹은 연주가 긴 곡)을 담아 밴드의 음악적 아쉬움을 달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정화(덩키스)의 데뷔작, 키 브라더스의 데뷔작, 골든 그레입스 [신중현 사운드], 히 화이브 [Merry Christmas 사이키데릭 사운드], 히 식스 5집 등이 그런 경우다. 녹음 장비와 기술은 나아졌지만 녹음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룹 사운드의 연주력과 합주력이 중요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소절 소절 끊어서 잘 된 부분만 잘라 붙이고 또 조작하는 일은 상상도 못하던 일이고, 한 명이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녹음해야 했던 시절이니까.
녹음 기술의 향상으로 저음이 보강되고 록 음악과 부합하는 공간감 있는 사운드가 음반에 담기게 되었다는 점도 기억해 둘만한 일이다. 게이트 폴드(일명 더블 재킷) 식으로 된 음반도 종종 나왔고, 재판을 찍으면서 커버가 바뀌거나 재킷 형태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어서, 시각적 새로움을 주기도 했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신중현(퀘션스), 김상희의 라이브 음반이 그런 경우다.
이 시기 그룹 사운드 음반들을 접하다 보면 그룹 사운드가 낸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이 여러 장 나왔음을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통행금지가 없어서, 장안의 멋쟁이 언니 오빠들이 명동 등지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생음악 살롱이나 고고 클럽 등에 가거나 밤새 쏘다니며 즐길 수 있는 해방일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겨냥한 각종 공연 및 파티도 많이 열렸다. 서양 명절이 구속받기 싫어하는 한국 청년들의 명절이 되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그룹 사운드의 캐롤 음반이 유행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캐롤 음반이 상업적인 매력이 있었다는 점, 그룹 사운드는 미8군 무대에서 충분히 그룹 사운드 버전으로 연주한 경험이 있다는 점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캐롤 음반이 여러 장 나오게 되었다. 키 보이스, 히 화이브, 라스트 챤스의 캐롤 음반이 대표적인데, 익숙한 캐롤이 나오다 중간에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가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그런데 1970년을 전후해 그룹 사운드들이 연주하고 매체에서 거론한 싸이키 음악은 어떤 것이었을까. 싸이키는 장르라기보다는 사운드, 조명의 개념이었다. 소울은 보컬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싸이키는 사운드에 중심이 있었다. 그룹 사운드가 연주하는 크고 헤비한 일렉트릭 사운드, 특히 반복적인 리프와 몽환적인 오르간이 특징적인 사운드를 의미했다. 오르간의 체계적인 사용, 퍼즈와 와와 같은 기타 이펙트의 사용은 이 시기 싸이키 음악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물론 신문 잡지에서 얘기하던 싸이키는 실제로는 싸이키 풍의 성향을 갖고 있는 그룹 사운드의 음악을 통칭하는 것에 가까웠다. 음악적으로 엄밀하게 보아 싸이키델릭 스타일이 아닌데도 '싸이키 가요'라 지칭하곤 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싸이키와 매스 미디어
당시 싸이키 붐을 바라보는 미디어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대부분의 매체는 1960년대 후반부터 트로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새로운 음악의 등장과 가요계의 변화를 바라는 논조의 기사들을 많이 다루고 있었다는 정보가 필요하다. 새로운 음악이 폭발한 1969년 가요계의 모습을 비교적 차분하게 분석한 것은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2. 소울 선풍 및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도입: "님아" "커피 한잔"(신중현 작곡) 등을 불러 소울 붐을 일으킨 펄 시스터즈는 이 곡의 히트로 어느 때보다 눈부신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사이키델릭 사운드는 소개로 그치고."('69년 가요계의 10대 뉴스', [주간 한국], 1969년 12월 28일자) 그런데 여가수의 소울에 대해서는 (조건부?)환대를 했던데 비해, 서두에서 인용한 기사에 나와있듯이 그룹 사운드의 싸이키 음악에 대해서는 "시끄럽기만한 음악"이라고 평하거나, 부정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기사를 보자.
"장려상: 그룹사운드. 상장 = 귀하(?)는 일찍이 기타에 앰프를 단 형태로 출발하시어 최근 '귀신 흐느끼듯' 개성이 강한 사이키델릭 사운드로까지 발전해오는 동안 해외에서 활약이 몹시 크다는 점을 우선 치하합니다. 슬그머니 이 금수강산에 상륙한 이래 귀하는 토착화한 사이키 가요 운운해가며 다양한 기대를 갖게 했던 바 '알고 보니 별 게 아니고 시끄럽고 어지럽기만 하다'는 중론을 인솔하고 70년대의 문턱에까지 와 계십니다. 따라서 해외에선 상당한 대접을 즐기고 계시다는 귀하를 푸대접할 수도 없고 그 예우에 몹시 고민해온 즉 본 장려상으로 '사대적인 우정'을 표시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1969년 말미."('逆定(역으로 정한) 최저상', [주간 한국], 1969년 12월 28일)
위의 인용 기사 외에도, '해괴', '광란' 등의 단어를 단골로 구사하는 부정적인 기사들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몰이해와 거부감이 원인이었을까. 기자들의 엘리트주의적 시각에 그룹 사운드의 싸이키 사운드와 청중들의 적극적인 반응은 저급하게 비쳤을까. 한편 "포크 싱거들이 차차 프로 스테이지로 진출, 각광을 받는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과열된 이상 사이키 붐이 시들기 시작한 것은 퍽 다행…[후략]"([일간 스포츠], 1970년 12월 28일)이란 기사도 있었다. 포크 가수와 싸이키 그룹 사운드를 대립시키는 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술이었을까. 1970년대 초 그룹 사운드 진영과 포크 진영이 서로 '소 닭 보듯'하는 관계였을 거라고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건 그런 기사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실제로 그룹 사운드 뮤지션과 포크 뮤지션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고, 서로 같은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무렵 이미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문화적 탄압이 진행 중이었다는 건 또 다른 실마리를 던진다. 1968년 김신조 침투 사건, 1969년 3선 개헌, 1971년 비상사태 선언과 대선, 1972년 영구적인 독재를 꾀한 '10월 유신' 등으로 정치적으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사회 분위기도 점점 숨막힐 듯 죄어오고 있었다. 대중음악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요계 정화 운동'과 '고운 노래 부르기 운동' 등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조짐도 싹트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룹 사운드가 '퇴폐'로 낙인찍히게 되는 건 다음 글에서 보게 될 것이다.
1969년경부터 시작된 그룹 사운드 붐은 단지 선구적인 행보나 전설적인 후일담에 현혹되지 않더라도 1980년대 헤비 메탈 씬이나, 1990년대 홍대 앞 인디 씬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록의 황금기를 꽃피웠다. 그룹 사운드(의 음악)는 미8군 씬에 묻혀 있다가 일반 무대로 진출하면서 한국 청년들과 조응하였고, 숱한 멤버 교체와 이합집산으로 분열증식 하면서 하나의 '집단적 목소리'가 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각에서 보자면, 그룹 사운드는 외계의 별종에서 보호관찰 대상이 되었다. 로큰롤 바이러스가 숙주를 만나서 확산된, 그래서 감시하고 통제하고 억누를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말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시기부터 기타의 판매량도 늘었는데 통기타와 전기기타가 구분된 통계는 아니지만 그룹 사운드 붐이 기여한 바를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한국 전체 기타 생산량이 한 달에 5백여 대에 불과하던 1966년에 비해, 1973년에는 서울 지역에서만 하루 200여 대가 공급되었다). 그룹 사운드는 한국 대중음악사상 처음으로 라이브 문화를 기반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록 씬을 이루었다. 생음악 살롱과 고고 클럽은 그 젖줄이 된 청년 문화 공간이었다. 비록 '소울 가요'처럼 주류를 돌파하지도 미디어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못했지만, 싸이키와 그룹 사운드는 1970년대 만개한 청년 문화의 주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룹 사운드가? 통기타/포크가 아니고? 200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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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글> 1970년대 한국 사회 - 급속한 도시화와 매스 미디어의 보급
1970년을 기점으로 라디오와 TV의 보급이 급속히 늘어났다. 1970년 인구는 3천 만명, 라디오 보급대수는 360여 만대, TV 보급대수는 50여 만대였다. 하지만 TV 보급대수는 1971년에 80여 만대, 1972년엔 1백 만대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절대적 보급률이야 아직 많이 미흡했지만, 인기 연속극이나 스포츠(김일의 프로 레슬링이나 권투)가 나오는 시간이면 라디오나 TV 수상기가 있는 집으로 이웃 사람들이 모두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던 걸 생각하면 수치로 환산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1969년 문화방송(MBC)의 TV국이 개국하면서 한국방송(KBS), 동양방송(TBC: 1980년 KBS 2 채널로 통폐합), 문화방송의 3대 TV 방송국 체제와 완성되고, 특히 TV 연속극 [아씨](TBC, 1970)와 '온 국민을 울리고 웃기던' [여로](KBS, 1971)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면서 TV 연속극이 그 당시 전성기를 이루던 라디오 연속극의 지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영상매체로서의 파급효과 때문에 TV는 대중문화 전반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음악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창력과 미모는 반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의 의식도 동양방송(TBC)의 쇼 프로그램 <쇼쇼쇼>에 나오는 펄 시스터즈와 김추자의 육감적인 무대를 경험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쇼 프로그램들은 청년층에 어필할만한 소울 가수들, 포크 가수들, 그룹 사운드들을 출연시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룹 사운드는 소울 가수들만큼 TV에 출연하는 경우가 적었지만(가수의 노래를 반주하는 악단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젊은이의 리듬]이란 그룹 사운드 프로그램이 생겨나 정기적으로 그룹 사운드가 출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펄 시스터즈, 김추자, 신중현, 조영남, 트윈 폴리오 등의 모습을 TV에서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무렵 장르를 막론하고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TV 연속극 주제가가 유행한 것은 매스 미디어의 영향이 일정 수준에 올라섰음을 알려주는 사례였다.
그렇지만 1969년 '소울 앤 싸이키'가 폭발할 수 있도록 여건을 성숙시킨 요인 중 하나는 라디오였다. 1964년 최동욱이 처음으로 DJ 프로그램을 선보인 이후, 라디오 방송국마다 DJ가 진행하는 팝송 프로그램이 경합을 벌이며 청(소)년층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동아방송(DBS)의 최동욱, 문화방송(MBC)의 이종환, 서울 라디오(RBS: 뒤에 TBS)의 피세영은 DJ 트로이카 체제를 이루며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인정받았다. DJ들이 팝송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음악차트와 인기곡을 거의 동시기에 소개하면서 새로운(실상은 영미권의) 음악 정서가 실시간으로 대량 유포되었다. 1970년을 전후해 소울과 싸이키델릭이 한국 대중음악에 녹아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들이 젊은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얘기들은 '도시'라는 지역적 한계 안에서의 일이다. 보급된 라디오와 TV의 상당수, 그리고 당연히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의 청취자의 상당수가 도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70년부터는 도시화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 27.9%였던 도시 인구 비율은 1970년에는 41.1%에 이르렀다. 1970년을 지나면서 국민 2명당 1명은 도시민일 정도로 도시의 인구가 증가했다는 의미다. '이촌향도'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또 100달러에도 못 미치던 1인당 GNP는 1970년 253달러로 상승했다. 진학률에 있어서도 중학교 진학률은 66.1%, 중졸자의 고교 진학률은 70.1%, 고졸자의 대학 진학률은 26.9%로 증가했는데, 지금과 비교할 순 없지만 '학생' 인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전히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경제 상황이었지만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고, 대학생 뱃지(이 당시 대학생들은 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다)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문화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청년들의 숫자도 일정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막걸리와 소주 뿐이던 주류에 생맥주가 등장해서 청년들을 사로잡았고, 칼질을 하며 돈가스를 먹는 경양식 집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종이 매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64년 [주간 한국]이 창간되어 인기를 누렸는데, 1968년경에는 많은 수의 대중적 주간지와 월간지가 창간되었다. 이 때 나오기 시작한 [주간 중앙], [주간 조선], [주간 경향], [주간 여성] 등은 [주간 한국]의 독점적 지위를 위협하며 대중들의 다양한 관심사를 다루어 나갔다. 물론 결정적이었던 것은 1968년 9월 [선데이 서울]의 창간이었다. 현재 [선데이 서울]은 '한 때를 풍미한 3류 도색 잡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실제로 나중에 '사건과 실화' 류로 변하였으나), 당시만 해도 종합잡지의 성격이 강했고 대중가요에 대한 진지한 기사들도 일정 비중을 다루었다. 1969년 9월 창간된 [일간 스포츠] 역시 가요 정보를 적지 않게 다룬 일간지였다.
하지만 가요 정보를 가장 풍부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은 가요 전문지일텐데, 놀랍게도 그 시절 [가요 생활]이란 가요 전문 월간지가 존재했다. 1966년 6월 창간되어 5년 여간 발행된 [가요 생활]은 지금도 그런 형태의 가요 전문지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자체로 놀랍다. 가요 전문지로서 충실하고 다양한 기사들을 담고 있는 [가요 생활]은 물론 당대에 대중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음악을 경시하고 '전통'은커녕 자료 보존과 정리조차 관심이 없는 정부와 여타 신문 방송 매체를 대신해, [가요 생활]은 가십 기사, 단신, 심지어 까지도 지나칠 수 없는 그 시대의 귀중한 대중음악 실록이 되어주고 있다. [가요 생활]의 존재가 그 때 이미 가요시장이 전문잡지를 소화할 만큼 성장했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은 사족일 뿐이다.
이와 같이 1970년을 전후해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음악이 매스 미디어에 의해 대량 전파되면서 가요계의 변화를 조력하고 반영했다. 그룹 사운드 붐을 만들어낸 것은 이런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