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엘리베이터 앞의 남자 이시다 상사를 방문한 박영준은 사흘만에 매매 플랜 트의 최종가격을 정부가 내정하고 있는 선으로 확정 하고, 그 가격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을 매매가격에 포함시키지 않고 이시다가 부담하되 1%를 달러화로 먼저 지불하고 나머지는 삼정이 정부로부터 지정업체 로 확정받았을 때 즉시 내기로 합의하는 성과를 얻었 다. 계약서는 합의한 내용에 따라 두 통을 작성하되 2%의 부담금에 대한 약정서는 별도로 작성되었다. 그 별지에는 만일 삼정이 지정에서 탈락됐을 경우 계획 내용 자체가 원인이 되었을 때는 그 1%의 부담 금은 반제하지 않아도 좋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3개 월 내로 삼정개발이 이시다 상사에 되돌려 준다는 단 서를 붙였다. 계약서의 정식 조인은 20일 안에 서울 에서 양사 대표가 만나 행하도록 하고, 플랜트 중 핵 심 부문에 대한 설계도면도 그때 수교한다는 데 합의 했다. 계약서의 원안 1통을 받아든 박영준은 서울로 돌아 갈 준비를 마쳤다. 모든 일은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마치 벌레 먹은 이처럼 아픔을 주던 젊은 계모 석혜 리를 제거해 버린 일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 다. 그는 이시다 상사가 주최한 연회에서 오랫만에 의식 이 몽롱해질 만큼 흠뻑 취해 돌아왔다. 다음날 오후 비행기 좌석까지 에약해 둔 그가 자리 에서 일어난 것은 호텔의 체크 아웃 타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서둘러 세수를 마치고 짐을 정리한 그는 트렁크와 서류가방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 엘리베이터 가 있는 로비 쪽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복도 중간쯤에서 방을 찾듯 어정거리고 서 있던 남자 한 명이 문을 나서는 박영준을 발견하 고는 얼른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리는것이었다. 박영준은 무심하게 사내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았 다. 복도에는 청소를 시작한 듯 각 객실에서 끌어낸 시 트와 타올들이 담긴 세탁물 손수레가 두어 개 놓여 있을 뿐 인적은 없었다. 박영준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을 때 검은색 코트깃을 세우고 보기 드물게 모자까 지 눌러쓴 덩치 큰 남자가 네 개의 엘리베이터 중 한 대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조금전의 사내였다. 박영준 은 그 사내가 자기보다 큰 덩치를 한데다 그의 한쪽 손에 들려진 샘소나이트 상표의 서류가방이 자기 것 과 똑같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면서 속으로 웃었 다. 15층에서 멎었던 엘리베이터 두 대가 거의 같은 시 각에 11층에 와 멎었다. 박영준은 바닥에 놓아 두었 던 트렁크를 집어들고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 섰다. 순간 바로 옆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자기앞의 엘리베이터가 열렸는데도 이쪽으 로 급히 다가와 박영준을 밀치듯이 같은 엘리베이터 로 들어섰다. 박영준은 고개를 돌려 사내를 쏘아보았 다. 그때였다. "나니야 키사마(뭐야, 이 자식)!" 하고 사내가 호통치듯 흘겨보았다. 앞니 한 개가 빠 진 듯해 보였다. 영준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사내를 다시 한번 노 려보았다. 둥글고 큰얼굴에 회색 중절모를 눌러 쓴 사나이도 다시 한번 크게 눈을 부라렸다. 고속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각 층마다 섰다. 다른 사람 둘이 더 탔다. 5층에서 멎었을 때였다. 눈을 부라린 사나이의 억센 손이 가방을 든 박영준의 팔을 움켜잡더니 저항할 틈 도 없이 우악스레 밖으로 끌어냈다. 영문을 모른 채 두 사람을 무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을 태운 엘리베이 터는 이내 문이 닫혀져 버렸다. "어, 내 가방!" 박영준이 소리쳤으나 엘리베이터는 이미 떠난 뒤였 다. 그의 오른손에는 서류가방만 달랑 들려 있었다. "당신 왜 이래?" 인적 없는 복도에서 박영준이 사나이에게 고함을 질 렀다. 그러나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영준은 '어'하는 비명을 터뜨리며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덩 치 큰 사나이의 주먹이 박영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쳤던 것이다. 그러나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인지 충격은 그다지 크 지 않았다. 갑작스런 주먹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던 박영준은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올랐다. '호텔 강도?!' 그 생각이 채 멎기도 전에 구부린 목덜미 위로 또 한번 큼직한 주먹이 내리쳐졌다. 몸이 앞으로 곤두박 질치듯 쏠렸다. 영준은 앞에 선 사나이의 두다리를 끌어안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숨돌릴 사이도 없이 사 내는 끌어안은 영준의 팔을 뿌리치듯 사정없는 발길 질로 가슴을 후려찼다. 박영준은 감고 있던 팔을 풀 어 가슴을 움켜갑으며 몸을 옆으로 굴렸다. 눈 위로 사나이의 육중한 덩치가 서 있었다. 시커먼 구둣발이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영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수그리며 다시 한번 옆으 로 몸을 굴렸다. 그러면서 한쪽 발을 높이 들어 상대 의 아랫배 언저리를 걷어찼다. "어!" 예기찮은 기습에 사나이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뱉었 다. 사나이가 주춤거리는 틈을 타 영준은 잽짜게 몸 을 일으켰다. 손에서 떨어져 나간 서류가방이 한 옆에 내동댕이쳐 져 있었다. 영준은 가방 쪽으로 다가서며 주먹을 마 구 휘두르는 사나이의 턱을 힘껏 쳤으나 생각과는 달 리 빗나가고 말았다. 다음 순간 관자놀이 부근이 불 에 덴 것처럼 뜨거운 통증에 휩싸였다. 가죽장갑을 낀 사나이의 주먹이었다. 사나이도 이미 들었던 가방 을 내팽개친 듯했다. "너 뭐야? 왜 이래?" 박영준은 고함을 지르며 한쪽 다리를 올려찼다. 앞 으로 뻗던 사나이의 팔에 맞았으나 다른 한 팔이 도 리깨를 후려차듯 정수리를 때렸다. 영준은 순간 허공 에 뜬 듯 정신이 어찔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두어 발 물러서며 다시 발길질을 했다. 허벅다리 중간쯤을 힘차게 걷어찼으나 상대는 끄떡도않은 채 날쌔게 달 려들며 비틀거리는 영준의 목덜미를 다시 한번 가격 했다. 머리 한쪽으로 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이어 관 자놀이 부근에 또 한 차례 돌같이 단단한 주먹이 날 아들었다. 영준은 마침내 썩은 나무토막처럼 옆으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그 때 복도 저 쪽으로부터 여자의 비명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객실 청소를 하던 여인이 이 광경을 보고 소리친 것이었지만 아무도 달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나이는 날쌔게 몸을 돌렸다. 바닥에 팽개쳐진 두 개의 서류가방 중 한 개를 주워든 그는 비상계단 쪽 문을 열고 나갔다. 사나이는 2개층의 계단을 급히 내 려온 다음 3층 복도로 나왔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바 로 위층에 멋고 있었다. 하향 버튼에 불이 켜져 있었 다. 사나이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엘리베이터 문 옆에 놓인 재떨이 아래쪽의 쓰레기통에 쑤셔박듯 밀 어넣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는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로비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나이는 일 단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서서 앞니를 벌린 그는 손톱으로 대문니 한쪽과 그 옆의 검은 곳 을 긁었다. 붙였던 검은 김이 걷히고 흰 이가 드러났 다. 그는 서둘러 양치질을 한 뒤 코트를 벗어 가방을 든 팔 위에 걸친 다음 점잖은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 왔다. 쓰러진 박영준이 청소부의 연락으로 달려온 호텔 직 원들의 부축을 받아 아래층 사무실로 내려온 것은 그 로부터 20분쯤 지난 뒤였다. 입안이 조금 다친 듯 침 속에 피가 약간 섞여 나왔으나 다른 외상은 없었다. 주먹으로 맞은 자국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지만 멍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박영준이 엘리베이터에서 사나이에게 끌려 내릴 때 바닥에 놔두었던 트렁크는 프론트에 보관돼 있었다. 서류가방은 5층 엘리베이터 앞에 그대로 있었다. 창 피하기도 해서 영준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고 영어 와 일어를 섞어가며 설명했으나, 경비실 직원과 경찰 관이 달려와 없어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두 세 번 되풀이 말했다. 트렁크와 서류가방이 그대로 있고 주머니 속에서도 없어진 것은 없었다. 객실로 올라가 잠시만 기다리면 범인을 수색해 보겠다는 호텔측의 만류를 거절하고, 영준은 쫓기듯 나리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터 미널을 향했다. 한시 바삐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상 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리다 공항 탑승구에서 공중전화로 출발을 알려온 최기태를 기다리기 위해 김주식은 일찌감치 그의 아 파트로 갔다. 최기태가 도착한 것은 저녁7시 30분경 이었다. 그가 들고 온 서류가방에는 관광객들이 흔히 그렇듯 관광 라벨이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두 사람은 키이가 없는 바꿔친 박영준의 서류가방을 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공항 통관 때 키이 를 잊었다는 핑계로 세관직원의 힘을 빌어 이미 열어 두었기 때문이다. 면도기와 로션 등 세면도구와 주간 지 한권, 도꾜의 지하철 노선도가 그려진 선전용 호 텔 전단과 필기구 들이 쏟아져 나오고, 뚜껑 쪽에 붙 은 포켓에서 고급 파일에 철해진 서류들이 나왔다. 값 나가는 물건이라곤 니나리치 상표가 붙은 선글라 스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침대에 걸터앉아 서류를 뒤적이는 김주식의 입은 만족과 흥분으로 시간이 갈수록 벌어졌다. 기대 하던 중요 부분의 설계가 든 디스크는 없었으나 그것 이 필요 없을 만큼 더 큰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는 신문지에 서류들을 쌌다. 그는 다른 서류가 혹시 또 빠진 것이 있는지 두 칸 으로 나누어진 서류 포켓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버튼으로 채워진 작은 포켓 속에 무언가들어 있었다. 얇은 책으로 엮어진 표지에 NWA사의 마크가 찍혀진 그것은 항공권이었다. 그는 무심코 표지를 넘겨 보았 다. 쓰고 난 항공권 카피였다. 복사된 글씨가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구겨 버리려던 그는 혹시나하는 마음에 서류와 함께 신문지에 쌌다. 집으로 돌아온 김주식은 밤이 이슥하도록 사전을 찾 아가며 계약서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그는 마침내 별첨된 부대 약정서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대강 알 수가 있었다. 김주식은 흥분으로 밤새 잠을 이룰 수가없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과 동시에 김주식은 회장실로 갔 다. 입수 경위를 밝히지 않은 채 그는 삼정개발과 이 시다 상사의 계약서류 일체를 내놓았다. 즉시 중역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다지 긴 시 간을 요하지 않았다. 부서별로 임무가 주어지고 관계자들은 바쁘게 돌아 가기 시작했다. 김주식은 구름 위에라도 올라탄 듯 들뜬 기분으로 자기 사무실 책상 위에 두 다리를 높 이 올려놓고 쉬고 있었다. 아니 쉬는 게 아니라 분석 검토된 서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서류와 함께 챙겨 왔던 NWA항공권이 떠올 랐다. 회장실로 서류를 가져갈 때 따로 서랍에 넣어 두었던 그것을 꺼낸 김주식은 몇번인가 뒤적뒤적하다 마침내 볼펜으로 희미한 글씨를 덧입혀 나가기 시작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펜을 놓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빛내며 무릎을 쳤다. 그는 서둘러 백지를 꺼내 티켓에 쓰인 글씨를 더듬어 그대로 옮겨 적었다. 다 쓴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한층 빛나고 있었다. 재현된 내용에 의하면 이상하게도 왕복권이 같은 날 모두 사용되었는데, 그것도 도꾜에서 출발하여 서울 로 온 것이 먼저 사용되고 이어 몇 시간뒤 서울에서 다시 도꾜로 돌아간 것으로 나타났다. 기록상으로 봤 을 때 서울에 머문 시간은 여섯 시간 남짓이었다. 김주식은 비서를 불러 지난 신문철을 가져오게 했 다. 2주 전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사회면을 뒤졌다. 있 었다. 붉은 사인펜으로 체크를 한 삼정개발박회장 부 인의 피살사건이 보도된 2단기사가 있었다. 탑승자가 박영준의 이름 그대로 되어 있는 티켓의 날짜와 사건 이 발생한 날이 같을 뿐 아니라 도꾜와 서울을 오고 간 중간 시간, 즉 박영준이 서울서 머문 시간과 신문 에 난 살해 추정 시간이 일치되고 있었다. 뚫어지게 신문을 들여다보는 김주식의 온 몸이 긴장 으로 경직돼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탈취한 서류보다 몇 갑절의 가치가 있는 증거물이 될수도 있는 것이었 다. 그는 소파에 기대 앉아 눈을 감았다. 당장 어떻 게 할것인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그는 이 항공권의 용도가 무한하며 경우 에 따라서는 황금방망이와도 같은 위력을 보일 것임 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할 때 함부로 덤빌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천천히, 조금도 서둘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뇌까리는 그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 었다. 이재성이 삼선동 골짜기에 있는 요정 삼선각에 도착 한 것은 오후 6시 정각이었다. 김주식은 미리 와 그 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주식이 지정한 삼선각은 미모의 여대생들이 아르 바이트로 나온다는 요정으로 이른바 풀코스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여대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익숙 한 여자들을 한 명씩 옆에 앉힌 두 사람은 마치 10년 지기나 되는듯 어울어졌다. "그 녀석은 원래 제 형보다 날 더 겁을 냅니다. 이 선생님이야 장군 출신이시라 그렇잖겠지만, 나야 쫄 병 출신이 돼서 그런지 성질이 급하고 거칠지요. 그 걸 알아선지 내 말이라면 뭐. 어쨌든 그 녀석한 테 단단히 쐐기를 박아 놓았으니까 설사 쓴다고 해도 별 것 아닐 겁니다. 더욱이 이선생께서 결백하시고 보면 말입니다." 시버스 리갈이 몇 잔 오간 뒤 김주식이 뻐기듯 말했 다. "조사를 하다 보면 드러나겠지만, 그 과정에서 말이 새나가면 곤란해 질텐데요. 그 사람 어느 신문에 있 습니까?" 이재성은 조금도 술기가 돌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김주식은, "앗따, 이선생도, 내게 맡겨 두시라니까요. 그까짓 아무데 근무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얼버무렸 다. "그 대신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저 쪽만 보지 마시 고 우리도 좀 거들떠봐 주시라는 부탁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야 이렇게 상무님도 알게 되었고 그 쪽 회장님과 도 모르는 처지가 아닌데 빈 말 드리겠습니까. 제 힘 닿는 대로 협조하겠습니다." 찜찜한 표정인 채로 이재성이 대꾸했다. "그런데 저 쪽에서는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일 은 계속 추진하는 모양이지요?" "그 박회장이 어떤 분인데요. 한번 한다고 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밀고 나갈 겁니다." "그렇다면 이선생님도 그 분과 손을 끊을 수는 없겠 군요." "끊고 어쩌고 할 게 뭐 있습니까.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 분과의 교류는 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사 업과는 무관합니다." "차라리 사업관계라면 몰라도 그 인간관계라는 게 더 무서운 것 아닙니까!" "글쎄올씨다. 지금껏 사업상 문제로 제게 부탁 같은 것 하신 일이 없는분이라." 또다시 술잔이 몇 차례 오고 가는 동안 옆자리에 앉 은 여자들이 딱딱한 얘기 그만하고 즐기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즐기자니 어떻게 말이냐?" "저희들에게도 술 한 잔씩 주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 도 춰요. 참 밴드도 부를까요?" 빼어나지는 않았어도 썩 예쁘게 생긴 여자가 눈을 흘기며 애교를 떨었다. "그래, 불러라 불러. 네 말마따나 즐겨야지. 이선 생,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밤엔 아예 이 집에서 자 고 갈 셈잡고 천천히 놀다 갑시다." 김주식이 여인의 가는 허리를 껴안으며 이재성에게 동조를 구했다. 이재성도 그제사 눈가가 불그레해지 기 시작했다. 어느 샌가 옆에 앉은 옛된 여자의 손이 이재성의 두 툼한 손에 잡혀 그의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가 있었 다. 웃음소리와 함께 술잔이 바쁘게 오고 가는데 창 백한 인상의 젊은이가 스피커와 전자올갠을 밀고 방 으로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여자들이 먼저 일어나 낡아빠진 옛 노래를 한 곡조씩 부르고 김주식도 그 뒤를 따랐다. 이재성이 술기운을 핑계삼아 여자를 끌고 일어나 춤 을 추기 시작했다. 한복 차림의 여자들은 한겨울인데도 속옷을 입지 않 은 맨몸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밴드를 내보내고 순서처럼 음담패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두 남자들의 손은 여자의 치마폭으로 들어간 채 아 예 보이지 않았다. "여보, 이선생 나 이래봬도 통 하나는 큽니 다 흥정도 할 줄 알아요 저 쪽 조건이 어느 정도인진 모르겠지만, 우리도 그 사람들보다 컸으면 컸지 절대로 작지 않을 겁니다." 김주식은 한참 이어진 잡담 끝에 꼬부라진 혓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찬가집니다. 나도 한번 잘 봤다 하면 끝까 지 미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재성도 한 팔을 위로 번쩍 치켜올리며 호기 있게 응수했다. "좋습니다. 이 김주식이가 큰지 당신 이재성이 큰지 한번 해 봅시다." 김주식이 충혈된 눈일망정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아니 아저씨들, 크긴 뭐가 커요? 크고 작은 건 대봐야 알지요. 그렇잖아요?"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여인들이 취한 체하며 말꼬리를 잡아 돌렸다. "그래? 대봐야 알아? 그렇지. 그래, 그럼 한번 대볼 까?" 김주식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옆에 앉았던 여인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똑같이 비틀거리며 그들은 안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 가 버렸다. 방안에 남은 이재성과 그에게 안겨 있던 여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서 옆으로 뒹굴 었다. 창피하고 분한 마음에 허겁지겁 호텔을 빠져나온 박 영준이 서류가방이 바뀐 것을 안 것은 공항 시내 터 미널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기 위해 짐과 소지품 검사 를 받을 때였다. 내용물을 검사받기 위해 키이를 꽂 았으나 가방은 열리지 않았다. 수상하게 여긴 검사원 들이 드라이버와 집게 따위로 자물쇠를 망가뜨려서야 열린 가방 안에서는 차곡차곡 접은 신분지만 쏟아져 나왔다. 박영준은 투숙객의 짐을 노리는 상습적인 네다바이 꾼이 미리 점찍어뒀다. 자기를 습격해 바꿔치기해 간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서울에 보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방속에는 값나갈 만한 귀중품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류가 들어 있기는 했지 만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휴지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 아닌가. 박영준은 별수 없이 터미널 가까운 곳에 있 는 작은 비지니스 호텔에 투숙한 뒤, 이시다 상사를 방문하여 호텔에서 가방을 분실했다고 간단히 설명하 고 계약서 초안 사본을 다시 만들어 줄것을 부탁했 다. 서울로 돌아온 후, 박영준은 자신의 실수를 아무에 게도 말하지 않았다. 도꾜 천지에 설마 그 서류를 필요로 한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그로서 자칫 자기의 위신 을 손상시키는 결과밖에는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박영준이 예정보다 사흘 늦게 귀국한 그날 오후, 강석현은 장성군의 이복만으로부 터 기다리던 연락을 받았다. "왔습니다요.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고요. 내 편지 갖고 오늘 밤차로 올라갈랍니다." 감이 먼 시외전화 속에서 이복만이 큰 소리로 웃으 며 말했다. 강석현이 밤새 기차 속에서 꺼칠해진 이복만을 만난 것은 서울역 안 그릴에서였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 후 다동 골목에 있는 일본어 번역사 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영감님 한 분이 일찌기 찾아든 손님을 반기며 그들이 내민 편지를 또박또박 성의 있 게 읽어 내려갔다. 회답을 쓴 사람은 바로 안베겐지 본인이었다. 뜻밖에도 아버지의 친척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놀랍 고 반가운 마음 금할수 없다는 서두로 시작된 편지 는, 보내 준 사진은 틀림없는 아버지 사진으로 혼자 서 실컷 울었다고 쓰고 있었다. 계부와 어머니 덕분 으로 자기는 동경서 대학을 마치고 지금은 모 제약회 사에 근무한다는 것과,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고국을 꼭 한번 찾고 싶으며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유골 이나마 고국땅에 묻어드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번역사 영감님이 편지를 우리말로 읽어 내려가는 동 안 이복만은 연신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런 이 복만을 보며 강석현의 마음도 언짢아졌으나, 한 편으 로 전혀 다른 감정이 가슴 깊은 데서부터 솟구쳐 오 르는 것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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