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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0일 (수) 국립중앙박물관 3층, 세계문화관 일본실에서 촬영.
수묵산수화 / 간테이(15세기 활동),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3~1573),15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일본 무로마치 시대에 그려진 수묵화이다. 화면 양쪽에 찍힌 인장을 통해 15세기 후반에 활동한 간데이라는
승려가 그린 것으로추정하고있다. 서로 다른 계절감을 나타내는 두 폭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데,
오른쪽 폭은 전경에 꽃나무를 감상하는 인물을 그린 봄의 풍경이고, 왼쪽 폭은 눈이 내린 산을 원경에 배치한
겨울 풍경이다. 그런데 이 풍경은 일본의 실제 경치가 아니라 중국 강남 지방의 이상 풍경이다.
그림 기법도 당시 일본에서 중국 산수화의 대가로 인식된 남송 시대의 화가 하규(12세기 말~13세기 초 활동)의
양식을 따랐다. 중요한 대상물을 그림 한쪽으로 치우치게 그려 강조하는 '변각 구도'는 무로마치 시대 수묵화의
특징이다. 이러한 구도는 수묵화가 주로 시회나 차회에서 쌍폭으로 마주해 걸었기 때문에 두 화면의
시각적 균형을 위해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수도 / 하시모도 가호(橋本雅邦,1835~1908), 메이지시대(明治,1868~1912) 19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하시모도 가호의 낙관과 인장이 있는 그림 두 폭이다. 하시모도 가호는 가노 호가이(1828~1888)와 함께
메이지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근대 일본화의 새로운 양식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전시된 두 작품은 수묵 위주로 다양한 붓놀림을 더해 전통적인 양식을 충실히 따라 그려냈다.
가호가 그림을 이런 방식으로 그리게 된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가호는 1884년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어니스트페놀로사(1853~1908)가 결성한 감화회에 참여했는데, 이때 당시 유력 가문에 내려오는 수준 높은
작품들을 접하면서 에도 시대 뿐만 아니라 훨씬 이전 시기의 일본 회화도 폭넙게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스승인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이 가호의 작업은 무로마치 시대의 사상을 따른다'라고 말한데서
그가 무로마치 수묵화를 중심으로 한 전통회화의 다양한 요소를 내면화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근대 일본화 양식을 새롭게 만들어 낸 화가가
동시에 전통적인 양식을 따라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위 그림의 일부.
위 그림의 일부.
겐지모노가타리 화첩,源氏物語畵帖 / 에도 시대(江戶時代,1603~1868)17세기, 화첩, 종이에 먹, 채색, 금,
겐지모노가타리 54첩에서 한 장면씩 골라 그 내용을 적고 그림을 그려 완성한 화첩이다. 교토 궁정의 회화를
도맡아 그렸던 화파인 도사파(土佐派) 화가의 작품으로 인물의 복식과 풍경을 자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장면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금빛 구름으로 감싸고 나머지 부분에 화려하게 색칠한 그림을 배치했다.
이야기는 여러 가지 풀과 꽃이 금으로 그려진 화려한 종이에 쓰여 있다. 첫 줄에는 각 첩의 제목이 쓰여 있어
어떤 내용인지 알게 해 준다.
위 그림의 일부분.
여성이 타는 가마 - 온나노리모노
지위가 높은 무사 가문의 여성이 타는 가마를 '온나노리모도(女乘物)'라고 한다. 5미터쯤 되는 긴 대를 가마
위쪽 끝에 끼우고 앞뒤에서 사람이 들어 나른다. '온나노리모도'는 신분에 따라 구조와 디자인이 정해져 있었다.
신분이 높은 쇼군 가문과 상급 다이묘 가문 여성이 사용하는 '온나노리모'는 겉에검은 칠을 하고 금가루를 뿌려
무늬를 그리는 마키에(蒔繪) 기법으로 호화롭게 꾸몄으며
안쪽은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나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그린 송죽매 그림,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그림 등으로 꾸몄다. 특히 무사 계급의 혼례 도구로 만든 가마는 가문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높을수로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벗풀. 당초무늬 마키에 가마 / 에도 시대(江戶時代,1603~1868), 19 세기, 나무에 칠, 129 x 142 x 97.5cm.
검은 옻을 칠하고 금가루를 뿌리는 마키에 기법으로 벗풀과 덩굴무늬를 그려 넣은 가마이다. 벗풀무늬는 지금의
히로시마시에 근거지를 두었던 다이묘 모리 가문의 상징이었으므로 이 가문의 여성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마키에 기법으로 가문의 상징과덩굴무늬를 넣은 가마는 상류 무사 계급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가마 안쪽은 금색 바탕 위에 화려하게 색을 칠한 꽃과 새 그림으로 꾸몄다.
에도 시대(1603~1868)와 근대 공예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체제 아래에 있는 다이묘들은 여러 물건을 만드는 직속 장인을 두었다.
직속 장인에는 칼장신구를 만드는 '긴코시(金工師)', 칠공예품을 만드는 '마키에시(蒔繪師)', 도자기를 만드는
'야키모노시(燒物師)'등이 있었다. 이 장인들은 쇼군 가문과 다이묘 가문에서 필요한 생활도구를 만들었다.
에도 막부가 통치권을 교토 조정에 반납하여 무사 시대가 끝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에는 공예가
경제 발전에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칠보 공예품, 금속 공예품, 도자기 등을 적극적으로 국외에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자 했다.
장인들은 공예가로 변신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내기도 했다.
또한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제실기예원"에 임명되어 고위 관리 대우를 받으며 공예품 만들기에 몰두했다.
제실기예원(帝室技藝員)은 미술 공예가를 보호하고 공예품 제작을 장려하기 위해 만든 직위였다.
혼례도구
혼례도구는 여성이 혼인할 때 가져가는 모든 생활 도구를 가리킨다. 놀이 도구, 서랍장, 화장품, 문방구, 의류
수납 도구, 음식기 수납 도구 등이 있다. 원래 헤이안 시대(794~1192) 귀족 사회에서는 대부분 남자가 처가로
가서 혼례를 올렸다. 그러다가 무사가 권력을 잡은 가마쿠라 시대(1192~1333)부터 강력한 가부장제가
이루어지고 지방 영주 사이에 정치적인 의도로 혼인을맺는 일이 많아졌다.
이때부터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서 혼례를 올리는 형식으,로 바뀌면서 여성이 혼인할 때모든 생활 도구를
만들어 가지고 가게 되었다. 무가의 혼례 도구는 무가 계급이 권력과 문화 면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를 맞이한
이즈치모모야마 시대(1573~1603)부터 에도 시대(1603~1868) 초기까지 제일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화장도구 수납함 /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칠(마키에), 높이 34 cm, 너비 33.5cm, 깊이 23.7cm,
네모반듯한 쟁반 모양에 3단 서랍을 배치한 화장 도수 받침대 겸 수납함이다.
서랍에는 거울과 빗 등을 넣어 둔다.
손잡이가 달린 거울 수납상자 /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칠(마키에), 높이 3.2cm, 길이 27.8cm.
손잡이가 달린 거울 에카가미를 넣어 두는 상자이다. 에카가미는 고려와 조선의 손잡이 거울(병경)의 사용
방법과 모양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아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처음 나타났다. 일본 병경은 처음에는 지름이 10cm
정도인 작은 거울이었으나 에도 시대가 되면서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고 17세기 말에는 지름 24cm 전후의
큰거울이 나타났다. 거울이 커지면서 거울 뒷면을 꾸미는 문양도 다양해졌는데,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나
거북, 학과 같은 장수와 행복을 상징하는 무늬, 후지산을 비롯한 명소, 가문의 문장 등이 장식되었다.
이를 검게 물들이는 도구 /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칠(마키에), 대야높이 16.8 cm, 너비 37.2cm,
받침대 높이 21.5cm, 너비 28.6cm.
이를 검게 물들이는 오하구로(齒黑) 화장 도구이다. 이를 검게 물드리는 것은 에도 시대 귀족과 무가 부인들의
중요한 몸가짐이었다. 미미다라이(耳盥,이관)는 대야 양쪽에 귀 모양 손잡이가 달린 것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를 물들이는 검은 액체를 바를 때 주위가 더러워지지 않게 하려고 쓰는 대야인데 입이나 손을 씻을 때도 썼다.
와다이는 미미다라이의 높이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누키스(貫簀,관책)는 미미다라이의 덮개이다.
손톱 다듬는 칼 /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칼(마키에), 상자 20.1 x 7.0cm.
손톱을 다듬을 때 사용하는 칼 두 자루와 그것을 보관하는 상자이다. 상자 안에 공간을 나눌 수 있는 별도의
칸막이가 있어 두 자루의 손톱칼을 분리하여 보관할 수 있다. 다른 혼례 도구와 마찬가지로 칠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금가루를 뿌려 고정시키는 '마키에' 기법으로 접시꽃, 모란,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무사의 자기, 고구타니와 나베시마
일본 자기는 1610년대에 규슈 히젠 지방(지금의 사가현과 나가사키현 일부)에서 조선의 기술과 중국의 형식이
결합하여 생겨났다. 1640년대에는 잿물을 발라 높은 온도로 구운 도자 겉면에 물감으로 무늬를 그리고
낮은 온도로 한 번 더 구워 빛깔을 내는 채색 기술이 들어왔다.
고구타니(古九谷) 자기는 1640~50년대에 만들어진 초기 채색 자기이다.
다이쇼지번(지금의 이시카와현)을 다스렸던 마에다 도시하루가 중심이 되어 만들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히젠 지방 아리타요에서 만든 자기라는 견해도 있다.
에도 시대 전기, 무가 사회의 시대정신과 문화를 반영하여 자기 무늬가 힘이 넘치고 강렬한 것이 특징이다.
나베시마(鍋島,과도) 자기는 사가번을 다스리는 나베시마 가문이 도쿠가와 가문과 다이묘들에게 바치려고 만든
최고급 자기이다. 주로 식기를 만들었는데 지름이 약 15cm, 약21cm, 약 30cm,인 둥근 접시가 주요 품목이다.
남빛 바탕에 빨강, 녹색, 황색을 칠하고 복숭아, 항아리, 책, 물레방아, 토끼 등을 그린 세련된 디자인이 참신하다.
이로에 소나무, 대나무, 매화무늬 접시 / 나베시마 자기, 에도시대, 18세기 전반, 높이 4.2cm, 입지름 20.1cm.
이로에(色絵)는 잿물을 발라 구운 도자기 위에 부드러운 물감으로 무늬를 그려 넣고 색을 칠해 낮은 온도에서
한 번 더 구운 것이다. 소나무는 평안과 장수,
대나무는 무사(無事), 매화는 생기를 뜻하여 좋은 운수를 기대하는 마음을 나타낸 접시이다.
소매쓰케 안개, 매화무늬 큰 접시 / 나베시마 자기, 에도시대, 18세기 전반, 높이 8.8cm, 입지름 30.1cm.
소매쓰케'란 하얀 바탕에 코발트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리질의 투명한 잿물을 발라 구워 문양이
남색으로 드러나게 만든 도자기이다. 이 작품에서는 안개에 싸인 커다란 매화나무를 표현했다.
이로에 초충무늬 접시 / 고구타니 양식, 에도시대(1603~1868), 18세기 전반, 높이 4cm, 입지름 28cm.
파랑, 노랑, 녹색으로 민들레와 나비를 표현했으며,
그릇 뒷면에는 운수가 좋기를 바라는 뜻에서 "복.福'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이로에 호랑이무늬 접시 / 고구타니 양식, 에도시대(1603~1868), 17세기 후반, 높이 2.3cm, 입지름 16cm.
초록, 노랑, 보라색으로 호랑이와 바위, 대나무를 표현하였으며,
그릇 뒷면에는 운수가 좋기를 바라는 뜻에서 "복.福'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이로에 참외무늬 발 / 고구타니(古九谷) 아오데(靑手) 양식,에도 시대(江戶時代,1603~1868)17세기.
전형적인 고쿠타니 아오데 양식의 그릇으로, 전체를 진한 색깔로 칠한 대접이다.
붉은색 물감을 전혀 쓰지 않고 보라, 노랑, 녹색, 파랑 가운데 세 가지 또는 두 가지 색을 썼다.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그릇 전체에 색을 칠하는 것이 아오데 양식의 특징이다.
이 작품은 배경에 노란색 국화를 깔고 그 위에 초록색 참외 줄기와 잎, 보라색 열매를 대담한 구도로 표현했다.
일본 근대 미술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일본 근대 미술품은 1933년부터 1943년까지 이왕가미술관에서 수집한 것으로
일본화 93점, 서양화 37점, 판화 4점, 조각 20점, 공예 44점(복제품 5점 포함) 등 모두 198점이다.
1933년 조선총독부가 덕수궁 석조전을 수리하여 근대 미술 작품 전용 전시관으로 만들면서 작품 수집이 시작
되었다.
해방 바로 전인 1945년까지 해마다 꾸준히 작품을 사들였는데, 수집품 현황은 <덕수궁 일본 근대 미술품 대장>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왕가미술관은 당시에는 '현대 미술품'이었던 근대 미술품들을 주로 전시나 소개,추천을
통해 사들였으며 일부는 작가에게서 기증받기도 했다.
작품을 관리하던 이왕가미술관은 덕수궁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유지되다가 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합되었으며, 그 결과 일본 근대 미술 수집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좌) 꽃을 담는 그릇 / 이와타 도시치(岩田藤七,1893~1980), 20세기 초, 유리, 높이 71.5cm
성형한 유리 표면에 연마제를 바르고 회전 숫돌로 홈을 파내거나 곡면을 깍아내어 만드는'커트글라스'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몸체와 긴다리 사이에 끼워 넣은 동그란 원형 유리는 커트글라스 기법으로 별 모양을 새겨
넣고, 다리에는 마름모 모양을 연속하여 새긴 뒤에 금가루를 메워 장식했다.
다리와 받침 사이에도 금을 바른 뒤에 커트글라스 기법으로 국화 문양을 새겨 넣어 호화롭게 만들었다.
작가인 이와타 도시치는 일본 유리 공예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다.
꽃단지 / 가노 쇼코쿠(1900~1965), 1935년, 채색도자, 높이 35cm.
항아리 모양의 꽃병으로 전면에 암녹색의 유약을 바른 뒤 홈을 따라 녹색의 유약을 흘러내리게 하여
고대 청동기의 발색을 연상시키는 추상적인 무늬를 만들어냈다. 작가인 가노 쇼코쿠는 에도시대부터 도예로
유명한 가문의 제자로 들어가 도자 기술을 배우고, 교토도자기시험소에서 화학 안료를 사용하여 색을 입히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꽃단지>는 1936년 문전(文展) 감사전에서 출품된 것을 이왕가에서 매입한 것이다.
꽃병 / 이와타 도시치(岩田藤七, 1893~1980), 1935년, 유리,금속(은), 높이 28.5cm, 몸통지름 19.7cm.
화초 문양의 은선(銀線)을 세공하여 바구니의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녹인 유리를 불어넣어 제작한 꽃병이다.
바깥쪽은 선명한 노란색, 안쪽은 하얀색이고 주둥이에는 은(銀) 장식을 둘렀다.
유리보다는 은의 유려한 세공과 교묘한 조합이 매우 뛰어나다.
본래 도쿄미술학교에서 조금 기법을 배운 유리 공예가였던 작가의 경력이 잘 조합된 작품이라 할수 있다.
닭 모양 주둥이 꽃병 / 가와무라 세이진(1890~1967) 1938년, 채색도자, 높이 38.5cm, 바닥지름 10cm.
12각형으로 각이 진 기형의 목이 긴 꽃병으로 구연부(아가리의 비표준어)는 닭의 머리로 형상화되었다.
구연부 곡선은 닭의 몸으로 형상화되었고 닭의 꼬리로 표현된 손잡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문양이 없이
투명하고 담백한 색체의 백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목 부분에는 에도 시대부터 발달한 후키즈미 기법을
대담하게 응용해 분사기로 청화 안료를 뿌려 은은하게 색과 문양이 퍼져나가는 효과를 주었다.
수반 <봄의 물> / 미야시로 겐조(宮代健三,1899~1968) 1941년, 유리 금속(철), 높이10.3cm, 넓이 42.2 cm.
금속 망치로 두둘겨 표면을 장식한 다섯줄의 철 고리를 같은 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위에 같은 철판으로 만든
연잎과 개구리 세 마리를 배치했다. 철 고리를 틀로 하여 안쪽에는 아름다운 보라색 유리를 대었다.
유리의 색이 군데군데 뭉친 부분과 금속의 거친 표면 장식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마치 연못의 수면 위로
반짝이는 잔물결을 연상시킨다.
그 위로 연잎 사이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개구리들이 잔잔한 봄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인 미야시로 겐조는 금속판을 두드려 입체적으로 만드는 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금속공예가였다.
평안노모.平安老母 / 히라쿠시 덴추(平 田中, 1872~1979), 1936년, 나무, 높이 34.7cm, 너비 26.3cm.
도쿄 지요다구에 지금도 남아 있는 서예용품 가게 '헤이안도(平安堂)'의 주인 오카다 규지로가
어머니의 13주기를 기리며 히라쿠시 덴추에게 부탁하여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을 출품했을 때 이왕가미술관에서 구입 의사를 밝히자 덴추는 이 작품은 제작을 맡긴 오카다에게 주고
똑같은 모양으로 하나를 더 만들어 미술관에 보냈다.
덴추는 목조에 석고 원형과 컴퍼스를 쓰는 기법으로 같은 작품을 여러 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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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린 박물관에 가서
그림을 봐도 공예품을 봐도
그저 옛 문화, 예술품이 그랬구나
정도로만 보고 지나치는데
바위솔님의 시선은
그냥 지나치는 정도가 아닌,
꼼꼼히 하나 하나 학습까지....
미술책이 따로 없어요. ㅎ
다녀온 듯 잘 보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