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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몰락의 시작
밤 8시 30분, 블라디보스토크 부둣가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마린스키는 간부급 부하들과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직선거리로 ~킬로 북쪽이 근대리아의 부두였고 창가로 가 서면 다섯 개의 거대한 크레인이 희미하게 보인다.
마르첸코가 행방불명이 된 지 만 하루가 지났다. 오늘도 그는 파벨과의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대기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파리야킨도 그랬지만 파벨은 결코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았다. 이번에 행방불명이 된 마르첸코가 2인자 행세를 했지만 파벨이 보낸 세 명의 간부급 부하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마린스키도 알고 있었다. 마린스키는 이고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조직에서 2인자인 인물로 자문관이었는데 파벨의 심복이다. 아마 파벨은 이고르를 감시하기 위해 또 다른 심복을 보냈을 것이지만 그놈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공격 시간은 보스가 정해줄 것이다. 그것이 오늘밤이 될지 내일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마르첸코의 행적이 밝혀질 다음이 될 것이다. 그가 죽었건 살아 있건 파벨은 그것을 동기로 삼을 작정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보드카 병이 즐비했고 모두들 냉수 마시듯 들이키고 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부하 한 명이 들어섰다. 손에는 봉투 한 개가 쥐어져 있다
「보스, 이것이 사무실에 여러 개 와 있는데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봉투 속에서 테이프 한 개를 꺼냈다.
「녹음테이프입니다. 마르첸코 씨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린스키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져서 테이프를 손에 쥔 부하는 당황했다.
「보스, 어떻게 할까요?」
「거기다 내려 놔라.」
테이블 위에 테이프를 내려놓은 부하가 방을 나갔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대부분의 시선이 테이프에 모아졌다. 모두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것이다. 이윽고 마린스키가 입을 열었다.
「여러 개가 보내진 모양인데‥‥ 우선 듣자.」
누군가가 녹음기를 가지고 왔고 테이프가 끼워졌다. 스위치를 누르자 조용한 방 안에 마르첸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니콜라이 마르첸코다. 난 지금부터 2년 전 조세프 파벨이 어떻게 해서 안드레이 파리야킨을 제거했는지를 여러 동지들에게 고백하려고 한다. 파벨은 북한의 이금철에게 정보를 팔았다. 그는‥‥‥」
「그만!」
마린스키가 소리쳤으므로 부하 한 명이 스위치를 껐다.
「마르첸코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단언하듯 말한 것은 이고르였다.
「이놈들이 우리를 교란시키려고 음모를 꾸미는 겁니다.」
그러자 마린스키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우리를 교란시키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보스, 테이프를 회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 개가 있다는 데‥‥‥)
이고르가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회수하도록. 그리고 놈들의 조작이라고 들은 놈들한테 말해 주도록 해.」
「알았습니다.」
이고르와 두어 명의 부하가 서둘러 방을 나갔다.
「마르첸코가 다급했던 모양이지?」
의자에 등을 기댄 마린스키가 혼자소리처럼 말하자 남아 있던 부하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고르는 테이프의 목소리가 마르첸코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이것, 안 되겠다.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아예 근대리아를 쓸어버리는 것이 낫겠다.」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부하 한 명이 들어섰다. 이번에는 다른 부하였는데 그가 쥐고 있는 것은 전화기였다.
「보스, 전화가 왔습니다.」
「난 그레고리 파트킨이라고 한다.」
그레고리가 쏘아대듯 말했다.
「뭐, 허튼 소리 늘어놓을 시간도 없고 기분도 아니야, 내가 보낸 테이프를 받았나 확인하려고 전화한 것이다.」
「그레고리 파트킨이라면 강도단 두목 놈이로군. 지금은 김상철의 졸개가 된‥‥」
마린스키는 태연했고 오히려 그레고리보다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런 테이프로 도대체 뭘 어쩔 작정이냐?」
「시간이 없어서 우선 5백 개만 이곳저곳에 뿌렸는데 2,3일 후에는 몇 천 개가 배포될 거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 발악을 하는군.」
「한 마디 하겠는데 마린스키‥‥‥」
그레고리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우리는 네까짓 졸개들한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두었으면 해. 애초부터 우리 목표는 너 같은 강아지들이 아니다. 파벨이야.」
「‥‥‥‥)
「이 테이프가 제 부하들한테 수천 개 배포된 것을 알면 그놈이 어떻게 나을 것 같나? 마린스키.」
「너는 잘 알 것이다, 마린스키. 용케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견디어 온 놈이니까.」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레고리는 전화박스를 나와 길가에 멈춰 서 있는 볼가에 올랐다. 그가 옆에 앉은 김상철에게 말했다.
「파벨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마린스키일 겁니다. 보포프는 최측근이지만 독자제력이 없고 마르첸코는 저 꼴이 되었으니까요. 내가 전화했다는 것만으로도 효력이 있습니다.」
볼가는 하바로프스크 시내를 벗어나 달려가는 중이었다. 김상철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밤 9시가 넘어 있었으니 지금쯤 근대리아 부두에 송길수가 인솔하는 150명의 무장병력이 도착했을 것이었다.
「보스, 아직 군은 움직일 기미가 없습니까?」
그레고리가 생각난 듯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로스토프는 경찰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는 거야.」
이틀에 걸쳐 로스토프를 만났던 이대각은 오후에 근대리아로 돌아갔다. 모스크바에서도 로스토프에게 압력을 넣고 있었지만 군은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레고리가 답답한지 한숨을 쉬었다. 경찰은 마피아와 더욱 밀접한 관계여서 온갖 정보가 그들에게로 흘러나간다.
「파벨도 지금쯤 테이프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놈이 당장에 대응할 최상의 표적은 근대 부두지요. 하바로프스크에 지사가 있지만 이미 직원들은 대피한 상태이고‥‥‥」
「교활한 놈이다, 파벨은. 언제 어떤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는 놈이야.」
「그렇지만 그놈도 우리가 러시아로 뛰어들 줄은 생각하지 못 했을 겁니다.」
볼가는 속력을 내어 어두운 밤길을 달려 나갔다. 그들이 은신처인 김스크 마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마을 안쪽의 공회당에서 차를 내린 그들은 판자문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마룻방 벽 쪽의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는 것은 마르첸코였다
「여어, 이제 오시는군. 혼자서 술을 마시려니까 술맛이 안 났데 잘 왔어,」
마르첸코의 얼굴은 이미 술기운에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이 테이블에 앉자 마르첸코는 잔에 술을 따라 그들 앞에 밀어놓았다.
「제일 유력한 보스 후계자는 마린스키야. 그놈은 파리야킨한테서도 견제를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부두 한쪽만 영역으로 받았지.」
술잔을 든 마르첸코가 건배를 하자는 듯 들어 올렸다가 그들의 반응이 없자 혼자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근대 부두도 마린스키가 습격하게 될 거야. 놈은 무장병력 천 명쯤은 금방 끌어 모을 수 있거든.」
「파벨의 계산이지. 근대 부두의 경비대와 싸우게 되면 마린스키의 세력은 이기나 지나 큰 타격을 입을 테니까.」
「그쯤은 알고 있어, 마르첸코,」
그레고리가 자르듯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에 파벨이 보포프를 보냈다. 놈은 이미 네 조직을 인수한 거야.」
「보포프라‥‥ 그 도마뱀 같은 놈.」
얼굴에 웃음을 띠운 마르첸코가 술잔에 술을 채웠다.
「너희들 덕분에 파벨이 내부정리를 할 기회를 잡았구만 그래. 이번 기회에 놈의 기반이 단단히 굳혀지겠다.」
「글쎄, 그것은 두고 봐야지.」
그렇게 말한 것은 김상철이다.
「우리가 파벨한테만 기회를 준 것은 아니니까.」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기동이 테이블로 돌아오자 조대길이 궁금한 듯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다리라는데, 지금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박기동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보드카를 삼켰다. 나호트카의 번화가인 치하오케안스카야 역 근처에 있는 카페 안이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주위는 술손님으로 소란스러웠는데 대부분이 선원이었다.
「이것, 야단났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고 말이오.」
그렇게 말하는 조대길은 이금철의 부하로 이번에 박기동을 따라온 사내였다. 마피아가 하바로프스크의 운송기지를 폐허로 만들고 그 보복으로 김상철이 마르첸코의 간부들을 몰살시킨 사건으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떠날 준비가 된 1500명의 북한 근로자는 국경 근처의 군 기지에 수용되어 있었지만 근대리아로 들어갈 길이 끊긴 것이다.
철도로 하바로프스크까지 갈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근대리아로 들어갈 차편이 없다. 지금 근대리아와 하바로프스크와의 교통은 단절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어, 기다리는 수밖에. 자, 술이나 마저 마시고 나가자구.」
박기동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숙소로 연락을 주기로 했으니까 말이야.」
그가 연락을 한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족 가게주인인 최진삼 씨였다. 최진삼 씨는 본래 장인규의 정보원이었다가 지금은 김상철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숙소로 정한 항구 근처의 모텔에 들어선 것은 오후 6시가 되었을 때였다. 보드카 한 병을 나눠 마신 그들은 적당히 취해 있었다.
「이봐, 조형. 밤에는 색시집이나 가자구.」
문에 열쇠를 끼워 넣으며 박기동이 말하자 조대길이 피식 웃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근대 부두가 있는데다가 연락하기에도 쉬웠고 호텔도 깨끗한 곳이 많았지만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것이 그가 나호트카에 온 이유였다.
방에 들어선 박기동은 소파에 길게 앉았다. 김상철이 마피아를 습격한 것은 조선족한테도 엄청난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그가 연락을 할 때마다 최진삼 씨는 이쪽의 사정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신바람을 내 상황설명을 해주었는데 근대 부두는 조만간에 공격당할 모양이었다.
소파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던 박기동은 노크소리에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문으로 다가갔다.
「거, 누구요?」
「문 열어요.」
한국말이었으므로 그는 문고리를 풀었다. 그러자 낮선 사내 세 명이 쏟아지듯 들어섰으므로 그는 완전히 잠이 깨었다.
「당신들 누구요?」
「당신 박기동이지?」
그렇게 물으면서 사내 두 명이 박기동의 어깨를 밀어 소파에 앉혔다. 이제 박기동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지만 아직 기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는 당신들은 누구야? 지금 왜 이러는 거야?」
사내 하나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소리 쳐도 소용없다. 옆방에 있는 놈은 이미 골로 보냈으니까.」
그는 30대 중반쯤으로 밝은색 양복을 맵시 있게 입었고 정확한 서울 말씨를 썼다. 박기동의 어깨가 점점 가라앉았다.
「어때? 순순히 따라갈 거냐, 아니면 여기서 죽을 테냐? 결정해라, 당장.」
「어, 어디로 말입니까?」
「그건 알아서 뭐해?」
「서울입니까?」
그러자 사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넌 기소중지자 신분이지.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박기동이 그 일 때문에 사내들이 나호트카까지 올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도대체, 그러면 내가 무슨‥‥‥」
「시끄러, 이 자식아.」
갑자기 날아온 손바닥에 뺨을 얻어맞은 박기동이 몸을 움츠렸다.
「자, 일어나. 어서 짐을 꾸리란 말이다.」
사내가 말하자 박기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방의 조대길을 골로 보냈다면 이놈들은 북한쪽도 아니다. 짐을 꾸리면서도 그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어쩌면 이놈들은 조선쪽 마피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테이프쯤은 문제 될 것이 없다.」
파벨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몇 만 개를 뿌린다고 해도 상관없다. 놈은 우리 조직의 분열을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그것,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밤이 깊었으므로 저택은 조용했다. 응접실에 둘러앉은 간부급 부하들은 모두 파벨에 의해서 요직에 발탁된 인물들이었으니 최측근이라고 불리워도 될 사람들이었다. 그중 하나인 이고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KGB출신으로 마린스키의 보좌역이자 파벨의 지시를 전달하는 연락관의 역할을 한다.
「보스, 근대운송에서 컨테이너 트럭 300대를 보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근대시를 출발했다는데 타운에서 보내온 정보여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말하자 파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들었다. 어떻게든 물자를 날라야 할 테니까 아마 사실일 지도 모르지.」
「근대 부두를 공략할 필요 없이 그 트럭들만 파괴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보포프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파벨이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근대의 강회장이 대통령을 만나러 모스크바로 떠난 모양이야. 로스토프한테서 연락이 왔어. 당분간은 자제하고 있으라고.」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통령이 나서면 조금 골치 아파져. 체르넨코나 로스토프도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고.」
모스크바의 양대 마피아 두목이었던 톨마초프가 아파트를 나서다가 반대파인 브리스탈파의 공격을 받아 살해된 것이 지난 달이다. 아파트 한 채가 거의 무너져 내린 전쟁이었는데 그 일을 기화로 대통령은 구소련 시대의 KGB 조직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모스크바 경찰국장과 간부급에 KGB 출신 간부들을 임명한 것이 그 예이다.
「며칠간만 더 기다린다. 그때까지 각자 관리를 잘 하도록.」
파벨이 맺듯이 말하자 부하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 1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부하들이 모두 나가고 파벨이 혼자되었을 때 다시 방문이 열리더니 이고르가 들어섰다. 파벨도 기다렸다는 듯이 앞쪽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마린스키는 근대 부두 공격 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승산은 있습니다, 보스.」
이고르가 말하자 파벨이 잠자코 잔에 보드카를 채웠다.
「김상철이 마린스키를 목표로 삼는 것은 확실하지만 마진스키가 모험을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레고리가 세 번 전화를 해왔다면서?」
술잔을 든 채 파벨이 묻자 이고르가 머리를 끄덕였다.
「예, 어제 두 번, 이틀 전에 한 번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 것 같나?」
「아마 내가 김상철이 같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근대 부두의 공격으로 네 세력은 거의 없어질 것이다. 넌 죽을지도 모른다. 너는 파벨의 총알받이로 희생될 것이다‥‥ 라고.」
「아마 마르첸코 그놈도 끼어들어서 네가 근대 부두 공격을 맡은 것은 그것 때문이라고 충고를 했을지도 모르지.」
「설마 마르첸코가‥‥‥」
이고르가 굳은 얼굴로 말하자 파벨이 한쪽 입술만을 비틀며 웃었다.
「마르첸코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이다. 테이프를 들어보았겠지? 아주 구체적으로 성의 있게 협조해준 흔적이 보여. 그놈은 김상철과 손을 잡았다.」
「‥‥‥‥」
「마린스키가 병력을 모으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근대 부두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거야. 그 빌어먹을 대통령이 나설까 봐 그런 것이 아냐.」
「‥‥‥‥」
「병력을 모아서 총부리를 나한테 돌리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단 말이야.」
술잔을 내려놓은 파벨이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고르, 이럴 경우에 너 같으면 어떻게 처신하겠느냐? 말해보아라.」
이고르가 굳어진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숨막힐 듯한 정적이 방 안에 찾아왔다. 벽시계의 초침소리만 방 안을 울릴 뿐이었다.
강회장을 수행한 것은 이남호 실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그룹 사장단과 그 배수 임원, 거기에다 근대리아에서 날아간 유장석 일행들이다. 그러나 코마노프 대통령을 만난 것은 강회장과 이남호, 유장석 셋이었고 러시아 측 참석자는 코마노프와 체르넨코 국방장관, 그리고 마슈크 경찰총장 셋이다. 두 시간에 걸친 회담을 끝내고 강회장이 숙소로 삼은 러시아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시가 되어 있었다. 경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호텔 앞에서 차를 내린 그는 수십 명의 수행원에 둘러싸여 로비를 지났다. 국가 원수 못지 않는 위용이다.
방에 들어 선 그는 저고리를 벗어 강미현에게로 건네주었다.
「근대리아에 가는 것은 당분간 보류다.」
저고리를 받아든 강미현이 잠자코 서 있자 그가 입맛을 다셨다.
「물론 대통령은 우리 요구를 들어주었다. 부두에서 근대리아까지의 육로는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게 될 거야.」
소파에 앉은 강회장은 지친 표정이었다.
「근대리아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운영위원장 이하 정부측 놈들이 근대리아를 망치고 있단 말이야.」
강미현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을 만난 김에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한국 정부가 친미, 친일 정책으로 근대리아를 통제하려 한다고. 지금 같은 상황으로 나갈 바에는 차라리 ‥‥‥」
말을 멈춘 강미현이 힐끗 강회장의 눈치를 보았다. 답답한 김에 뱉은 말이었지만 강회장이 공식적으로 그렇게 말한다면 러시아는 공식대응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한국 정부의 의도를 샅샅이 파악하고 있을 터이니 이것을 계기로 계약을 무효화하고 러시아군을 진입시켜 근대리아를 장악할 수도 있다. 개발에 투입된 자금과 노력이 아까운 것이 아니다. 강회장의 의도대로 이제 근대리아는 러시아와 중국의 조선족에게는 새로운 조국이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희망의 땅인 것이다.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럴 수야 있나?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지. 그래서 상철이가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니냐?」
「‥‥‥‥」
「코마노프한테는 내 사위가 될 놈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잘 난 사위 두었다고 웃더라‥‥ 그 사람이.」
잠자코 탁자 위에 시선을 주는 강미현을 향해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코마노프도 내가 근대리아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더구나. 보기보다 꽤 사려가 깊은 사람이야. 될 수 있는 한 한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고 일을 해결하기를 바라더라.」
「그럼 운영위원회가 어떻게 하고 있는 것도 알겠군요?」
「알겠지.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은근히 지원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러시아 정부가 운영위원회 체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면 한국 정부가 근대그룹을 억압하여 투자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강회장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우선, 성과는 있었다. 코마노프가 육로를 보장해준다고 했으니 근대리아는 다음 기회에 가기로 하자.」
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내부 사정이 심각해. 경비본부장 놈이 유장석이를 체포한다 어쩐다 하고 대드는 상황이란 말이다. 그리고 상철이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이 할애비 말을 들어. 그놈은 운이 강한 놈이니까. 그리고 내 운까지도 넘겨받은 놈이란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되니까 잠자코 기다려라.」
근대리아 운영위원장 관사는 경비본부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3층 건물이다. 근대시 외곽에 세워진 이곳은 본래 영빈관으로 사용될 계획이었으나 운영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위원장 관사가 된 것이다.
아침 10시, 환한 햇살이 내려 비치고 있는 맑은 날씨였다. 보통 때 같으면 시내의 행정청에 출근했어야 할 운영위원회 전창남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방금 도착한 경비본부장 신재열이다.
「코마노프가 약속했다니 육로는 열렸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물자 부족 현상은 해결되겠는데‥‥‥」
신재열이 말하자 전창남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대각이 국경 근처에 대기시켜 놓았던 트럭 300대를 러시아로 출발시켰어.」
「마피아가 그대로 둘까요?」
「글쎄, 두고봐야지. 하지만 로스토프가 코마노프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방관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수송단 경비를 해주겠지.」
「그렇다면 이번은 강회장과 김상철이의 판정승인가?」
그러자 전창남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어젯밤에 이곳으로 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안전하기도 하고 기초 조사를 마쳐야 할 것 같아서.」
「뭐야. 자백했나?」
「예, 의외로 순순히 자백하더군요. 현재 북한 국경의 온성에 1500명이 대기하고 있는데다 교육을 받고 있는 놈들이 3000명 정도 더 있다고 합니다. 그놈이 직접 확인하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김상철이의 지시를 받은 겁니다. 타운의 북한 측 책임자 이금철 대좌와 김상철의 합작품이지요.」
신재열이 열띤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겁니다, 위원장님.」
타운에는 곧 북한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입국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고 박기동이 김상철의 인력관리 대리인이라는 것은 경비본부에서 파악하고 있던 터였다. 신재열은 박기동을 추적한 끝에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셈이었다.
「보포프는 교활한 놈이야. 아마 당분간은 부하들과의 공식석상에도 나타나지 않을 걸? 한 놈씩 불러 충성을 확인하면서 세력을 키우겠지. 전에 파벨이 쓰던 방법이야.」
마르첸코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었고 지친 표정이었다.
「나한데 반감을 갖고 있었거나 조금 소외당했던 놈들을 키워주면서 제 사람으로 만들 거야. 그런 놈들이야 어느 조직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늦은 오후여서 공회당의 유리창 밖에는 기운 햇살이 만든 그림자가 덮이고 있었다.
「내가 얘기했던 베료스카의 지배인 칼리닌과 쟈파린 거리의 볼쇼이 클럽 주인 파르포프가 그놈에게 붙을 거야. 그놈들은 파벨이 심어 놓은 놈들이니까.」
「나머지 놈들은 내 별장에서 죽었지. 한 놈은 내가 처치했지만.」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칼리닌과 파르포프는 이미 죽었어. 칼리닌은 가게 안에서 기관총에 맞았고 파르포프는 차 안에 있다가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그러자 방 안에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고 그것을 김상철이 깼다.
「이제 마르첸코, 아무래도 당신을 풀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그래야 보포프보다 빨리 손을 쓸 것 아닌가?」
마르첸코가 굳어진 얼굴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칼리닌과 파르포프를 없애다니, 보포프가 혼비백산 했겠는데.」
「보포프를 없애는 걸 도와줄 수도 있어.」
「오히려 마린스키 입장이 딱하게 되었는데 그건 당신한테 맡기겠어.」
「조건이 뭐야?」
상체를 세운 마르첸코가 바짝 다가앉았다. 이제 두 눈을 치켜 뜬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새 마피아 보스의 동업자가 되는 것뿐이야. 아니, 후원자라고 할까?」
「파벨과 같은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으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지. 그레고리의 부하 몇 명을 당신이 데리고 있어줘야겠어. 아마 도움이 될 거야.」
「이미 칼리닌, 파르포프는 당신이 제거한 것으로 소문이 났을 테니까 보포프는 잔뜩 긴장하고 있을 거야. 어때, 나가서 해보겠나? 마르첸코.」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마르첸코가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야. 그래서 나도 협력을 했고‥‥내가 왜 안하겠나?」
김상철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자 문이 열리더니 주코프가 들어섰다.
「보스, 부르셨습니까?」
「마르첸코 씨가 나가실 예정인데 그전에 우리들과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다. 」
주코프가 머리를 끄덕였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보스.」
「로스토프가 1개 연대 병력을 근대 부두에 파견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고르는 방금 파벨한테 다녀온 길이었다. 마린스키의 앞자리에 앉은 그가 말을 이었다.
「보스, 당분간은 움직임을 자제하라고 파벨이 말하더군요. 코마노프가 적극 개입하고 있답니다.」
「나도 들었어, 근대의 강회장이 코마노프를 만났다는 것을.」
「코마노프가 직접 로스토프한테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근대의 수송단이 하바로프스크로 다가오고 있어. 300대가 넘어. 아마 내일부터는 근대 부두에서 수송열차가 출발하겠군.」
「그렇게 되겠지요.」
마린스키는 이미 술이 조금 들어간 상태였는데 술병을 움켜쥐더니 보드카를 두어 모금 삼켰다. 저녁 7시가 넘어 있어서 창밖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이야기는 들었겠지?」
술병을 내려놓은 마린스키가 이고르를 바라보았다.
「파벨이 그 이야기는 안하더냐? 마르첸코가 대활약을 하고 있다는‥‥ 그가 칼리닌과 파르포프를 없애는 바람에 보포프가 어디에다 머리를 처박고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들었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세이를 하바로프스크로 파견했더군요,」
「알렉세이 같은 피라미쯤이야 2, 3일 후에는 얼굴 없는 시체가 되어서 아무르 강 위에 떠 있게 될 것이다.」
「‥‥‥‥」
「마르첸코는 김상철이의 지원을 받고 있어, 이미 하바로프스크는 마르첸코의 수중에 다시 들어갔다.」
다시 술병을 쥔 마린스키가 병을 기울여 두어 모금을 삼키고 내려놓았다.
「마르첸코 습격사건이 있는 직후 파벨은 근대 부두를 공격해야 했다. 그렇게 했으면 나는 반 이상의 세력을 잃었을 것이고 성공했든 실패했든 파벨의 권위는 설 수 있었어.」
이고르가 긴장한 얼굴로 마린스키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파벨에 대한 비판이다.
마린스키가 말을 이었다.
「이고르, 넌 내가 파벨 앞에서 내 병력을 동원해서 근대 부두를 치자고 솔선해서 나서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이다. 그것은 의심받기 싫어서였어.」
「마르첸코의 테이프 사건과 놈들의 전화가 나한테 몇 번 왔다는 것을 알게 된 파벨은 아예 병력동원을 포기했지. 그렇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보스.」
「파벨이 블라디보스토크는 너한테 넘겨준다고 하더냐?」
이고르가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아닙니다, 보스.」
그러자 갑자기 마린스키가 술병을 거꾸로 들더니 테이블을 내리쳤다. 병이 깨어지면서 술이 사방으로 튀었고 동시에 문이 열리더니 부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마린스키의 심복들이다.
그들이 잠자코 주위에 둘러서자 마린스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고르, 이제 명분은 나한테 있다. 파벨은 이제 끝났단 말이다.」
장인규가 금강산 클럽에 들어선 것은 아침 10시 정각이다. 이제 날씨는 영상 10도의 여름 날씨였으므로 얇은 가죽잠바에 바지 차림을 한 그녀는 곧장 홀로 들어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앞장을 섰다. 김상철이 러시아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이제 그녀는 타운의 업소들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일을 관리하는 입장이다. 사내는 홀 안쪽의 밀실로 다가가더니 문을 열었다. 방 안의 소파에 앉아 있는 이금철이 보였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
뒤에 붙어선 경호원들에게 그녀가 말했다. 이제 서로 왕래하는 사이이지만 한 번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금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클럽이 꽤 좋아졌네요.」
그렇게 인사는 했지만 악수 같은 것은 양쪽 모두가 할 생각도 없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생수병과 잔이 각각 앞쪽에 놓여 있었고 담배와 재떨이도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요? 갑자기.」
이금철이 묻자 장인규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박기동 씨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블라디보스토크의 최진삼 씨도 나흘 전에 전화를 받은 것이 마지막이라는데‥‥‥」
「글쎄, 나는 그쪽하고 직접 연락이 안 되어서 …· 하지만 온성에 다녀간 것만은 확인이 되었소,」
이금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혹시 김 사장한테 가 있지 않을까?」
「확인해봤는데 없어요. 그리고 박기동은 김 사장의 연락처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이금철이 입맛을 다셨다.
「이제 육로가 개통이 된 상황이라 박기동이 준비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쪽 사람도 연락이 없습니까?」
「온성과는 연락을 주고받지만 박 선생과 같이 다니면서 나한테 연락을 하지는 않소,」
「그렇다면 좀 찾아봐 주세요, 나호트카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합니다. 바닷가의 무슨 모텔이라는데 최진삼 씨가 압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인규가 말을 이었다.
「내일까지 연락이 없으면 김 사장께 보고를 해야겠어요.」
따라 일어선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장 사람을 보내지요. 온성에도 연락을 해보겠소.」
하바로프스크는 마피아간의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파벨이 보낸 알렉세이와 보포프가 연합한 세력과 마르첸코와의 싸움이다.
그러나 기선을 잡고 있는 것은 마르첸코였다. 그는 이미 파벨의 심복들을 거의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그레고리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 가게나 주거지를 불문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대낮에도 거리에는 폭음과 총성이 났다. 경찰당국은 총격전 시는 물론이고 총기를 휴대한 마피아는 현장에서 사살한다는 강경책으로 나왔는데 마피아가 일사불란한 지휘체제였을 때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 상황이 그들에게는 마피아를 제압할 기회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녁 8시가 되자 시내는 인적이 드물었고 차량의 통행도 뜸해졌다. 경찰당국이 밤 9시로 통금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시 외곽의 주택가는 이미 인적이 끊긴 지 오래였다.
국도로 이어지는 주택가의 도로 모퉁이에 세워진 3층 건물도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이곳은 전에 철도노동조합 사무실로 쓰이다가 지금은 낡아서 시의 자재창고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건물 2층의 사무실 안, 창에 짙은색 커튼을 내린 방 안에 테이블을 중심으로 7, 8명의 사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천장에 달린 두 개의 형광등이 열 평 남짓한 방 안을 비추고 있었는데 분위기는 무겁다. 보포프는 테이블 안쪽에 앉아 있었다. 며칠 사이에 그의 볼은 핼쑥하게 여위어 있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마르첸코한테 칼리닌과 파르포프가 당했지만 아직도 간부급 서너 명은 우리가 끌어들일 수 있어. 주저하거나 저쪽으로 넘어갈 눈치가 보이는 놈들은 우리도 가차 없이 처단할 테니까.」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의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혔다.
「오늘, 빌리 클럽을 박살낸 것도 그것 때문이야. 바하린 그놈은 운 좋게도 살아남았지만 이제 다른 놈들도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와 마주보고 앉은 알렉세이는 30대 중반으로 유지노사할린스크 출신이다. 회색빛 머리칼에 다부진 체격의 그는 구소련 시절에 꽤 날리던 축구선수였다는 소문이 있다. 알렉세이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들도 제각기 담배를 피우거나 딴전을 피웠는데 입을 여는 것은 보포프 혼자이다.
「저녁에 파벨하고 통화를 했어. 블라디보스토크를 곧 정리하고 이곳에 온다는 거야. 근대 부두는 코마노프가 가로막아서 당분간 보류시킬 수밖에 없겠다고 하더군.」
그러자 알렉세이가 머리를 들었다.
「보포프, 마르첸코는 이미 예전의 조직 대부분을 규합해놓고 있어요. 그것도 파벨한데 말해주었소?」
보포프가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이야, 알렉세이. 그리고 김상철의 지원을 받아 더욱 날뛰고 있다고도 말해주었어.」
「하지만 며칠 가지 못할 것이야, 그 배신자는.」
문이 열리면서 사내 하나가 들어섰으므로 방 안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사내는 알렉세이의 부하였다. 곧장 알렉세이에게로 다가간 그는 허리를 굽혀 몇 마디 귓속말을 하고 물러섰다. 천천히 머리를 끄덕인 알렉세이가 보포프를 바라보았다.
「보포프, 파벨은 한 시간 전에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쳤어. 블라디보스토크는 지금 마린스키가 지배하고 있어.」
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말을 이었다.
「방금 내 부하한테 연락을 해온 사람은 이고르야. 그러면 믿을 만하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보포프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내, 당장 파벨한테 연락을‥‥‥‥」
그 순간이다. 어느 사이에 권총을 빼든 알렉세이가 총구를 보포프의 가슴에 똑바로 겨누었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도 일제히 총을 뽑았다.
「이고르가 해준 말이 또 있다. 마린스키와 마르첸코가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야. 이고르가 마린스키 측에 붙었듯이 나도 마르첸코에게 협조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지.」
「이, 이것 봐, 알렉세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보포프가 손을 내젓는 순간 알렉세이의 총구에서 섬광이 튀었다. 소음기를 끼운 총성은 둔탁했지만 방안을 울렸고 가슴을 맞은 보포프가 앉은 채로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알렉세이와 나란히 앉은 부하들이 앞쪽에 앉은 보포프의 일행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다. 보포프와 그의 심복 세 명은 시체가 되어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마르첸코를 찾아라. 서둘러.」
알렉세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만나고 싶다고, 아니, 연락이 되면 날 바꿔 줘, 어서!」
김상철이 파벨의 도주 사실을 안 것은 그날 밤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내려 보냈던 그레고리의 부하가 전화로 알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하바로프스크의 마르첸코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어젯밤 알렉세이가 보포프를 사살했소. 이것으로 사건은 종결이요, 김.」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린스키와 곧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조직을 양분해야 될 것 같소.」
그가 마린스키에게 전권을 양보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통화를 마친 김상철로부터 내용을 들은 그레고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연하지요, 그리고 그런 상황이 우리들에게는 차라리 낫습니다. 파벨과 같은 경우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파벨은 어디로 갔을까?」
「모스크바나 아니면 유럽 쪽으로 가고 있겠지요. 이미 그자는 잊혀진 놈입니다. 부하 두어 명이 따라간 모양인데 아마 그놈들도 믿지 못해 당하거나 말거나 하겠지요.」
일 년쯤 전의 일로 모스크바의 마피아 보스였던 밀리우스라는 자가 경쟁세력에 밀려 부하 몇 명과 함께 헝가리로 피신한 지 한 달 만에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살해범은 그의 부하들이었다. 부하들은 그의 엄청난 재물을 모조리 강탈한 다음 뿔뿔이 흩어졌는데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난 근대리아로 돌아가겠다.」
김상철이 말하자 그레고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난 이곳에 남아서 마르첸코와 수습을 하겠습니다. 마린스키도 만나봐야 될 것 같습니다.」
「박기동이 나흘째 연락이 없다니 마음이 개운치가 않아.」
「그놈, 마피아 전쟁이 일어나니까 어디 깊숙한 곳에 엎드려 있을 겁니다. 이제 사건이 끝났으니 얼굴을 내밀겠지요,」
그레고리도 박기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김스크 부락은 아침부터 활기를 띄고 있었는데 부하들에게 마피아 내부의 정변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부락민은 모두 조선족으로 백 명도 안 되는 인구였지만 벌써 십여 명이 근대 타운의 사업장에서 돈벌이를 하는 중이다. 그들은 부하들과 함께 번갈아 경비까지 서주면서 고생해왔던 참이라 같이 들떠 있었다.
공회당의 문이 열리더니 이한이 들어섰다.
「형님, 하바로프스크 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 앞에 선 이한이 말을 이었다.
「회장님은 어제 서울에 도착하셨다고‥‥ 근대리아는 상황이 나아지면 들리시겠다고 하셨답니다.」
「곧 들리시겠군, 이제는.」
그레고리가 말을 받고는 김상철을 힐끗 바라보았다.
「상황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풀려버렸지 않습니까? 마르첸코는 물론이고 이제 블라디보스토크의 마린스키도 근대리아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계약을 백지화시켜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강회장이 탄 승용차가 청와대에 들어선 것은 아침 10시 45분이었다. 현관에서 차를 내린 강회장과 이남호는 비서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곧장 비서실장 이태준의 방으로 들어섰다. 이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는데 동석하고 있는 것은 안보수석 박정규이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곧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오늘은 이태준이 강회장에게 러시아 방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초청한 것이다.
「고생하셨겠습니다. 연로하신데 긴 여행을 하셔서.」
이태준이 입을 열었다.
「성과가 대단하셨더군요. 군대가 동원된 것을 보면 이제 수송로는 물론이고 근대 부두도 걱정이 없겠습니다.」
「그야‥‥‥‥」
강회장이 입맛을 다시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러시아 정부의 체면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요. 마피아 때문에 국사를 망칠 수는 없지요.」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선 모양이던데요.」
「그렇지요. 직접 극동군 사령관한테 전화지시를 했으니까요.」
「다행입니다. 근대를 위해서나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곧 수송이 시작되겠지요?」
「아침에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잘 되었군요, 그런데 러시아 대통령이 다른 이야기는 없던가요? 한러 양국관계나 아니면 남북한 관계에 대해서.」
「글쎄, 나는 근대리아와 러시아 관계만 신경을 쓰다 보니, 원체 정신이 없어서‥‥」
강회장이 힐끗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같이 있었는데, 그 양반이 뭐라고 한 것 있었나?」
「없었습니다. 시간도 짧았고 해서 ‥‥‥」
「그렇지. 짧았지.」
머리를 끄덕인 강회장이 이태준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일로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가 조금 소원해졌지만 별일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제 얼굴에 침 뱉듯이 제 나라 험담하는 사람도 아니고.」
「잘못되면 계약위반으로 러시아가 근대리아를 몰수해 갈 수도 있는 판이니까. 다된 밥을 엎을 수는 없지.」
「뭐, 남북관계만 우리 정부와 호흡을 맞춰주신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지요, 강회장님.」
이태준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도 근대리아와 회장님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겁니다. 이해해 주셔야지요.」
「경비본부장이 행정위원장에게 막말을 하고 대드는 상황인데, 어디 일이 제대로 될까요?」
강회장의 말에 분위기가 금방 딱딱해졌다. 박정규가 헛기침을 하더니 나섰다.
「저, 그것은 조금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를 주었습니다만.」
「근대리아가 언제 넘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운영위원회는 안에서 내분만 일으키고 있소. 행정위 소속의 직원들을 불러다가 조사나 하고.」
그러자 이남호가 그의 말을 가로막듯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일이 모두 수습되었으니 내부도 정돈해야 되겠습니다. 차차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시켜 나가야겠지요.」
「그렇지요. 조화가 중요합니다.」
이태준이 맞장구를 쳤다.
「곧 경비본부장을 한국으로 불러들이지요. 잘잘못 이전에 하극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조처하겠습니다.」
눈을 껌벅이며 이태준을 바라보던 강회장이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잘 생각하신 거요,」
「저회들은 원칙을 지킵니다. 곧 대의를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알겠소.」
이남호의 시선이 박정규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시선을 의식했을 것임에도 박정규는 잠자코 강회장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국경에서 150킬로 정도 근대리아 영토로 들어선 곳에 테르시 마을이 있다. 본래 토착민 서너 가구가 사냥을 생업으로 하며 살던 곳이었다가 길이 뚫리면서 개척마을이 세워진 곳이었다. 그러나 인구는 아직 2백 명 정도로 반수 이상이 주유소와 정비소 등에 근무하는 근대리아 정부소속 직원들이었고 대아운송의 직원들도 7, 8명이 있다. 이곳에서 수송단이 차량을 점검하고 연료와 보급품을 갖추어 내륙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김상철이 헬기로 이곳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이젠 여름이어서 헬기장 주위에는 푸른 풀잎이 무성했고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결에 짙은 땅냄새가 맡아졌다. 미리 연락을 하고 온 참이어서 대아운송의 테르시 책임자인 송명기가 헬기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타운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김상철 일행을 따라 헬기장을 나서면서 송명기가 말을 이었다.
「장사장님이 도착하시는 대로 타운으로 연락을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테르시는 한눈에 들어오는 조그만 부락이다. 헬기장에서 백 미터쯤 앞쪽으로는 직진으로 뻗은 도로가 나 있고 그 양쪽으로 십 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들이 다가가는 대아운송의 주차장에는 50여 대의 컨테이너 트럭이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북한 노동자들을 싣고 가려고 대기하고 있는 수송단인 것이다. 김상철이 테르시에 온 것은 북한 노동자의 입국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대아운송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상철이 안쪽의 지사장실에 자리 잡고 앉자 송명기가 전화기를 들고는 다이얼을 눌렸다. 이한은 바깥 사무실에 있는 모양으로 방에 따라오지 않았다
「사장님, 장사장님 연결되었습니다. 급하신 모양인데요.」
김상철은 송명기가 건네주는 전화를 받았다. 장인규에게는 하바로프스크를 떠나기 전에 테르시에 간다고 연락을 해두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요?」
그가 묻자 장인규가 서두르듯 말했다.
「박기동이 납치 된 것 같아요.」
「‥‥‥‥」
「나호트가의 모텔에서 두 사내가 대여섯 명한테 끌려가는 것을 주인이 보았다고 해요. 그 두 사내가 박기동과 조대길이 분명합니다.」
「그게 언제였소?」
「닷새쯤 전이라니까 말이 맞습니다.」
「러시아인이요? 아니면‥‥‥」
「조선족이었답니다.」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장인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금철한테 확인을 했는데 펄쩍 뛰었습니다. 그도 지금 사람을 풀어 찾고 있는데‥‥‥」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마피아나 나호트카의 폭력배들을 알아보고 있지만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
「지금 이쪽으로 오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곳에 계실 필요가 없습니다.」
「알겠어. 곧 가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송명기를 바라보았다.
「헬기장에 연락해서 내가 곧 근대리아로 출발하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송명기가 손을 뻗어 수화기를 쥐었다. 물론 마피아에도 조선족이 있었고 무리를 이룬 조선족의 폭력집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김상철에게 송명기가 다가와 섰다.
「사장님, 헬기가 대기하고 있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리더니 서너 명의 사내들이 물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사장님, 근대리아 경호본부의 특수수사과장 염태식이오.」
그중 선임자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김상철의 앞에 멈춰서면서 말했다.
「당신을 보안법위반 및 살인혐의 등으로 체포합니다. 여기 영장이 있습니다.」
사내가 잠바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딱 벌어진 어깨에 다부진 용모의 사내였는데 김상철로서는 초면이다. 넋을 잃은 송명기가 눈을 치켜뜨고는 김상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어디로 데려 갈 겁니까?」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어.」
사내 두 명이 다가와 김상철의 양쪽 팔을 잡더니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자, 가자.」
염태식이 몸을 돌리자 사내들은 김상철을 에워싸고는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 일어서 있었으나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운송 사무실에서 헬기장까지는 백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헬기장에서는 이미 헬기가 프로펠러를 회전시키고 있었는데 김상철이 하바로프스크에서 타고 온 헬기였다. 염태식이 인솔해온 부하들은 20명 가깝게 되었고 모두 기관총과 권총으로 중무장한 차림이었다. 그들은 이미 김상철이 테르시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야? 운영위원장 짓인가?」
헬기장의 사무실로 다가가던 김상철이 앞장선 염태식에게 묻자 그가 머리를 돌렸다.
「닥쳐, 이 새끼야. 건방진 새끼 같으니, 어따 대고 반말이야.」
염태식이 그를 쏘아보며 잇사이로 말했다.
「넌 인마, 이제 인생 끝이야. 좋은 시절 끝났단 말이다.」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김상철은 문득 박기동의 얼굴을 떠올렸고 순간 숨을 들이마셨다. 박기동의 실종과 이 사건의 연관성이 생각났던 것이다. 헬기장의 대합실은 좁다. 20평 남짓한 대합실 겸 휴게실로 들어서자 염태식은 여유를 찾은 듯 어깨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새끼 똘마니들은 몇 놈 잡았지?」
「네 명입니다, 과장님.」
누군가가 대답하자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근대리아가 제 집인 줄 아는 모양이군. 겨우 경호 네 명을 달고 들어오다니.」
그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없다. 우선 이놈하고 경호 책임자 이한이 두 놈만 싣고 떠난다. 너희들은 본부에서 헬기가 곧 올 테니 그것을 타고오너라.」
대합실에 가득한 경비요원들을 둘러보는 그의 모습은 당당했다.
「김반장, 네가 남아라. 이주임은 다섯 명을 데리고 나를 따르도록.」
헬기는 고도 천 미터 상공을 날고 있었다. 강력한 터번엔진 2기에서 뿜어 나오는 진동으로 기체는 신음하듯 떨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자랑하는 Mi-24 하인드형 공격용 헬기였다. 물론 동체 측면의 날개에 대전차 미사일이나 로켓탄포드를 탑재하지는 않았으나 날개를 벌리고 나는 모습은 언제나 위협적이다.
러시아 공군은 Mi-24수백 대를 민간에 양도하여 상업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김상철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 대를 빌려 타고 왔던 것이다. 조종석과 분리된 일렬식 좌석에 여덟 명의 사내가 넷씩 마주앉아 동체의 진동에 같이 떨고 있었다. 앞쪽의 창으로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바라보였다. 김상철은 염태식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지 못한 염태식이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힐끗거리더니 이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도 이번에 안기부에서 교체 파견된 간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며칠 전에 단 한 명 남아 있었던 안기부 파견 간부 장동택이 근대리아를 떠나 서울로 돌아갔다
문득 머리를 든 김상철이 앞쪽에 앉은 이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김상철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던 듯 시선이 마주치자 떼지 않았다. 그에게도 청천벽력처럼 일어난 사건일 것이었다. 운영위원회와 행정위원회의 갈등, 한국 정부와 근대그룹간의 불화 등에 무관심했던 이한으로서는 아직도 현실이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헬기가 방향을 트는 모양으로 기체가 조금 옆쪽으로 기울어졌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앞쪽의 사내들의 몸이 통로 쪽으로 굽혀졌다.
앞으로 두 시간쯤이면 근대리아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는 밤이 되어 있을 것이고 염태식은 자신을 비밀리에 경비본부의 사무실로 데려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서울행 직행편 비행기를 탄다. 김상철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근대리아의 남은 조직은 경비본부에 의해서 접수되거나 분해될 것이었다.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끝이다. 그레고리는 아마 하바로프스크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송길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 모두 마피아 계열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근대리아는 마피아의 제물이 된다. 그리고 북한의 이금철은 기회를 노릴 것이다.
김상철의 시선이 다시 이한에게로 옮겨지자 그때까지도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한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김상철이 눈길을 내리자 이한이 손가락 하나를 잠깐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시선을 돌린 김상철은 앞쪽을 바라본 채 주위의 사내들을 시선 안에 모두 집어넣었다. 앞쪽 사내들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쪽 사내들의 시선은 잡을 수가 없다. 김상철의 눈길이 다시 이한의 팔목으로 내려가자 그가 다시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가 내렸다. 헬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앞쪽으로 쏠렸으므로 사내들의 몸이 일제히 기울어졌을 때 김상철은 다시 이한의 팔목을 보았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누르고 있던 이한이 잠깐 손을 들어보였는데 수갑의 양쪽날 끝이 드러나 있다. 이미 그는 한쪽 수갑을 풀어놓은 것이다. 헬기가 중심을 잡자 길게 숨을 내려쉰 김상철은 앞쪽을 바라본 채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염태식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창문은 동쪽에 붙어 있어서 어느덧 푸른빛이 가신 하늘은 회색빛이 되어가는 중이다.
김상철은 잠깐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안전벨트는 버튼 식으로 누르기만 하면 풀어지는 형식이다. 머리를 든 김상철이 다시 이한을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한의 오른쪽에 앉은 사내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건너뛰어 왼쪽의 사내 두 명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왼쪽 끝의 사내가 그의 시선을 받고는 하품을 했다. 다시 한 번 김상철이 시선을 반복하자 이한이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30분쯤 시간이 지났을 때 앞열 왼쪽 끝의 사내는 졸고 있었다. 창밖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고 헬기 천장의 붉은색 등이 기체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다. 김상철은 이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벨트의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양쪽 팔꿈치를 치켜올려 오른쪽 사내의 미간을 후려치듯 찍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마로 염태식의 얼굴을 받으면서 손으로는 그의 벨트에 찬 권총을 뽑아들었다.
「땅, 땅, 땅.」
헬기 안에 총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그것은 이한이 쏘아 갈긴 총성이었다.
「움직이지 마!」
김상철이 왼쪽 끝의 사내에게 총을 겨누고 소리치는 순간 다시 이한의 총이 발사되었다.
「땅!」
왼쪽 끝의 사내가 말 한마디 뱉지 못하고 사지를 늘어뜨리자 이한의 권총이 염태식에게로 겨누어졌다.
「쏘지 마라!」
김상철이 소리치자 눈을 치켜뜬 이한의 총구가 오른쪽으로 돌려지면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김상철의 팔꿈치에 미간을 맞고 흔들리고 있던 사내가 바닥으로 몸을 꺾었다. 이한은 옆 사내의 권총을 빼앗아 들자마자 나란히 앉은 세 사내를 차례로 쏘아죽이고 앞열의 두 사내까지 마저 죽였다. 김상철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염태식의 턱밑에 총구를 가져갔다.
「내 수갑을 풀어라.」
그리고는 이한을 돌아보았다.
「조종사에게 저택으로 가라고 해, 그리고 장인규에게 연락해.」
「이미 나는 경비부원 다섯 명을 살해했다. 경비대는 곧 이곳으로 진입해올 것이다.」
김상철이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장인규를 위시한 타운에 남아 있는 간부급 사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저택의 응접실이었는데 도착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시각이다. 이한의 무선연락을 받은 장인규가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금방 회의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잡혀가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이곳에서 경비부원들과 전쟁을 치러 동지들을 희생시키지도 않겠다.」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유 위원장에게 중재를 부탁하지요. 전쟁이 일어난다면 경비대에 승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북한 측과 손을 잡으면 근대리아는 전복됩니다. 」
이맛살을 찌푸린 김상철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유 위원장한테 당신을 부탁할 생각이야. 대아운송은 넘겨주더라도 우리가 세운 타운의 사업장은 모두 당신과 우리 동지들이 관리할 수 있도록.」
「‥‥‥‥」
「아마 그것은 책임져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떠난다.」
그러자 방 안의 사내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김상철이 손을 들자 모두들 조용해졌다.
「그 방법밖에 없다. 여러분이나 근대리아를 위해서‥‥ 송길수와 그레고리가 돌아올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지만 앞으로 근대리아의 조직은 장인규가 맡는다.」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가 김상철의 세찬 시선을 받고는 입을 닫았다.
「근대리아의 운영자들도 북한을 견제하는 조선족 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 이제 그것을 장인규가 맡는 것이다.」
「어디로 가실 작정 입니까?」
말석에 앉은 사내 하나가 물었는데 그는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고맙지만 하나라도 더 이곳에 남아서 장 사장을 도와라. 그것이 나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김상철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정위원회도 내 문제는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풀릴 것이다. 근대리아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간섭이 풀리는 날이 되면 …….」
「그때까지 잘 부탁한다.」
「연락은 자주 하시겠지요?」
장인규는 상황판단이 빠른데다 분위기 장악력도 있다. 그녀가 그렇게 묻자 김상철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이곳이 내 고향이고 내 형제들이 있는 곳이야. 당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저택의 뜰에 내려앉은 헬기가 다시 우렁찬 폭음을 울리며 두 개의 엔진을 가동시키고 있었다. 이제 밤이어서 주위는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지만 저택 주위는 사내들로 뒤덮여 있었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이 머리칼을 날렸고 먼지가 휘몰아 얼굴을 때렸다. 이한이 부하들을 지휘하여 분주히 헬기에 짐을 싣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상철을 따라갈 사람으로는 이한과 그의 부하인 최복수, 정기만 세 사람이었다.
현관에 서 있는 김상철에게 장인규가 다가와 섰다.
「타운에 있던 달러를 실었습니다. 모두 2백만 달러쯤 됩니다.」
그러자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도 돈이 있어. 쓸데없는 짓을‥‥‥」
「객지에선 돈이 많을수록 좋아요. 내가 당해봐서 압니다.」
「유 위원장이 염려 말라고 했어. 내일 아침에 이대각 부위원장이 찾아오기로 했으니 만나보도록.」
심란한 얼굴로 장인규가 머리를 끄덕이자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맙소, 장인규 씨. 이럴 때 당신이 큰 도움이 됩니다.」
「당신은 강한 여자요.」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이곳으로 숙소를 당장 옮기도록 해요.」
그녀가 다시 머리를 끄덕이자 김상철이 생각난 듯 말했다.
「이인숙 씨 모녀도 잘 부탁합니다.」
「글쎄 그런 걱정은‥‥‥」
그러자 사내들을 헤치고 이금철파 최태호가 다가왔다. 현관의 등불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다.
「김 사장님, 어떻게 된 일이요?」
다가선 이금철이 다급하게 묻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그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사건을 모두 들었을 터였다.
「난 당분간 떠납니다. 내 대신 여기 있는 장사장이 조직을 맡기로 했고, 물론 행정위원장의 승인도 받았지요,」
「아니 그런데 왜?」
「경비원들을 다섯이나 죽였소.」
「이한이 했다던데.」
「아무튼 여기 있지는 못하게 되었소, 당분간,」
헬기에 짐을 다 실었는지 이한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김상철은 장인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 사장, 잘 부탁합니다.」
장인규와 악수를 마친 김상철이 이제는 이금철을 향해 돌아섰다.
「잘 부탁합니다, 이 대좌. 내가 지켜보겠습니다.」
「걱정 마시오, 잘 될 테니.」
이금철이 그의 손을 힘차게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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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부지런히 즐겨 읽고 있습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즐감요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요~^^
즐감요~~~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