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표현인 두 진리설
앞서 두 가지 진리설과 무아설을 통해 공성에 대해 살펴보았듯이, 중관학파에 따르면 공성이란 연기의 의미이다.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고 말한다."
짠드라끼르띠는 위 게송을 주석하여 "연기는 원인(hetu)과 조건(pratyaya)에 의존하여(apekṣya) 싹과 식(識) 등이 [자성이 없는 가유(假有)로서] 현현하는 것이다. 즉 [제법이] 자성에 의하여 생기하지 않는 것이고, 존재들이 자성에 의해 생기하지 않는 것이 공성이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유자성론자가 공의 의미를 비존재(abhāva)라고 해석하여 중관학파를 허무론자(nāstika)로 비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는 '비존재의 의미'를 '공성의 의미'에 갖다 붙임으로써 [우리들에게] 오류가 따라붙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공성의 의미는 비존재의 의미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 [공성의 의미는] 연기의 의미이기 때문에, 공성에 대한 논박은 타당하지 않다."
중관학파에게 공이란 '연기'의 의미이고, 연기란 '자성이 없음'(niḥsvabhāvatā, 무자성)의 의미이다. 연기와 공, 그리고 무자성을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는 나가르주나와 짠드라끼르띠의 생각은 샨띠데바와 쁘라즈냐까라마띠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연기 그것은 공성이라고 당신은 이해했다.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물은 없다'라고 한 당신의 사자후는 비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중관학파는 연기와 공, 그리고 무자성을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여 연기공(pratītyasamutpāda-śūnyatā)과 무자성공(niḥsvabhāva- śūnyatā)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무자성론자(niḥsvabhāvavādin)라고도 부른다. 결국 중관학파에게 있어서 공의 의미는 '법이 없다'(dharmo nāsti)는 것과 같이 사물의 비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법들에게는 실체적인 '자성이 없다'(svabhāvo nāsti)는 것을 밝힘으로써 연기적으로 사물이 존재하는 것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가오(長尾)는 연기와 공성의 동일성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승의와 세속에 대한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진리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서는 '공성'(śūnyatā)·'공성의 의미'(śūnyatā-artha)·'공성의 목적'(śūnyatā-prayojana)을 여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샨띠데바가 BCA 9장에서 공성에 대해 기술하면서 두 진리의 구조를 서두에 도입한 것도 이 전제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승의와 세속을 있는 그대로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존재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생긴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와 같이 두 진리를 온전히 알아 여실히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전도되지 않는 법의 관찰이 일어난다."
연기와 공성, 그리고 두 진리의 관계와 관련해서 나가오는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그는 연기와 공성의 수평적 관계(수평선)와 승의와 세속의 수직적 관계(수직선)가 직각으로 교차되어 중관철학의 체계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연기와 공성의 동일성과 승의와 세속의 단절성은 상호 보완적인 의미를 지니고 중관철학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가오의 통찰은 중관의 세계관과 관련하여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새롭고 신선한 조망도를 제공한다. 그는 이 수평선과 수직선이 교차되는 접점에 존재하는 중관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도(Madhyamā-pratipad)이다.
샨띠데바는 BCA에서 중도라는 용어를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는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단 한 차례만 사용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중도의 사상을 온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샨띠데바와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두 진리설을 통해 연기와 공성, 그리고 무자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중도설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1)두 진리 → 연기 → 무자성·공성 → 중도
우선, 연기와 공성, 그리고 무자성과 관련해서 샨띠데바와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승의적 진리가 '지(知, buddhi)의 대상을 초월했다'고 언명함으로써 승의는 지(知)에 의한 4구 분별을 떠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有)도 아니고 비유(非有)도 아니다. 유이고 비유인 것도 아니다. 양쪽이 아닌 것도 아니다. 진실은 4구를 떠난 것이라고 중관론자들은 알고 있다."
4구를 떠났다는 것은 불가언설의 승의가 그 자체로 본래 적정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승의적 진리가 모든 분별을 떠나 희론의 대상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분별과 희론의 구체적인 예는 4구 분별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샨띠데바와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이 4구의 성립을 부정함으로써 『중론』의 귀경게에 기술된 나가르주나의 '팔불(八不) 연기'를 계승한다. 왜냐하면 4구 분별을 통해 성립하는 것들이 팔불에서 각각 부정되기 때문이다.
팔불은 연기의 수식어로서 연기가 지닌 8가지 특징을 나타낸다. 성자의 지혜의 관점에서 본다면, 연기에는 소멸(滅)도 생기(生)도, 단멸(斷)도 상주(常)도, 동일함(一)도 다름(異)도, 옴(來)도 감(去)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의 생기와 소멸을 비롯한 8가지를 부정함으로써 일체의 법이 논파되는 것이 팔불 연기의 핵심이다. 최근 남수영 박사는 나가르주나의 팔불이 시종일관 무자성의 개념에 근거해서 설해지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의 논증에 따르면, 팔불 연기가 설해진 목적은 유자성론에 근거해서 설해지는 여러 견해들의 불합리를 비판하고, 무자성과 공성 등으로 설해지는 승의적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깨닫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생기와 소멸을 떠나 있는 팔불 연기는 '공(空)인 연기'의 다른 표현이다.
샨띠데바도 두 진리설을 통해 '무명에 의해 나타나고 연기한 사물의 현현된 모습'이 세속이며, 이와 같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승의임을 밝힘으로써 분별과 희론이라는 세속의 정체와 분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승의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결국 샨띠데바에게 있어서 두 진리설은 4구 분별의 부정과 팔불 연기를 통해 드러나는 사물의 무자성성과 공성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돕는 것에 다름아니다.
다음으로 샨띠데바와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두 진리설을 통해 상견과 단견의 양극단을 떠나는 중도를 제시한다. 남 박사의 지적처럼, 시종일관 무자성의 개념에 근거해서 설해지고 있는 팔불 연기는 사물이 어떤 자성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성(astitva)도 비존재성(nāstitva)도 갖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자성상 불생(不生, anutpanna)인 것은 진실로 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sat, bhāva, 有)라고 할 수 없고, 또 자성상 불생인 것은 진실로 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비존재(asat, abhāva, 無)라고도 할 수 없다. 연기인 사물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인 것이고, 존재와 비존재 등의 양극단을 떠나있는 것이다. 그래서 짠드라끼르띠는 "모든 것이 자성에 의하여 발생하지 않음(anutpatti)이라는 특성(lakṣaņa)을 지닌 공성은 중도라고 불린다."고 말한다. 따라서 나가르주나는 연기란 존재와 비존재의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 공성=중도'라고 말한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말한다.
"실로 자성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주에 [집착하는 견해이고],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단멸에 [집착하는 견해]가 된다."
샨띠데바도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떠나는 것이 '공성의 결과'라고 말한다. 공성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언제나 집착과 두려움이라는 극단적인 견해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집착은 상견(常見, śāśvata-dṛṣṭi)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실체나 영혼이 상주한다거나 존재가 영원하다는 견해에 의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반면, 두려움은 단견(斷見, uccheda-dṛṣṭi) 때문에 생긴다. 존재의 지속을 부정하여 모든 것이 단멸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아래와 같이 공성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서 이러한 집착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고통받는 중생의 구제를 성취하기 위하여 해탈하지 않고 윤회계에 머문다고까지 말한다.
"미혹(癡)에 의해 대상에 괴로워할지라도 집착과 두려움으로부터 해탈하지 않고서 윤회계(세간)에 머물러 성취한다. 이것이 공성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공성의 결과를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무주처열반(apratiṣṭhita-nirvāņatā)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본다. 비록 중생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윤회계에 머물러 생사의 경계에 있을지라도 공성의 깨달음(지혜)에 의해서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집착에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을 떠나지 않는 것과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공성을 수습함으로써 무명으로부터 기인하는 집착과 두려움의 양극단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성으로 인하여 윤회계에 있더라도 그곳은 더 이상 고통의 세계가 아니라 환희의 동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양극단을 떠나는 것을 두 진리와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승의를 고찰하는 것에 의하여 상견의 극단을 떠나고, 세속적 진리를 허용하는 것에 의해서 단견의 극단을 떠나게 된다."
공성의 결과가 양 극단을 떠나는 중도이다. 바로 이곳에서 단절되었던 승의와 세속은 또 다시 결합한다. 존재에 대한 깊은 고찰을 통해 승의와 세속을 알고, 존재의 진리성인 연기와 공성을 아는 것, 이것이 중도이다. 그래서 짠드라끼르띠는 Prasannapadā에서 중도를 '제법의 실상을 고찰하는 것'(dharmāņāṃ bhūta-pratyavekṣā), 즉 진실의 고찰이라고 말한다. 결국 샨띠데바에게 있어서 두 진리는 연기의 특징인 팔불과 동일하고, 팔불을 특징으로 하는 연기인 사물은 어떤 자성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무자성·공성이며, 따라서 존재성도 비존재성도 갖지 못한다. 이와 같이 사물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제법의 실상이며, 이 제법실상이 곧 중도인 셈이다. 이것은 두 진리설을 취해서 중도를 밝히는 것으로, 샨띠데바의 공성 사상은 '두 진리 → 연기 → 무자성·공성 → 중도'를 설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2)중도를 통한 두 진리의 상즉
두 진리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중관학파의 공성 사상은 중도에서 완결된다. 그렇지만 완결된 중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단절된 승의와 세속이 만날 수 있는 장(場)을 제공한다. 불가언설의 승의와 언설의 세속은 양 극단을 초월한 중도를 통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중도란 일반적으로 고통(苦)과 즐거움(樂) 혹은 존재(有)와 비존재(無)의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대립인 유와 무가 부정된 이상, 그 밖의 여러 대립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짠드라끼르띠는 Ratnakūṭa-sūtra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섭이여, 아(我)라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무아(無我)라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그 양극단의 중간은 색(色)이 없고, 보이는 것이 없고, 의지처가 없고, 나타남이 없고, 무표이고, 징표가 없다. 가섭이여, 그것을 중도, 즉 제법실상에 대한 고찰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유와 무를 비롯하여, 아(我)와 무아(無我)·일(一)과 이(異)·상(常)과 무상(無常)·고(苦)와 락(樂)·색법(色法)과 무색법(無色法)·가견법(可見法)과 불가견법(不可見法)·유대(有對)와 무대(無對)·유위(有爲)와 무위(無爲)·유루(有漏)와 무루(無漏)·세간과 출세간 등의 모든 대립을 떠나 있는 것이 중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승의와 세속에 있어서도 중도라고 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가오(長尾)는 세속과 승의 두 개의 세계 중 어느 한 편에 치우치면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속은 승의의 세계를 경배하고 승의는 세속적인 세계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흐름은 항상 세속에서 승의로 향하고, 동시에 승의에서 세속으로 향한다. 언설의 세속은 항상 자기의 이면에 있는 승의를 구하여 자기의 최후의 귀의처로 삼고, 불가언설의 승의는 반대로 자기표현의 의지처로서 세속이 독립되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오는 승의와 세속을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비유한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승의와 세속의 양극단은 중도를 통해서 비춰볼 때, 서로 융합하여 무차별일체(相卽)가 된다. 이러한 상즉의 관계는 『중론』 25장 게송19와 20에 설해진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명제를 논리적 근거로 한다. 생사와 열반은 한쪽이 성립되어 있을 때는 다른 쪽은 성립하지 못하는 상호 대립적인 양 극단의 관계에 있다. 그런 관계에 있는 생사와 열반이 차별이 없이 상즉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런데 견해의 차이에 의해 승의도 되고 세속도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견해가 사라지면 당연히 차별도 사라진다. 승의인 열반과 세속인 생사도 마찬가지이다. 일체의 대립된 견해를 떠나 있는 중도의 견지에서 볼 때, 생사와 열반은 본래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이다. 샨띠데바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유정은 본래의 상태로부터 한다면 열반인 것이다."
우에다 요시부미(上田義文)는 두 진리의 상즉의 논리적 근거인 '생사즉 열반'의 명제를 반야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과 동일한 논리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색즉시공에서 공은 색에 대하여 부정적 대립의 관계에 있는 측면, 그리고 색과 무차별한 관계에 있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 열반도 생사에 대하여 이들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고 그는 본다. 즉 단절과 결합의 두 측면을 지닌다는 것이다. 단절을 통해 대립되는 것이 상호 부정되고, 결합을 통해 부정되는 것이 상호 긍정되는 것이다. 그는 이 공이나 열반에 나타나 있는 단절과 결합의 모순은 반야바라밀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으로서 이 지혜가 무분별의 분별, 즉 중도라고 파악한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