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시창작방1, 2』, 『시창작방3』에 올라 온 총 57편의 작품 중 황을선 시인의 <기다림>, 윤여호 시인의 <구룡포>, 돌샘 이길옥 시인의 <변산아리랑> 등 총 3편을 추천한다.
기다림
황을선
바다는 익어서 파란가 보다
뿌옇던 아침 바다가
오후에는 파랗게 웃네
서둘러 파란 바다를 보러 왔다가
백사장을 서성이며 마음 삭여봐도
속이 탄다
꽃은 때가 되면 다 피어나도
바라보는 아픔들을 헤쳐가며
바다가 익는지는 몰랐네
강릉 바다는 한나절 익어야 파랗고
한 계절을 해만 바라보던 겨울은
잘 익어 봄으로 왔구나
인생 여정 다리 아파 앉아보니
걸어온 먼 길이 눈에 익다
돌아가는 길, 석양은 또
얼마나 익어서 하늘을 물들일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익어감’에 대한 고찰을 담은 시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권대근(문학평론가)이 말한 ‘참신성’이 이 작품 전체에 통일성 있는 맥락을 구성하고 있는 점이다. 참신성이란 남이 쓰지 않던 말을 새로이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쓰던 말도 남들이 쓰지 않던 뜻이나 용법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는 새로운 느낌을 주게 되므로 곧 개성적인 표현이 된다. 이 시에선 익어서 된 파란 바다, 겨울이 잘 익어서 온 봄, 익어가는 석양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가수 노사연의 ‘바램’을 작사한 김종환이 늙어가는 것을 익어가는 것으로 표현할 때만 해도 참신한 표현이었지만, 러시아형식주의자들의 개념처럼 지금은 ‘후경화’, 즉 익숙해진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참신성을 통해 신선한 느낌을 환기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작품 절반을 차지하는 ‘파란’색의 이미지는 보통 심리학에서 시원함, 슬픔, 우울, 냉정, 지성 등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색채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 ‘익어’의 표현을 덧붙여 역설적 조합을 이루어낸다. 즉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표현 두 개를 결합하여 개성적 표현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제목에 어울리는 내용을 시 안에서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자연의 순환과 이치를 보여주는 표현들 사이에 정작 화자의 심정을 표현한 부분은 2연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속이 타’는 어떤 일이 내포되어 있다는 걸 상정하고 시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 일이 해결되기를 화자가 기다리게 된 건, 그 또한 자연의 순리처럼 모든 게 차례대로 익어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구룡포 [九龍浦]
윤여호
아낙의 소망 어창 가득 채운 어부들이
끝내 얼리지 못한 속울음에 어긋매여
서툰 열 맞추느라 등 휜 줄 모르는 청어
구룡포 싹쓸바람과 당당히 맞서 개명 한
과메기로 각인된 삶이
시누대 피한 눈 갈쭉히 뜨고 고샅길에 매달렸다
내 어머니처럼 온몸 꾸덕꾸덕해 질 때까지
햇귀 벗갠 바다 끄덩이 붙잡고
등 푸르던 시절 물때 맞춰 푸느라
남몰래 떨군 눈물 건지려가는 중이다
헐거워진 맥박 말리며 또 하루 견뎌낸 것들이
소금기 절인 삶에 주름진
늙은 손길의 고단함을 덜어내는 중이다
억겁의 시간에 좁아진 샛길 비틀어 놓고
전기세 아끼느라 초저녁 졸음에 길들여진 어머니
휜 허리에 끌려온 유모차 속살이 아려온다
청어 살 굳는 소리로 정 쌓던 구룡포
그물 한 올 놓친 망사리 빠져나간 파도소리에
긴 밤 어머니는 과메기처럼 자맥질 한다
청어와 어부의 고단한 삶을 엮어 절망을 희망으로 승화한 작품이다. 시인은 이 두 제재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시에선 청어가 말려 과메기로 변화하는 과정이 주를 이루지만, 단지 객관화된 사물로서 이를 묘사하는 ‘사물시’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를 ‘내 어머니’의 삶과 연결하면서 의미 있는 투영으로 발전하고 있다. 시인은 상이한 두 제재 간의 세계 안에 있는 유사성을 발견한다. 구조주의에선 이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세계의 구조들은 선천적으로 인간 정신에 있는 구조물이기 때문에 그 구조들을 세계에 투사함으로써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에 의하면 시인이 의식 속에 품고 있는 삶에 대한 철학이 구룡포 바닷가에 매달린 청어라는 사물의 프리즘을 통해 어머니의 삶까지 포괄하여 공통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시의 매력은 다양한 감각성에도 있다. ‘열을 맞추어 매달린 청어, 소금기 절인 삶, 청어 살 굳는 소리, 꾸덕꾸덕한 온몸’ 등 시각과 청작, 미각과 촉각 등을 동원해 보다 리얼한 현장과 감정의 구체성을 드러낸다. 특히 청어의 고향이자 어머니 삶이 터전인 ‘바다’라는 공간은 신화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근원을 상징한다. 이는 흔히 ‘생명의 어머니’로 일컬어질 만큼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다. 한자어로 ‘바다해(海)’자에 ‘어미모(母)’자가 들어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소멸해가는 하나의 삶이 또 다른 삶의 소생의 바탕이 되어준다는 주제의식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모티브이다. 전체적으로 어촌에서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청어를 중심으로 전개한 시인의 동일시 시각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변산 아리랑
돌샘 이길옥
1. 직소폭포
비단 한 폭 널린다
그 고운 결에 감겨 쏟아지는 절창
변산에 터를 잡은
온갖 것들의 소리를 모아 빚은
저 가락
굿 한판 벌여 난장을 튼다
2. 격포
파도가 허겁지겁 달려와
읽다 두고 간 고전
수만 권을 뒤적이며
입에 거품을 문다
채석강 書庫에 가득 찬
이야기를 꺼내
철썩, 처얼썩.
한나절을 꼬박 읽어낸
낭랑한 목청으로
격포가 들썩인다
전북자치도 변산반도국립공원을 배경으로 화자가 관찰한 풍광의 위엄을 다양한 비유를 통해 생동감있게 전달하는 작품이다. 관찰자로서의 화자는 보이는 장면을 사람의 인생과 엮거나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주제를 전달하지 않는다.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바를 연상작용을 통해 확장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소재가 주는 풍부한 감정에 집중하게 만든다. 우선 부안 8경 중 하나인 직소폭포에선 폭포가 쏟아지는 현상을 시각과 청각 이미지인 ‘비단’과 ‘굿’으로 비유한다. 특히 ‘가락’과 ‘굿’, ‘난장’은 육자배기토리에 속하는 전라도 판소릴 자연스럽게 불러온다. 전라도 굿판의 악사들이 세습무가 출신으로 판소리의 모태가 된 사실과, 또 부안의 기생인 매창의 존재, 그리고 굿판에서 악무로써 피리, 대금, 아쟁, 장구, 북, 징 등의 요소들이 활용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 짧은 시 안의 복합적인 소리들이 활자를 뚫고 전달되는 느낌을 받게 한다. 채석강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여 명명했다는 다소 사대주의적 발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무릉의 경지를 겨룰만한 곳으로 그 시대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인이 묘사한 부분은 외변산일 가능성이 크다. 이 곳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치 수천 권의 책을 겹겹이 쌓은 것처럼 보이는 퇴적암 절벽이 있기 때문이다. 해식애(海蝕崖)라 불리는 이 낭떠러지는 퇴적암층이 오랜 시간 파도의 침식과 풍화 작용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오랜 세월이 겹겹 쌓인 퇴적층을 수만 권의 고전으로 비유한 건 경이로운 발상이자 ‘긴장’을 주기에 충분하다. 문학이론에선 ‘긴장(tension)’에 대해 ‘작품 외부를 향한 문자적 의미와 작품 내부를 향한 비유적 의미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문학 언어’라고 정의한다. 부안의 명소들을 앞세워 지시적으로 전달하는 문자적 의미와 이의 내부에 잠재한 속성을 예찬하는 비유적 의미가 적절히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