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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만
2010년 5월 30일 / 대예배 / 마 7:13-14
마 7:13-14 / [좁은 문 ; 눅 13:24]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14)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눅 13:23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각 성과 마을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눅 13:24-30절 전체는 이 한 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24절을 보면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좁으니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물음에 대해 구원을 받는 자가 적다든가 아니면 많다든가 하는 직접적인 답은 하지 않고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❶ “누구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❷ 구원을 받는 자가 많은지 적은지는 우리의 알 바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즉 그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맡겨야 하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다른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 답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좁으니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는 말씀은 잘못하면 오해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마치 사람들이 치열하게 경쟁해서 쟁취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구원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은 확고하고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편안하지도 않고, 부대끼는 일도 많고, 양보도 해야 하고, 인내도 필요하듯이 구원 받은 이들의 삶은 그리 쉽고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많은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가 갑자기 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오히려 평소의 삶이 불편해지고, 자유롭지 못하고, 눈치봐야할 일도 많고, 손해도 많고, 피곤해집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가 뭐 이렇게 힘들어. 나 안 해.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된 것 자체는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한량없는 은혜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자녀이기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데, 그것이 귀찮고, 피곤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신나게 살지 못한다고 영원히 복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잠시 어려움을 못 견뎌 좁은 문을 버리고 떠나가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 비유로 말합니다. 고3 학생이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고, 들어가기만 하면 최고의 영예와 장래의 취업과 출세가 보장된 일류대학에서 입학을 약속 받았다고 가정합니다. 다른 학생은 밤잠을 못자고 죽기 살기로 공부하면서도 합격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 고등학교 3학년 동안 학교에 성실히 출석하고 수업시간에 착실히 공부하며, 불량학생 같은 행실을 삼가고, 정상적인 생활만 하면 무조건 입학이 약속되었을 뿐 아니라 4년간 전액장학금과 졸업 후 해외유학과 귀국 후 교수직이든 다른 직장에서의 중직이든 임용이 다 보장되었다면 고등학교에서의 남은 1년간의 성실한 학교생활이 갑갑하다고 불평불만하고 뛰쳐나가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도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여하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 뿐입니다.
■ 공처가인 사장이 남들도 자기처럼 공처가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사원들에게 “마누라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내 편으로 모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저 쪽으로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원 전원이 사장 편으로 몰려왔는데 1명만이 저 쪽에 남아 있었습니다. “자네는 정말 마누라가 무섭지 않나?” 하고 물으니까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집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많이 모인 데는 절대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공처가의 아내와 비슷한 말을 예수님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밀려가는 넓은 길로는 가지 마라.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몰려가는 넓은 문으로는 들어가지 마라. 그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파멸의 문이다. 그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비록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문을 잘 못 찾으면 엉뚱한 곳으로 갑니다. 길을 잘못 들면 고생만하고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가 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움으로 모든 것이 일그러져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방향을 잘못 잡아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 우리 영혼의 결국도 그와 같습니다. 자칫하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 멸망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중하게 생명에 이르는 문을 열고 들어가되 확신을 갖고 생명길로 걸어야 합니다. 겉만 보고 선택하다보면 잘못 선택하기 쉽습니다. 사람 눈치를 보고 가다가는 잘못 선택하기 쉽습니다. 우선 당장 편하고 쉬운 것만 앞세우다가는 잘못 선택하여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충분한 기도를 통해 결론을 내야 합니다. 아니면 목자의 인도하심이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들의 의(義)는 외식적이었으며, 온전하지도 못하고 부분적으로 그들의 의(義)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며 천국의 백성이 되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나은 의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만이 천국의 백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산상설교에서 이 두 가지 의를 계속해서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쪽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곧 인간적인 의입니다. 다른 한쪽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나은 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셨습니다. 아울러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우리 각자가 져야할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하반부에서 3가지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첫 번째 해당되는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
① (13-14절) 문과 길의 비유 ② (15-23절) 두 나무의 비유 ③ (24-27절) 두 집의 비유입니다.
1. 생명의 길은 겉보기에 화려하지 않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화려하고 멋진 것들을 좋아합니다. 할 수 있으면 크고 화려하고 멋진 문으로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넓고 잘 닦여진 좋은 길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겉보기에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함정일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오히려 본능을 거슬러서 생명의 길로 가려면 그런 화려함과 거창한 것을 피하여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열매에는 그들을 끌어들이는 어떤 매력이 있었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사망의 열매는 생명의 열매에 비해 오히려 더 겉모습이 요란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몸과 마음뿐 아니라 영혼까지 끌어당기는 화려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감각을 자극하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문을 열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우리를 만족시켜줄 온갖 보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습니다.
롯이 소돔을 선택할 때도 그랬습니다. 겉보기에 그 땅은 문화가 잘 발달된 애굽과 같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 같았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선택한 헤브론은 황량한 황무지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망했고 아브라함은 갈수록 더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의 사랑받는 제자 데마 역시 이 세상을 사랑하여 기독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승인 바울 선생님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왜 그런 엄청난 실수를 하였습니까?
생명의 길을 따르는 데는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아무런 화려함이 없고 시시해 보일 뿐 아니라 고생만 하는 반면 세상에는 우리 눈을 유혹하는 온갖 화려함이 손짓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자기를 들어내려고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습니다. 평범하고 수수하나 은은한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거짓은 사람들을 속이려고 요란하게 치장합니다. 생명의 길을 걸으면서 겉보기에 화려하고 매력적인 유혹들을 잘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보다 보이나 그것은 함정이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유일하게 생명을 얻는 길이요 영혼의 양식을 얻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실한 믿음을 가지기를 망설이는 이유, 진실한 제자가 되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세상의 화려함을 마음껏 누리는 사치스런 생활을 절제하고 초라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믿음을 가는 분들을 존경하며 부러워합니다. 겉으로 잠간 화려한 것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더 가치있는 선택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을 선택하지 말고 겉보기에는 좁고 초라하나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하여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알의 겨자씨는 작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만 더 한다면 큰일도 감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2. 생명의 길은 걷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왠지 위험부담이 적어 보이며, 쉽게 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이런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며 좌우를 둘러봅니다.
남들이 모두 가는데 나만 안 따라가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유행에 뒤쳐지는 것 같습니다. 무슨 큰 손해를 볼 것 같습니다. 한 밤중에 개 한 마리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따라 짖는 것 같이 요란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군중심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군중심리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누군가 선동하면 분별력을 잃기 쉽습니다.
왜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 독자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합니까? 무리에게서 소외되어 혼자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수가 선택한 것이 거의 옳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언제나 다수가 옳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다수는 모세를 죽이고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과 승리에 대한 믿음이 없이 불평만을 쏟아놓았습니다. 다수의 군중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생명의 길을 걸으려면 의미없는 다수의 군중에 섞이지 말고 거기서 나와서 믿음의 소수 편에 서야 합니다.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오해를 받고 왕따를 당하며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담대하게 소수의 진리 편에 서야 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영향력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들은 의미 있는 소수였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더라도 진리의 편에 선 사람들은 다수보다는 소수였습니다. 그 소수는 어떤 소수입니까? 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늘 하나님의 편에 서고자하는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자가 되어 훈련받는 대가를 지불하려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제자가 되어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하려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영생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 빌리 선데이는 18세기 미국 대부흥운동을 찬양으로 공헌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15살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평생 지키기로 결심하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매일 15분씩 성경읽기, 매일 15분씩 기도하기, 매일 15분씩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기, 매일 15분씩 누군가에게 교회에 가자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60분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인데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나를 하나님께 묶어 놓을 때 나는 더 만족하게 세상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큰 문으로 들어가도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갑시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넓은 길로 걸어가도 우리만은 좁은 길로 갑시다. 비웃음소리가 들려도 멈추지 맙시다. 외롭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맙시다.
3. 생명의 길은 고생과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포기했습니다(창 12:1-2).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계 2:10). 잘못한 것도 없이 핍박을 당합니다(마 5:10-11). 때로는 죽음도 찾아옵니다(계 2:13). 왜 편하고 쉬운 길을 옆에 놓아두고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힘들고, 고생스럽고, 불편해도 참고 바른 길을 택하여 가야지 우선 당장 편하고 쉽게 살자고 멸망의 길을 택하여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룻을 보십시오).
▶ 만일 예수님이 쉽고 편안한 것을 택하셨다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생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피하려 하셨다면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자원하여 감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나 베드로 그 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꺼이 고생과 불편을 감수하려고 하였기에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갖은 고생을 감수하였습니다. 때로 죄도 없이 옥에 갇히고 붙잡혀 매를 맞기도 했으며 때로 굶고 추위에 떨고 오해받고 쫓겨 다니기도 했으며 심지어 복음전하다가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도 누가 그들에게 세상 부귀영화를 버리라고 했는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그 길을 택하였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건만 사지(死地)를 택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자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어떤 믿음에 대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믿음 그 자체를 증거로 삼았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금보다 귀한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히 11:13-19 /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 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아 제단 위에서 그를 죽여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18)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삭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퍼져 나가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하였습니다. 19) 만일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죽을 운명에 놓여 있던 이삭이 살아 있는 그대로 다시 아브라함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대충 믿기를 원하십니까? 철저하게 잘 믿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잘 믿으려면 먼저 고생과 불편을 감수할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욕 얻어먹는 것은 기본입니다. 잘못없이 매 맞을 각오, 가난한 각오, 자청하여 고생할 각오, 그리고 죽을 각오까지 하셔야 합니다.
▶ 편안하고 쉽게 믿는 길이 없습니까? 물론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문 앞에까지 교회 차가 가서 ‘제발 타시죠!’ 하여 모셔오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마치면, 다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 . 힘들고 어려운 교회 봉사는 하나도 안 해도 됩니다. 골치 아프게 제자 훈련받느라고 시간 빼앗기고 기도생활을 하느라고 잠 못 자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연히 예수 믿으라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권하였다가 무안당할 필요 없습니다. 욕 먹을 일, 비난 들을 일, 골치 아픈 일은 다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헌신도 없고 손해 볼 일도 없이 쉽게 예수 믿을 길이 원하기만 하면 널려 있습니다. 매 주일 예배드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약속 잡아 볼 일보고 시간 날 때만 가끔 늦은 시간에 잠간 얼굴을 비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고생 고생하여야 겨우 걸어갈 수 있습니다. 문을 들어서면서 겸손하게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쉽게들 믿던데 편하게 믿던데 왜 너만 별나게 믿느냐? 바쁘면 예배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고, 적당히 인생도 즐기며 눈치껏 최소한의 헌신과 헌금을 드리면 되지 너는 광신적으로 유별나게 믿어야 하느냐?” 이런 비난을 듣는 것이 좁은 길을 걷는 증거입니다. 욕먹어가면서, 조롱당하면서도, 기쁨으로 섬기고, 힘들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좁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하시니 그것뿐입니까? 오른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도 돌려대며, 5리를 가고자 한다면 10리까지 가주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주고 … . 예수님은 그것도 모자라 원수까지 사랑해 주며, 때로는 목숨을 다하여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시니 … . 그것도 모자라서 그렇게 하기를 기쁨으로 하라고 하시니 … . 그렇습니다. 영생의 길은 좁은 길을 걸으며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함으로 걷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모두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 삿갓조개는 엄청난 부착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위나 배 밑바닥에 붙은 삿갓조개는 뗄 수 없습니다. 억센 파도에 부딪쳐도 무서운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과학자들도 그 엄청난 부착력의 비밀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결심한 성도는 삿갓조개와 같습니다. 어떤 환란, 위협, 핍박과 고난도 그를 예수님에게서 뗄 수 없었음을 2천년 교회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 만일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하신 기업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면 어떠한 장애물에도 포기하거나 곁길로 가지 않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능히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험하여 힘들고 고통스럽고 외로워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소망을 갖고 계속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능히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 넓은 길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나 좁은 길은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지금 당장을 생각하면 넓은 문 넓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이나 미래 특히 천국을 바라를 내다보면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인생은 하루살이, 1년생이 아닙니다. 영원한 시간을 살도록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들고 불편이 따라오지만 그 결과는 영생이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 미켈란젤로가 로마 대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부터 예언자들 시대까지의 대작을 1508년부터 4년에 걸쳐 그렸습니다. 그는 본래 허리 병이 심하고 호흡장애가 있어 누워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엄청난 고역이었습니다. “왜 이런 불가능한 작품을 맡으셨습니까?” 하는 제자의 질문에 그는 “내 작품이 아닐세.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 명령일세.”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며 헌신적인 수고로 5백년간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는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가며 생명에 이르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값진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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