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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 순교성지와 순교자
어디선가 실려오는 향기 무명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순교성지 한티는 너무 맑고 아름답다. 한티는 대구 경북의 순교성지 가운데서도 특별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신앙선조들이 아름답게 살다가 거룩하게 순교했고 영원히 묻혀 있는 완벽한 성지이다. 무명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한티는 세월을 건너 뛰어 영원히 남을 천주교인들의 마음의 안식처이다.
병인박해 직전, 큰 교우촌 이뤄
한티에는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를 전후하여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임란 때나 신유박해(1801년) 때도 신자들은 모여들었다. 신자들이 낮에는 사기를 구어 생계를 연명하거나 옥바라지를 했고, 밤에는 인근 원당마을이나 신나무골로 성사를 보러 다녔다. 밤새워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옮겨다녔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축지법을 쓴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한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교우는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 도령(스테파노)이다. 이들은 경신박해를 피해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피난왔다가 이곳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 지금 이선이 엘리사벳은 신나무골로 옮겨져 안장돼 있다.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
한티에는 무명순교자가 가장 많이 묻혀있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로는 조 가를로와 그 가족, 그리고 서태순 베드로 정도이다. 조 가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풍양 조씨인데 천주교를 믿는다고 심한 문중 박해를 받아 고향 상주 구두실이에서 쫓겨났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한티로 들어온 조 가를로는 병인박해 때 부인(최 바르바라), 여동생(조 아기)과 함께 순교했다. 서태순 베드로는 증조부(서광수) 대부터 신자 집안이었다. 충주에 살다가 박해를 피해 형(서익순 요한)과 함께 강원도-문경새재-상주를 거쳐 조카(서상돈 아우구스티노, 국채보상운동 창시자)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으나 또다시 병인박해가 일자 문경 한실로 피난갔다. 서태순은 문경한실에서 붙잡혀 상주 진영에서 순교했는데, 서상돈과 함께 한티로 피난왔던 형 서익순이 시신을 거둬 한티에 안장했다.
먼저 죽이고, 나중에 보고하던 선참후계(先斬後啓)가 적용된 병인박해 기간 동안 한티 교우촌에서는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마을은 불태워졌다. 박해를 모면한 조영학 토마(조 가를로의 아들), 박만수 요셉 등이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공소 재건에 앞장섰다. 1967년 대구대교구 액션단체가 순례를 시작하면서 한티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높아졌고, 1980년대에는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이루어졌다. 피정의집(1991년), 영성관(2000년) 순례자의집(2004년)이 축복됐다.
십자가의 길로 속진의 때를 씻고
한티순교성지의 입구에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는 일상의 때를 씻어주는 영혼의 정화소이다. 14처 가운데는 미처 제대로 묻을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돌더미 사이에 겨우 마련된 곳이 있나하면, 예전 한티에 숨어살던 교우들이 내다팔던 도자기를 굽던 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타야하는 곳도 있다. 십자가의 길을 뒤로,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야외제대에 서면 주님 앞에 한없이 겸손해지는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세상 영화가 뭐라고, 작은 일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며 사는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는 한티순교성지에서는 지금도 당시에 굽던 도자기 조각들이 여기 저기 늘려있다. 돌하나, 풀 한포기, 나뭇가지 하나에도 순교자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한티순교성지는 곳곳에 기도와 묵상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있으며, 산책로도 매우 아름답다.
하늘 향해 열려있는 야외제대
순례를 마친 신자들이 막 돌아가기 시작하는 오후 나절, 적막이 그 자락을 펴려고 할 즈음 한티순교성지 제일 안쪽에 자리잡은 피정의 집 앞에 서 있노라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특히 9월 순교성월에 한티를 찾아가면 아직 덜 피어서 수줍은 은자주빛 물결로 일렁이는 억새의 바다 너머 야외제대가 보이고, 그 너머로 정성들여 복원해놓은 옛 공소와 신자촌이 보인다. 사랑과 희생 밖에 모르던 착한 목자를 향해 기도하던 어린 양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 가을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야외 돌제대 위로 어디선가 향기가 묻어온다. 한티 곳곳에서 보라색 말간 꽃을 피우고 있는 벌개미취 향인가? 아님 잔디와 함께 피어난 청명한 달개비나 수줍은 여뀌꽃내인가?
신앙 선조들의 행복한 시공간
어쩌면 들꽃 혹은 산벚나무에도 머무는 그분의 향기일까?
한티에 머물면 세파에 찌들려 울퉁불퉁하던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으며 순해진다. 바람을 따라 피정의 집에서 조금 내려가면 요즘 보기 힘든 자그마한 초가집들이 나온다. 바로 옛 교우촌이다. 수혈주거지 같은 움막도 있고, 단칸 집도 있다. 한티가 본격 성지로 개발되기 전까지 교우촌을 이루던 옛 공소는 세상에 재물을 쌓은 부자들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신앙선조들에게는 지상낙원이었다. 천주교가 박해당하던 어두운 시절, 맘 졸이며 살면서도 이웃과 함께 맘껏 기도를 올릴 수 있던 한티는 순교선조들의 행복한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가. 한티순교성지 약사
1801년 신유박해 - 서울 경기 충청 지방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청송, 영양, 안동 등으로 피난 신자촌 형성.
1815-1827년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때에 대구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감옥과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정 한티로 이주해 옴.
1860년대
1860년 경신 박해 - 직접적인 한티의 최초 박해.한티로 피난 왔던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스테파노 한티에서 순교. 김현상 요아킴 가족 대구로 이주
1862년 40명 가량 성사를 받음(장 베르뇌 주교 보고서)
1866년 병인박해 - 김응진 가롤로(김현상 차남) 가정, 서상돈 아오스딩 및 서인순 시몬, 노곡동 송씨 가족,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 한티로 피난
1867년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 한티에 안장.서태순의 형 서인순 시몬과 이 알로이시오 대구로 내려가다 체포 서울로 압송, 좌포도청에서 참수.
1868년 봄, 공소 회장 조가롤로 및 배교하지 않는 신자들 한티마을 현장에서 순교.
1882-1883년 김보록 신부 한티에서 성사 집행(신자수 39명, 고백성사 20명, 영성체 19명, 세례 3명, 혼배 1쌍).
1885년 대구 본당 설정(신나무골, 김보록 신부 - 한티 방문) 대축일에 신나무골로 미사참례
1900년대
1900년 신자 수 80명 이상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부 한티 교우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떠남
1950년 한국전쟁 중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
1967년 9월 순교자성월에 대구대교구 액션 단체 주관으로 순례 시작
1983년 매월 마지막 주일 순교자 현양 미사 봉헌.순교 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및 조사 시작
1988년 5월 무명 순교자 묘 24기 확인(3기 이장, 합묘확인 2기)
1900~
1990년 2월:한티 순교 성지 피정의 집 착공
1991년 9월:무명 순교자 묘 9기 추가 확인(유명 4기, 무명 33기).한티 순교 성지 피정의 집 완공(9,29)
1995년 3월:성지 안내소 완공
1997년 영성관 착공
2000년 대구대교구 대희년 전대사 순례성지로 지정.영성관 축성(2,17).순교자 성월 지구별 한티순교성지 순례미사 봉헌
2004년 4월 13일 순례자의 집 기공
2004년 12월 10일 순례자의 집 축복
나. 박해시대 순교자.
1. 경상도지방 신앙공동체 형성과 신유박해(1801)
초대 한국 천주교신자들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박해가 없는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했다. 황사영 『백서』와 「사학 죄인 사영등 추안」,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말하는 황일광, 김종한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신자들이 경상도로 이주했던 때는 1798년 전후이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더욱 늘어났다.
1800년 순조純祖 즉위년에는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발생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정조가 승하하고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섭정이 시작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다. 노론 벽파였던 정순왕후는 실권을 잡자 남인 시파를 탄압하려는 의도로 남인계 서학자 들을 구속했다. 서학을 금하는 포고가 발표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실시돼 천주교에 대한 수색이 엄격해졌다. 이 엄중한 감시 하에서 천주교 서적과 성물이 든 정약종의 서책함이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남인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붙잡혔다.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강완숙 등은 참수당하고, 권철신 등은 옥사했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됐다. 이 박해는 지방으로까지 번져 이존창이 순교하고, 주문모 신부가 자수해 군문효수형을 당했다. 백서사건 이후에는 박해가 전국으로 확산돼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1801년 말 「토사교문討邪敎文」의 반포 이후 끝났으나 이 박해로 천주교신자 400여 명이 유배되고, 100여 명이 처형돼 초창기 한국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신자들의 지역 분포 양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신자들은 서울,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이 박해로 인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다. 특히 신유박해가 영남지방에까지 미치지 않자 경상도지역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안전지대로 인식됐고, 박해를 피해 경상도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도 점차 증가됐다.
또한 신유박해 때문에 소위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이 전국 여러 지방으로 유배流配 또는 도배徒配됐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천주교를 전국적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1811년 작성된 『사학징의』에 의하면 신유박해 때 경상도 지방에 유배된 이들은 71명이다.
2. 을해박해(1815)
신유박해로 수많은 지도자와 신자들을 잃은 한국 교회는 이여진(요한, ?-1830), 신태보(申太甫베드로, 1768-1839),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요한), 홍낙민(洪樂敏 루가, 1740-1801)의 아들인 홍우송 등에 의한 교회 재건 운동이 시작되고, 성직자의 영입을 위해 1811년 말 이여진과 그 일행은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보내는 두 개의 서한을 가지고 북경에 갔다. 이 서한은 1814년 라틴어로 번역되어 교황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과 중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때문에 북경 주교는 이들의 청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1814년 전국적으로 수해와 기근이 심각했으며, 특히 영남지방이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전지수라는 배교자가 신자들을 밀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의 탐욕과 중앙의 지시도 없이 지방관의 자의로 1815년 경상도 북부지방과 강원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을해박해가 일어났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습격을 받은 곳은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이었다. 이곳에는 때마침 예수부활축일(음력 1815년 2월 22일)을 맞이해 각지에서 많은 교인들이 와 있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 고성운(高聖云 요셉, ?-1816), 고성대(高聖大 베드로, ?-1816),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 ?-1816),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1816),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 ?-1815),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 ?-1830), 안치룡(安致龍, ?-1815?) 등 40명이 경주 진영으로 압송됐다.
며칠 뒤 포졸들은 청송 진보 머루산 교우촌에서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 1782-1815), 이시임(李時壬 안나, 1782-1816)과 그의 아들 박종악(1813-1816), 김흥금(金興金, 1765-1815), 김장복(金長福,1797-1815) 등 24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안동진영으로 압송하고, 3월에는 일월산에 있던 영양의 곧은정을, 4월 23일에는 우련밭 교우촌을 급습하여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1816),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1765-1816) 등 8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안동진영으로 압송했다. 이리하여 경상북도 동북부지방 신자들 중 72명이 체포되고, 그 중 34명이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1815년 6월 18일 경상감사 이존수가 신문 결과를 조정에 보고했다. 최봉한, 김윤덕, 김악지(金岳只, ?-1815), 김진성(金振聲, ?-1815)은 이때 이미 옥사했으며, 나이 어린 김문악은 별도로 범한 바가 없으므로 석방하고, 나이가 많고 배교한 방만동과 어린아이 박종악을 제외한 나머지 27명에 대해 사형을 품신했다.
같은 해 7월 7일 조정에서는 배교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사형하라는 회시를 보내어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선복 등 11명이 배교했고, 신광채(申光采, ?-1815), 심경(沈瓊, ?-1815), 김광억(金光億, ?-1815), 박종악과 배교했던 방만동 등은 옥사했으며, 김종한, 김희성, 김시우, 김화춘(야고보, ?-1816), 고성대, 고성운, 이시임, 서석봉, 구성열, 안치룡, 김광복, 김흥금, 김장복 등 13명은 1815년 10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두 차례 더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형 확정 판결 전에 안치룡, 서석봉, 김시우, 김흥금, 김장복, 김광복 등 6명이 옥사했다. 결국 1816년 10월 21일 김종한, 고성운, 고성대, 김희성, 김화춘, 구성열, 이시임 등 7명의 사형이 결정되고, 그해 11월 1일 경상감영의 사형장인 아미산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3. 정해박해(1827)
을해박해 이후 1816년경부터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이 추진됐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이 성직자 영입을 위해 1822년경까지 9차례 북경을 왕래했다. 1821년경부터는 현석문(玄錫文 가를로, 1797-1846), 이경언(李景彦 바오로, 1790-1827) 등도 성직자 영입을 위해 함께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1824년 말부터는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1791-1839), 1826년경부터는 조신철(趙信喆 가를로, 1795-1839) 등이 참여했다. 1824년말에서 1825년 사이에 유진길 등이 교황에게 보낼 서한을 작성했다. 이 편지에는 성직자의 파견과 한국 교회를 위한 지속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827년 2월경 전라도 곡성 덕실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기고, 천주교신자에 대한 밀고가 발생해 정해박해가 일어났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박해는 3월에는 주로 전라도 북부에 한정되다가 신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다른 도의 신자들 이름도 드러나 박해가 다른지방으로까지 번졌다. 경상도에서는 그해 4월 22일 상주 잣골에 살고 있던 신태보가 체포돼 전주로 압송되고, 상주 멍에목에서 박경화(바오로, 1757-1827),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 1792-1839) 부자, 상주 앵무동에서는 김사건(金士健 안드레아, 1794-1839)과 안군심(安君心 리카르도, 1774-1835), 봉화 곰직이에서는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 1776-1839)이 체포되고, 5월에는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 1761-1828)이 안동진영에 나가 자수했다. 이외에도 여러 명이 더 붙잡혀 경상도에서는 31명의 신자가 체포됐다. 이들 중 25명은 나이가 어리거나 교리를 잘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풀려나거나 귀양을 가고, 신앙을 증거한 박경화 등 6명은 경상감영의 감옥에 갇혔다. 그 후 1827년 11월 15일 박경화, 12월 3일 김세박, 1835년에 안군심은 사형을 기다리다가 옥사했다. 박사의, 이재행, 김사건은 기해박해 때인 1839년 4월 14일(음) 대구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당했다.
4. 정해박해 이후 상황
정해박해 이전부터 시작된 조선 신자들의 청원과 북경 주교의 협력으로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서한을 보내 조선 포교지를 맡아주도록 제의했다. 전교회의 사정으로 이 제의가 곧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브뤼기에르(Barthélemy Bruiguiére, 蘇, 1792-1835) 샴Siam대목구 부주교가 조선 선교사로 자원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열게 됐다.
조선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창설된 지 46년 만인 1831년 9월 9일, 교황청은 조선을 교황 대목구代牧區로 설정했다. 동시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교황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 조선대목구를 북경 주교로부터 독립시켰다. 한국교회는 비로소 교황대목구라는 교계제도에 의해 지탱되고 확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본국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로 갔지만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1835년 말 만주의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개척한 입국로를 통해 1836년 초 모방(Pierre Philbert Maubant, 1803-1939)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이때 조선에는 그보다 1년 전에 입국해 있던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1795-1854) 신부가 있었다. 모방 신부는 입국한 지 1년 후인 1836년 말에 여항덕 신부를 중국으로 귀환시키고,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최방제(崔方齊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838), 김대건(金大健 안드레아, 1821- 1846)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어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이 때 이들을 국경까지 인도한 조선 신자들을 통해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 1803-1839) 신부가 입국했고, 1837년 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Laurent Marie Joseph Imbert, 1797-1839) 주교도 의주 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1838년 초 조선에서는 프랑스 선교사 3명이 활약했다. 이들 선교사들은 전국 68개 지역에 걸쳐 확산된 신자들을 방문해 성사를 집행했으며, 회장이나 신자 대표를 선임함으로써 교회가 조직력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그 동안 영입된 선교사들은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따르면 전국에서 신자 54명이 참수당하고 60여 명이 옥사했다. 특히 이 시기에 1827년 정해박해 때 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 동안 수감 중이던 이재행, 박사의, 김사건 등 3명이 대구에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 1796-1839) 외 4명이 전주에서 각각 참수되어 순교했다. 전라도 고산 등지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돼 박춘하 외 20여 명이 처형되었다. 기해박해는 전국적인 박해였으며, 특히 경기도와 서울지역이 가장 심했다.
기해박해 이후 1845년 말,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Jean Joseph Ferréol, 1808-1853) 주교가 김대건 신부와 다블뤼 신부를 동행, 조선에 들어오면서 한국 교회는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1846년 초 페레올 주교는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해상로를 개척하기 위해 김대건 신부를 황해도 연안으로 파견했으나 그곳에서 뜻밖의 사고로 김대건 신부는 지방 관헌에게 체포되면서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신자들의 체포에 그쳤으므로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 선교사들은 지방으로 피난하는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 신앙을 지탱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특히 철종의 천주교 관용정책으로 인하여 전국 각 지역의 공소가 이 시기에 많이 형성됐고, 한국 천주교회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졌다.
5. 경신박해(1860)와 그 이후 상황
기해박해 이후 뜸하던 천주교 박해가 1859년 12월 말부터 이듬해인 1860년 8월까지 경상도 지역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 박해는 새 좌우 포도대장 신명순, 임태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포도대장에 의한 박해가 조선 정부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그들은 1860년 5월 10일 파면됐다. 이어 허계, 신관호가 새 좌우 포도대장으로 임명됐다. 이 포도대장들은 이 일을 소문 없이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해 음력 8월 7일 철종의 명령으로 신자를 모두 풀어줌으로써 9개월 간의 경신박해는 끝났다. 이 박해 동안 최양업 신부는 간월골 죽림에 장기간 숨어있었다. 이곳에서 최양업 신부가 쓴 19번째 편지에 경신박해 때 경상도지방 신자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한편 언양에 살고 있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1821-1868)도 포졸들에게 체포돼 50일 동안 언양 옥에 갇힌 채 문초를 받다가 경주진영으로 이송됐다. 이송된 그는 영장의 심문을 받고 곤장 20대를 맞았으며, 큰칼을 쓰고 8개월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명에 의해 석방됐다.
충주 장원에서 대구로 이사와 살던 서태순(徐泰淳 베드로, 1823-1867)도 1860년에 잡혀 대구감영으로 끌려간 뒤 영장의 심문에 주뢰周牢와 주장朱杖, 곤장棍杖으로 무수히 맞아 팔과 다리가 끊어졌다. 그는 6개월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배교하는 말을 하고 돈을 바쳐서 풀려났다. 또한 한티에서 1860년 2월 8일 이선이(엘리사벳, ?-1861)와 아들 배도령(스테파노, ?-1861)이 잡혀 현장에서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지며 시신은 후에 신나무골에 안장되었다. 한티에 살고 있던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전 바오로 형제는 난을 피해 달비골로 피신했다. 그 뒤 형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건학 교우촌으로 옮겨 살았다.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지방의 경신박해로 인하여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졌으며,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이들은 냉담하게 됐다고 전한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의 많은 외인들 중에서 예비신자들이 속출하였으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이번 박해로 인해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중략>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졌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이들은 실망하며,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냉담자로 보입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경신박해로 인해 수많은 교우촌의 파괴, 교우들의 신앙에 대한 불안과 불신, 외인에 대한 복음 전파의 어려움 등을 전하고 있다. 이런 평가를 종합해보면 경신박해는 비록 좌우 포도대장이 국가의 승인 없이 일으킨 박해였지만 전교에 어려움을 주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고, 경상도지방에 형성된 신앙공동의 구성원들에게 신앙에 어려움을 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신박해 이후 조선 교회가 다소 침체를 겪는 동안 1861년 3월 청나라 산동 지방을 떠난 배로, 1859년과 1860년 두 번에 걸쳐 입국하려다가 실패한 랑드르(Jean Marie Pierre Eliacin Landre, 洪, 1828- 1863) 신부, 조안노(Pierre Marie Joanno, 吳, 1832-1863) 신부, 리델(Félix Clair Ridel, 李明福, 1830-1884)신부, 깔레(Adolphe Nicolas Calais, 姜, 1833-1884) 신부 등 4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 교회가 경신박해를 극복하고, 2명의 주교와 7명의 프랑스 신부, 1명의 조선 신부를 모시고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려 할 때인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가 장티푸스와 과로로 40세의 나이에 선종했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조선 사람으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는 12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가장 힘든 산골지역에서 헌신적으로 사목했고, 서양말로 된 교리책, 기도서 등을 틈틈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했으며, 천주가사를 지어 교우들이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유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제천 배론에 안장됐다.
6. 병인박해(1866-1873)
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했던 김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1857년 8월 4일 70세로 사망했다. 철종의 장인 김문근마저 1863년 11월 사망하자 조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세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달 뒤인 12월 8일 철종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자 후사가 없는 것을 기회로 조 대왕대비는 앞장서서 홍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明福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1863년 12월 13일, 제26대 왕으로 즉위한 고종은 그때 나이 12세였다. 당시 정치는 표면상으로는 조 대비가 하는 것 같았지만, 모든 실권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에게 있었다. 고종이 즉위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안동 김씨의 세력은 깨끗이 밀려났다. 그 대신 풍양 조씨 일파가 대궐 안에서 활개를 쳤다. 이들의 득세는 천주교의 앞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후 14년에 걸쳐 안동 김씨 세력 밑에서는 전국적인 천주교 박해가 거의 없었다. 전교 활동도 활성화됐다.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12월에는 베르뇌(Simon François Berneux, 張敬一, 1814-1866)주교를 포함해 8명의 성직자가 조선 교회에서 활동했으며, 신자는 2만3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 10년은 천주교에 결정적인 철퇴가 내려진 시기였다. 대원군은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남하정책을 계속 추진하자 베르뇌 주교의 교섭에 의해 프랑스의 도움으로 러시아 세력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866년 초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가 그의 계획 실행에 협력하기 어렵게 되자 천주교신자 탄압을 결심, 선교사 체포령을 내렸다. 이 선교사 체포령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오페르트의 남연군南延君묘 도굴사건,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거치면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는 비극을 낳았으며,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종식됐다. 조선 천주교회는 1866년부터 1873년에 이르는 병인박해 기간 동안 사상 최대의 시련을 겪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 천주교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는 사라졌다. 천주교와 관련돼 치죄治罪된 전직 관리들도 복권됐다. 1874년 5월 20일 고종은 특명을 내려 천주교신자들에게 많은 돈을 대준 정언正言이었던 조철증(趙喆增, 1827-1868) 등의 죄를 사면했다. 고종의 이 결정에 대해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홍문관 등의 여러 관장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그들의 복권을 강력하게 명했다. 그러나 고종 집정 이후에도 외교조약이 맺어지는 1880년대 후반까지는 전국에서 사사로운 박해는 계속됐다. 신자들은 이후 30여 년 동안 박해자들과 대결하거나 피신해 살면서 믿음을 지켜야 했다.
병인년에 시작된 대박해를 거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전국적으로 8천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순교자는 경기도 74명, 충청도 336명, 황해도 25명, 전라도 33명, 경상도 43명, 함경도 18명, 평안도 1명, 강원도 1명 등이다.
또한 대구와 신나무골 신자들이 한티에 피신해 있다가 1868년 40여 명이 거기에서 순교했다. 한티에 살다가 순교한 이들은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다. 조 가롤로와 그의 가족 정도가 이름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에는 순교자 877명이 수록돼 있다.
이들 중 24위는 1968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됐다. 영호남지방에서 순교한 조윤호, 정원지, 한재권, 이명서, 손선지, 조화서, 정문호는 전주교구, 이윤일은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이윤일 성인은 충청도 홍주에서 출생하여 상주 갈골을 거쳐 문경 여우목에서 공소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11월 18일 문경관아에 체포되어 상주진영에서 문초를 받고,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양력) 관덕당 형장에서 52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했다. 이윤일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대구 날뫼에서 경기도 용인 묵리로, 다시 미리내성지로 이장되었다가 1986년 12월 21일 대구로 모셔졌다.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1987년 1월 21일 성인유해를 성모당에 안치하고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선포했다. 그후 1991년 1월 20일 성인의 유해는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에 봉안됐다.
다. 박해시대 교우촌
1. 신유박해 이후 경상도지역 교우촌
조선에 교우촌은 신유박해 이전인 1790년대부터 형성됐다. 1790년 북경 주교로부터 조상제사 금지령이 내린 뒤 천주교신자들은 향촌사회로부터 친척이나 가족의 사사로운 박해를 받음으로써 고향을 떠나 낯선 산간지방으로 숨어들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상도지방의 교우촌은 비교적 박해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알려진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보면 이미 경기, 충청, 전라도 세 곳과 경상, 강원도지방에서 신앙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유박해 이후 경상도지방에는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비교적 박해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경상도지방의 산골로 숨어들어 살기 시작했고, 박해로 유배된 이들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연고지를 버리고, 유배지로 함께 가서 살면서 그곳에 신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동네를 형성하게 됐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교우촌은 태백산, 소백산, 전주, 고산, 무장, 예천, 영광 등이다. 경상도에서는 진보의 머루산, 청송의 노래산이 대표적인 교우촌이다. 한편 신유박해로 인해 경상도지방으로 71명이 유배됐다.
2.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시기 교우촌
신유박해 이후부터 을해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경상도 지방으로 많은 신자들이 이주해 교우촌을 형성했다. 을해박해가 일어났던 시기에 영호남지방에는 태백산, 소백산, 전주, 고산, 무장, 예천, 영광에 이어 울진, 청송, 진보, 상주, 영양, 안동 등에 교우촌이 있었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영남지역의 교우촌은 태백산, 소백산, 순흥, 봉화, 울진, 예천, 상주, 안동, 영양, 청송, 진보, 대구, 안의, 함안, 진주, 고성 등 16개 지역이다.
3. 1860년대 영호남지방 공소
1849년 12월 말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선종할 때까지 11년 6개월 동안 서양 선교사들이 순방할 수 없는 어려운 지역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이었으나, 나중에는 다블뤼 신부가 충청도 일부를, 1857년 페롱(Stamisalas Féron, 權, 1827-1903) 신부가 강원도지역과 경상도 북부지역을 담당하게 됐다. 당시 최양업 신부가 관할한 교우촌은 127개에 달하며 그의 편지에 기록된 것은 안곡, 죽림, 간월 등이다.
최양업 신부 선종 이후에는 리델 신부가 영호남지역의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1861년 6월 10일 입국하여 1870년 6월 5일 제6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주교가 제작한 지도에 의하면 1860년대 전국 153개 지역에 걸쳐 공소가 조성됐다.
4. 1880년대 영호남지방 공소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1868년 4월 27일 제6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됐다. 1877년 말 리델 주교가 두세(Eugéne Camille 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와 로베르 신부를 동행해 입국했으나 곧 체포돼 중국으로 추방됐다. 리델 주교가 조선에 돌아올 수 없게 되자 블랑(Jean Marie Gustave Blane, 白圭三, 1844-1890) 신부가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1880년 말 입국한 뮈텔 신부와 리우빌(Lucien Nicolas Anatole Liouville, 柳達榮, 1855-1898) 신부는 블랑 주교를 도와서 박해로 황폐해진 조선 교회의 재건을 서둘렀다. 선교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교우촌이 정착되고, 계속된 박해에도 공소는 1860년대보다 22개 지역이 더 늘어났다.
1878년 1월부터 황해도 지방에서 사목활동을 해오던 로베르 신부는 1881년에는 강원도에서, 1882년 초에는 경기도에서 선교하다가 1882년 말부터 경상도지방을 담당, 1883년부터 이 지역에 있는 공소를 방문했다. 로베르 신부는 1882-1883년 사목보고서(1883년 5월 2일 작성)에서 그의 사목 지역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23개 지역 43개 공소이며, 그 관할 구역에 2천945명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밝혔다. 로베르 신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1884년에는 그의 사목 지역에 1천772명의 고해성사자, 215명의 성인 영세자, 384명의 예비신자가 있었다. 리우빌 신부가 담당한 전라도 지역에는 1천776명의 고해성사자와 40여 명의 성인 영세자가 있었다.
라. 한티교우촌 순교자
1. 한티 교우촌의 형성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자리한 한티는 서쪽 가산(901m)과 남동쪽 주봉인 팔공산(1,192m)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산골은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가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때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신자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하여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요아킴) 가정이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 깊은 산골인 한티에 와서 살았다. 이렇게 처음에는 한두 집 모여들어 움막을 짓고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적은 수의 신자들이었으나 한티를 중심으로 인근의 서촌, 한밤, 원당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면서 점차 커지기 시작하여 1850년대 큰 교우촌이 되었다.
2. 경신박해와 한티교우촌
경신박해가 시작되자 신나무골, 어골 뿐 아니라 한티도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신나무골에서 한티 사기굴로 피신을 왔던 배손이 가족이 잡혀, 배손이는 배교하고, 아내 이선이와 장남 배 스테파노는 신앙을 증거한 후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한티에 살던 김현상 가족들도 대구로 가고, 어골의 이재영(고스마, 이장언 회장의 부친) 가정도 대구 부근의 송골(중리동)로 피신했다. 그러나 몇 달 후 경신박해가 잠잠해지자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에 대하여 베르뇌 주교는 1862년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여 명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성무집행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현상 가정이 대구로 나감에 따라 상주 구두실이 고향인 조 가롤로 가정이 한티의 중심이 되었다. 신자들은 조 가롤로 집에 모여 주일을 지냈다. 경신박해 때 대구로 간 김현상 후손들은 대구 읍내 첫 신자 가정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 교회 창설에 큰 공로를 세웠다.
3.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모자(母子)
이선이 엘리사벳(李先伊)은 칠곡에 사는 배손이(배정모)와 결혼하여 딸 하나와 아들 스테파노(본명 미상), 용철, 용덕을 낳았다. 그녀는 경신박해가 발발하기 전까지 남편을 따라 칠곡 골바실(국우동)에 살았고, 이 시기에 입교한 듯하다.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관아가 있는 칠곡읍은 감시가 심했다. 그래서 박해를 피하여 신나무골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여부재를 넘어 학명동(동명) 흑다리를 거쳐 팔공산 중턱 한티로 피난하였다. 당시 딸은 출가한 상태였다. 한티 사기굴에 피신해 있던 이들은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졸들이 심문을 하자 남편 배손이는 배교하였고, 이선이(42세)와 16세의 배도령은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고 하였다. 포졸들이 웃옷을 벗겨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매질을 하였다. 혀가 빠질 정도로 매질을 하였음에도 이들은 신앙을 지켰다. 결국 포졸들은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랐다. 그 때를 1860년 2월 29일(음력 2월 8일)로 추정하고 있다. 용철(11살)과 용덕(4세)은 나이가 어린 탓에 심문을 당하지 않았다. 이선이와 배도령의 시신을 배손이가 한티 뒷산에 묻었다. 얼마 후 이선이의 시신은 칠곡읍 아양동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1984년 7월 7일 이선이의 유해를 신나무골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목이 잘려진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7월 8일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 이선이 묘지 이장식과 순교자 현양비 축성이 있었고, 그 때부터 그녀를 엘리사벳으로 불렀다. 또 그 묘의 위치를 정확히 찾지 못한 배도령은 스테파노라고 불렀다.
(1961년 이선이 엘리사벳가문의 후손 배태근의 구술 증언).
4. 병인박해와 한티교우촌 상황
병인박해(1866)가 일어나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있는 교우촌들은 유린되었고, 8천여 명 이상이 순교했다. 이러한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 리텔 신부는 부활 판공을 주기 위해 대구에 와 있었다. 신부를 통해 박해 소식을 알게 된 대구 읍내와 신나무골 등에 있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문경 한실과 한티로 피난을 갔다. 대구의 서상돈 집안이 이 시기에 한티로 이사를 했다. 대구의 김응진 가롤로 가정(김현상의 후손), 대구 부근 노곡동에 살던 송씨 가정을 비롯하여 신나무골의 많은 신자 가정이 한티로 피난했다. 병인박해 때 한티에 살던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오히려 대구 읍내로 피신했다. 1868년 시 외곽 동쪽 하양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대구로 돌아오던 중 고발하는 사람이 있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감옥에서 자신을 고발한 이를 만났으며, 며칠 동안 문초를 받았지만 오히려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때 감옥에서 서태순의 형인 서인순(시몬)을 만났으며,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도청에 감금되어 있다가 교살형으로 순교했다. 그때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31세였다.
5.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
경신박해가 일어날 때 서태순은 대구지역(혹은 한티)에 살고 있었다. 서태순은 서치보徐致輔의 셋째아들로 1823년 충청도 청풍에서 태어났다. 기해박해 무렵 가족들과 함께 여우목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40년 부친 서치보가 선종하게 되자, 17세 된 서태순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풍기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서태순은 풍기에서 김 데레사와 혼인한 후 충주 중원으로 이사했다. 박해가 소강상태에 이른 1859년 서태순의 가족과 형제들 가족은 한티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10월 13일경(음) 잡혔고, 경상감영의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심문을 받았다. 그러다가 결국 음력 12월 8-9일경 배교하고 돈을 바치고 나서 풀려나 몇 년을 냉담했다. 그 후 지난날의 잘못을 통회하고 열심을 회복하여 계명을 지켰고, 순교를 간절히 원하였다. 이 후 서태순의 가족들은 대구를 떠나 문경 한실의 교우촌으로 이사하였다. 서태순은 한실에서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서 교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조카 서상돈과 그의 가족들에 의해 한티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6. 무진박해와 한티순교자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박해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이 시행될 정도로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1868년경 봄 한티에 서울포졸과 가산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을 체포했다. 배교하는 자는 놓아주었고, 공소회장 조 가롤로와 아내 최 바르바라와 동생 조아기 등 신앙을 지킨 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도망가는 자들은 쫓아가서 죽였다. 이 때 순교자는 40여 명이었다. 포졸들과 병사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돌 더미에 묻힌 이도 있고. 밭에 묻힌 이도 있고, 산등성이에 묻힌 이도 있다. 후에 발굴 작업을 통해 총 37기의 무덤이 있는 것이 확인 되었는데 한 무덤에 여러 명이 합장된 경우도 있다.
7. 공소회장 조가롤로와 그의 가족
조 가롤로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풍양 조씨인데 천주교를 믿는다고 박해를 받아 고향인 상주 구두실에서 쫓겨났다. 이로 아내 최바르바라와 동생 조아기와 함께 고향을 떠나 3년 동안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한티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숯을 구워 생활하면서 아들 영학과 영구를 낳고 살았다. 경신박해 때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대구로 나감에 따라 조 가롤로가 공소회장이 되어 그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며 주일을 지켰다. 무진년 봄에 들이닥친 병사들의 칼에 조가롤로와 부인 최 바르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는 목이 잘렸다. 영학과 영구 형제는 그 와중에 뒷산에 숨어 있다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혔있다. 그리고 이들이 쓰던 묵주와 고상도 함께 묻었다고 한다.
8. 공소의 재건
병인박해 후에 한티에 신자들이 다시 모여 살았다. 조 가롤로 회장의 아들 조영학 토마, 살아남은 박만수 요셉, 군위에서 한티로 이사 온 김재윤 플로리아노, 김윤하 안드레아, 박기인 루도비코, 한돌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 조규성 프란치스코 가정이 들어왔다. 이들을 중심으로 순교자들이 죽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을을 재건했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바람맞이 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루었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 회장으로 추대했으며 이 후 그들은 순교자의 묘를 벌초하는 등 돌보고 관리했다.
1882-1883년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했다. 이때 신자 39명, 고해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로베르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어 로베르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 참례하러 갔다. 이후 한티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신자가 80여 명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선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9. 대구대목구 설정(1911)에서 오늘까지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기 전인 을해박해(1815)를 즈음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는 한티교우촌의 역사는 오늘까지 200년의 세월이 지났다. 숱한 박해의 격랑 속에서도 조선대목구는 성장하여 80주년이 된 1911년,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 되었다. 대구대목구의 초대 안세화 드망즈 주교 때부터 현재 제10대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에 이르기까지 대구대교구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한티와 신나무골은 그 초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해박해가 발생되기 전 순회전교를 하였던 샤스탕 신부를 시작으로 최양업 신부, 다블뤼주교, 리델 신부 등이 경상도 지역을 맡았다. 김보록 신부는 1885년 대구지역 첫 본당으로 신나무골에 정착하기 그 전부터 한티를 방문하였고, 1895년에 가실본당이 설정이 된 후로 가실성당의 신부가 한티를 왔다. 대구대목구 설정 후 1927년부터는 비산본당의 관할이었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1957년부터는 칠곡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1967년 9월 순교자성월부터는 대구대교구 액션단체 주관으로 공적 순례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1980년대에 들어 본격적인 성지조성을 위한 부지매입과 순교자묘역확인 작업을 거친 후 1991년 피정의집이 개관되었고, 2000년에는 영성관이, 2004년에는 순례자성당이 축성되었다. 1995년부터 2015년까지 20년간 대구관구 신학생들이 한티로 입학하였으며, 지금도 사제품을 앞둔 신학생들의 30일 피정이 이어지고 있다. 피정의집 개관이래 30여 년 동안 매년 사제피정과 제 단체 피정 및 연수가 진행되고 있으며 해마다 전국의 순례자들은 물론 해외의 순례자들도 찾아와 영적인 힘을 얻어가고 있다. 박해시대 한티의 교우들이 신나무골을 오가며 걸었던 한티가는 길이 열림으로써 도보순례자들의 발길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10. 재조명한 한티순교자와 교우촌
1)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전국에 많은 성지가 있으나 순교자들이 실제로 살고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그 자리에 묻힌 후 지금까지 무덤이 그대로 전해오는 성지는 잘 없다.
그런 면에서 한티는 특별한 성지라 할 수 있겠다.
2) 한티는 200년 동안 신앙의 숨결이 이어온 땅이기도 하다.
박해가 심하면 교우들이 떠남으로써 교우촌은 사라지게 되나,
한티는 박해가 시작되거나 끝나고 나면 또 다시 교우들이 돌아와 지금까지 신앙의 숨결이 이어온 곳이다.
3) 한티는 박해시대의 심산 교우촌이다.
해발 600미터에 자리한 한티는 지금도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중으로 주위에 다른 민가를 찾을 수 없는 외딴 곳이다.
4) 한티는 순교자와 교우촌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와 교우촌은 떼려야 뗄 수 없다. 교우촌은 순교자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한티는 교우촌을 중심으로 37기 순교자의 무덤이 십만여 평의 산에 병풍처럼 들러 싸여 있는 곳이다.
5) 한티는 박해시대의 이름 없는 순교자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박해시대에 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대부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무명 순교자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고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6) 마지막으로 한티가는길은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을 배우는 곳이다.
지난 200년 동안 이 길을 오고 갔던 신앙 선조들이 하늘에서 이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빌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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