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번에는 성왕의 위기 극복과 북위 6진의 난에 대해 살펴보았지요. 이번 글에서는 북위 6진의 난과 백제의 외교활동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북위 6진의 난이 불러온 후폭풍
이렇게 6진의 난이란 사건이 북위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겸황문시랑 역도원을 파견하여 대사(大使)로 삼고, 육진(六鎭)을 위무하게 하였다. 당시 육진은 이미 모두 배반하였으므로 역도원은 결과적으로 가지 못하였다. (중략) 육진이 배반하게 되자, 원차는 마침내 대(代)에서 온 사람들을 기용하고 조서를 전달하여 그들을 위무하고 기쁘게 하였다.
『자치통감』 권 150 「남북조 양기 6 무제 보통 5년(서기 524년)」
② 북위 왕조 ‘태풍의 눈’ 이주영
이렇게 북위 입장에서는 패전 소식만 들려오는데 뜻밖의 승전보가 날아왔습니다. 바로 이주영이라는 인물이었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북)수용(秀容 산서성 삭주시)의 추장인 이주영이 이(반란군 지도자들인 걸복막우, 만우걸진)를 토벌하고 평정하였다. 이주영은 이주우건의 현손이다.
『자치통감』 권 150 「남북조 양기 6 무제 보통 5년(서기 524년)」
이주영의 고조인 이주우건이라는 인물은 한국사로 치자면 광개토태왕 때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만큼 나름대로 유서 있는 집안이었지요. 이 이주영이라는 인물은 얼핏 본다면 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동한 말기의 간신(폭군?) 동탁과 위치가 비슷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북위 왕조에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다만 이렇게만 말한다면 이주영이 상당히 딱해집니다. 이주영은 군사적 능력, 인격, 자제력, 정치적 감각 모든 면에서 동탁의 상위호환인 상당한 능력자였지요. 궁극적으로는 실패하는 인물이라 조조나 사마의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여하간 그가 그릇이 큰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주영은 신묘하고 지혜로우며 명확하게 결단하고, 무리들을 제어함이 엄정하였다. 당시에 사방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이주영은 몰래 큰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축목(畜牧)자재(資材)를 흩어서 날쌔고 용감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호걸들과 교분을 맺고 받아들였는데,…(후략).
『자치통감』 권 150 「남북조 양기 6 무제 보통 5년(서기 524년)」
③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를 취하는 한국 왕조들
중국 남북조의 정세가 어수선할 이 무렵에 한국 왕조들은 서로 간의 전쟁도 쉬면서 각자 움직임을 취합니다. 우선 백제부터 알아보지요. 성왕은 서기 524년 양(梁)나라와 국교를 더 긴밀히 하여 양 무제로부터 '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의 벼슬을 제공받았습니다. 원전을 살펴보지요.
2년에 양나라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지절(持節) 도독(都督) 백제제군사(百濟諸軍事) 수동장군(綏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6 「백제본기 제4 성왕(聖王) 2년(서기 524년)」
백제가 서기 524년 어느 때에 사신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양나라 북벌 이전인지 이후인지도 알 수 없지요. 다만 양나라 입장에서는 하등 불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정세가 유리한 상황에서 이웃 나라가 친선 사절을 보냈으니 양나라 입장에서는 어깨가 으쓱거려질 만했지요. 백제가 시점을 잘 고른 셈입니다.
백제가 외교활동을 하는 것과 달리, 신라 법흥왕은 소소하나마 국방에 집중합니다. 설령 그것이 고구려와의 거대한 국경분쟁이 아니라 해도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법흥왕(法興王) 11년 양(梁) 보통(普通) 6년(서기 524년) 처음으로 군주(軍主)를 설치하여 상주(上州)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4 「잡지 제3 지리(地理) 1(一) 신라(新羅) 상주」
11년(서기 524년) 가을 9월에 왕이 나아가 남쪽 변방의 새로 확장한 영토를 순행(巡幸)하였는데, 〔이때〕 가야국의 왕이 와서 만났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法興王) 11년 9월」
언급된 원전에서의 가야국이 어느 나라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남쪽 변방’이라는 말을 중시하여 금관가야로 보는 학자들도 있고, 서기 6세기 시점의 가야라는 표기가 보통 대가야 즉 반파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대가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요. 어떻든 법흥왕은 고구려와 전쟁을 하기보다는 ‘내실’을 기한 듯합니다.
여기서 고구려의 동향이 다소 주목됩니다. 서기 523년에 백제를 공격한 이후로 백성을 구휼하고 북위에 사신을 보낸 것 이후로는 서기 526년 음력 3월에 활동을 재개할 때까지 역사서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지요. 안장왕이 놀고먹었을 리는 만무하니 훗날의 행적으로 보아 백제에 대한 거대한 반격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훗날 시점에서 좀 더 상세히 살핀다면 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도독한부군지묘지명(大都督韓府君之墓誌銘)」(이하 한기(韓曁) 묘지명(墓誌銘)으로 표기합니다) 같은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그저 허송세월하지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지요. 백제로의 공세가 좌절되었을 때 안장왕은 남하를 자제하고 대신 상대적으로 허술해진 북위 쪽 진출을 꾀했던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북위 효창(孝昌) 년간(年間)(525~527)에 영주(營州) 지역이 고구려의 침구(侵寇)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한상이 고구려군에 의해 ‘요동’(고구려)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침구라는 말은 침입해서 노략질한다는 말이니 고구려의 공세가 있었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