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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미리내 성지
1) 미리내 기본
간략설명 은하수 별빛이 쏟아지는
도로주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 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미리내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 6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일생은 짧았다. 비록 2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지만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없는 신앙, 놀랄 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를 열 성상(星霜).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고국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대상(代償)하지 못할 재앙”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846년 9월 16일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복을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대건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 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년)는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 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묻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순교자 옆에 묻어달란 주교의 유언대로 김대건 신부 옆자리에 그를 안장했다.
그 무렵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하지 못한 한을 위로했다. 그리고 미리내 성지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선종해 김대건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로 설립되었다가 1896년 5월 20일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에 있는 성 요셉 성당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마르코 신부가 본당신자들과 함께 1906년 여름 건축을 시작해 1907년 초 자연석으로 건립하여 성 요셉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다. 그해에 강도영 신부는 성당 옆에 학교 건물을 건립하여 해성학원을 열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신자 자녀들에 대한 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해성학원은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36년 폐교되었다.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1976년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었고, 같은 해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하면서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정착하고 주차장 시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을 순차적으로 완공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 요셉 성당에서 경당까지 길 옆에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고,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종아리뼈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2층 전시장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들이 설치되어 박해의 아픔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그 후 103위 시성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었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는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성당 뒤편으로 해서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옮겨 설치되었다.
성지의 제일 위쪽인 미리내 언덕에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9월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경당 내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발 뼈 유해 일부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경당 앞마당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신부는 초대 미리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선종할 때까지 34년간 사목하며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를 단장하고 기념경당을 건립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거룩한 순교자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고, 최문식 신부는 한국교회 열아홉 번째 사제로 미리내 본당 3대 주임을 지냈다. 경당 밖 왼편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가 나란히 누워 있다.
미리내 성 요셉 성당 위 광장 중앙의 대형 십자가 왼편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겟세마니 동산을 꾸며 놓았다. 여기에는 피땀 흘리며 기도를 바치는 예수와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았다.
내려오는 길 오른쪽 등성이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와 성 이윤일 요한 천묘사적비가 있다. 1976년 순교자 현양사업을 진행하며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 17위를 이곳에 이장해 모셨다. 그 중에서 6월 24일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 21일 대구대교구로 이장해 이듬해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고자 1988년 9월 20일 미리내에 천묘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대구대교구는 성인의 유해를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나머지 16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 중에서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는 2013년 10월 22일 생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손골 성지로 이장해 현양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묻혀있는 12위는 모두 용인 내사면 대대4리의 목 없는 순교자 줄무덤에서 이장한 유해이다. 그동안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 하단에 자리했던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은 지속적인 이용이 어려워 2019년 5월 31일부터 수원교구 안성추모공원 내에 조성한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을 시작해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에 묘지 축복식을 거행했다.
2005년 10월 25일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가 수원교구로 이관되었다. 수원교구는 그동안 성지를 가꾸는데 수고해온 수도회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리내 성지를 성 김대건 신부의 영성과 믿음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갈 의지를 밝혔다. 2015년 4월 7일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23m x 5.5m, 최영철 바오로 작)을 제작 설치하고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7일)]
2) 미리내 성지의 진토
경기도 지역에서 유명한 교우촌으로는 미리내(안성군 양성면 미산리)가 있다. 그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로 '은하수'를 뜻하는데, 은이 공소에서 큰 산을 넘으면 닿게 된다.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성지로 잘 알려져 있는 미리내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00여 년 전인 1896년 5월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의 부임으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인박해의 순교자 이윤일(요한) 성인과 다른 무명 순교자들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되었으며, 김 신부의 모친 고 우루술라도 이곳에 묻혔다. 또 1853년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한 뒤 교회에서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김 신부 곁에 그의 무덤을 조성하였다.
현재 이곳 성지 입구 왼편에는 103위 시성 기념 성당이 건립되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1975년 10월 6일에 창립된 성모 성심 수녀회가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103위 성인 중에서 두 분의 유해가 있던 곳인 만큼 기념 성당이 건립될 만한 곳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가장 뒤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기념 경당, 입구 오른쪽 위에 있는 이윤일 성인의 무덤 자리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 그리고 작고 초라하지만 선조들의 신앙이 담겨 있는 미리내 성당을 둘러보지 않고 되돌아가는 신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무덤은 이곳 교우촌 신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오다가 1901년 5월 21일에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다시 경남의 밀양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1951년 서울 수복 후에는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리내에는 김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기념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이윤일(요한) 성인은 특이하게 미리내 성지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본래 충청도 홍주 출신인 그는 박해의 위협을 피해 경상도 상주 골짜기에 은거해 살던 중에 체포되어 1866년 12월 26일 대구 관덕정(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날뫼(대구시 비산동)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먹방이 교우촌(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1976년 미리내로, 1986년 대구로 이장되었다. 이중 먹방이 무덤은 '거꾸로 된 무덤'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이유는 성인의 가족들이 훗날 그 시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거꾸로 묻었기 때문이다.
이제 미리내에는 김대건과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자리가 빈 무덤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그들의 신앙과 함께 스며 있는 진토(塵土)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순례할 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순교 신심을 바탕으로 내일의 신앙을 다져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루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김대건 신부가 스승 신부에게 보낸 1846년의 옥중 서한)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3) 미리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탄생
김대건 신부 시성으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 명칭 변경
수원교구(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10월 22일 미리내 성지 내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의 명칭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으로 변경했다.
수원교구는 “1928년 본 경당이 지어질 당시 명칭은 ‘복자 기념 성당’이었으며, 여기에서 ‘복자’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김대건 사제가 ‘성인’으로 시성됨으로 인해 명칭을 변경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설립 당시부터 일부 특정 신자들을 위한 경당이 아닌 모든 신자들에게 개방된 성당이었으며, ‘순교자의 모후’를 주보 성인을 두고 봉헌식과 교회법적 성당 조건을 충족하는 축성식을 거행하였으므로 성당으로 변경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28년 건립됐다. 김대건 신부 묘소가 바로 앞에 있어 미리내 성지 순례의 절정이 되는 곳이다. 하얀색 벽면에 빨간 지붕을 얹은 아담한 크기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와 목관 일부분을 안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일, 이상도 기자]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기념 성당’ 본래 의미 되찾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서 명칭 변경
수원교구가 미리내성지에 자리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 명칭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으로 변경했다.
수원교구는 지난 10월 3일 열린 교구 국장회의를 통해 명칭 변경을 결정하고 10월 22일 공문을 발송해 명칭 변경에 관해 알렸다.
이번에 명칭이 변경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이하 김대건기념성당)은 1928년 미리내성지의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묘소 앞에 세워진 건물이다.
교구는 공문을 통해 “본 경당이 지어질 당시 명칭은 ‘복자 기념 성당’이었으며, 여기에서 ‘복자’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지칭하는 것”이라며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김대건 사제가 ‘성인’으로 시성됨으로 인해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며 명칭 변경의 근거를 제시했다.
또한 교구는 ‘성당’이라는 표현에 관해서 김대건기념성당이 “설립 당시부터 일부 특정 신자들을 위한 곳(경당)이 아닌, 모든 신자들에게 개방된 곳(성당)이었음”을 확인하고 “‘순교자의 모후’를 주보 성인으로 두고 봉헌식과 축복식을 거행했으므로 ‘성당’이라는 명칭이 교회법적으로도 부합하다”고 밝혔다.
교회법 제1214조에 따르면 성당은 ‘하느님 경배를 위해 지정된 거룩한 건물’로 신자들에게는 하느님 경배를 특히 공적으로 행하기 위해 성당에 출입할 권리가 있다. 반면 경당은 ‘어떤 공동체나 또는 그 곳에 모이는 신자들의 집단의 편익을 위해 직권자의 허가로 지정된 하느님 경배의 장소’다.(제1223조)
김대건기념성당은 전국 성지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순례지 중 하나다.
1928년 9월 18일 당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였던 라리보 주교가 봉헌식을 주례했고, 아직 ‘성지’라는 용어조차 사용되지 않던 시절부터 김대건 성인의 묘소를 찾는 많은 신자들이 김대건기념성당에서 기도해 왔다. 1965년부터는 9월 순교자 성월마다 성당 앞 광장에서 순교자현양대회가 열렸고, 미리내성지 초입에 자리한 성요셉성당에서부터 김대건기념성당까지 유해행렬을 하는 전통도 생겼다.
미리내성지는 2017년 김대건기념성당 앞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한국 순교자의 모후이신 성모상’을 설치해 순례자들의 신심 함양을 도왔다. 성모상은 순교한 김대건 성인과 그 모친 고 우르술라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8일, 이승훈 기자]
이민식(1829∼1921).
1846년 병오(丙午)박해 때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 세례명 빈첸시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목격하고 40여일동안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려고 노력한 끝에 10월 26일 밤 포졸들의 감시를 뚫고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어 미리내에 안장했고, 그 뒤 1901년 시복 수속 관계로 김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게 되자 유일한 증인으로 발굴에 참여하였다. 평생을 자신이 거두어 안장한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돌보다가 1921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나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미리내 북쪽 거문정이에 살았던 이민식 빈첸시오와 관련된 기록이다. 김 신부가 은이 마을에서 전교 활동을 할 때 열심한 신자로서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은 김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고 유체를 수습하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40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유체는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안고, 동체는 결방하여 짊어지고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유체를 옮기게 된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검은 돌(黑石洞)을 지나 동작리(鋼雀洞) 뒷산을 타고 남태령을 넘어 청계산 골짜기에 이르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어두워질 때까지 유체를 다래 덩쿨에 숨겼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하우 고개[鶴峴]를 돌아 묘론이 고개, 너덜이(板橋)를 거쳐 태재(泰峴)에 이르니 용인 땅과 가까운 능골 앞산이었다. 끊임없이 묵주 기도를 바치며 밤을 틈타 유체를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되도록 위험한 큰길을 버리고 참바대 고개를 넘어 태화산 기슭의 퉁점(銅店),드렝이 고개를 거쳐 마침내 은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은이 마을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 고개에서 날이 새는 바람에 유체를 콩밭에 숨겨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 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히 넘기기를 빌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유체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 신부의 유체를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외 여러 가지 증언
이 밖에도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다섯 사람의 증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김 프란치스코라는 시람에 의하면 상여에 실어 양성에 있는 미리내에 묻었다고 했고(《기해병오 순교자 증언록》 282쪽), 박 베드로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임시로 문배부리(지금의 용산구청 자리)라는 곳에 묻었다가 양성 미리내로 옮겼다고 했고(위 증언록 285쪽), 서 야고보라는 사람은 새남터에서 조금 떨어진 왜재에 매장했다가 다음 날 왜고개(현 국군 중앙 성당 자리)로 옮겨 매장하고 장례를 치뤘다고 했다.(위 증언록 289쪽).
또 김대건 신부 유해 발굴과 이장 기록 보고서에 의하면 1846년 9월 30일 교우 14명이 미리내로 옮기고 그해 10월 26일에야 미리내에 유체를 안장했다고 한다. 이민식의 증손자 이순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민식을 비롯 세 사람이 옮겼다고 한다.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30여 차례에 걸친 현지 답사와 8,90대 노인들의 증언들을 종합 분석하여 지도상에 그 경로를 재현해 본결과 한강 도강 과정 누락, 유체 단독 이장 등 과장 부분을 제외하면 용인천주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는 이장 경로가 당시 실제 상황과 부합되는 측면이 크다고 여겨진다.
[자료 참고 : 한국순교자현양회]
이민식 빈첸시오의 후손 [고초골의 자랑 5]
1846년 9월 16일 한국의 첫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만25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자 교우촌 어른들의 걱정과 격려를 받은 당시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하신 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시킵니다.
현재 고초골에는 이민식 빈첸시오의 후손(이선행요아킴)이 살고 계십니다.
* 이민식(1829~1921)*빈첸시오 소개
빈첸시오는 1829년 열심한 교우 집안인 함평 이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그의 집안 역시 군란 때의 다른 교우들 가정이 다 그랬듯이 쫓겨 다니는 처지라 가정 형편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였고 공부도 많이 못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백과 용기가 뛰어나서 다른 성숙한 청년을 능가하는 용감한 청년이었던 그는 남달리 신심이 깊었고 김대건 신부님이 은이에서 전교 하실 때 30리나 되는 은이까지 밤으로 찾아가서 성사를 보고 신부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김 신부님이 밤에 미리내에 오셔서 성사를 주고 그날 밤으로 가실 때에는 빈첸시오가 으례 길을 안내해서 영접해 오고 또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이렇게 이민식 빈첸시오는 김 신부님을 각별히 따랐고 김 신부님의 어진 인품과 고결한 덕행에 많은 감화를 받았으며 신부님 또한 그의 강직하고 순박하면서도 열심한 수계 범절을 칭찬 하셨다고 한다.
* 사제가 되고 싶었던 빈첸시오*
김 신부님처럼 자기도 사제가 되어 천주님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그는 나이 40세가 되도록 꿈울 접지 못하고 있다가 40세가 지나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50세가 가까이되자 총명이 떨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전보다 더 열심히 수계하여 부감목 신부 밑에서 여러 해 동안 복사를 했으며 서울 약현 본당 초대 정 신부를 도와드리는 등 교회 사업에 전념하여 당대나 후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평생 동정으로 살면서...*
평생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거룩하게 살아 모든 교우들로부터 반성인 이라 일컬어졌다.1853년 2월 페레올 고 주교님이 서거 하신 후 베르뇌 주교님의 분부로 페레올 주교님의 유해를 김대건 신부님 무덤 옆자리로 안장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앞장서서 주교님의 유해를 모셔다가 김 신부님 묘소 옆에 안장해 드리기도 하였다.
평생 동정으로 살면서 교회에 봉사해 오던 그는 1921년 12월9일 92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묵리에서 미리내 성당으로 모셔졌고 수백 명의 교우들이 참례한 가운데 드브레 주교님의 주레로 장례미사를 드리고 성당 앞 빈첸시오 선산에 안장할 때 주교께서는 연령방면 예절을 행하시며 무덤에 강복하셨다.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교회에서는 1976년 여름 그의 묘를 김 신부님 옆 현재의 무덤 자리로 이장하였다. [자료: 고초골 피정의집]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이윤일(李尹一) 요한(1816-1867년)
성 이윤일 요한(Joannes)은 충청도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친 대(代)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언제부터 경상도 문경군 새재 여우목으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는데, 키가 크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위엄이 있었으며, 신심이 깊고 또 솔직담백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선대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가문이어서 선친들 중에 전교회장과 순교자들도 있었다. 이 요한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온갖 방법과 노력으로 자기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포졸들을 보냈다. 이 요한은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올 때가 온 것이며 이미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 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 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그들은 마을을 수색하여 이 요한의 가족 8명과 마을의 신자 30명을 체포하여 험준한 산길을 걸어 문경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문경에서 사흘을 지낸 후 상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세 달을 지냈는데 그가 기거하던 곳은 집이 아니었고, 마구간도 돼지우리도 아닌 겨울에 무나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파 둔 구덩이가 요한의 침실이었다. 그의 목에는 죄수가 쓰는 칼이 두 개나 채워졌고, 발에는 차꼬를 끼워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으며 신자들을 격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상주 목사는 마지막 문초를 마치고 70여 명의 신자를 세 편으로 갈랐다. 첫째 편은 집으로 돌려보낼 자들이고, 둘째 편은 처형될 사람들 그리고 셋째 편은 이 요한과 같은 사교의 두목이었다. 상주 목사는 1867년 1월 4일 대원군의 윤허와 함께 군중에게 교훈이 되게 사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집행을 위해 대구로 압송하였다. 이 요한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출발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이 요한은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다 받아먹고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갔다. 천주학장이를 참수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형장은 인파로 들끓었다. 집행관이 나와서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희광이에게 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 주게나.” 하고 말하였다. 요한은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꿇어앉았다. 돈을 준 효력이 있었는지 요한의 목은 한 칼에 떨어졌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와 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에 의해 대구 날뫼(비산동)에 매장되었다가, 1901년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면서 당시 용인의 먹뱅이에 살고 있던 그의 동생 이시영에 의해 1912년 이동면 묵리 산으로 이장하였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그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미리내에 묻힌 분들
고 우르술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어머니.
페레올(Jean Joseph Ferreol) 주교(1808-1853)
제3대 조선교구장. 1808년 12월 27일에 프랑스 아비뇽(Avignon)에서 태어나 1838년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1839년 5월초에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향하였다. 1840년 1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상륙하여 중국대륙을 횡단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그는 조선 교회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여 어떤 큰 불행이 일어났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 봉천에까지 왔으나 그 곳 요동지방의 푸대접 때문에 서만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지방은 원래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구역이었으나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그 관할권이 넘겨짐에 따라, 이를 시기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이 그 곳 신자들에게 프랑스출신 신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이었다.
서만자에 돌아온 페레올 신부는 그 곳에서 앵베르 주교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지시대로 조선 입국을 위해 양부(Yang Vou)로 가려고 했으나 요동지방 신자들의 적의로 말미암아 그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Bellina)의 명의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31일 만주교구의 베롤(Verrolles)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았다. 이에 더욱 조선 입국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그를 찾아온 김대건(金大建)을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은 주교와의 약속대로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주교에게 연락하니, 주교는 그때 프랑스로부터 새로 파견되어 온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거느리고 생해로 달려왔다. 이어 함께 배를 타고 모진 풍파를 헤쳐 간신히 한국 서해안에 다다라 충청도 나바위[羅岩)라는 곳에서 닻을 내렸다. 조선 입국을 시도한 지 6년만인 1845년 19월 12일이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가 조선 입국에 앞서 상해에서 신품을 준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1851년을 맞이한 주교는 거듭된 박해와 1만여 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과로로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끝내 회복을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는 제3대 주교로서 조선 입국 이래 8년 동안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킨 큰 공을 남기었는데, 그의 유해는 4월 12일에 안성(安城)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묻혔다.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1829-1921년)
1846년 병오(丙午)박해 때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시신을 운반한 사람. 세례명 빈첸시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목격하고 40여 일 동안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려고 노력한 끝에 10월 26일 밤 포졸들의 감시를 뚫고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어 미리내에 안장했고, 그 뒤 1901년 시복 수속 관계로 김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게 되자 유일한 증인으로 발굴에 참여하였다. 평생을 자신이 거두어 안장한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돌보다가 1921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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