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7월 4일(목) 아가 6:1-14 찬송 393장
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14.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개역 개정)
- 신랑 신부의 사랑의 회복 -
일시적인 안일함과 나태함에 빠져 신랑의 부름을 외면하였던
술람미 여인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하여
두 사람 사이에 야기된 위기를 극복하고 재회하여
갈등을 겪기 이전보다 더욱 깊고 성숙하여진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6장은 아가서 제 3부(5:2-8:14)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은 신랑 신부가 각기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로써 표현하는 장면을 기록한 전반부(1-10절)와
두 사람의 재회 장면을 노래하는 후반부(11-14절)로 구분된다.
본 단락 전반부에서 신랑과 신부가 각기 서로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은 일시적인 사랑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곧 재회하여 더욱 성숙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 부분에서 술람미 여인은 한시바삐
솔로몬이 거닐고 있는 동산으로 나아가기를 원했고(2-3절)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다시 한번 찬양하며(4-7절)
그녀에 대한 변함없는 절대적인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8-10절)
술람미 여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솔로몬의 노래 가운데 등장하는
각종 동식물과 아름다운 도시 등은 그것들과 비교되는
술람미 여인의 아름답고도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한편 본 단락 후반부에서는 전반부에서 보여준 바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두 사람의 재회가 이루어지는 기쁜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자신의 수레에 태워
그녀가 왕비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선포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증명해 보였으며,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축하하듯이 그녀의 춤을 보기를 원하는
주위 사람들의 청을 허락하여 그녀가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인지를 만인 앞에 드러내보이고 있다.
이렇듯 자신에게 풍성히 부어진 솔로몬의 사랑에 대하여
술람미 여인은 그의 허락을 얻어 춤을 추어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것으로 답하는데,
춤추는 숨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다음 단락(7:1-5)에 세밀히 묘사되고 있다.
본 단락을 통하여 특히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①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일지라도 종종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잃어버리는 가슴 아픈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한 경우 양자가 취해야 할 최선의 행동은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겸손하면서도
적극적인 실천이 뒤따르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욜1:13-14)
② 자신의 잘못을 솔직 담백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동은
상대방의 마음에 다시금 자신을 향한 사랑을 일으키는 기폭제와도 같다.(삼상25:32-33)
③ 남편과 아내는 서로 상대를 자랑하며
또한 상대방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도록
인격적으로 자신을 단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편 이같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자랑거리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한 영적인 성결함을 유지하며,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울러 교훈한다.
(렘9:24; 빌3:7; 벧전2:9)
3절)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라고 말한다.
곧 나는 나의 님의 것이며 나의 님은 나의 것이니
그 사이에 어떠한 다른 대상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의 독점성과 배타성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사랑의 독점성과 배타성을 말하면
반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은 반문을 던지곤 한다.
즉 ‘진정한 사랑이란 나누고 공유하는 것인데
어떻게 배타적이고 독점적일 수가 있느냐?’
하지만 굳이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일부일처제를 거론할 것도 없이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궁극적이고 진정한 사랑은
사실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려운 예를 들 것도 없이
남녀간의 사랑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흔히 이미 애인이나 배우자가 있는데
누군가 데이트 신청을 해오면 즉석에서 ‘I am already taken’이라고 대답한다.
곧 나는 누군가에 의해 이미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므로
당신의 프로포즈를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가 하면 그들은 연인이나 배우자가 사랑을 확인하려 들면
자신의 사랑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표현할 때
‘1 have no one above you’라고 말한다.
곧 ‘나는 당신 위에는 그 누구도 없다’는 것으로
나에게는 당신이 최고요 오직 당신 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보면 겉으로 보기에 자유연애를 주장하곤 하는
서양 사람들이 정조관념이 희박한 것 같아도
실상은 사랑에 있어서 누구보다 독점적이며 배타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 인간에 대한 사랑도 이렇게 독점적이고 배타적이라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암3:2)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역시 동일하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고 명령하셨다.
또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당신의 양떼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역시 부모나 형제, 심지어 자기의 생명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마10:37-39)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기독교의 하나님은 배타적이고 고집불통일며 폭군적인 신이라는 등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하나이며 그들 사이의 진정한 사랑은
서로에 대해서 독점적이고 타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일 때 가능하듯
우리가 섬기고 사랑해야 할 하나님도 한 분 뿐임을 알아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나님만 좇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