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디스크쟈키 최동욱
음악에 대한 각종 매체가 발달하다보니 요즘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듣는 사람의 숫자는 많이 줄었다. 대부분 배경음악용으로 틀어놓거나, 운전기사들이 교통정보의 습득을 위해 듣는 경우가 많다. FM방송의 음악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음악을 들려주는 시간보다 가벼운 잡담을 늘어놓는 시간이 더 많이 차지하게 되면서 ‘음악’에 충성을 바치는 프로그램은 듣기가 힘들어졌다.
현재의 청소년들이 인터넷 접속을 생활화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면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60년대 중반의 한국 청소년들은 라디오방송 음악프로그램 듣기에 몰두했다. 이런 현상은 그들이 들었던 음악프로그램이 새로운 내용으로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팝송’이라는 새로운 음악문화였다.
당시의 일반적인 성인들이 트로트를 들었다면 도시적인 세련된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최희준이나 한명숙이 부르는 스탠다드팝을 들었다. 이것마저도 구린 음악으로 여기고 첨단의 음악을 향유하려는 젊은이들은 미국 본토의 따끈따끈한 음악인 ‘팝송’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음악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팝송은 1950년대 말부터 드물게 존재하여 1950년대 말 KBS의 <금주의 희망음악>에서는 1주일에 한 번 30분간 간간이 팝송을 틀어주었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KBS의 주간프로그램으로 <리듬퍼레이드>가 존재했다. 1962년 KBS2 라디오가 생기고 주 1회 30분간 방송되는 <금주의 히트퍼레이드>가 생기면서 비로소 빌보드 챠트를 근거로 한 최신 팝송이 소개되었는데 이때의 프로그램 선곡과 스크립트를 담당한 사람이 1964년 한국 최초의 DJ(디스크쟈키)로 등장할 최동욱 이라는 사람이다.
1962년 서울에는 ‘음악감상실’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음악업소들이 황금시절을 구가하고 있었다. 충무로의 ‘카네기’, 종로2가의 ‘디쉐네’, ‘메트로’, ‘뉴월드’, 낙원동의 ‘르네상스’와 ‘무아’, 미도파옆 ‘은성’자리에 위치한 시대백화점의 ‘라스칼라’, 태평로 조선일보사옆 아카데미극장 위의 ‘아카데미’, 광교의 ‘아폴로’, 그리고 명동의 ‘시보네’ 등이 그 주역들이었다.
이곳들은 음향시설이나 실내 분위기를 일급 수준으로 갖추었고 앞다투어 새로운 음반의 입수와 개선에 경합을 보였다. 따라서 좋은 음향기기를 가질 수도, 라디오 방송에서 새로운 외국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도 없었던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음악을 듣는 새로운 문화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61년경 메트로시절 최동욱
1961년 고려대 국문학과 3학년 복교생이던 최동욱도 음악감상실에 단골로 드나드는 이러한 젊은이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다 자신이 드나들던 YMCA 뒤에 있던 ‘디쉐네’에서 주인에게 자청하여 장내 디스크쟈키를 시도했다. ‘디쉐네’에서 그의 진행솜씨가 인정을 받았던지 화신백화점 3층에 ‘메트로’가 새로 개업하면서 디스크쟈키로 초빙되어간다. ‘메트로’에서 지낸 1년 동안에 그는 뮤직홀 세계의 실력 있는 디스크쟈키로 소문이 났고 ‘세시봉’, ‘카네기’ 등으로 옮겨다니면서 디스크쟈키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간다.
다운타운가에서 명 DJ로 이름을 날리던 최동욱은 1963년 2월 한국 최초의 민방인 동아방송의 개국사원으로 입사하면서 방송가에 진출하게 된다. 그는 개국당시(1963.4.28)부터 <탑튠쇼>(월-토, 오후 6:40-7:00)를 메인 프로그램으로 들고 나왔다. KBS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방송하던 것을 매일 방송하고 그것도 생방에다 프로듀서인 자신이 직접 방송을 해보겠다고 제안을 했다. 음악감상실에서 쌓은 경험을 방송에 적응하여 보겠다는 야심에서였다.
1966년의 최동욱. 탑튠쇼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제안은 동료들의 비웃음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제작은 아나운서, 엔지니어, 프로듀서로 분담되어 있었고 마이크는 항상 아나운서가 잡게 됨에 따라 대중들의 실제적 인기는 아나운서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아나운서들은 발음은 좋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고 영어발음에 서툴러 곡소개를 하면서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해 최동욱은 근본적인 불만을 갖고 있었다.
최동욱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나갔다. 매일 새 곡이 한곡씩 소개되고 들어서 좋은 새 곡이 반복되었으며 청취자의 앙콜엽서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 ‘동아 베스트 텐’을 선정 방송했다. 이것은 한국 방송에서 랭킹을 만들어낸 최초의 방송이었다. 각 레코드회사에서 새로 나온 디스크를 소개하는 ‘오늘의 가요’에서는 새 가요를 소개했고, 앙콜엽서를 받아 가요앙콜을 만들어 ‘가요베스트 텐’을 선정했다. 또한 한국 최초로 빌보드챠트를 소개하고 10위권 내의 곡을 집중적으로 방송하였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진행되던 음악프로를 쌍방향의 시청자 참여프로그램으로 전환하였으며 미국 본토의 최신음악을 시차없이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팬과 얘기하고 있는 최동욱. 1971년의 모습
1964년 9월 어느 날 참아오던 최동욱의 뚜껑이 열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아나운서가 거드름을 피우며 최동욱이 쓴 원고를 받아서는 애니멀스의 을 ‘하우제 오프 리징 선’ 이라고 엉망인 콩글리쉬로 읽는 것을 보고 열이 받은 나머지 녹음을 중단하고 스튜디오에서 철수해버린 것이었다.
방송을 30분 앞두고 스튜디오는 발칵 뒤집혔고 급기야는 최창봉 방송부장이 달려왔다.
“이것 봐 어떻게 하자고 방송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녹음을 걷어치웠단 말인가”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가 죽었습니다. 이대로 어물어물 만들어 방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아나운서로 바꾸면 되지 않는가?”
“마땅하게 해낼 아나운서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단 말야!”
“제가 직접 해보겠습니다.”
최부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럼 네가 한 번 해봐!”
한국의 방송사에서 음악프로그램의 권력이 아나운서에서 프로듀서로 옮겨지면서 최초로 DJ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방송계의 오랜 관행을 신입사원이 깬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1964년 9월 여자 아나운서의 소개 멘트로 방송마이크 앞에 나섰다. “지금부터 디스크쟈키 최동욱이 진행하겠습니다.
제가 최동욱입니다. 프러듀서인 제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판을 돌리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디스크쟈키로 여러분에게 좋은 음악을...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 첫 모험방송의 인사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스튜디오 밖에는 동료들의 얼굴이 나를 에워쌌다. 그 표정은 축복의 눈길이 아니고 질시와 회의의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한국 최초의 디스크쟈키가 엮는 팝스계 야사 (3) 질시와 엄포속에서 출발된 1인3역 프로그램」, 『음악동아』 84. 8, 276쪽
위의 장면은 앞으로 최동욱이 겪어야 할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청취자들의 욕구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던 그의 시도는 청취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팝송을 좋아하는 대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동아방송과 친해지려고 방문하는 행렬들이 날로 늘어갔다. 5백회가 되는 1964년 가을에는 특별 공개 버라이어티쇼를 기획했다. 진명여고의 강당 삼일당에서 당시 미8군에서 활동하던 키보이스, 애드포, 샤우터즈, 코끼리캄보 등 전설로 일컬어지는 한국 초기의 대표적 록밴드를 등장시켜 라이브무대 <탑툰쇼>를 마련했다. 쇼는 성공적이었다.
<탑튠쇼>의 성공에 고무된 최동욱은 내친 김에 더욱 과감한 시도를 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라디오방송은 낮방송을 오후 2시쯤에 끝내고 오후 5시경에 다시 저녁방송을 시작했다. 오후 3시대는 방송도 하지 않던 시간대로서 ‘데드아워’라고도 했었다. 바로 이 시간대에 최동욱은 1964년 10월 1일부터 <3시의 다이얼>(화-토, 오후 3:20-4:00)을 신설했다. 청취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율을 높이면서 프로그램의 품격을 갖추기 위해 초대손님 선정에 크게 신경을 썼다. 기존의 엽서신청방식에다가 즉석 전화희망곡 신청을 과감히 도입했다.
전화희망곡 신청의 경우 자질구레한 개인 이야기는 매정하도록 잘라버렸다. 즉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보낸다는 식의 사신 형태를 배제한 것이다. 이렇게 최동욱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음악을 항상 중심에 둔 나머지 대중들의 눈높이를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와 결국 불만에 가득 찬 청취자들에게 생방으로 쌍욕을 얻어먹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튠쇼>를 버전업한 <3시의 다이얼>은 1960년대 후반 라디오 청취율에 있어 전설적인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다. 동아방송 자체조사는 물론 라이벌 민간방송과 문공부의 청취조사에서도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 수위를 차지했다.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젊은이들의 문화적 갈증을 풀어주었던 그의 인기는 인기정상의 연예인 못지않았다.
귓전에 속삭이는 듯 조용하고 감미로운 음색의 소유자이자 재치와 센스가 넘치는 민감한 사나이... 그는 틴에이져뿐만 아니라 젊은 층 뭇 여성들의 갈망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매혹적이어서인지, 아니면 그의 찰나적인 기지와 주변에 끌려서인지 어쨌든 그 까닭은 분석할 수 없지만 최동욱 바로 그는 007영화의 제임스본드 아닌 한국의 본드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레이보이 순례-최동욱편」, 『아리랑』 67. 9, 160쪽
최동욱의 화려한 독주는 청취자들의 호응과 반비례하여 방송국 내부의 반발에 직면했다. 기존의 방송의 관행을 깨는 그의 다양한 시도는 프로듀서의 범위를 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급기야는 방송국에서 프리랜서로의 전환을 종용받게 된다. 1969년 초부터 프리랜서로 전향한 이후 1970년 10월 1일부터 진행한 <영시의 다이얼>(밤 11시25분~0시45분)이라는 심야음악프로그램은 그의 역량의 절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팬들과 함께 있는 임문일(왼쪽에서 두번째). CBS의 꿈과 음악 사이에 음악프로그램으로 고교생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게스트와 격 있는 대화, 심야전화방문, 명사와의 전화인터뷰, 가수의 생음악연주와 해프닝 등의 다양성까지 곁들여 그야말로 라디오 프로그램의 전형적 버라이어티를 마음껏 살렸다. 바로 이 때 1970년은 심야음악방송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TBC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박광희), CBS의 <꿈과 음악 사이에>(임문일)이 모두 1970년에 신설되면서 젊은이들은 부모들이 잠든 한밤중에 그들만의 세계로 매일 가출하고 있었다.
(2006.9.26 yahookorea 추억의 아카데미 음악감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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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시의 다이얼~~~~~최동욱씨 멘트가 나올것 같은 시그널 뮤직이네요.....70년대 광교의 쉘부르에서 이종환씨와 함께 뵈었었죠...많은 가수들의 등용문이었던곳....
최동욱`! ~!쑈 멘트가 들리는 거 같아요
그 시절의 감회가 새롭네요!
옛날 시청앞 거시기 다방이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