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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학의 이해
<중국문학의 이해>는 중국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장구한 중국 문학의 강을 탐색하기 위한 안내서이다. 중국 문학은 크게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뉜다. 고전문학은 한자가 쓰이기 시작한 상나라 때부터 19세기까지 약 3,5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현대문학은 20세기 초 5·4 신문학운동을 계기로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갈수록 생소해지는 중국 문학을 어떻게 대중에게 안내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내놓은 것이 바로 <중국문학의 이해>이다. 문학사의 긴 흐름에 대한 복잡한 설명보다는 그 문학사에 명멸했던 작품을 감상하면서 학습자들이 자신만의 느낌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이 과목의 목표이다. 특히 중국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고전시가는 그것이 갖는 형식적 성과인 낭송의 아름다움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강의를 할 때 시기별로 선별된 주요 작품들을 낭송의 방식으로 진행하여 시가의 형식적 성과를 학습자들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고자 했다. 이야기 중심인 소설, 희곡 같은 경우에도 작품의핵심 부분을 제시함으로써 학습자들이 작품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므로 한 사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문학은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중국 문학을 이해한다’는 말은 곧 ‘중국을 이해한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얻는 중국 문학의 이해가 문학을 넘어 중국을 이해하는 길로 이끌 수 있기를 바란다.
제1장 중국 고전문학 개관
1. 고전문학의 특징
2. 고전문학의 이중성
3. 고전문학의 발달과정
제2장 《시경詩經》과 초사楚辭
1. 《시경詩經》
2. 초사楚辭
제3장 악부樂府와 한부漢賦
1. 악부시樂府詩
2. 한부漢賦
제4장 고시古詩–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완적阮籍, 도잠陶潛
1.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2. 완적 – 지식인의 불우와 회한
3. 도잠 –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
제5장 당시 1 –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1. 이백 – 시선詩仙의 풍류와 울분
2. 두보 – 시의 성인
3. 왕유 – 소요자적逍遙自適의 ‘관은官隱’
제6장 당시 2 – 이하李賀, 이상은李商隱
1. 이하 – 비틀린 언어의 미학
2. 이상은 – 개성과 탐미의 신세계
제7장 송시 –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1. 소식 – 사대부문학의 정점
2. 황정견 –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시인
제8장 중국 고전소설사의 이해
1. 문언 서사
2. 백화 서사
제9장 《서유기西遊記》의 이해
1. 《서유기》의 성립 배경
2. 《서유기》의 구조와 인물
3. 《서유기》의 두 가지 주제
제10장 《홍루몽紅樓夢》의 이해
1. 아속雅俗의 융합
2. 시로 쓴 소설 《홍루몽》
3. 《홍루몽》에 집대성된 문학적 전통
제11장 중국 현대문학 개관
1. 중국 신문학, 중국 현대문학 · 당대문학, 20세기 중국 문학
2. 새로운 중국 문학의 등장 – 문학론과 작가 · 작품, 문학사단
3. 현대문학의 성숙 – 장편소설과 시, 희곡
4. 현대문학의 여성 작가
5. 사회주의 문학의 흐름
6. 중국 현대문학의 정상화
7. 대중문학의 흐름
8. 21세기의 중국 문학
제12장 루쉰魯迅과 <광인일기狂人日記>
1. 작가 소개
2. 작품 소개 및 분석
제13장 장아이링張愛玲과 <침향 부스러기: 첫 번째 향沈香屑: 第一爐香>·<황금족쇄金鎖記>
1. 작가 소개
2. 작품 소개 및 분석
제14장 위화余華와 《인생活着》· 《쉬싼관 매혈기許三觀賣血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十個詞彙裏的中國》
1. 작가 소개
2. 작품 소개 및 분석
제15장 진융金庸과 그 무협소설 세계
1. 작가 소개
2. 작품 소개 및 분석
3. 작품 감상
1강. 중국고전문학 개관
▪ 중국고전문학의 이중성
고전문학은 중국 사회의 이중적 계층구조에 따라 형성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고전문학은 지배계층이 주도한 이른바 사대부문학의 흐름과 하층의 민간에서 주도한 민간문학의 흐름으로 나뉘어 발전해 왔다. 사대부문학과 민간문학은 각기 정통(正統)문학과 속(俗)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 사대부문학과 민간문학
농공상의 신분체제를 고집한 유가사상과 왕조 지배체제 아래 발달한 중국의 고전문학은 신분의 벽을 해소하지 못하고 사대부문학과 민간문학이라는 이중구조로 발달해 왔다. 역사가 흐를수록 지배계층과 서민 사이의 격차가 줄어들어 점차 서민 특히 도시의 시민계층을 수요층으로 한 민간문학이 개화하기 시작했다. 당송 시기가 사대부문학이 성황을 이룬 시기라고 한다면 원명청 시기는 민간문학이 흥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왕조체제가 서구 제국주의의 군사력에 굴복하고 강제로 현대세계에 편입되기 전까지 중국에서는 서민이 지배계층의 기득권을 극복하고 자체적인 변혁을 이루어 내지 못했다. 민간문학의 역량 역시 사대부문학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고전문학의 틀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가 중국고전문학의 특성
1 역사적 연속성(한자와 유가사상)
ᄀ 중국의 고전문학은 한자가 쓰이기 시작한 상나라(?B.C.1600-?B.C.1046) 때부터 19세기까지 약 3,5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 기간 동안 발달한 중국의 고전문학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역사적 연속성이 두드러진다.
ᄂ 중국 고전문학의 발달과정에는 여러 힘이 다양하게 작용했지만, 그 가운데 한자와 유가사상은 ‘수천 년 동안의 연속성’을 뒷받침해 온 가장 중요한 힘으로 꼽힌다. 세계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이런 연속성은 문학작품에 사용된 문자나 문장 형태뿐만 아니라 문학 이념까지 포함하며, 문학은 물론 문화 전반에 걸쳐서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이와 같은 연속성은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동시에 중국 고전문학의 역사에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경향을 각인시켰다는 단점을 노출하기도 했다.
2 한자와 중국문학
ᄀ 독특한 표의문자 체계로 출발한 한자는 복잡하고 익히기 어려운 언어였지만 형태와 의미의 안정성에 힘입어 중국 문학은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자의 특성으로 인해 중국에서는 한문이라 불리는 독특한 문어체가 발달했으며 함축성이 뛰어난 운문 양식이 성행했다. 甲骨文(상, 주) ⇨ 金文(상, 주) ⇨ 篆書(진) ⇨ 隸書 (한) ⇨ 楷書(후한, 위진)로 이어지며, ‘孤立語’로 어형변화(어미변화)가 없고 문법 관계가 주로 어순에 의해 결정된다.
ᄂ 고대의 상형문자에서 시작된 체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해 온 한자는 그 특성상 수식성이 강하고 시각적 형태미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한자가 그림에서 출발한 상형 문자라는 사실, 그리고 붓이라는 도구가 한자의 필기 수단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어왔다는 사실과 관계가 깊다. 하나의 한자는 하나의 음절로 발음되며 글자마다 고유한 성조를 갖고 있어서 청각적 조화를 중시하는 경향도 강화되어왔다. 한자의 상형성은 중국 시가에 풍부한 형상성을 부여한다.
ᄃ 한자는 복잡하고 익히기 어려운 문자였기 때문에 문학을 포함해서 한자를 이용한 문자 활동은 오랫동안 소수의 식자층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다. 문자를 활용한 미적 활동과 지적 활동 역시 그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또한 문자 자체의 특성으로 인한 정형화(定型化)와 간략화(簡略化) 경향은 일상 용어와는 다른 한문(漢文) 혹은 문언문(文言文)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문어체를 발달시켰다. 이는 시가(詩歌)를 중심으로 한 함축성이 뛰어난 문학 양식이 발전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유가사상과 중국문학
ᄀ 농경사회를 토대로 고대부터 일찍이 발달한 유가사상은 한나라 때 국교의 위상을 얻었으며 다소의 부침은 있었으나 19세기까지 중국 사회를 지배해 왔다. 유가사상의 일관된 지배체제 로 인해 중국 고전문학은 뛰어난 안정성을 갖추었으나 한편으로는 보수와 복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중국 고전문학이 정치, 역사, 철학 등 인문사회 전반을 아우르며 발달한 것은 윤리도덕과 경세제민을 중시한 유가사상의 지배체제와 관계가 깊다. 또 한 문학에서는 개인적 표현으로써의 예술이라는 측면보다 사회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행위라는 측면이 중시되었다.
ᄂ 중국에서는 문학작품이 다루는 주제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었으며, 문학의 기능 또한 서구 문학보다 훨씬 포괄적이었다. 역사, 철학, 윤리 등 다양한 인문학 분야들을 아우르는 경우가 많다. 또 경제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책이나 정치적 사건에 대한 견해를 시나 산문을 통해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중국 고전문학은 개인적 감성이나 상상력에 바탕을 둔 자 기표현의 범주를 넘어서서 정치, 경제, 사회 등 공적 영역의 활동과 연관된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특징은 유가사상의 특성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ᄃ 중국 고전문학의 영역이 넓은 이유는 문학의 가치를 사회성과 윤리성에 연관시키려한 생각과 관계가 깊다. 시를 통해 정치적 사건을 직접 언급하거나 그와 관련된 작자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일도 흔하다. 이런 현상은 언어와 문자를 이용하여 미적이고 지성적인 활동에 종사한 이들이 추구한 궁극적 가치가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일보다 보편성과 사회성을 추구하는 일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문자와 관련된 일에 종사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적 혹은 문화적으로 사회의 상류계층에 속해 있었다. 그들의 글쓰기는 대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편적인 윤리 규범을 전파하려는 일종의 사명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일이 많았다.
나 중국고전문학의 이중성 – 사대부문학과 민간문학(시와 산문, 희곡과 소설)
1 고전문학은 중국 사회의 이중적 계층구조에 따라 형성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고전문학은 지배계층이 주도한 이른바 사대부문학의 흐름과 하층의 민간에서 주도한 민간문학의 흐름으로 나뉘어 발전해 왔다.
2 사대부문학은 미적 감수성의 원천을 통속적인 민간문학에서 흡수한 경우가 많았다. 악부시(樂府 詩)와 송나라의 사(詞), 명청시대의 희곡인 전기(傳奇) 같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사대부문학은 이전까지 속된 것으로 치부하며 경시하던 민간문학 형식을 세련되게 변형하여 자신들의 감수성과 지성을 표현하는 양식으로 활용해 왔다. 이른바 ‘전아(典雅)’함을 특징으로 내세우는 상류계층의 문학이 저속한 민간문학으로부터 미적 감수성을 흡수하여 자신의 문학적 에너지로 차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3 민간문학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배계층이 발달시켜 온 제반 문학적 규범에 순응하며 스스로 변질되는 양상을 종종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대부문학의 규범에 따라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켜 우아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강해졌다. 봉건적 지배체제와 비인간적 윤리 규범에 대한 저항의식이 담긴 작품들이 지배계층과 가까운 평론가나 개작자(改作者)의 손을 거치면서 반항적 내용이 희석되는가 하면, 거칠고 자유로운 틀을 변형시켜 정형적인 틀을 갖춘 ‘세련된’ 형태로 변해 갔다.
다 중국고전문학의 발달과정
1 <고전문학의 출발> - 춘추전국시대 : 문자 활동이 보편화된 때부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의 틀이 갖추어지는 단계에 도달하기까지를 가리킨다. 주(周)나라 후기인 동주(東周) 시기부터 한나라와 위진남북조시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문학의 태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기는 춘추전국시대이다. 왕실이 주도하던 문자 활동이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 민간으로 확산된 일이 문학을 태동시 킨 가장 큰 요인이었다. 왕실에서 관리하던 문자 기록과 문자 활동이 민간으로 전파됨에 따라 중국에서는 자유롭게 지식이 축적되고 재생산되는 시기가 열렸다. 이 시기의 중요한 문학적 유산으로는 흔히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초사(楚辭)》, 그리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산문들이 거론된다.
2 <고전문학의 출발> - 한, 위진남북조 시대 : 한 왕조 때 들어와 고대의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가 뛰어난 글쓰기 능력과 학문적 지식을 결합하여 벼슬길에 오름으로써 사회적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문인계층’의 형성이 시작되어 글의 가치와 아름다운 글을 쓰는 방법에 대 한 문인들의 자각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발달시킨 가장 중요한 문학 양식은 5언과 7언을 위주로한 고시(古詩)였다. 한 왕조 말에 시작된 이런 흐름은 남북조 시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재능 있는 시인들에 의해 다듬어져 전문성이 높은 세련된 문학적 글쓰기라는 분야 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3 <사대부문학의 성황> - 사대부 계층 : 근체시(절구와 율시), 고문
ᄀ 수당 시기 이후 과거제도의 확대에 따라 문인계층이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넓어졌 다. 문인들의 글쓰기 능력은 감성적 표현이라는 미학적 차원을 넘어 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한나라 말부터 발달한 문인의 정체성이 관료제도와 결합하여 통치 질서를 자임하는 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나아갔다.
ᄂ 왕조 구분법에 따르면 이 시기는 대체로 수당 시기부터 남송(南宋) 초기에 해당한다. 과거제도가 확대된 당송 시기에 들어와 글쓰기는 국가의 통치 기능을 담당하는 사대부계층의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 과거의 시험 과목에 포함되었던 시와 산문은 여타 장르를 압도했으며 고전문학을 대표하는 문학 양식으로 발달했다. 사대부계층은 유가사상을 토대로 하여 불교 와 도교의 자양분을 흡수해서 전통적인 문학 관념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문학 양식을 발달시켰다. 그들이 발달시킨 근체시(近體詩)와 고문(古文)은 사대부문학의 성황을 주도한 핵심 적인 문학 양식이었다.
4 <민간문학의 흥성> 남송 이후 – 청대 : 희곡과 소설
ᄀ 민간문학의 흥성은 도시 문화의 발전과 시민계층의 대두에 힘입었다. 강남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도시들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따라 시민 문화가 대두한 것은 대체로 남송 이후이다. 민간문학의 흥성을 주도했던 문학 양식은 소설과 희곡이다. 많은 소설과 희곡 작품은 새로 대두한 시민계층의 시민의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크게 보아 전통적 인 ‘도학적’ 사유체계에 대한 저항과 반성으로 명나라 때 양명학(陽明學)이 등장하고, 청나라 때 도학적 사유의 추상성을 극복하고자 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사상이 등장한 일도 시민계층의 발달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ᄂ 민간문학이 주도한 고전문학의 발달과정은 청나라 후기에 이르러 침체의 양상을 서서히 드 러내기 시작했다. 청 왕조의 보수화와 가혹한 문자옥(文字獄), 관료 조직의 공적 책임의식 상실과 만연한 부패, 사대부 계층의 보수화 등은 침체의 길로 들어선 청나라의 난맥상을 잘 보여준다. 고전문학의 발달을 주도해 온 민간문학의 아화(雅化) 현상, 사대부 계층의 보수화 를 반영한 문학 의식의 퇴보 등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아래 더욱 심화되었다.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은 활력을 잃어 가던 중국 사회 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가했다.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중국 대륙으로 물밀듯이 밀려온 서양 제국주의와 그에 수반된 서구 문학의 도래는 중국 고전문학의 황혼을 예고하는 거대한 파도였다.
2강. 《시경詩經》과 《초사楚辭》
▪ 毛詩
오늘날 전해지는 《시경》의 기본적인 틀 역시 한나라 때에 나온 해설서 가운데 하나인 《모시(毛詩)》 에서 비롯되었다. 이 해설서는 동한 때의 유학자 정현(鄭玄, 127∼200)이 해설을 붙인 《모시전(毛詩 箋)》이 나온 뒤부터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해설이라는 점 때문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모시》 또한 유가적 관점에서 시의 정치적, 윤리적 효용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경》에 수록된 노래들은 그 노래가 수집되어 기록될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과 정서를 느끼 고 이해하는 문학작품이 아니라, 유가의 입장에서 충효와 봉건 윤리를 가르치는 근엄한 경문(經文)으 로 해석되었다.
▪ 風, 雅, 頌
《시경》에는 〈국풍(國風)〉160편, 〈소아(小雅)〉74편, 〈대아(大雅)〉31편, 〈송(頌)〉40편, 총 305편이 수록 되어 있다. ‘국풍國風’에는 주남周南으로부터 빈豳에 이르는 열다섯 나라의 노래가 실려 있다. ‘아雅’ 는 중원 지역에서 유행하던 노래로서 중국의 왕조에서 ‘정성正聲’이라고 숭상하는 음악이었다. 소아 는 잔치에서 연주하던 음악이고, 대아는 조회에서 연주하던 음악이다. ‘송頌’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썼던 악가樂歌로서 조상의 공적을 송양하는 노래이다. 춤까지 곁들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가 《시경詩經》
1 《시경詩經》은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시가(詩歌) 모음집이다. 《시경》에는 서주 초기부터 춘추시 대에 이르는 약 500년 동안에 나왔던 시가들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당시 각 제후국에서 유행 하던 민간가요와 왕의 직할지에서 유행하던 시가, 왕실의 연회와 의식에 쓰였던 시가, 종묘의 제사에 사용되었던 시가 등이 있다.
2 총 305편의 가사가 〈국풍(國風)〉(160편), 〈소아(小雅)〉(74편), 〈대아(大雅)〉(31편), 〈송(頌)〉(40편) 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한나라 때에 이르러 유가의 경전으로 떠받들어지기 전 까지는 종종 ‘시(詩)’ 또는 ‘시삼백(詩三百)’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3 현대 이전까지 중국에서 《시경》은 순수한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문학의 교육적, 윤리적, 정치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유가의 경전으로 해석되어왔다. 유학이 국교(國敎)가 된 한나라 때부터 경학 자들은 당시의 정치체제를 합리화하고 한 왕실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활용했다.
4 현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시경》은 당시의 생활상과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한 소박한 문학작품으 로 평가될 수 있다. 특히 입말과 다른 압축적인 표의문자를 활용한 글말로 기록된 노래들은 이 후 중국 고전문학에서 운문 양식이 나아가야 할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關雎》
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
參差荇菜, 左右流之.
窈窕淑女, 寤寐求之.
求之不得, 寤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
參差荇菜, 左右采之.
窈窕淑女, 琴瑟友之.
參差荇菜, 左右芼之.
窈窕淑女, 鍾鼓樂之.
꽈안꽈안 저구새 황하의 모래섬에서 우네
아리따운 아가씨여 군자의 좋은 짝이라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친다네
아리따운 아가씨여 자나깨나 그립다네
그리워도 얻지 못해 자나깨나 생각하네
그리움 하염없어 전전반측 잠못자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뜯는다네
아리따운 아가씨여 금슬 타며 벗하려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고른다네
아리따운 아가씨여 종과 북으로 즐기려네
<국풍國風·주남周南·관저關雎>
‘국풍國風’에서 ‘국國’은 제후들의 나라를 말하며, ‘풍風’은 풍요風謠, 곧 가요의 뜻이다. 국풍에는 주 남周南으로부터 빈豳에 이르는 열다섯 나라의 노래가 실려 있다. ‘주남’은 주나라 왕조가 직할하던 황하 이남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모시》의 해설에서는 이 시가가 문왕文王의 교화와 후비 后妃의 덕을 노래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노래는) <국풍>의 시작이며, 그것을 가지고 온 세상을 교화하여 부부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 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시골 백성들과 제후국에 쓰는 것이다. ‘풍(風)’이란 바람이요, 가르침이다. 바람으로 움직이듯이 가르쳐 변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風之始也, 所以風天下而正夫婦也. 故用之鄕人焉, 用之邦國焉. 風, 風也敎也, 風以動之, 敎以化之.)
<관저>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는 젊은이의 사랑의 노래이다. 첫 장에서는 물가에서 마름을 따던 젊은이가 물새의 짝을 부르는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좋은 짝이 될 아름다운 아가씨를 생각 한다. 둘째 장에서는 그 아가씨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하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셋째 장에서 는 마침내 사랑을 얻은 젊은이가 연인과 금슬을 타며 함께 어울리고, 종을 울리고 북을 울리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이 시를 혼인 시에 부르는 혼인 축하 노래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종과 북은 혼인 예식에 베푸는 음악에 동원되는 악기인 셈이다. 셋째 장을 요조숙녀를 얻지 못해 전전반측 괴로워하던 젊은이가 공상 속에서 전개한 아름다운 장면으로 보기도 한다. 《시경》의 편찬자로 알려져 있는 공자는 이 작품을 시선집의 맨 앞에 배열하면서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슬퍼해도 비통함에 이르지 않았다”라 는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절제와 조화의 경지를 얻은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소아小雅·녹명鹿鳴>
呦呦鹿鳴,食野之蘋.
我有嘉賓,鼓瑟吹笙.
吹笙鼓簧,承筐是將.
人之好我,示我周行.
呦呦鹿鳴,食野之蒿.
我有嘉賓,德音孔昭.
視民不恌,君子是則是效.
我有旨酒,嘉賓式燕以敖.
메에메에 사슴이 울며 들쑥을 뜯고 있네
좋은손님오시니 슬을뜯고 생황을부네
생황불며귀한예물받들어올렸더니
손님은 위대한 도를 나에게 알려주네
메에메에 사슴이 울며 들쑥을 뜯고 있네
내게오신좋은손님명성이높으시네
백성에게 도타우시니 군자들도 따른다네
좋은 술로 잔치하며 즐겁게 해드리네
呦呦鹿鳴,食野之芩.
我有嘉賓,鼓瑟鼓琴.
鼓瑟鼓琴,和樂且湛.
我有旨酒,以燕樂嘉賓之心.
좋은 술로 잔치하며 마음 즐겁게 해드리네.
메에메에 사슴이 울며 금풀을 뜯고 있네
좋은 손님 내게 있어 슬 뜯고 금을 타네
슬을 뜯고 금을 타며 화락하게 즐긴다네
‘아雅’는 ‘정正’의 의미가 있어서 《시경》의 ‘아’를 ‘정악正樂’을 뜻하는 말로 푼다. 동시에 ‘아’는 ‘하 夏’와 통하여 하나라가 지배하던 황하 일대, 이른바 중원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시경》의 ‘아’를 중원 지역에서 유행하던 노래로서 중국의 왕조에서 ‘정성正聲’이라고 숭 상하는 음악이었다고 설명한다.
<소아小雅·녹명鹿鳴>
《시경》의 <소아>와 <대아>의 구별에 대해 주희는 그의 《시집전詩集傳》에서 “소아는 잔치에서 연주 하던 음악이고, 대아는 조회에서 연주하던 음악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잔치와 조회에서 쓰인 음악 이므로 대부분 사대부들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녹명>은 손님을 모시고 잔치하는 모습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는 임금이 여러 신하와 훌륭한 손님을 모시고 잔치할 때 쓰는 것이었으나 뒤에는 향인들까지도 잔치에 쓰게 되었다. <녹명> 시는 3장으로 구성되었는데 매 장마다 사슴이 우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넓은 초원에서 일군의 사슴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서로 부르고 응하는 평화롭고 다정한 모습이다. 이것은 잔치할 때 필요한 화기애애 한 분위기를 위해 바탕으로 깐 것이다.
화락하게 우는 사슴의 울음소리처럼 잔치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슬과 생 황의 연주이다. 이 연주를 들으면서 주인은 좋은 손님께 정성스러운 예물을 올린다. 그리고 손님에게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권하는 훌륭한 말씀도 부탁한다. 둘째 장은 손님의 말씀이 끝난 후 주인 이 나서서 손님의 명성을 치하하는 말을 한 것으로, 주인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덕을 쌓아 큰 명성을 쌓은 손님을 본받기를 바란다고 치하하고 있다. 셋째 장은 첫 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면서 잔치의 즐거움을 거듭밝힌 것이다.
<대아大雅·문왕文王>
文王在上,於昭于天。
周雖舊邦,其命維新。
有周不顯,帝命不時。
文王陟降,在帝左右。
亹亹文王,令聞不已。
陳錫哉周,侯文王孫子。
文王孫子,本支百世, 凡周之士,不顯亦世。
世之不顯,厥猶翼翼。
思皇多士,生此王國。
王國克生,維周之楨; 濟濟多士,文王以寧。
穆穆文王,於緝熙敬止。
假哉天命。有商孫子。
商之孫子,其麗不億。
上帝既命,侯于周服。
侯服于周,天命靡常。
殷士膚敏。裸將于京。
厥作裸將,常服黼冔。
王之藎臣。無念爾祖。
無念爾祖,聿修厥德。
문왕께서 하늘 위에 계시나니 아아, 하늘에서 빛나시도다
주나라는 오래된 나라여도 하늘의 명은 새롭기만 하네
주나라 조정이 밝으니 천명을 내림이 크게 옳다네
문왕께서 하늘 땅을 오르내리며 하느님 곁에 계시네
부지런한 문왕이시여 아름다운 명성 끊임이 없어라
주나라에 거듭 내린 복을 문왕의 자손들이 누린다네
문왕의 자손들 뿌리와 가지가 백대에 무성하고
모든 주나라 신하들 연년세세 크게 빛나도다
세세에 크게 빛나시니 그 계책이 신중하고 충성되네
빛나는 많은 신하들이 왕국에서 일어나네
왕국의 탄생은 이들 주나라의 기둥 때문이니
많은 신하들 있어 문왕께서 마음 편하시다네
덕이 높으신 문왕께서는 끊임없이 빛나시네
위대한 하늘의 명은 은나라에 있었다네
은나라 자손들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었지만 하느님이 명을 내려 주나라에 복종케 되었네
주나라에 복종케 되었으니, 하늘의 명은 일정하지 않다네
은나라 관리들 주나라 도읍에서 제사 술 올리나니
은나라 예복과 관모를 쓰고 술을 올리고 있다네
왕의 충성스런 신하들이여, 그대들 조상을 생각하시라.
그대들 조상을 생각하며 그분과 같은 덕을 닦아야 하네
永言配命,自求多福。
殷之未喪師,克配上帝。
宜鑒于殷,駿命不易!
命之不易,無遏爾躬。
宣昭義問,有虞殷自天。
上天之載,無聲無臭。
儀刑文王,萬邦作孚。
<대아大雅·문왕文王>
오래도록 하늘의 명을 따르며 스스로 많은 복을 누려야지
은나라도 민심을 잃지 않았을 적에는 하늘의 뜻에 부합하였다네
은나라를 거울삼아야 하리니 위대한 천명은 지키기 어렵다네
하늘의 명 지키기 어려우니 그대들 몸에서 끊기지 않게 하라
명성을 빛나게 하리니 은나라처럼 천명을 잃을까 걱정이라네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
문왕을 본받으면 온 세상이 믿고 따르게 되리
‘대아大雅’는 주로 조회 때 불렀던 노래이므로 잔치에 주로 쓰인 소아小雅에 비하여 더욱 전아典雅 하다. 주 왕조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는 시들이 많다. 후세에는 조회는 물론이고 소아처럼 잔치 자리 에서도 많이 불렀다. 이 작품에 대해 <모시서>에서는 “문왕이 천명을 받아 주나라를 이룩한 것을 읊 은 것’이라 하였다. 주희는 ‘주공周公이 문왕의 덕을 추술하여 주나라가 은나라를 대신하여 천명을 받게 된 것이 모두 문왕으로 말미암았음을 성왕成王에게 훈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문왕에 대한 찬미는 아와 송의 기본 주제라고 할 만큼 빈번하게 작품 속에 출현한다.
전체 시는 총 7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은 문왕이 천명을 얻어 나라를 일으켰음을 말하였고, 2장에서 는 문왕으로 인해 자손들이 백 대에 걸쳐 복과 영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말하였다. 3장에서는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들을 노래하였고 4장에서는 천명이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바뀌었음을 말하였다. 5장에 서는 천명이 바뀌어 은나라의 관리들이 주나라에 복속되었음을 말하였고, 6장에서는 그런 은나라를 거울삼아 하늘을 경외하고 덕을 닦아 천명이 옮기지 않도록 해야함을 말하였다. 7장에서는 문왕의 덕행을 본받게 되면 하늘의 복을 받고 백성의 신뢰를 얻게 될 것임을 말하였다.
<주송周頌·청묘淸廟>
於穆清廟,肅雍顯相。 濟濟多士,秉文之德。
對越在天,駿奔走在廟。 不顯不承,無射於人斯!
<주송周頌·청묘淸廟>
아아, 아름답도다 청묘여, 엄숙하고 의젓하도다
제사 돕는 대신들이여 많고 많은 선비들은 문왕의 덕을 받드나니
하늘에 계신 분 높이 우러르며 바쁘게 사당을 뛰어다니고 있네
빛나는 문왕의 신령을 크게 받드나니 사람들은 싫어할 줄 모른다네
‘송頌’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썼던 악가樂歌로서 조상의 공적을 송양하는 노래이다. 춤까지 곁
들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주송周頌’에 대해서 정현鄭玄은 “주나라 왕실이 공을 이루어 태평하고 덕이
성하던 때의 시로서, 주공이 섭정하던 성왕 즉위 초의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주송은 대부분 압운하지 않고 문사도 옛 티가 많아서 《시경》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 봄이 옳을 것이다. 이 <청묘> 작품은 문왕을 제사하는 노래이다. <모시서>에 의하면 주공이 동쪽에 낙읍 을 이루어 놓은 뒤 제후들을 거느리고 문왕을 제사할 때 부른 노래라고 한다.
전체 시는 8구로 이루어졌으며 장을 구분하지 않았고 압운을 가하지도 않았다. 처음 2구는 종묘의 아름다움과 그곳에서 제사를 돕는 높은 대신들의 엄숙하고 의젓한 모습을 묘사하였다. 중반의 4구는 문왕의 제사를 위해 분주하게 오가는 제관들의 경건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마지막 2구에서는 문왕의 빛나는 덕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영원히 계승될 것을 선포하였다. 문왕의 덕을 송양하는 노래지만, 문왕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대신 제사에 참여하는 대신들과 제관들의 훌륭 한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문왕의 덕을 더욱 드러내게 하는 수사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나 《楚辭》
1 초사는 매우 이질적이다. 샤머니즘, 남방적 다신교, 환상과 주술이 빚어내는 신비주의, 마술적 도취와 무아지경에 대한 탐닉 등과 같은 초사 특유의 요소들은 부국강병과 약육강식의 냉혹한 현실을 주제로 한 제자백가류의 정치사상에 대한 문학적 거부 그 자체였다.
2 초사의 문학적 세계는 중국의 문학적 전통 속에서는 좀처럼 자리를 잡기 어려웠던 문학의 탈정 치성, 문명 이전의 세계에 뿌리내린 마술적 세계관, 제자백가의 현실주의로는 포용할 수 없었던 개인주의 등에 뿌리내린 세계였다.
3 초사의 문학적 에너지는 가혹한 정치적 경쟁이 난무하고 유학이 관학으로 군림했던 중국의 오 랜 역사 시기 동안 수면 아래 잠복할 수밖에 없었다. 초사의 에너지는 제국이 몰락의 길로 들 어서거나 전제 왕권이 해체되는 시기에 마치 격세유전처럼 간헐적으로 예외적인 개인들을 통해 빛을 발하곤 했다.
4 그들은 대체로 가혹한 정치적 경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현실 앞에 좌절했던 지식인, 탐미 적 성향이 강하거나 신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강했던 문인과 예술가, 이국적 취향이 나 개인적 상상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예외적인 사람들이었다.
5 초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구가(九歌)〉와 〈이소(離騷)〉가 있다. 〈구가〉는 초사라는 양식의 특 성인 남방적 정서의 원형 혹은 기초를 잘 보여 준다. 반면에 〈이소〉는 전문적인 문학적 능력을 가진 지식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세련된 초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두 작품은 모두 장중하 고 유려하면서 영탄적인 리듬을 갖고 있다.
6 특히 ‘혜(兮)’라는 말을 이용하여 두 개의 관념을 하나로 묶어 길게 제시하는 방식을 쓴다. 짝수 리듬을 쓰지 않고 삼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홀수 리듬을 깔고 있어서 탐미적인 춤의 가락이 흘 러가도록 하는 방식을 활용해 장중함과 유려함을 더해 준다.
<구가九歌·국상國殤>
操吳戈兮被犀甲, 車錯轂兮短兵接.
오나라 창 들고 물소 갑옷 입은 군인들, 수레바퀴 부딪치고 도검이 맞붙었다.
旌蔽日兮敵若雲, 矢交墜兮士爭先.
깃발은 해를 가리고 적군은 구름처럼 몰려오고, 화살은 비처럼 쏟아지는데 군인들은 앞을 다툰다.
凌余陣兮躐余行, 左驂殪兮右刃傷.
적군은 아군 진지를 덮치고 아군의 대오를 짓밟아, 왼쪽 말은 쓰러졌고 오른쪽 말은 칼을 맞았다.
霾兩輪兮縶四馬, 援玉枹兮擊鳴鼓.
天時懟兮威靈怒, 嚴殺盡兮棄原野.
出不入兮往不反, 平原忽兮路超遠.
수레바퀴는 진흙탕에 빠지고 말은 버둥거리는데, 장군은 북채 들어 찢어져라 돌격의 북 쳐댄다.
하늘도 원망하고 신령도 진노하고, 참혹한 싸움 끝나 들판에 버려진 시체들.
나서면 들어갈 수 없고 떠나면 돌아갈 길 없나니, 평야는 아득하고 길은 끝없이 멀구나.
帶長劍兮挾秦弓, 首身離兮心不懲.
장검 차고 진나라 활 멘 군인의 몸뚱이, 머리는 떨어져 나가 구르고 원혼만 푸르르다.
誠既勇兮又以武, 終剛強兮不可凌.
실로 용감하고 무예 뛰어나던 군인들, 시종 억세고 강해서 범접할 수 없었는데,
身既死兮神以靈, 子魂魄兮爲鬼雄.
몸은 죽고 혼령만 떠도나니, 그대 혼백이여, 귀신 중의 영웅이여!
<구가九歌·국상國殤>
〈구가〉는 열한 편의 짧은 시가(詩歌)로 이루어진 연작 시가이다. 〈구가〉는 초나라 사람들이 신에게 제사 지낼 때 부르던 무가(巫歌)가 글자로 정착된 것이며 고대의 종교적 활동과 관계가 깊은 민간가 요가 점차 발달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전쟁터에서 죽은 이의 혼백을 저세상으 로 떠나보내는 장례를 주제로 한 〈국상(國殤)〉은 다듬어진 형태와 세련된 언어로 〈구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국상〉에 묘사된 전쟁의 모습은 잔혹한 살육 그 자체이며, 거기에 문명 건설이라든가 장렬한 애국자 라든가 하는 어떤 특별한 의미는 전혀 부여되어 있지 않다. 〈국상〉은 그들이 대면했던 끔찍한 죽음의 장면과 참혹한 시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읽는 사람들을 몸서리치게 할 따름이다.
왕과 장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대부의 관점에서는 전쟁이란 불가피한 일이며 어떤 때에는 역 사의 발전을 위해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직접 전투에 나가 이름도 모르는 적군과 맞닥 뜨려 살육전을 벌이다가 토막난 시체로 들판에 버려지게 될 병사들의 시각에서는 전쟁이란 누가 이 기고 지든 간에 끔찍한 살육이며 극도의 공포일 따름이라는 것을 〈국상〉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소離騷>
帝高陽之苗裔兮, 朕皇考曰伯庸. 고양 임금의 후손이시여 나의 훌륭하신 선친의 자는 백용이라 한다.
攝提貞于孟陬兮, 惟庚寅吾以降.때는 바야흐로 인년(寅年)의 인월(寅月), 경인일(庚寅日)에 나는 태어났도다.
皇覽揆余初度兮, 肇錫余以嘉名.선친께서 내 출생 시(時)를 따져 보시고 내게 좋은 이름을 내려 주셨으니,
名余曰正則兮, 字余曰靈均. 나의 이름은 바른 법칙의 정칙이며 자는 신령한 조화의 영균이라네.
紛吾既有此內美兮, 又重之以脩能. 내 이미 이런 아름다운 바탕을 지녔으며 또한 뛰어난 재능을 더불어 갖추었다네. 扈江離與辟芷兮, 紉秋蘭以爲佩. 몸에는 강리와 벽지의 귀한 향초들을 걸치고 추란을 줄에 꿰어서 허리에 둘렀다네. 汩余若將不及兮, 恐年歲之不吾與. 빠른 세월을 내 따라잡지 못하리니, 세월이 나를 기다리지 않아 두렵구나.
朝搴阰之木蘭兮, 夕攬洲之宿莽. 아침에는 산언덕의 목란을 따고 저녁에는 모래섬의 숙망풀을 캐노라 해와 달이 빨라 오래 머물지 않으니,
日月忽其不淹兮, 春與秋其代序. 해와 달이 빨라 오래 머물지 않으니, 봄과 가을이 차례대로 바뀌는구나.
惟草木之零落兮, 恐美人之遲暮. 초목의 영락을 생각하나니 미인의 황혼이 두렵기만 하다네.
不撫壯而棄穢兮, 何不改乎此度? 젊음을 믿지 말고 더러움을 버려야 하거늘, 어찌 그 태도를 바꾸지 않는가.
乘騏驥以馳騁兮, 來吾道夫先路. 준마를 타고 내달리리니, 오라, 내가 앞길을 인도하리라.
<이소離騷>
〈이소〉는 초사의 문학적 특성이 최고조로 발휘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이소〉는 〈구가〉에 비해 리 듬이 훨씬 장중하며 구성이 복잡하고 표현도 정교하다. 〈이소〉에는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특유의 화려함과 현란함, 신화와 마술의 세계에 대한 몰두, 고대 남방의 샤머니즘과 신선경에 대한 경도 등 이채로운 모티프들이 가득 차 있다. 〈이소〉는 중국 고전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글자 수가 약 2,500자 에 길이는 400행에 가까운 장편시로 초사의 대표작으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위에서 소개한 〈이소〉의 시작 부분은 큰 규모에 걸맞은 당당함과 중후함, 긴 호흡의 장중한 리듬이 유감없이 구사되어 있다. 〈이소〉의 화자는 유가적인 겸양의 태도나 우회적인 점잖은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조상의 내력과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인간 세상과 신화의 세계를 오가는 자신의 특별한 모습과 능력에 대해 화자는 거침없이 말하고 있으며, 화자 자신의 높은 인격 과 능력도 과장된 어조로 당당하게 서술하고 있다.
동원된 글자와 소재도 화려하고 감상적이며, 많은 구가 영탄조로 되어 있다. 수백 행에 이르는 장편 시에 알맞게 두 행마다 ‘혜(兮)’자를 넣어 두 행이 리듬의 한 단위가 되도록 함으로써 호흡을 길게 만들어 놓았다. 〈이소〉에는 신화의 세계로 출발하는 첫 부분의 위풍당당한 느낌을 고취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사적 고려가 작용하고 있다.
3강. 악부樂府와 한부漢賦
▪ 《악부시집》
한나라 때 유행했던 악부시의 원형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한나라 때의 악부시들은 고대 경전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중시되기 시작한 송나라 이후에 기록으로 정착된 것이 대부분이다. 고대의 악부 시를 수집해 놓은 책으로는 송나라 때 나온 곽무천(郭茂倩, 1041∼1099)의 《악부시집(樂府詩集)》 100권이 있다.
▪ 요가(鐃歌)
요가는 군중에서 부르던 노래인데 말 위에서 연주하여 사기를 북돋아 주는 목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 행진이나 잔치에서도 활용되었다. 요가의 내용 중에는 군대와 관련이 없는 애정과 관련된 노래도 많은데, 이에 대해 청나라 때 장술조莊述祖라는 학자는 “군대 음악으로서 의 요가는 단지 그 악곡만을 썼을 뿐이어서 그 가사가 꼭 군대와 관련될 필요는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강의 시 인용한 두 작품 <상야>와 <유소사>는 모두 요가에 속하는 노래이다.
▪ 풍간(諷諫)과 포진(鋪陳)
일반적으로 부는 기발한 상상과 화려한 수식, 허구적으로 설정된 인물을 이용한 대화체, 그리고 박학 에 기반을 둔 ‘포진(鋪陳)’ 등의 기법을 이용하여 ‘풍간諷諫’을 행하는 양식이라고 설명한다. 부는 거 의 유일한 독자인 왕을 설득하여 깨우치려는 분명한 목적의식 아래 풍자와 해학의 요소를 활용하여 허구적 내용을 나열하여 진술하는 이른바 포진의 방식으로 엮어 나갔다.
가 악부시
1 산문의 시대였던 전국시대가 지나가고 중국 대륙에 통일 제국인 한나라가 들어서자 《시경》 이 후 잠복했던 고대 시가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나라 때 중국인들의 정서와 생활 감정, 당시의 사회 풍조 등을 엿볼 수 있는 이 민가풍의 악부시들은 대부분 《시경》의 〈국풍〉을 연상시키듯 길이가 짧고 구어적이며 리듬이 소박하고 상식적이다.
2 시의 흐름으로 보아 읽는 운문이라기보다는 노래의 가사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텍스트를 중심으로 볼 때 이들 악부시에서는 《시경》의 〈국풍〉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복적인 짝수 리듬과 4자를 기본으로 한 정형화된 자수율이 보이지 않는다. 압운은 어느 정도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표현의 형태는 오히려 자유롭다.
<상야上邪>
上邪!
我欲與君相知, 長命無絶衰, 山無陵, 江水爲竭, 冬雷震震, 夏雨雪,
天地合, 乃敢與君絶!
<상야上邪>
하늘이시여!
우리 임과 서로 사랑하며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산언덕이 닳아 없어지고, 강물이 말라 멈추고,
겨울에 우르르 천둥 치고, 여름에 펑펑 눈 내리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붙기 전에는 임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답니다.
<상야>는 한나라 때 불리던 악부 민가로 사랑에 빠진 여인이 부르는 사랑의 맹세이다. 영원한 사랑 을 갈구하는 이 여인에게 이별은 불가능한 다섯 가지의 조건이 이루어진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다. 산 언덕이 닳아 없어지는 것, 강물이 말라붙는 것, 겨울에 천둥이 치는 것,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 하늘 과 땅이 하나로 붙어버리는 것, 이런 상황에 아니라면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얼마나 견고한 신념이며 얼마나 뜨거운 격정인가! 이 짧은 노래에 어떻게 이토록 큰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명나라 때 호응린胡應麟은 이 시를 짧은 노래 중에서 최고의 작품, 신품神品이라고 평하였다.
<유소사有所思>
有所思,乃在大海南。
何用問遺君,雙珠玳瑁簪,
用玉紹繚之。
聞君有他心,拉雜摧燒之。
摧燒之,當風揚其灰!
從今以往,勿復相思,相思與君絕!
雞鳴狗吠,兄嫂當知之。
妃呼狶! 秋風肅肅晨風颸, 東方須臾高知之!
그리운 임은 큰 바다 남쪽에 계신다네.
임께 무엇을 보내드릴까, 쌍구슬 달린 대모잠
옥으로 둘러 장식까지 마쳤는데,
임에게 딴마음 있단 말 듣고는 던져 분지르고 불살라버렸네.
분질러 불사르고 바람에 재를 날렸다네.
이후로는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끝이라네!
닭 울고 개 짖었으니 올케언니도 이 일을 알겠지.
아아!
가을바람 불어오고 새벽바람 차가운데
동방이 곧 밝아오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유소사有所思>
<유소사> 역시 한나라 때 불리던 악부 민가로 위 <상야>와 같이 요가鐃歌 18곡에 속하는 노래이 다. 이 시는 애인의 변심을 전해들은 여인의 좌절과 분노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애정시이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애인의 변심으로 인한 분노와 좌절 또한 크다. ‘계명구폐鷄鳴狗吠’ 이하에 대해서는 해 석이 분분하다. 남몰래 밀회를 즐기던 옛날을 생각하고 그 사랑을 가족들이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앞 으로 어떡하겠느냐는 뜻으로 보기도 하고, 애인의 변심이 자신을 믿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닌 가 해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소문이 났을 것이고 가족들도 다 알았을 것이라고 변심한 애 인에게 항변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요가는 군중에서 부르던 노래인데 말 위에서 연주하여 사기를 북돋아 주는 목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 행진이나 잔치에서도 활용되었다. 요가의 내용 중에는 군대와 관련이 없는 애정과 관련된 노래도 많은데, 이에 대해 청나라 때 장술조莊述祖라는 학자는 “군대 음악으로서의 요가는 단지 그 악곡만을 썼을 뿐이어서 그 가사가 꼭 군대와 관련될 필요는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위에 인용한 두 작품 <상야>와 <유소사>를 서로 연계된 사랑의 노래로 보기도 하는데, 애인의 변심을 전해 들은 후의 감정을 묘사한 것이 <유소사>이고,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거쳐서 마침내 도달한 사랑에 대한 확고해진 신념을 노래한 것이 <상야>라는 해석이다.
<부병행婦病行>
婦病連年累歲,
傳呼丈人前一言.
當言未及得言,
不知淚下一何翩翩.
屬累君兩三孤子,
莫我兒饑且寒.
有過慎莫笪笞,
行當折搖, 思復念之.
亂曰,
抱時無衣, 襦復無裏.
閉門塞牖, 舍孤兒到市.
道逢親交, 泣坐不能起.
從乞求與孤兒買餌,
對交啼泣, 淚不可止.
我欲不傷悲不能已,
探懷中錢持授交.
入門見孤兒,
啼索其母抱.
徘徊空舍中,
行復爾耳,
棄置勿復道.
<부병행婦病行>
부인이 병든 지 여러 해
한 말씀 올린다고 남편을 부르더니
말을 시작도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누나
“당신께 고아들을 맡깁니다.
애들이 주리고 춥지 않게 해주세요.
잘못이 있더라도 때리지 마시고요.
저는 곧 죽게 될 터이니 제 말을 제발 잊지 마세요.”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르길)
아이를 안아보니 외투 하나 없고 속도 없는 저고리만 달랑 걸쳤구나.
문 닫아걸고 창문을 틀어막고 아이 떼어놓고 시장으로 갔네.
길에서 친구 하나를 만나 주저앉아 우나니 일어날 수가 없네
아이 먹일 음식 살 돈 구걸하며
친구를 마주하여 우노라니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네
멈추지 못하는 슬픈 눈물에
친구가 품속을 더듬어 돈을 쥐어주네
집에 와 아이를 보니
울며불며 제 어미 품을 찾는구나 빈집을 이리저리 배회하나니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겠지
아서라, 더 말해 무엇하리.
이 작품은 오랜 병을 앓는 부인을 둔 한 집안의 비참한 상황을 통해 당시 극빈층 백성들의 참담함을 그려냈다. 앞부분은 부인이 남편에게 유언하는 모습이고, 이하는 부인이 죽은 뒤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이다. 시어의 조탁이 없고, 서술이 평이하다. ‘추위와 배고픔’의 주제는 전반부에서는 ‘아이들을 배고프고 헐벗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인의 눈물의 호소로, 중반에서는 친구를 만나 구걸하는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라는 암울한 절규를 통해서 거듭 나타난다. 기 본적인 삶의 조건조차 해결할 수 없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핍진하게 그려서 한대 악부시의 현실주의 적 특색을 잘 구현한 작품이라 하겠다.
나 한부
1 유협은 <문심조룡>에서 한대의 부에 대하여 “문인들은 대체로 창작 의도를 초사를 따라 하는 데 두어서 굴원의 여영餘影이 남아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부라는 것은 《시경》의 시를 짓 던 사람들에게서 생명을 받아, 초사에서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일반 적으로 부는 기발한 상상과 화려한 수식, 허구적으로 설정된 인물을 이용한 대화체, 그리고 박 학에 기반을 둔 ‘포진(鋪陳)’ 등의 기법을 이용하여 ‘풍간諷諫’을 행하는 양식이라고 설명한다.
2 한부는 대개 경제(景帝, 기원전 156∼기원전 141 재위) 때에 양효왕(梁孝王, ?∼기원전 144)의 정원인 양원(梁園)에서 지어지기 시작하여 무제(武帝, 기원전 141∼기원전 87 재위)와 선제(宣 帝, 기원전 73∼기원전 49 재위) 때에 본격적으로 성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는 거의 유일 한 독자인 왕을 설득하여 깨우치려는 분명한 목적의식 아래 풍자와 해학의 요소를 활용하여 허 구적 내용을 운문을 통해 엮어 나갔다.
3 현대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그것은 소설과 시의 중간 정도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 한 한부의 서사적 성격은 한부의 대표적 작가인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와 〈상림부上林賦〉 의 내용을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자허부(子虛賦)〉
仆對曰:唯唯。臣聞楚有七澤,嘗見其一,未睹其餘也。臣之所見,蓋特其小小耳者,名曰雲夢。雲夢 者,方九百里,其中有山焉。
“예, 신은 초나라에는 일곱 대택大澤이 있다 들었습니다만, 그중 한 곳을 보았을 뿐 나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본 곳은 일곱 대택 중에 가장 작은 곳으로 이름은 운몽택이라고 합니다. 운몽택은 사방 구백 리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산이 있습니다.
其山則盤紆茀鬱,隆崇嵂崒;岑崟參差,日月蔽虧;交錯糾紛,上干青雲;罷池陂陀,下屬江河。
산은 구절양장 높고 험하며, 솟구친 산봉우리가 들쭉날쭉 해와 달을 가립니다. 산줄기들은 첩첩 이어 져 어지러이 푸른 하늘에 닿고 산비탈은 가파르게 내려가 아래로 장강물로 이어집니다.
其土則丹青赭堊,雌黃白坿,錫碧金銀,眾色炫耀,照爛龍鱗。
그 토양 속에는 주사, 석청, 적토, 백악, 자황, 석회, 주석, 벽옥, 황금, 백은이 있어 온갖 색깔로 눈부 시게 용의 비늘처럼 반짝입니다.
其石則赤玉玫瑰,琳瑉琨吾,瑊玏玄厲,碝石碔玞。
그곳의 돌 중에는 적색의 옥석, 자색의 매괴, 임민, 곤오, 감륵, 숯돌로 쓰이는 흑석, 반백반적의 연석, 적색 바탕에 흰 무늬의 무부가 있습니다.
其東則有蕙圃:衡蘭芷若,芎藭昌蒲,茳蘺麋蕪,諸柘巴苴。
동쪽에는 혜초가 자라는 꽃동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두형, 난초. 백지, 두약, 궁궁, 창포, 강리, 미무, 사탕수수와 파초가 자랍니다.
其南則有平原廣澤,登降陁靡,案衍壇曼,緣以大江,限以巫山。
남쪽에는 평원과 호수인데, 오르락 내리락 지세는 기울어져 이어지고, 낮은 지역의 넓고 평탄한 땅은 장강을 따라 무산까지 이어집니다.
其高燥則生葴菥苞荔,薛莎青薠。其卑濕則生藏莨蒹葭,東薔雕胡,蓮藕觚盧、菴閭軒於,眾物居之,不 可勝圖。
그 높고 건조한 땅에는 마람, 냉이, 그령, 타래붓꽃, 쑥, 사초, 청번이 자라고 그 낮고 습한 땅에는 강 아지풀, 동장, 줄풀, 조롱박, 암려, 유초 등 온갖 식물들이 자라서 일일이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其西則有湧泉清池,激水推移,外發芙蓉菱華,內隱钜石白沙。其中則有神龜蛟鼉,瑇瑁鱉黿。
그 서쪽에는 솟구치는 샘과 맑은 연못이 있고 부딪혀 흐르는 물이 출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밖 에는 연꽃과 마름꽃이 피어 있고, 안에는 큰 돌과 흰 모래가 숨어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신령한 거 북, 교룡, 악어, 대모, 자라가 있습니다.
其北則有陰林:其樹楩柟豫章,桂椒木蘭,蘖離朱楊,樝梨梬栗,橘柚芬芳;
그 북쪽으로는 어둑한 숲이 있으니, 황편목, 남목, 장목, 계수나무, 산초나무, 목련나무, 황경나무, 산 리수, 주양목, 산사나무, 고욤나무, 귤나무, 유자나무가 있어 멀리까지 향기롭습니다.
其上則有鵷雛孔鸞,騰遠射幹;其下則有白虎玄豹,蟃蜒貙犴。
그 위로는 원추새, 공작새, 난새, 뛰어오르는 원숭이와 나무 타는 야간이 있고, 그 아래로는 흰 호랑 이와 검은 표범이 있고 맹수인 만연과 추한이 있습니다.
<상림부上林賦>
於是曆吉日以齊戒, 襲朝衣, 乘法駕, 建華旗, 鳴玉鸞, 游乎六藝之囿, 馳騖乎仁義之塗, 覽觀春秋之林,
이에 길일을 택해 재계하고 조복을 입고 수레에 올라, 화려한 깃발을 세우고 수레의 옥장식을 짤랑 이며 ‘육예’의 동산으로 놀러가, ‘인의’의 길을 치달리며 《춘추》의 숲을 구경하고,
射狸首, 兼騶虞,弋玄鶴, 建干戚,載雲罘, 揜群雅,悲伐檀, 樂樂胥,
‘살쾡이 머리’와 ‘추우’를 쏘고, ‘현학’을 쏘고, ‘도끼[干戚]’를 세우고, 구름 같은 그물을 펼쳐 까마귀 [雅] 떼를 잡고, 불우한 인재의 노래[伐檀]를 슬피 부르고, 인재를 얻은 왕의 기쁨[樂胥]을 노래한다.
修容乎禮園, 翶翔乎書圃, 述易道, 放怪獸, 登明堂, 坐淸廟, 次群臣, 奏得失, 四海之內, 靡不受獲.
《예기》의 정원에서 몸가짐을 닦고, 《상서》의 밭에서 날갯짓한다. 《주역》의 도리를 서술하고, 괴이한 짐승을 놓아 보내며, 명당에 올라 ‘청묘’에 앉아서 신하들을 모아 놓고 정치의 득실에 대한 상소를 들으니, 천하 백성들 가운데 은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도다.
於斯之時,天下大說,鄉風而聽,隨流而化,卉然興道而遷義,刑錯而不用,德隆於三王,而功羨於五 帝。若此故獵,乃可喜也。
이때를 당하여 천하가 크게 기뻐하고 풍속이 물 흐르듯 교화가 되어 크게 도가 일어나고 의로 옮겨
갔으며 형벌은 버리고 쓰지 않았으니, 덕은 삼왕보다 높고 공은 오제를 넘어섰도다. 이와 같은 옛날
의 수렵이어야 비로소 기뻐할 만한 것이로다.
若夫終日馳騁,勞神苦形,罷車馬之用,抏士卒之精,費府庫之財,而無德厚之恩,務在獨樂,不顧眾 庶,亡國家之政,貪雉兔之獲,則仁者不由也。
종일 말을 달리며 정신과 육신을 수고롭게 하고, 수레와 말을 곤비하게 쓰며, 사졸들의 정기를 훼손 하고 나라 창고의 재물을 허비하면서, 후덕한 은혜를 베풂이 없이 홀로 즐기기에만 힘쓰며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의 정치를 잊고 꿩과 토끼 얻는 것을 탐하는 것이니 어진 자가 따르지 않 는 바로다.
從此觀之,齊楚之事,豈不哀哉!地方不過千里,而囿居九百,是草木不得墾辟,而人無所食也。夫以諸 侯之細,而樂萬乘之侈,仆恐百姓被其尤也。”
이로 보건대 제나라 초나라의 일은 어찌 슬프지 않으랴! 땅이 사방 천 리를 넘지 않으면서도 임금의 동산이 구백 리나 되어 농사할 땅이 없으니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도다. 작디작은 제후국이 천자의 사치를 즐기고 있으니 나는 백성들이 그 폐해를 입을 것이 걱정이로다.
於是二子愀然改容,超若自失,逡巡避席,曰:“鄙人固陋,不知忌諱,乃今見教,謹受命矣.
이에 두 사람이 얼굴빛이 바뀌고 심히 슬퍼하여 뒤로 물러나 자리를 피하며 말하였다. “저희는 참으 로 비루하여 삼갈 것을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 가르침을 받았으니 근실히 분부하신 말씀을 받잡겠습니다!”
<자허부>와 <상림부>
1 자허라는 초의 사신이 제나라로 가서 왕의 수렵을 따라간다.
2 수렵이 끝난 후 제나라 왕이 자허에게 소감을 묻는다.
3 자허는 초나라 왕이 수렵을 하는 운몽택(雲夢澤)이 더 호화롭다고 응대한다.
4 오유선생(烏有先生)이 나서서 제나라를 멸시하는 자허의 태도가 결국 초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라 고 경고한다. (이상 〈자허부〉)
5 무시공(亡是公)이 두 사람을 비웃으며 천자가 수렵을 하는 상림(上林)의 웅대한 규모와 그 안의 온갖 사물들을 자세히 묘사한다.
6 그는 천자가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에 충실하여 천하의 백성들에게 은택이 두루 미쳤음을 지 적하면서 초나라, 제나라 왕의 사치를 비판한다.
7 자허와 오유선생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고 반성한다. (이상 〈상림부〉)
‘자허’와 ‘오유선생’, ‘무시공’과 같이 허구적으로 설정된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위의 줄거리는 분명히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성된 허구이다. 〈상림부(上林賦)〉에는 수렵을 비유로 삼아 왕이 문 교(文敎)를 기르고 예악을 흥성시킨 일을 칭송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가의 경전인 ‘육예’와 유가의 정 치적 지향점인 ‘인의’ 같은 어휘, 〈추우〉와 〈벌단〉같은 《시경》의 노래 구절, 그리고 순임금의 음악으 로 알려진 〈간척〉의 명칭 등이 두루 거론되어 있다.
왕실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이런 부는 이미 왕의 제도적인 옹호를 얻어 낼 만한 충분한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의 성공을 계기로 많은 유학자가 부의
창작에 나섰고 이러한 상황은 동한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었다. 한부는 형식적으로 보면 서정적이고 압축적인 운문과 서술적인 산문의 중간에 놓을 만한 모호한 상 태에 놓여 있었고, 또 부의 작자들도 이야기의 완결성을 통해 진지한 담론을 전개하는 데에 관심을 두기보다 지식의 나열과 화려한 묘사에 치중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한부의 서사적 성격은 약 화되어 버렸다. 또한 허구적 상황 설정을 전제로 하는 부의 내용이 동한 후기부터 합리적 사고와 실 질적인 태도를 중시하는 유학의 전반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는 점도 부의 몰락을 재촉했다.
문학사적 관점에서 한부는 이름을 밝힌 작가에 의해 ‘창작’된 어느 정도 형식적 원칙이 갖춰진 작품 이었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문학 양식에 매우 근접한 최초의 문체였다. 그러나 정작 한부의 작 자들은 자신들이 써낸 것을 예술적인 글로 인식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학문적 진리[眞]나 도덕적 선 함[善]과는 다른 의미에서 예술적 ‘아름다움[美]’의 가치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 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부는 서정적 운문과 서사적 산문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문 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고, ‘작가-작품’이라는 문학적 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은 글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진 위진남북조시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4강. 고시古詩 –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완적阮籍, 도잠陶潛
▪ 고시십구수
<고시십구수〉는 원래 민가였던 것이 동한 말엽에 여러 문인들의 손을 거쳐 오늘날 전해지는 형태로 다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당시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민초들의 힘겨운 삶과 애증, 인생의 무상함, 세태에 대한 불만 등을 침울한 분위기로 노래한 작품이 많다. 시상(詩想)의 전 개가 빠르고 다양한 수사법이 동원되었으며, 압운과 리듬의 구성, 대구의 운용 등 형식적 측면도 상 당히 잘 다듬어졌다. <고시십구수>는 중국 고전시 특유의 분위기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데에 성공함 으로써 오언고시가 악부시의 뒤를 이어 운문문학의 주도적인 양식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 로 평가된다.
▪ 완적
완적은 건안칠자로 유명한 완우(阮瑀, ?∼212)의 아들로 태어나 군웅쟁패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했던 삼국시대와 사마씨(司馬氏)가 위(魏) 왕조를 찬탈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다. 그런 시대 환경 속에 서 현실에 대한 환멸을 거듭 겪으며 살았던 완적의 시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불우’라는 관념 을 통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經世濟民] 유가적 가치관 의 구현을 삶의 궁극적 의의로 설정했으나 끝내 그것을 실현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만년의 완적은 타락과 불신으로 점철된 현실에 대한 혐오감을 가슴에 채우고 세상을 등진 채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침잠하여 우울한 심사를 달래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홀로 수레를 타고 길 끝까지 달리다가 끝내 목 놓아 통곡만 하고 돌아오곤 했다고 전한다[《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그리고 ‘죽림칠현(竹林 七賢)’이라는 부질없는 명성을 허리띠처럼 매고 다니며 생애 내내 자신을 둘러싼 불합리한 현실과 싸 우고 도피하기를 반복했다. 무려 82수에 이르는 그의 〈영회시(詠懷詩)〉에는 이런 심사가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모호한 상징의 방식으로 토로되어 있다.
▪ 도잠
도잠은 자가 원량(元亮) 또는 연명(淵明)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원래 이름이 연명이었는데 나중 에 잠(潛)으로 고쳤다고도 한다. 그는 몰락한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 맹가(孟嘉, 296∼349)의 집에서 자라났다. 그는 당시 동진의 명사였던 외조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 으며 노장사상과 유가 경전을 두루 공부했다. 그러나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그의 젊은 날의 큰 뜻은 문벌제도의 벽에 가로막혔고 결국 지방의 말단 관리로 전전해야 했다. 그 와중에 그는 환현(桓玄, 369∼404)의 반란과 유유(劉裕, 363∼422)의 전횡을 목도했고, 405년에는 81일간의 짧은 팽택현령 (彭澤縣令)직을 마지막으로 13년 동안의 벼슬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읊은 것이 바로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전원에서 유유자적하던 그였지만 집안 살림이 점점 기울면서 가난 에 시달렸고, 그나마 친우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이어가던 삶을 술 속에서 마감했다.
<고시십구수>는 민가가 동한 말엽에 여러 문인들의 손을 거쳐 오늘날 전해지는 형태로 다듬어진 것 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민초들의 힘겨운 삶과 애증, 인생의 무상함, 세태에 대한 불만 등을 침울한 분위기로 노래한 작품이 많다. 시상詩想의 전개가 빠르고 다양한 수 사법이 동원되었으며, 압운과 리듬의 구성, 대구의 운용 등 형식적 측면도 상당히 잘 다듬어졌다. <고시십구수>는 중국 고전시 특유의 분위기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오언고시가 악 부시의 뒤를 이어 운문문학의 주도적인 양식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문심조룡文心雕龍명시明詩》
그 구성과 문장을 보면 솔직하면서도 야하지 않으며, 완곡하게 사물을 묘사하여 비감이 가슴속에 사 무치니 실로 오언시의 으뜸이다.
《시품詩品》
글이 부드러우면서 아름답고, 뜻이 슬프면서도 깊고, 마음을 놀라게 하고 넋을 움직이니, 시의 글자 하나가 황금 천 냥과 맞먹는다고 할만하다.
<行行重行行>
行行重行行, 與君生別離.
相去萬餘里, 各在天一涯.
道路阻且長, 會面安可知.
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
相去日已遠, 衣帶日已緩.
浮雲蔽白日, 遊子不顧返.
思君令人老, 歲月忽已晩.
棄捐勿復道, 努力加餐飯.
가고 가고 또 가고 가시는가 임이여, 그대와 생이별이로구나.
만리도 넘게 떨어져 각자 하늘 한 모퉁이에 있구나.
험하고도 머나먼 길 만날 날을 어찌 알 수 있으랴?
호마는 북풍에 몸을 기대고 월조는 남쪽 가지에 둥지 튼다지.
헤어진 날 멀어질수록 허리띠는 나날이 헐거워지는데,
떠도는 구름이 밝은 해를 가렸는가 떠난 임은 돌아올 생각이 없다네.
그대 그리움에 몸은 늙어가 세월은 어느덧 저물었는데,
버림받은 일은 다시 말할 것 있으랴 밥이나 더 잘 먹도록 애써 봐야지.
<行行重行行>
이 시는 〈고시십구수〉 가운데 첫 번째 작품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생이별로 애태우는 여인의 심경 을 묘사하고 있다. ‘行行’을 반복한 표현 속에서 임이 떠나간 곳이 아주 먼 곳임을 알 수 있다. 돌아 올 기약조차 분명하지 않은 그 여정 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이 말라 간다. 또한 ‘行行’을 ‘항행’으로 읽으면, 남자는 징병되어 끝없이 줄지어 변방으로 끌려가는 사람 들 무리에 끼여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럴 경우 남자의 귀향은 더욱 요원 해진다. 게다가 빛을 가리는 구름, 곧 남자의 귀환을 방해하는 어떤 장애물로 인해 남자는 돌아올 생 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를 유혹한 아리따운 다른 여인일 수도 있고, 타락한 벼슬아치의 농간 혹은 국경을 위협하는 외적일 수도 있다. 결국 남겨진 여인은 긴 세월 그리움에 지쳐 몸도 마음도 시들어 간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녀는 색다른 심경의 변화를 토로한다. 혹시나 자신이 버림받은 건 아닐까 하 는 생각 따위는 내던져 버리고, 그 대신 애써 한 수저의 밥이라도 더 먹으려고 결심하는 것이다. 언 뜻 보면 이 진술은 모든 미련을 털어버리고 현재의 삶에나 충실하자는 체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러나 이것은 떠난 그 사람이 돌아오는 그때까지 건강을 지켜 죽음을 미루려는 그녀의 의지를다지는 선언이다. 설령 현실적으로 돌아올 기약이 전무하다 할지라도 이 여인의 ‘밥’은 끝까지 기다림을 포 기하지 않겠노라고 수없이 곱씹는 여인의 비장한 결의를 나타낸다.
<百年不滿百>
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晝短苦夜長, 何不秉燭游.
爲樂當及時, 何能待來茲.
愚者愛惜費, 但爲後世嗤.
仙人王子喬, 難可與等期.
<百年不滿百>
인생은 백 년도 못 되거늘 언제나 천년의 근심 품고 살지.
낮은 짧고 괴로운 밤은 기니 어찌 촛불 잡고 놀지 않으랴?
즐겁게 노는 것도 때에 맞춰야 하나니 어찌 내년을 기다리고 있으랴?
어리석은이는돈쓰는것을아까워하지만그저후세사람들의웃음거리가될뿐.
신선이 된 왕자교 같은 이가 있다지만 그와 같기를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는가.
〈고시십구수〉의 제15수인 〈생년불만백(生年不滿百)〉은 장대한 우주와 자연 앞에서 백 년이 채 안 되 는 인생의 덧없음을 인식하고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보내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박한 쾌락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오히려 이 노래는 겉으로 드러난 말의 이면에 내재된 화자의 역설적인 심경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대중 가요가 그렇듯이 보편적인 민중의 노래는 아픔을 아픔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른바 노동요(勞 動謠)처럼 현실의 고통과 힘겨움을 이겨 내기 위해 현실 자체와 상반되는 내용을 노래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阮籍(220∼263)
완적은 건안칠자로 유명한 완우(阮瑀, ?∼212)의 아들로 태어나 군웅쟁패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했 던 삼국시대와 사마씨(司馬氏)가 위(魏) 왕조를 찬탈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다. 그런 시대 환경 속에서 현실에 대한 환멸을 거듭 겪으며 살았던 완적의 시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불우’라는 관념을 통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經世濟民] 유가적 가 치관의 구현을 삶의 궁극적 의의로 설정했으나 끝내 그것을 실현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만년의 완 적은 타락과 불신으로 점철된 현실에 대한 혐오감을 가슴에 채우고 세상을 등진 채 老莊思想에 침잠 하여 우울한 심사를 달래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홀로 수레를 타고 길 끝까지 달리다가 끝내 목 놓 아 통곡만 하고 돌아오곤 했다고 전한다. 竹林七賢이라는 부질없는 명성을 허리띠처럼 매고 다니며 생애 내내 자신을 둘러싼 불합리한 현실과 싸우고 도피하기를 반복했다. 82수에 이르는 그의 〈詠懷〉 시에는 이런 심사가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모호한 상징의 방식으로 토로되어 있다.
<詠懷>
天網彌四野, 六翮掩不舒.
隨波紛綸客, 汎汎若浮鳧.
生命無期度, 朝夕有不虞.
列仙停修齡, 養志在沖虛.
飄飄雲日間, 邈與世路殊.
榮名非己寶, 聲色焉足娛.
採藥無旋返, 神仙志不符.
逼此良可惑, 令我久躊躇.
<詠懷>
하늘의그물사방의들에가득하니날개를덮어펼칠수가없구나.
세파에 분주히 흔들리는 나그네들 흔들흔들 물에 뜬 오리 떼 같구나.
생명은 도무지 기약이 없어 아침저녁도 예측할 수가 없네.
신선들은나이를멈출수있거니뜻을기르는건신선이되기위함이지.
구름과 태양 사이를 표홀히 떠다니니 세속의 길과는 너무도 다르다네.
영화와명예도내보물로여기지않거늘좋은노래와고운여인에어찌즐거우랴?
약초 캐러 갔다가 돌아오는 이 없으니 신선의 뜻과는 부합하지 않았네.
이런 일 당하면 진실로 당혹스러워 나는 하염없이 머뭇거리게 된다네.
운명의 굴레에 덧씌운 세상에서 시인에게는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물 위에 뜬 오리 떼처럼 무기력하게 세파에 떠밀리는 인간의 삶은 아침에 죽을지 저녁에 죽을지도 예측할 수 없는 짧고 덧없는 것이기만 하다. 시인은 세속의 오욕과 나약하기 그지없는 감정의 틀을 벗어나 신선처럼 초탈하게 살 수 있기를 갈망하지만, 그 역시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정하고 내심은 착잡 하기만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간을 붙들어 죽음을 막고 세상 밖을 노닐고 싶어도 “하늘로 오르는 계단은 끊어져 있고, 은하수는 멀고 다리도 없으니(〈詠懷詩〉 35수: 天階路殊絶, 雲漢邈無梁)” 어찌할 것인가라는 절망에 직면할 따름이다.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적 성취의 실패와 자기 존재의 의미 상실을 긴밀하게 연관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문학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작품을 남긴 특별한 개인들이 ‘불우(不遇)’함을 한탄하 는 문인들 속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학문과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때를 만나지 못해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때로는 자책으로, 때로는 불합리한 운명에 대한 원망으로 채워진 시의 창작으로 달래고자 했던 것이다. 완적은 사회적 성취의 실패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뇌를 시, 특히 오언고시의 형식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선 구적으로 보여 주었다. 완적은 오언고시의 표현 영역을 확대시켰으며 이후 오언고시가 지식인계층의 표현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陶潛(365∼427)
도잠은 자가 원량(元亮) 또는 연명(淵明)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원래 이름이 연명이었는데 나 중에 잠(潛)으로 고쳤다고도 한다.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죽은 후에 친우들이 정절(靖節)이라 는 시호(諡號)를 붙여 주어서 정절선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젊은 날의 큰 뜻 은 문벌제도의 벽에 가로막혔고 결국 지방의 말단 관리로 전전해야 했다. 그 와중에 환현(桓玄, 369 ∼404)의 반란과 유유(劉裕, 363∼422)의 전횡을 목도했고, 405년에는 81일간의 짧은 팽택현령(彭澤 縣令)직을 마지막으로 13년 동안의 벼슬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읊은 것이 바로 유명 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전원에서 유유자적하던 그였지만 집안 살림이 점점 기울면서 가난에 시달렸고, 그나마 친우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이어가던 삶을 술 속에서 마감했다.
<飮酒>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辯已忘言.
<飮酒>
사람사는곳에초가집엮었는데수레와말소리시끄럽게들리지않네.
묻노니 그대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멀어지면 땅도 절로 치우치기 마련이지.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고 느긋하게 남산을 바라보네.
산 기운 저물녘이라 아름답고 나는 새들은 더불어 둥지로 돌아가네.
이가운데참뜻이있을터말로설명하자니이미언어를잊었다네.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도 속세의 소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언뜻 ‘一切唯心造’라는 불 교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지만 굳이 양자를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 자연을 통해 홍진 세상을 벗어 나려는 시인의 마음은 무서리 속에 피어나는 국화와 같은 사대부의 지조에 의한 것이며, 날이 저물 어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처럼 자연스러운 회귀의 본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바로 그런 삶 속에서 시인은 자연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어울려 사는 ‘참된 뜻’을 체득한다. 그러나 그 체득은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술에 이 시의 또 다른 맛이 담겨 있다. 본격적인 시 인의 등장이란 이처럼 개인의 특수한 사색과 깨달음을 시의 형식으로 나타냄으로써 일상적인 정서에 바탕을 둔 민간의 노래나 시가보다 한층 지적이고 심오한 철학의 세계를 담아내게 된다는 데에 의의 가 있다. 완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잠 역시 타인과 공유하기 어려운 특별한 세계관과 정서를 시 로 승화시키는 본격 시인의 등장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훌륭한 표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讀山海經>
自古皆有沒, 何人得靈長.
不死復不老, 萬歲如平常.
赤泉給我飮, 員丘足我糧.
方與三辰游, 壽考豈渠央.
<讀山海經>
예로부터다들죽어갔는데그누가신령하게오래살수있었으랴?
죽지도않고또늙지도않으면만년세상을변함없이살겠지.
적천은 나에게 마실 물을 주고 원구산에는 먹을 양식 충분하다네.
비로소일월성신과함께놀것이니수명이어찌홀연끝날일이있으랴?
죽음은 자연 만물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남북조 시기를 풍미했던 도교의 신선설에서 내 세우는 신선은 그런 숙명을 뛰어넘는 존재이다. 신선은 광대한 우주 앞에서 초라한 인간의 불사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악한 부조리에 얽힌 세상에서 덧없는 삶을 사는 인간의 부질없는 열망일 뿐이다. 그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시인은 《산해경》에서 제시하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미련 을 떨치지 못한다. 인간 존재의 부질없음에 대한 자각과 불사의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의 정신 적 갈등은 13수에 이르는 〈독산해경〉에서 다양한 소재를 통해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止酒>
居止次城邑, 逍遙自閑止.
坐止高蔭下, 步止蓽門裏.
好味止園葵, 大歡止稚子.
平生不止酒, 止酒情無喜.
暮止不安寢, 晨止不能起.
日月欲止之, 營衛止不理.
徒知止不樂, 未信止利己.
始覺止爲善, 今朝眞止矣.
從此一止去, 將止扶桑涘.
淸顔止宿容, 奚止千萬祀.
<止酒>
사는 것은 성읍에 사는 것으로 그치고 소요함은 절로 한가로움에서 그친다.
앉는건높은그늘밑에그치고걷는건사립문안에그친다.
좋아하는 맛은 텃밭의 아욱에서 그치고 큰 기쁨은 어린 아들에서 그친다.
평생토록 술을 그치지 않았으니 술을 그치면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이라.
저녁에 그치면 편히 자지 못하고 아침에 그치면 일어나지 못한다.
항상 그치려 했건만 몸의 기능이 그쳐서 작동하지 않음이라.
그저그침이즐겁지않다는것만알뿐그침이몸에이롭다는건믿지못하였다.
비로소 그침이 좋다는 걸 깨달았으니 오늘 아침에는 진실로 그쳐야 할 것이라.
지금부터 일단 그치고 나면 신선 나라 부상의 물가에 그치게 되겠지.
맑은 얼굴은 변치 않는 얼굴에 그치려니 어찌 천만 년에서 그치겠는가!
시인의 등장은 언어에 대한 깊은 탐색을 수반한다. <지주止酒>의 ‘지止’는 ‘술을 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지止’라는 한자는 의미가 매우 다양한다. 살다[居住], 이르다[至, 到], 멈추다[停止], 그만두 다[終止], 만류하다, 붙잡아 두다[扣留], 사로잡다[俘獲], 기다리다[等待], 제지하다[制止], 줄이다[減 省] 등등.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 시의 해석은 상당 부분 달라질 수 있어서 ‘술을 끊는다[止酒]’는 내 용 또한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始覺止爲善 비로소 계속 마셔도[扣留] 좋음을 깨달았으니
今朝眞止矣 오늘 아침에는 정말로 (술상 앞에) 나아가야겠다[至].
시인의 뜻이 술을 끊겠다는 것인지 줄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부터 마음 놓고 마시겠다는 것 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이처럼 해석의 다양성을 내포한 해학은 이른바 ‘언어의 놀이’에 따른 결과 이며, 시의 예술성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하게 된다.
5강. 당시1 – 이백, 두보, 왕유
▪ 이백의 규정시
빼어난 착상과 절묘한 묘사가 돋보이는 이백의 규정시(閨情詩)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잘 보여준다. 규방 여인의 원망을 담은 노래는 이미 《시경》과 한나라 악부 민가에서부터 자주 발견할 수 있으며, 고대 중국에서도 수많은 시인들의 영원한 주제가 되었으나 규정시 가운데 상투적인 한탄을 벗어난 진정으로 뛰어난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가부장제적인 고대 중국의 예교 사회에서 이성 간의 그리움이나 원망을 표현해 내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규방 여인의 절 절한 감정을 문학적으로 수준 높게 묘사한, 민가의 틀에 얹어진 이백의 규정시는 흔치 않은 훌륭한 사례이다.
▪ 이백의 음주시
이백의 생애는 거의 술과 여행의 연속이라고 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술과 산수풍경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술은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언급이 없는 시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자주 등 장하는 소재이다. 이는 그의 현실적 고뇌와 초월적 인생관을 표현하는 매체로 술만큼 유용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주를 소재로 한 이백의 시 가운데에는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 〈월하 독작(月下獨酌)〉, 〈동야취숙용문각기언지(冬夜醉宿龍門覺起言志)〉, 〈장진주(將進酒)〉 등 대표작으로 꼽 을 만한 작품이 수없이 많다.
▪ 두보와 시사(詩史)
안녹산(安祿山, 703?~757)의 난은 두보의 삶에 커다란 전환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목도한 백성들 의 참상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시를 지었는데, 바로 ‘삼리삼별(三吏三別)’로 불리는 6편의 작품이다. ‘삼리’는 〈석호리(石壕吏)>,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를 가리키고, ‘삼별’은 〈신혼별(新婚別)〉, 〈무가별(無家別)〉, 〈수로별(垂老別)〉을 가리킨다. 민가적인 시의 틀과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을 성공 적으로 융합시킨 이 작품들로 인해 훗날 그의 시에는 ‘시사(詩史)’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 왕유와 시불(詩佛)
당나라 전기 산수전원시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흔히 왕유(王維, 701∼761)를 꼽는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여생을 마친 그는 차분하고 탈속적인 기풍의 시를 많이 남겨 중국 문학사에서 흔히 ‘시불 (詩佛)’이라고도 불린다.
李白(701∼762)
이백은 자가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또는 적선인(謫仙人)이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났고 검술에도 능하여 협객들과 어울릴 정도로 자유분방했으며, 20대 초에는 강남 지 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친구를 사귀고, 한때 도교 사원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결혼하여 처가가 있는 호북성(湖北省) 안륙현(安陸縣)에서 10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는 41세 무렵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 으로 가서 한림학사에 임명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참소를 당해 내쫓겼다. 평소 꿈꾸던 정치 개혁의 포부를 접을 수밖에 없게 된 그는 약 10년 동안 장강 유역을 떠돌며 한때 도사가 되어 생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영왕(永王)의 막료로서 반란의 평정에 참여했다가 훗날 영왕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백 역시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감 형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얼마 후 사면되었으며 이후 강남 일대를 유랑하다가 병사했다.
이백은 두보와 함께 중국 고전시의 쌍벽을 이루는 시인이다. 중국 문학사에서 그는 흔히 ‘시선(詩 仙)’이라 불리며, 두보와 더불어 ‘이두(李杜)’라고 칭해진다. 이백은 당나라 전성기의 활달한 기상과 낭만적 분위기를 자유분방하고 기발하게 시로 승화시켰다. 그의 시에는 즉흥적이고 풍부한 상상의 힘이 넘친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그의 시는 1,000여 편으로, 후세 사람들이 엮은 《이태백집(李太 白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파란만장했던 생애만큼이나 내용이 다양하고 형식도 자유롭다. 도가적인 신선의 세계를 추구한 시, 우국충정을 담은 시, 사대부적 포부를 담은 시, 유흥과 풍류의 감흥을 담은 시 등 다양한 그의 시에는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자신의 천성과 사대부로서 지녀야 하는 사회적 책임감 사이의 갈등이 두루 뒤섞여 있다. 이백의 시에는 음주, 산수, 규방의 정서, 사랑과 이 별, 여행, 신선 세계, 생로병사의 애환, 전쟁 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한마디로 그 를 낭만시인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怨情>
美人卷珠簾, 深坐顰蛾眉.
但見淚痕濕, 不知心恨誰
<怨情>
미인은 주렴을 걷고 깊숙이 앉아 고운 눈썹 찡그리네.
그저 젖은 눈물 자국만 보일 뿐인데 마음으로 누굴 원망하는지 알 길이 없네.
이 시에는 시작과 동시에 주렴을 걷는 미인이 등장한다. ‘미인’이라는 단어와 ‘주렴’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녀가 지체 높은 집안의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해 놓았다. 주렴을 걷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구에서 눈썹을 찡그린다는 것은 주렴을 걷고 기
다린 누군가가 끝내 오지 않아 실망하게 된 표정이다. 시인은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를 생략한 채 하나의 움직임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의 정적인 장면만을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풍부한 상상을 유도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은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을 기다림과 슬픔에 젖게 만드는 그는 누구일까 하는 수수께끼로 마무리된다. 이백은 20자의 짤막한 절구에서 한 여인의 애절하고 기나긴 기다림과 그에 따라 깊어지는 슬픔, 나아가 그녀에 대한 연민을 풍성하게 담아 놓았다. 미인의 모습 과 심리를 짧고 간결하게 묘사하면서도 곱씹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子夜吳歌 秋歌>
長安一片月, 萬戶搗衣聲.
秋風吹不盡, 總是玉關情.
何日平胡虜, 良人罷遠征.
<子夜吳歌 秋歌>
장안엔 조각달 하나 떠 있는데 집집마다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
가을바람은 끝없이 불어오는데 모두가 옥문관의 정이 실려 있네.
언제나 오랑캐를 평정하여 그이의 먼 출정이 끝날까?
〈자야오가〉는 총 4수로 각기 춘하추동 사계절의 노래로 구성되어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라고도 불 린다. 조각달이 떠 있는 아름다운 가을밤, 장안의 여인들은 집집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듬이질로 마음을 달랜다. 1∼2구의 ‘일편(一片)’과 ‘만호(萬戶)’, 달빛과 소리의 절묘한 대비를 통해 계절이 운치 있게 묘사되어 있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추(秋)’자가 연상시키는 ‘수심의 바람[愁風]’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징병되어 변방에 나가 있는 남편의 ‘정(情)’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아내에 대한 그 리움과 머나먼 북방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시시각각 시달리는 외로움과 향수(鄕愁), 한순간도 늦출 수 없는 긴장 속에서 겪어야 하는 전투에 대한 걱정과 죽음의 두려움 등을 전하는 자연의 메신저이 다. 마지막 두 구절은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아내의 소박한 심 정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민가 특유의 진솔한 감정 표현을 최대한 살렸다.
<月下獨酌>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游, 相期邈雲漢.
<月下獨酌>
꽃사이에 술 한병 가까운 벗하나 없어 홀로 마시네.
잔을 들어 밝은 달 불러오니 그림자와 짝을 이루어 세 명이 되었네.
달이야 원래 술마실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내 몸짓만 따라할 뿐이건만
잠시 잠깐 달과 그림자 데리고서 이 좋은 봄날을 때맞춰 즐겨보려네.
내가 노래하면 달은 오락가락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어절씨구.
깨어 있을 때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지네.
변함없는 사귐을 길이 맺으며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길 기약하네.
이백의 시에는 술과 산수풍경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술은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언급이 없는 시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그의 현실적 고뇌와 초월적 인생관을 표현하 는 매체로 술만큼 유용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음주를 소재로 한 시 가운데에는 〈山中與幽人 對酌〉, 〈月下獨酌〉, 〈冬夜醉宿龍門覺起言志〉, 〈將進酒〉 등 대표작으로 꼽을만한 작품이 수없이 많다. 〈월하독작〉은 총 4수의 연작시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언뜻 보면 좋은 봄날을 놓치기 아쉬워 급 한 대로 달과 그림자로 술친구를 삼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굳이 희로애락 같은 인 간적 감정이 없는 자연의 사물을 술친구로 삼은 것은 사회적 부조리와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 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지기(知己)를 더 이상 찾지 않겠다는 선언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발 디딘 대지를 거부하고 ‘아득한 하늘나라’를 꿈꾸는 극한의 소외감과 고독을 토로한다.
<望終南山寄紫閣隱者>
出門見南山, 引領意無限.
秀色難爲名, 蒼翠日在眼.
有時白雲起, 天際自舒卷.
心中與之然, 托興每不淺.
何當造幽人, 滅迹棲絶巘.
<望終南山寄紫閣隱者>
대문을 나서니 종남산이 보여 고개 내밀고 바라보며 한없이 마음 끌렸소.
빼어난 경치는 형용하기 어려운데 짙푸른 녹음 날마다 눈에 비치오.
이따금 흰 구름 일어나 하늘 끝에서 절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오.
내 마음 그 구름과 함께 하나니 감흥을 기탁함이 늘 얕지 않다오.
어찌하면 숨어 사는 이 찾아가 세상을 끊고 높은 봉우리에 살 수 있을까요?
젊은 시절부터 도교에 관심에 많았던 이백의 시에는 신선 세계에 대한 언급이 많다. 이백은 신선 세계를 형상화하고 그 안에 자신의 내면세계를 융합함으로써 중국 문학사에서 ‘시선’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다. 종남산의 흰 구름은 고결한 존재인 신선이나 은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제5,6구의 ‘서권 (舒卷)’에는 시대 환경에 따라 선비가 뜻을 펼치거나[舒] 뜻을 거두고 물러남[卷]을 가리키는 의미도 들어있다. 이렇게 보면 제7∼8구는 뜻을 펼칠 수 없는 시대의 한계를 인정하고 고결한 은자들과 더 불어 자신도 세상과 단절된 까마득한 봉우리로 물러가 살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을 마음속에 늘 품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백의 세계는 냉혹하고 덧없는 현실과 황홀하지만 일순간에 지나 지 않는 몽환 사이의 끝없는 길항(拮抗)으로 유지된다. 소망을 상실한 현실 세계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지대한 욕망과 끝없이 발목을 잡아채는 현실의 폭압 사이의 경계에 그만의 ‘작은 우주’가 있는 것이다. 불행한 시대의 천재가 안주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머뭇거리던 바로 이 ‘작은 우주’의 시적 경 계야말로 현대적 용어로 번역하자면 ‘문학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杜甫(712∼770)
하남성(河南省) 공현(鞏縣)에서 태어난 두보는 자가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다. 좌습유 (左拾遺) 및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라는 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두습유(杜拾遺) 또는 두공 부(杜工部)라고도 불린다. 30세 무렵까지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중원 일대를 유랑했으며, 결혼한 뒤
로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 근교에 정착해 살았다. 35세부터 44세까지는 줄곧 장안에서 벼슬살이의 기회를 찾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나중에 간신히 무기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 관직인 주조 참군(冑曹參軍) 자리를 얻었다. 실의와 가난에 시달리던 그 기간 그는 부패한 지배체제의 실상을 깨 달았고 가난한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했다. 당시 그의 현실 인식은 〈병거행(兵車行)〉, 〈여인행 (麗人行)〉,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같은 비판적인 작품에 담겨 있다.
뒤이어 일어난 안녹산(安祿山, 703?~757)의 난은 그의 삶에 커다란 전환기가 되었다. 한때 반란군에 게 억류되었던 그는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유명한 〈춘망(春望)〉과 〈월야(月夜)〉, 〈애강두(哀江頭)〉 등 의 작품을 지었다. 그 후 장안을 탈출하여 봉상(鳳翔)에 피신해 있던 숙종(肅宗, 756∼762 재위)을 찾아갔으며 간관(諫官)인 좌습유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진 재상 방관(房 琯, 697∼763)을 옹호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섬서성 화주(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 천되었다. 이후 그는 그간 목도한 백성들의 참상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시를 지었는데, 바로 ‘삼리삼 별(三吏三別)’로 불리는 6편의 작품이다. ‘삼리’는 〈석호리(石壕吏)>,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 吏)〉를 가리키고, ‘삼별’은 〈신혼별(新婚別)〉, 〈무가별(無家別)〉, 〈수로별(垂老別)〉을 가리킨다. 민가적인 시의 틀과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을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이 작품들로 인해 훗날 그의 시에는 ‘시사 (詩史)’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전쟁과 기근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화주에 부임한 이듬해에 벼슬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이 곳저곳을 떠돌다가 당시 사천절도사(四川節度使)로 있던 엄무(嚴武, 726∼765)가 있는 성도(成都)로 갔으며, 엄무의 도움으로 성도 초당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엄무가 죽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기주(夔州)를 거쳐 호북(湖北)과 호남(湖南) 일대를 떠돌다가 배 위에서 병사했다. 48 세에 화주를 떠난 이후 죽을 때까지 그는 〈춘야희우(春夜喜雨)〉,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 歌)〉, 〈영회고적(詠懷古跡)〉 5수, 〈등루(登樓)〉, 〈촉상(蜀相)〉, 〈등고(登高)〉, 〈추흥(秋興)〉 8수, 〈삼절구 (三絶句)〉 등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남겼다.
두보는 옛 시가의 틀을 잘 가다듬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5언의 장편 형식으로 지은 ‘삼리삼별’ 같은 작품들은 악부시의 틀을 일신시켜 새로운 형식을 개척해 낸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그의 악부시들은 훗날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원진(元稹, 779∼831) 등에 의해 전개된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언율시와 칠언 율시의 형식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률(聲律)과 대장(對仗)의 구사가 완벽한 그의 시에는 거의 교과서라고 할 만한 시 창작의 법칙성이 갖춰져 있다. 나아가 그는 법칙을 넘어선 자유로운 ‘요체(拗體)’까지 다양하 게 모색했다. 그의 엄밀한 시 창작 태도와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본받고자 했던 북송의 황정견(黃庭 堅, 1045∼1105)을 비롯해서 명청시대의 수많은 시인으로부터 두보는 중국 시의 조종(祖宗)으로 추 앙받았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두보의 시는 1,400여 수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1,000수 정도가 근체 시인 율시와 절구이며 나머지는 고시와 악부시이다.
<春望>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나라는 깨어져도 산하는 남아 성에 봄이 드니 초목 우거지는데,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시절에 가슴 아파 꽃을 보고도 눈물 뿌리고 이별 한스러워 새소리 듣고도 가슴 철렁인다.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봉화가 삼월 내내 이어지니 가족의 편지는 만금의 값이라.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흰머리 긁을수록 더욱 성기어져 이젠 정말 비녀도 이기지 못할 듯.
<春望>
유가적 사대부의 삶을 지향했던 두보는 우국충정을 절실하게 토로한 시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의 〈춘망(春望)〉은 유가 사대부의 충정을 절실하게 그려 낸 오언율시이다. 이 시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 나 반군이 당 왕조의 수도 장안을 점령했을 때 숙종의 행재소를 찾아가던 두보가 포로로 잡혀 억류 되어 있는 동안에 지어졌다. ‘침울비장(沈鬱悲壯)’이라고 불리는 두보의 시풍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보는 봉건체제의 권력의 핵심인 왕조의 통치 시스템이 붕괴된 사건이 자신이 직면한 모 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우국충정을 주제로 한 두보의 이런 시들은 당시 왕조의 지지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통치 시스템을 안정시키고자 애썼던 후 대의 지배계층에게도 공공적 텍스트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다. 두보는 중국 문학사상 흔치 않은 애 국시인의 한 사람으로 애호를 받았다.
<秋興1>
玉露凋傷楓樹林, 巫山巫峽氣蕭森. 옥 같은 이슬에 단풍나무 숲 시들고 무산 무협의 기운 스산한데,
江間波浪兼天湧, 塞上風雲接地陰. 강 물결은 하늘까지 치솟고 변방의 풍운은 땅에 닿아 음산하다.
叢菊兩開他日淚, 孤舟一繫故園心. 국화 떨기 두 번 핀 것은 지난날의 눈물 외로운 배 한 척 묶여 있는 것은 고향 그리는 마음.
寒衣處處催刀尺, 白帝城高急暮砧. 겨울옷 짓느라 여기저기 가위 자를 재촉하고 백제성 높은 곳에 저녁 다듬
이 소리 급하다.
<秋興2>
夔府孤城落日斜 每依北斗望京華 기주의 외로운 성에 석양이 기울 때면 매양 북두성에 의지해 경사를 바라본다.
聽猿實下三聲淚 奉使虛隨八月槎 원숭이 우는 소리 세 번 들으며 눈물 떨구고 사신의 임무 받들어 헛 되이 팔월의 뗏목을 따랐다.
畫省香爐違伏枕 山樓粉堞隱悲笳 상서성의 향로는 몸져누워 어긋났는데 누대와 성곽에는 슬픈 갈잎 피리 소리 은은하다.
請看石上藤蘿月 已映洲前蘆荻花 돌 위 등나무의 달을 보아라 이미 모래톱 앞 갈대꽃을 비추고 있으니.
<秋興>
두보는 정련된 언어와 화려한 수사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다. 칠언율시 〈추 흥(秋興)〉은 좋은 예이다. 이 시는 대력 원년(766) 두보가 56세 되던 해에 기주에서 지은 것이다. 여 덟 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지만 전후의 맥락이 하나로 이어져 강한 통일성이 느껴진다. 전체적인 내 용은 기주에 머물던 어느 가을날 장안을 추억하며 느낀 소회를 피력한 것이다. 이를 두 부분으로 나 누어 살펴보면, 앞의 세 수는 기주에서 장안에 대한 추억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뒤의 다섯 수는 장안 에 대한 추억에서 기주의 경물로 되돌아오는 방식을 취했다. 이와 같은 짜임새 덕분에 여덟 수에 유 기적인 일체감이 형성될 뿐만 아니라 매 수에도 수미호응의 장치를 마련해 구조적으로 탄탄한 감을 준다. 시에 반영된 정서는 다소 쓸쓸하고 우울해 보인다. 기주에서 본 경물을 장안과 연결지은 허실 상생虛實相生의 수법 속에 인생의 무상함과 두보 자신의 무력감이 짙게 배어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보 기주 시기의 사상과 감정이 연작시의 틀 속에서 잘 드러난 칠언율시의 명편이라 할 것이다.
위에 소개한 작품 중 첫 번째 작품은 가을을 맞아 떠도는 생활을 마음 아파한 것이다. 앞의 네 구 는 시사를 반영한 것으로 난리통의 쇠락한 모습을 비장한 정서로 드러냈고, 뒤 네 구는 가을날의 슬 픈 심사를 적은 것으로 국화와 외로운 배를 가지고 처량함을 잘 그려냈다. 둘째 수는 기주의 저녁 경치를 바라보며 경사를 그리워한 것이다. 삼협을 울리는 원숭이 울음소리에 마음이 처연하여 굴곡 많았던 평생의 벼슬살이를 아픔 속에 추억하고 있다. 기주 백제성에 울리는 갈잎피리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 강가의 갈대꽃에 부서지는 달빛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명나라 두보시 주 석가인 왕사석王嗣奭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추흥팔수>는 첫째 수로 감흥 을 일으키고 다음 일곱 수가 모두 내심의 소회를 피력하면서 혹은 위를 이어받고 혹은 아래를 일으 키고 혹은 서로 시상을 열고 혹은 멀리 호응하면서 전체가 한 편의 작품이 되었으니, 한 수를 없애 도 안 되고 한 수만 따로 골라내도 안 된다.”
王維(701∼761)
당나라 초기에는 문화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다양한 모색과 통합이 이루어졌다. 시의 영역에서도 새 로운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많은 성과가 나타났다. 이 가운데에는 산수자연의 아름 다움과 전원생활의 즐거움 등을 주제로 한 시의 창작도 많이 이루어졌다. 남북조시대의 도잠(陶潛, 365∼427)과 사영운(謝靈運, 385∼433)에게서 시작된 시적 경향을 계승한 산수전원시의 흐름은 당나 라 전기에 유행한 불교 및 도교의 관념적인 사유와 어우러져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당나라 전기 산수전원시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흔히 왕유를 꼽는다. 조숙한 천재로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던 그는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부의 관직을 역임했다.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정치적 곤 경에 처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원만한 관직 생활 끝에 재상의 직위에 해당하는 상서우승(尙書右丞)까 지 역임했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여생을 마친 그는 차분하고 탈속적인 기풍의 시를 많이 남겨 중국 문학사에서 흔히 ‘시불(詩佛)’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시와 그림 모두 뛰어나 송나라 때의 소식(蘇軾, 1037∼1101)은 그의 시에 그림이 담겨 있고 그림에 시가 담겨 있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왕유의 시풍은 장안 근처에 별장을 지어 놓고 벼슬을 하면서 은거 생활을 겸했던 독특한 생활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過香積寺>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峰.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鐘.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
薄暮空潭曲, 安禪制毒龍.
<過香積寺>
향적사는 어디 있는가? 몇 리를 걸어 구름 낀 봉우리로 들어간다.
오래된 나무숲엔 사람 다니는 길도 없는데 깊은 산 어디에서 종소리 들려오는가?
샘물 소리 높은 바위에 낮은 소리로 흐르고 햇살은 푸른 소나무에 싸늘히 비친다.
저물녘 굽은 못 고요히 비어 있음은 좌선하여 못된 용을 제압했기 때문이지.
이 시에서 향적사는 특정한 절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동시에 불법(佛法)이 존재하는 곳 을 상징하기도 한다. 시에는 단순히 종소리와 소리 없이 흐르는 샘물, 그리고 고요하게 비어 있는 못 의 모습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만으로도 절이라는 것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자 욱한 안개 속을 헤매는 나그네 같은 인생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샘물 소리마저 가둬 버리는 고요하고 청정한 곳이며, 나아가 세상에 재앙을 일으키는 못된 용도 제압하는 평온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의 고승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미련(尾聯)에 대해서는 “해질녘 빈 못 굽 이에서 편안히 좌선하며 탐욕을 씻으리라”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즉, 《열반경(涅槃經)》에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못된 용의 이야기가 있으니, 시인이 이것을 차용하여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탐욕과 번뇌에 비유했다고 풀이하는 것이다. 결국 절을 둘러싼 산의 풍경이 세속의 모든 때와 번뇌를 씻어 줄 만하기에 굳이 절 자체에 이르지 않고 도 저절로 참선할 마음이 일어나게 만든다는 뜻이다
비록 불교의 분위기에 감화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문인은 결국 승려가 아니라 관찰자에 가깝다. 그 렇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참선의 오묘한 내용이나 그를 통한 깨달음 자체를 제시하기보다는 선승 (禪僧)들이 참선을 통해 이룩한 경지에 대한 ‘홍탁(烘托)’의 묘사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달을 묘사 하되 직접 그것을 그리지 않고 밤하늘의 구름과 어둠을 그림으로써 간접적으로 달을 드러내는 것처 럼 주변의 묘사를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은근히 보여 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거사(居 士)’로서 사대부 시인들은 산사의 암자에 묻혀 속세와 연을 끊은 승려들과 는 달리 불교와 참선의 정취를 일상의 삶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6강. 당시2 – 이하李賀, 이상은李商隱
▪ 이하와 피휘
피휘란 본래 글을 쓸 때 군주나 조상의 이름에 들어 있는 글자 대신에 뜻이 비슷한 다른 글자를 사 용함으로써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행위였는데, 당나라 때의 관습에는 그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져서 똑같은 글자뿐만 아니라 발음이 같은 글자까지 피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의 부친 이름이 이진숙(李晉肅)이었기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하가 ‘晉’자와 발 음이 같은 ‘진사(進士)’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하의 출세를 막고자 했던 이들의 이런 불합리한 비판에 대해 동조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서 당시 21세였던 이하는 결국 진사 시험에 응시하지 못했다.
▪ 비틀린 언어
이하는 병약한 몸과 현실에 대한 좌절로 인해 세속적 삶에 환멸을 느끼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문 학에서 찾았으며, 그로 인해 선택한 표현 방법이 비극적 상징이었다. 그의 비극적 상징은 병적인 심 리 상태와 초사의 전통이 예술적으로 융합된 결과물이었으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본질 적으로 부조리와 모순이 없는 희망의 신세계였다. 다만 그러한 신세계가 시인 자신의 현실 속에서 당장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묘사하는 시인의 언어는 표면적으로 ‘비틀리고’ 기괴 함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결국 이하의 비극적 상징은 단순히 개인적 측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전체에 대한 광대하고 보편적인 상징이었던 셈 이다.
▪ 이상은의 무제시
이상은의 시는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하게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이른바 무제시(無題詩)가 많다. 그 의 시에는 대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복잡하고 미묘한 애정,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과 포부에 대한 미련, 화려한 지난날에 대한 회상과 회환 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어 일견 상식적인 관점에서 주제를 파악해 내는 일이 쉽지 않다. 이렇게 모호할 정도로 복합적이고 복잡한 주제와 시상을 표현 하는 데에 걸맞은 효과적이고 절묘한 표현 방법과 특이한 기교가 그의 시에서 성공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 상징과 은유
이상은 시의 난해성과 모호성은 고의적으로 조성해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의 시의 특색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누면 우선 상징과 은유의 구사가 매우 뛰어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상은의 시는 상 징과 은유를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상투적으로 구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등장하는 상징과 은유 가 신선함과 예리함을 느끼게 한다.
李賀(790?∼817?)
흔히 ‘詩鬼’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하는 유미주의적 성향을 띤 강렬한 상징적 언어를 구사하고 염 세적 소재를 절묘하게 활용하여 독특한 시 세계를 개척한 시인이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그의 시 는 서양의 현대 상징주의 시와 유사성이 논의되면서 더욱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하는 당나라 高 祖 李淵(618∼626 재위)의 숙부였던 鄭王 李亮의 후손으로, 출신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쇠락한 가 문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 재능이 널리 드러났기 때문에 그러한 책임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그를 시기하던 이들은 당나라 때에 널리 퍼져 있던 과도한 ‘避諱’의 관습을 이용하여 집요하게 그를 비판 했고,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벼슬살이에서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이후 그는 3년 동안 종9품에 해당하는 말단 관직인 궁중의 의전을 담당하는 奉禮郞을 지내다가 사 직했다. 다시 군대의 막료로 들어가 전공을 세워 보려 했으나 병약한 몸 때문에 일 년을 채 못 버티 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26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하의 작품은 240여 편이다. 귀신과 신선을 주요 소재로 하는 이하의 독특한 시풍이 형성된 배경에 대해서는 첫째,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울분, 둘째, 초사를 위주로 한 초 문화, 셋째, 險怪함을 추구한 顔眞卿(709∼785)의 서예와 불교 등이 대표하는 당시의 독특한 ‘중원 문화’의 영향 등이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부조리한 사회적 관습으로 인한 포부의 좌절 과 허약한 건강이 그런 배경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계기를 제공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開愁歌>
秋風吹地百草乾, 華容碧影生晩寒.
我當二十不得意, 一心愁謝如枯蘭.
衣如飛鶉馬如狗, 臨岐擊劍生銅吼.
旗亭下馬解秋衣, 請貰宜陽一壺酒.
壺中喚天雲不開, 白晝萬里閒凄迷.
主人勸我養心骨, 莫受俗物相塡豗.
<開愁歌>
가을바람 대지에 불어 풀들은 다 마르고 꽃도 푸른 나무도 저물녘 한기를 머금었다.
내나이스물에도뜻을이루지못해 마음은 온통 마른 난초처럼 시름으로 시들어 간다.
옷은 메추라기 같고 말은 개처럼 야위어 갈림길에 임해 칼을 휘두르니 구리 울음소리 일어난다.
주루에서 말을 내려 가을옷을 벗어 옷을저당잡히고의양의술한병을얻었다.
술병속에서하늘향해소리쳐도구름은걷히지않고 환한 대낮이건만 만 리 타향에서 쓸쓸히 길을 헤맨다.
주인은 날더러 정신과 육체를 수양하라 하면서 속된 일로 마음을 채우지 말라 권한다.
저물녘 추위 속에 피어있는 꽃나무와 말라버린 난초는 스물의 나이에 병약한 몸과 벼슬살이에 대한 좌절로 시름에 빠진 시인의 자화상이다. 해진 옷과 야윈 말을 타고 가다가 옷을 저당 잡히고 술 한 병을 구하는 그의 모습 또한 전형적인 落魄한 문사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시의 본래 의미는 이처럼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네 구절에 내포된 것처럼 부조리 한 세상을 질책하는 데에 있다. 불합리한 관습으로 인해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썩힐 수밖에 없는 구름 낀 세상은 술에 취해 한탄해도 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학문이나 정치와는 관련 없는 술집 주인만이 시인의 억울함과 울분을 알아주는 씁쓸한 상황은 시인을 더욱 깊은 슬픔으로 몰아넣는다. 이 시의 반어적 풍자는 상황의 차이가 약간 있긴 하지만 굴원의 〈어부사(漁父辭)〉가 지어진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神絃曲>
西山日沒東山昏, 旋風吹馬馬踏雲.
華絃素管聲淺繁, 花裙綷縩步秋塵.
桂葉刷風桂墮子, 靑狸哭血寒狐死.
古壁彩虯金帖尾, 雨工騎入秋潭水.
百年老鴞成木魅, 笑聲碧火巢中起.
<神絃曲>
서산에 해가 저무니 동쪽 산이 흐릿해지고 회오리바람이 불어 신마가 구름을 밟네.
화려한악기들소리낮고어지러울때 무녀는 치맛자락 사각거리며 가을 먼지를 밟네.
계수나무 잎사귀 바람에 불려 열매가 떨어지고 푸른 살쾡이 피울음 속에서 처량한 이리가 죽어가네.
낡은벽화려한이무기는금빛꼬리가달려있는데 우공은 그것을 타고 가을 연못 속으로 들어가네.
백 년 묵은 올빼미는 나무귀신이 되었는데 웃음소리와 푸른 도깨비불이 둥지에서 일어나네.
바람을 일으키며 구름을 말을 삼아 타고 위풍당당하게 내려오는 하늘의 신들이 ‘푸른 살쾡이’와 ‘이리’, ‘백 년 묵은 올빼미’로 상징되는 세상의 악귀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노래한 이 작품은 무녀의 제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사와 비슷한 면을 보인다. 그러나 이하의 노래에서 귀신의 이야 기는 신화성과는 완전히 결별한 채 현실의 모순에 대한 상징으로 변모해 버린다. 즉, 병약한 몸과 ‘피휘’라는 부조리한 관습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인이 모순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문학적 상상으로 귀결되고, 그 과정에서 초사는 적절한 소재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비극적 세계에 대한 이 통쾌한 ‘문학적’ 싸움은 시적 자아의 현실에서는 여전히 실현 불가능한 환상일 뿐이 다. 이 때문에 무력한 그를 괴롭히는 갈망과 좌절 사이에서 그의 언어는 끝없는 분노로 비틀려 간다. 자신을 몰아치는 비틀린 세계로 인한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걷잡을 수 없는 분노는 외마디 포효로 나 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도 절제할 수 없는 불만스러운 넋두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秋來>
桐風驚心壯士苦, 衰燈絡緯啼寒素.
誰看靑簡一編書, 不遣花蟲粉空蠹.
思牽今夜腸應直, 雨冷香魂弔書客.
秋墳鬼唱鮑家詩, 恨血千年土中碧.
오동나무 바람에 마음 놀라 사나이는 괴로운데 스러지는 등불 아래 베짱이 울음 차갑고 쓸쓸하구나.
누구일까,푸른죽간으로엮은책읽어줄사람 좀이슬어먼지가되지않게해줄이누구일까?
시름끊이지않는이밤마음뜨거운데 싸늘한 빗속 향기로운 영혼이 글쟁이를 위로하누나.
가을 무덤 속에 귀신이 포조의 시를 읊조리리니 한맺힌피는천년세월흙속에서푸르리라.
<秋來>
제1∼2구에서 ‘오동나무에 이는 바람’은 생명을 앗아 가는 잔인한 세월을 의미한다. 가슴에 품은 웅 대한 뜻을 이루지 못해 고심하던 ‘사나이’는 어느새 다가온 죽음 앞에 놀라고 괴로워한다. ‘스러지는 등불’은 꺼져 가는 생명과 사라져 가는 희망을 동시에 암시한다. 제3∼4구는 시적 자아가 글을 쓰는 사람임을 밝히면서, 나아가 적어도 자신의 생시에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글을 쓰는 고독한 존 재임을 하소연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5구의 끊이지 않는 ‘시름’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시름일 수도 있고, 창작을 위한 고뇌일 수도 있으며, 나아가 知音에 대한 ‘그리움[思]’이기도 하다. 이 시의 주제는 사실상 마지막 두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이하는 옛날의 훌륭한 시인처럼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 고심하는 자신의 작품은 그저 죽은 후에 무덤을 찾아온 귀신들에게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 라고 절망적으로 예언한다. 천년 혹은 영원의 시간이 흘러도 불행한 자신의 한은 무덤 속에서 시퍼 렇게 鬼光을 내뿜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단단하게 뭉치리라는 것이다.
이하는 병약한 몸과 현실에 대한 좌절로 인해 세속적 삶에 환멸을 느끼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문 학에서 찾았으며, 그로 인해 선택한 표현 방법이 비극적 상징이었다. 그의 비극적 상징은 병적인 심 리 상태와 초사의 전통이 예술적으로 융합된 결과물이었으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본질 적으로 부조리와 모순이 없는 희망의 신세계였다. 다만 그러한 신세계가 시인 자신의 현실 속에서 당장 실현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묘사하는 시인의 언어는 표면적으로 ‘비틀리고’ 기괴함을 추 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결국 이하의 비극적 상징은 단순히 개인적 측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전체에 대한 광대하고 보편적인 상징이었던 셈이다.
李商隱(813∼858)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인 이상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난 천재 시인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그는 당시 정계의 유력한 정파인 令狐씨 문파의 영수였던 令狐楚(766?∼837)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매우 젊은 나이에 진사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이상은은 돌연 영호초와 정적 관계에 있었던 王茂元(?∼843) 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로 인해 영호초 일파에서는 이상은의 행위를 배은망덕으로 규정하여 맹 렬히 비난했다. 이후 왕무원의 정치적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상은이 30대에 들어서면서 영호 씨 집안의 令狐綯(795∼872)가 권력을 장악하고 장기집권의 가도로 들어섰다. 이에 따라 이상은은 권력의 중심부로 채 진입해 보지도 못하고 일거에 몰락하게 되었다. 장안을 떠난 그는 이전에 친분 이 있었던 지방의 고위 관리나 유지들을 찾아가 막료 생활을 하면서 각지를 떠돌았다. 이상은은 절 망과 회한의 유랑 생활에서 끝내 의욕과 희망을 되찾지 못하고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은의 불행한 일생은 정치적 입신을 위해 정계에 뛰어든 야망에 가득 찬 유능한 젊은이가 겪었 던 좌절과 허탈감 등을 잘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파란만장한 짧은 생애 동안 불운에 의해 혹은 스 스로 자초하여 직면했던 갖가지 사건들과 그로부터 비롯된 감회가 잘 나타나 있다. 이상은의 시는
그의 내면세계를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 그의 시 가운데 가장 특색 있고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작품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하게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이른바 무제시(無題詩)가 많다. 그의 시에는 대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복잡하고 미묘한 애정,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과 포부 에 대한 미련, 화려한 지난날에 대한 회상과 회환 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어 일견 상식적인 관 점에서 주제를 파악해 내는 일이 쉽지 않다. 이렇게 모호할 정도로 복합적이고 복잡한 주제와 시상 을 표현하는 데에 걸맞은 효과적이고 절묘한 표현 방법과 특이한 기교가 그의 시에서 성공적으로 운 용되고 있다.
이상은의 시는 시상의 전개 방식이 복잡하고 시어의 의미 파악이 난해한 경우가 많으며, 주제 자체 가 모호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난해성과 모호성은 그 자체가 이상은 시의 특색이며 심미성 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의 시의 특색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누면 우선 상징과 은유의 구사가 매우 뛰 어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상은의 시는 상징과 은유를 상투적으로 구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등장하는 상징과 은유가 신선함과 예리함을 느끼게 한다. 다음으로는 전고의 운용이 매우 능숙하고 치밀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상은은 전고를 단순한 의미 전달의 차원에서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가해지고 독특하게 해석되도록 배치하는 교묘하고 치밀한 방식을 쓰고 있다. 또 글자 하나하나가 매우 정련되고 압축되어 있으며 시상이 화려하고 압도적인 것도 특 징이다. 그의 시는 이런 여러 요인들의 상호 작용으로 인해 화려하고 감상적이면서도 의외로 장중하 고 유창하며 압도적인 기세를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無題> (錦瑟無端五十弦)
錦瑟無端五十弦, 一絃一柱思華年.
莊生曉夢迷蝴蝶, 望帝春心托杜鵑.
滄海月明珠有淚, 藍田日暖玉生煙.
此情可待成追憶, 只是當時已惘然.
<無題>
금슬은 무슨 까닭으로 오십 현이런가 현하나안족하나마다 꽃다운 시절 생각나게 하네.
장자는 새벽꿈에 나비인가 미혹되고 망제(望帝)는 춘심을 두견에게 기탁했네.
창해에달밝을때면진주는눈물흘리고 남전(藍田)에 날 따뜻해지면 옥에서 연기 오른다네.
이러한 정이 기다려 추억이 될 수 있을까 그저 당시의 일이 이미 아득할 뿐이니.
시평2 : 명明 호응린胡應麟(1551∼1602)
금슬은 어떤 하녀의 이름이며 당시 당나라 때의 소설에 나온다. 이 시는 아마 그 하녀에 대한 이상
은의 생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구성과 ‘효몽曉夢’, ‘춘심春心’, ‘남전藍田’, ‘주루珠淚’와 같은 표현들은 다른 무제시들에도 자주 나오는데, 첫머리에 나오는 ‘금슬錦瑟’은 그런 말들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송나라 사람(黃朝英)은 이 시를 영물시라고 보았으며, ‘적適’, ‘원怨’, ‘청淸’, ‘화和’자에 깊은 의미를 부여해 놓았다고 했지만, 오늘날에는 정확하게 알아내기 어렵다. ‘此情可待成 追憶’은 더더욱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학자들이 자리를 마련해서 이에 대해 토론했지만 하녀와
관련되어 있다든가 주제가 추억과 관련되어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분분하고 각자 자기 생각을 주장할 따름이다.
시평1 : 송宋 황조영黃朝英(?∼?)
어떤 사람이 이 시를 읽고 도무지 그 뜻이 이해가 가지 않아 나중에 소동파(蘇東坡, 1037∼1101)에 게 물었다. 그랬더니 소동파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말들은 《고금악지(古今樂志)》에 나오는데, 금슬은 줄이 오십 개이고 기둥도 오십 개입니다. 그 소리는 즐거움[適], 원망[怨], 맑음[淸], 조화로움 [和] 네 가지 소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를 놓고 생각해보건대, ‘莊生曉夢迷蝴蝶’은 ‘적適’이고, ‘望帝春心托杜鵑’은 ‘원怨’이고, ‘滄海月明珠有淚’는 ‘청淸’이고, ‘藍田日暖玉生煙’은 ‘화和’입니다. 시 전 체에 걸쳐 이 네 가지 뜻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옛날 책에 보면 이상은은 기상이 높고 특출 하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러합니다. 유공부(劉貢父, 1023∼1089)의 시화(詩話)에 보면 금슬은 당시 높은 사람의 애첩 이름이었다고 하고 이상은이 그 애첩과 관련하여 지은 시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시평4 : 전종서錢鍾書(1910∼1998)
하작(何焯, 1661∼1722)은 “《의산집(義山集)》의 맨 첫 번째에 이 시가 놓여 있는 것은 이상은 스스 로 <금슬>로서 자기 시집 전체를 열어젖히고자 했음을 말한다”라고 했다. 처음 두 구는 꽃다운 시절 은 이미 지나고 자취만 남아 있음을 말하는데, 젊은 날의 기세와 평생의 즐거움과 갖가지 맺힌 생각 들을 뚜렷하게 펼쳐 보인다. 3, 4구는 작시의 법에 대해 말한다. 직설적인 방식이 아니라 나비가 된 장자의 이상한 상태와 두견새를 바라보는 망제의 비애로서 짐작하게 하는 상징적인 작시의 법인 것 이다. 5, 6구는 시의 풍격 혹은 경지에 대해 말한 것이다. 눈물 흘리는 진주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뜨거움과 고통 등 인간의 기운을 가진 보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玉生煙’이라는 말에는 자신의 시 가 옥처럼 잘 다듬어져 있는데, 그 안에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고 생기가 넘쳐 나오고 있어서 모양 만 예쁘게 만들어진 보통 옥과는 다르다는 뜻이 들어 있다.
시평3 : 청淸 양계초梁啓超(1873∼1929)
이상은의 <금슬>을 비롯한 시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다만 나는 그 시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읽으면 내 마음이 신선하고 유쾌해진다. 아름다움이란 다양 한 것이며 아름다움은 신비스러움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란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이런 작품도 가벼이 보고 없애 버리려 하면 안 될 것이다.
<無題> (相見時難別亦難)
相見時難別亦難, 東風無力百花殘. 만나기 어렵더니 헤어지기 또 어려워 동풍이 잦아드니 온갖 꽃 시든다.
春蠶到死絲方盡, 臘炬成灰淚始乾.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 토하기를 끝내고 촛불은재되어야눈물겨우마른다.
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새벽 거울 바라보다 흰머리에 시름겹고 한밤에노래읊다달빛찬것느끼겠지.
蓬山此去無多路, 靑鳥殷勤爲探看. 봉래산 예로부터 먼 길이 아니려니 파랑새야 아무쪼록 날 위해 찾아다오.
<無題> (相見時難別亦難)
시평1: 청淸 오교吳喬(1611∼1695)
첫 구에서 말하는 바는 만날 때도 자기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는데 헤어진 뒤로도 글을 전하는 게
쉽지 않음을 한탄한다는 뜻이다. 아마 결국 글로 전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어서 이 시를 썼을 것이 다. 둘째 구에서 ‘동풍’은 영호도(令狐綯)를 가리키고 ‘백화’는 이상은 자신을 가리킨다...... 칠팔 구의 ‘無多路’와 ‘爲探看’은 길을 묻는 일이 여의치 않다는 것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나타낸 다. 이 부분에서 이상은은 다시금 자기의 마음을 피력했다. ‘만나기가 어렵다......’라고 한 말은 원망하 는 말이며 절망에까지 이른 말은 아니다”라고 했다.
시평2: 청淸 요내姚鼐(1731∼1815)
서로 마음이 쉽사리 합해진 사람은 멀어지기도 쉬운 법이며, 어렵게 만난 사람은 헤어지기도 어려 운 법이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은 종잡기 어렵다. 첫 구는 혼백이 극도로 소진된 상태 를 절실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처럼 소진된 상태에서도 봄누에와 촛불처럼 죽음에 이르고 재가 되 어 없어질 때까지 그 마음은 끝내 다함이 없다. 가운데 구절에 나오는 거울에 비친 초췌한 모습과 달빛 아래 한기를 느끼는 모습은 좋은 얼굴 모습을 잘 유지하고 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고 해도 좌절 하지 말기를 기약하는 뜻이다. 비록 봉래산이 만 리나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어쩌면 소식 을 전할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 줄 파랑새가 되어 날 위해 애써 줄지 알 수 없음을 애타게 기대한다. 이 시는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며,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군신이나 친구 사 이에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 아니다. 군신 관계로 해석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생각이며, 꽉 막힌 사람들은 이 시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시평3: 청淸 왕벽강汪辟疆(1887∼1967)
끊고자 하나 차마 끊어 내지 못한 채 슬프고 아픈 심사만 계속 품고 있으며, 그 때문에 뜻을 밖으 로 드러내지 못하는 말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시의 뜻은 따져 보면 잘 드러난다. 첫 구는 만나기도 어렵고 끊어버리기도 쉽지 않음을 말한다. 여기서 쓰인 ‘別’은 이별의 ‘별’자가 아니라 생각을 끊어 버린다는 ‘별’자이다. 이 구절은 영호도가 마음을 열어 줄 뜻이 없고 자기는 틀림없이 몰락하고 말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세 번째 구와 네 번째 구는 자신의 마음이 예전과 같음을 힘주어 말한 것이고, 다섯 번째 구는 시름으로 인해 늙어 간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여섯 번째 구는 고독하게 홀로 지낸 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말이 가슴 아프고 담긴 뜻은 애처로워 백 번 읊어도 물리지 않는다.
7강. 송시 –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 소식의 호방한 詞
“시는 장엄하고 사는 아리땁다[詩莊詞媚]”라는 말처럼 시가 진지한 사상과 인품,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 등을 표현하는 수단인 데에 비해 사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서정을 노래하는 양식으로 여겼다. 그런데 소식은 웅대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은 호방한 사를 지어 이전까지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기풍 이 주류를 이루던 사를 개성적이고 시적인 것으로 바꿔 놓았다.
▪ 황정견의 점철성금
일반적으로 황정견의 시는 전고를 많이 활용하고, 정련된 구법을 추구하며, 표현의 신기함을 선호하 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른바 ‘점철성금(點鐵成金)’이나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로 대표되는 학시(學詩)의 태도는 훗날 송나라 시단을 주도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초가 된 것으로도 유명 하다. 남의 시의(詩意)를 그대로 빌려다 표현을 바꿔 쓰는 것이 환골법이요, 남의 시의에서 힌트를 얻어 그 뜻을 확대 변용하는 방식이 탈태법이다. 단순한 표절의 기교가 아니라 배움을 통해 지식을 자기 것으로 체화(體化)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옛것을 새롭게 이용하는[以故爲新]” 방법을 의미한다.
蘇軾(1037∼1101)
소식은 자가 子瞻, 호는 東坡居士로서, 眉州(지금의 四川省 眉山縣) 사람이다. 저명한 문인 蘇洵 (1009∼1066)의 아들인 그는 북송의 시와 산문, 사, 서예, 그림의 대가로서 부친인 소순 및 아우 蘇 轍(1039∼1112)과 더불어 ‘三蘇’라고 불린다. 또한 세 사람 모두 고문의 대가로서 ‘당송팔대가’에 포 함된다. 소식은 1057년 아우소철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는데 정치적으로 왕안석 이 주도한 개혁운동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입장을 견지했다. 1079년에 그를 시기하던 이들이 그의 시 를 왜곡하여 일으킨 ‘烏臺詩案’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1085년까지 지방 관으로 전전하다가 겨우 조정으로 돌아와 1086년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1089년부터 다시 지 방관으로 돌아다니다가 급기야 1094년에 광동성 혜주로 유배되었고, 1097년에는 海南島의 儋州로 유배되어 3년 남짓 지내다가 1100년 6월 해배가 되어 가족들이 있는 常州로 돌아온 뒤 얼마 뒤 세 상을 떠났다.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소식은 북송의 시문개혁운동을 실질적으로 완성한 작품들을 창작해 낸 대문호로 평가되고 있다. 그 는 기본적으로 스승 구양수와 마찬가지로 유학을 존중하고, 유학의 도를 밝히며 경세치용에 적합한 글쓰기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노장사상의 낭만과 열정도 배척하지 않고 자유롭게 수용했으며, 만 년에는 불교에도 심취했다. 또한 본의 아니게 중국 곳곳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넓어진 견문은 그로 하여금 거시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소식은 중국 문학사와 예술사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스케일 크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두루 양산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문학관 및 창작의 성취는 ‘蘇門四學士’로 일컬어지는 黃庭堅(1045∼1105)과 秦觀(1049∼1100), 張耒(1054∼1114), 晁補 之(1053∼1110) 같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和子由澠池懷舊>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 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還記否, 路長人困蹇驢嘶.
인생살이 이곳저곳 떠도는 것이 무엇과 같은가? 응당 날던 기러기가 진흙 위에 내려앉은 격이리라.
진흙위에우연히발자국남겼을뿐 기러기날아가버리면어디로갔는지어찌알수있으랴.
노승은 이미 죽어 새로 부도탑이 만들어졌고 벽은이미허물어져옛날적었던시읽을길없구나.
지난날 험난했던 여정을 아직 기억하는가 길은 멀고 사람은 피곤한데 나귀는 절뚝이며 울어댔었지.
<和子由澠池懷舊>
이 시는 아우 蘇轍(字가 子由)의 시 <澠池懷舊>에 화답한 것이다. ‘민지’는 하남성에 있는 지명이다. 아우와의 옛일을 회상하는 내용이지만 소식의 인생관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인생을 계절 따라 떠도는 기러기에 비유하면서 사람이 태어나 남긴 자취란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처럼 덧없는 것이 라고 정의한다. 심지어 그가 보기에는 성불(成佛)을 꿈꾸던 노승과 그가 수행하던 도량마저 죽음과 세월 앞에 무력하다. 노승의 죽음은 ‘입적(入寂)’이 아니라 ‘이사(已死)’라고 표현되어 있다. 힘겨웠던 지난날의 추억과 그 시절의 감회를 담은 시마저 무너진 절과 함께 사라져 버린 지금의 현실은 삶의 덧없음을 되새기게 해 줄 따름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시인이 결코 비관적 분위기를 고조시키 려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고 있는 시인은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 음을 보여 주는데, 이 담담함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한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 따뜻한 마음이 깊게 전 해진다. 어쩌면 모든 것이 덧없지만 그러한 덧없는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마음 밭에 깊게 새 겨진 추억의 발자국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인생을 기러기 발자국에 비유한 전반 4구는 ‘설니홍 조雪泥鴻爪’라는 성어를 만들었을 만큼 인구에 회자하였다.
<念奴嬌・赤壁懷古>
大江東去, 浪淘盡千古風流人物.
故壘西邊, 人道是三國周郎赤壁.
亂石崩雲, 驚濤裂岸, 卷起千堆雪.
江山如畵, 一時多少豪傑.
遙想公瑾當年, 小喬初嫁了.
雄姿英發, 羽扇綸巾.
談笑間, 强虜灰飛烟滅.
故國神遊, 多情應笑我, 早生華髮.
人間如夢, 一樽還酹江月
장강은 동으로 흘러 흘러 천고의 풍류 인물들을 다 씻어가 버렸는가!
사람들 옛 보루의 서쪽을 삼국시대 주유의 적벽이라 전하네.
어지러운 바위들 구름을 무너뜨릴 듯한데 놀란 파도는 강 언덕을 찢으며 천 무더기 눈 같은 물결을 말아 올리네.
강산은 그림 같은데 한때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있었던가?
멀리 주유가 활약했던 당시를 상상해 보면 소교는 갓 시집왔었고
영웅의 모습 꽃처럼 피어났지 깃털 부채 들고 윤건을 쓰고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강한 적은 재 되어 날고 연기로 사라졌지
고향으로 가는 마음이여 다정한 이는 날 보고 웃겠지 벌써 흰머리 났다고.
인간 세상은 꿈같은 것 한 잔 술 강 속의 달에 붓노라
<念奴嬌・赤壁懷古>
이 작품은 첫머리에서 장엄한 대자연과 그곳을 관통하는 장강을 등장시켜 도도한 역사를 이끌어 내 고, 다시 한 시대를 풍미한 호걸들에 대한 회상을 바탕으로 덧없는 인생에 대한 감회를 서술하고 있 다. 거침없고 호방한 필치에 웅장하면서도 세밀한 그림 같은 묘사를 함께 녹여냄으로써 풍경과 역사 에 대한 회고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단아한 용모에 깃털 들고 윤건을 두른 채 느긋한 담소 속에서 강한 적을 물리치는 주유는 고상한 풍류와 호걸의 기상을 겸비한 이상적 인물로서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인간형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정신적 여행은 부질없이 늙어가는 현실의 자 신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통해서 작가는 한층 더 깊은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돌이켜 보면 주유의 멋진 자취 또한 이제는 무너져 버린 바위만 어지럽게 널린 옛 유적에 지나지 않 으니 인생은 결국 한바탕 꿈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는 장구한 세월을 변함없이 지키는 달을 향해 경 건하게 술을 따르는 것이다.
<赤壁賦>
蘇子曰, “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 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 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適.”
客喜而笑, 洗盞更酌, 肴核旣盡, 杯盤狼藉.
相與枕藉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소 선생이 말했다. “그대도 저 강물과 달을 아시는가?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완전히 가 버린 적이 없고, 달은 차고 기우는 것이 저와 같은데도 끝내 없어지거나 더 커지지 않소.
대개 변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천지는 일찍이 한 순간도 그대로 있을 수 없었고,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소. 그러니 또 무얼 선망한단 말이오?
또한 하늘과 땅 사이에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는지라, 내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안 되오.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속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그림 이 된다오. 취해도 금하는 이 없고 써도 고갈되지 않소. 이것은 조물주의 무한한 보물이니, 그대와 내가 함께 즐기는 것이라오.” 손님이 기뻐 웃으며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랐다. 안주가 바닥나고 술 잔과 쟁반이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배 안에서 깔고 베고 하면서 잠들었는데 동방이 벌써 밝아진 줄 몰랐다.
<赤壁賦>
<적벽부>는 전후 2편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적벽부>라고 하면 <전적벽부>를 가리킨다. 위에 인용 한 부분은 전체를 네 부분으로 나눌 때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앞의 세 부분에는 1082년 7월 16일 밤에 소식이 손님들과 함께 황주(黃州)의 적벽기(赤壁磯)로 뱃놀이를 나간 일과 달빛 비치는 드넓은 장강의 풍경에 세상사를 잊고 배 위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던 일, 그리고 손님이 부는 퉁소 소리가 너무 슬퍼 그 이유를 묻자 손님이 장구한 역사와 광대한 대자연 속에서 순간을 머물다 가는 덧없는 인생 때문이라고 설명한 일들이 서술되어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소식이 그 손님의 슬픔을 위로하 며 폭넓은 세계관을 갖고 대자연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깨달으라고 조언하여, 마침내 모두가 즐거 운 마음으로 날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즐겼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4・4・6・6으로 진행되는 기존 부 양식의 기본 리듬을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사이사이에 5 자, 8자, 9자의 리듬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언뜻 보기에 산문 같은 느낌마저 주고 있다. 그러나 작품 의 첫머리에서 그랬듯이 끝에서도 4・4・6・6의 리듬으로 마무리하여 부 문체의 최소 요건을 지켰음을 확인시켜 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리듬과 호쾌하게 이어지는 논리에 덧붙여 소식은 “흰 이슬 같은 달빛이 강을 가로지르고, 물빛은 하늘과 이어져 있네[白露橫江, 水光接 天]”와 같이 한 폭의 압축된 산수화 같은 묘사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형식적이고 낡은 골동품으로 변 한 문체인 부를 시원스럽고 의미 깊은 읊조림으로 승화시켰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모든 것은 마 음에서 비롯된다[一切唯心造]”는 불교의 세계관과 상대적 관점에 입각한 도교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융합한 초월적 인생관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앞의 인용문만 보더라도 ‘盈虛(영 허)’와 ‘消長(소장)’은 노장사상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이고, ‘聲(성)’과 ‘色(색)’은 불교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이다.
黃庭堅(813∼858)
황정견은 당시와 송시로 대표되는 중국 고전시의 마지막 전성기를 빛낸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스 승 소식과 관련된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불우의 연속이었다. 황정견은 洪州 分寧(지금의 江西省 修水 縣) 사람으로 자는 魯直이고 호는 山谷道人 또는 涪翁이다. 그는 스물세 살이 되던 1067년 진사에 급제한 이후 보수파인 소식과 교류하면서 정치적, 문학적으로 소식의 그늘 아래에서 입지를 굳혀 나 갔다. 그러나 1080년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던 보수파들이 각지로 좌천되거나 유배를 당하자 황정 견도 같은 운명에 처해 吉州(지금의 江西省 南昌市 남쪽)에 속한 太和縣의 현장으로 좌천되었다. 1085년 무렵 왕안석의 실각 이후 다시 보수파가 세력을 얻으면서 황정견도 5, 6년 동안 벼슬살이의 황금기를 보냈다. 그러나 1093년 스승 소식이 다시 정치적 박해를 받아 혜주와 해남도 등으로 기나 긴 유랑을 떠나야 했다. 1101년 이후로는 황정견도 각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105년 宜州(지금 의 廣西省壯族 자치구)에서 예순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登快閣>
癡兒了却公家事,
快閣東西依晚晴.
落木千山天遠大,
澄江一道月分明.
朱弦已爲佳人絶,
靑眼聊因美酒横.
萬里歸舡弄長笛,
此心吾與白鷗盟.
<登快閣>
못난 사람,공무를 대충 끝내고 나서
쾌각에 올라 동서로 펼쳐진 맑은 저녁 풍경을 본다.
산마다 낙엽지고 하늘은 멀고 큰데
한줄기 맑은 강에 달이 또렷하구나.
거문고줄은 좋은 벗 위해 끊어버렸고
반가운 눈빛은 그저 좋은 술 있을 때나 보일 뿐이지
먼 길 돌아가는 배에선 피리 소리 길게 울리는데
이 마음을 나는야 흰 갈매기와 다짐하련다.
황정견의 걸작으로 꼽히는 〈등쾌각(登快閣)〉은 서른여덟 살이 되던 1082년에 지은 것이다. 수련에서 시인은 중요한 공무를 대충 끝내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일컬어 겸손하게 ‘못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사실 자신이 시골 작은 관청에 있으니 특별히 중 요하고 큰일도 없다는 의미를 둘러 표현한 것이다. 함련은 쾌각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이다. 한 줄기 은사(銀絲)를 흘려 놓은 듯이 맑은 강물 한 줄기가 산을 감싸 흐르고, 날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달은 계수나무 아래 방아 찧는 토끼가 보일 듯이 빛깔도 모양도 선명하다. 경련에 이르면 평화롭고 상큼한 황혼의 풍경 속에서 시인은 상대적으로 고적한 심경에 잠겨 현재의 삶을 생각한다. 알아주는 이 없어 노래조차 부르지 못한 채 술 들고 찾아와 주는 이가 있다면 ‘푸른 눈동자[靑眼]’로 반갑게 맞 이할 수 있으리라는 쓸쓸한 심경을 토로한다. 미련에서는 먼 타향에 묶여 지내는 현재의 처지를 노래 한다. 향수가 겹치니 강을 흐르는 배의 피리 소리가 더욱 길게 들려오지만, 쓸쓸한 내 마음을 그저 무 심한 갈매기에게 하소연할 뿐이다. 마지막 구절은 세상사의 곡절과 고독, 심지어 향수마저 모두 잊고 평정한 상태로 자연과 하나로 어울려 지내겠다는 다짐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寄黃幾復>
我居北海君南海, 寄鴈傳書謝不能.
桃李春風一杯酒, 江湖夜雨十年燈.
持家但有四立壁, 治病不蘄三折肱.
想得讀書頭已白, 隔溪猿哭瘴煙藤.
나는 북해에 살고 그대는 남해에 살아
기러기에 편지 전하렸더니 그럴 수 없다 사절하네.
복사꽃, 살구꽃 봄바람에 한 잔의 술
강호에 밤비 내릴 때 십 년을 타는 나그네의 등불.
집안 살림이야 그저 사방의 벽뿐인데
병을 고치려고 자기 팔 세 번 부러뜨리지는 마오.
아마도 글 읽다가 머리가 이미 하얗게 셌을 텐데
원숭이 우는 골짝 너머 장독 안개 등나무에 서렸겠지.
<寄黃幾復>
이 시는 머나먼 객지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백성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고 아울러 머리가 세도록 독 서를 게을리하지 않는 황기복의 사람됨에 대한 칭송이라 하겠다. 다만 마지막 구절은 먼 열대의 타향 에서 원숭이 울음을 들으며 향수에 시달릴 벗을 위로하는 의미와 더불어 독한 안개에 막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벗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함께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황정견은 다양한 전고를 활용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어휘와 의미를 ‘粘化’하였으니, 이것은 황정견이 시어를 만드는 특유의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제2구 ‘기안寄雁’의 경우를 보자. 편지를 전하는 뜻으로 기러기 전고를 쓰는 것은 이미 진부한 전고의 활용인데, 마지막에 ‘謝不能’이라는 표현을 덧보태 쓴 것이 절묘하다. 편지를 전하자 했더니 기러기가 자신은 그 남쪽까지 갈 수는 없으니 불가능하다며 사절한다는 것이 다. 형양에 있는 회안봉까지만 날아가서 다시 북으로 돌아오는 기러기의 입장에서 훨씬 남쪽인 영남 까지는 아무리 부탁을 해도 들어줄 수가 없다는 말이다
<從隨主簿乞貓>
秋來鼠軰欺猫死,
窺甕翻盤攪夜眠.
聞道貍奴將數子,
買魚穿柳聘銜蟬.
가을이 오자 쥐떼는 고양이 죽은 걸 믿고 날뛰어
항아리 뒤지고 쟁반을 엎으며 밤잠을 방해하네.
듣자하니 암쾡이가 새끼 몇마리 낳을거라 하니
생선 사다 버들가지에 꿰어놓고 나비를 모셔와야지.
<從隨主簿乞貓>
황정견은 고양이를 나타내는 다양한 어휘들을 함께 사용하여 “속된 것을 가져다 우아하게 만드는 [以俗爲雅]” 시어 창작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 덕분에 같은 개념이 세 차례나 등장하면서도 중복의 느낌이 없고, 나아가 해학적인 맛도 강화되었다. 게다가 익살스럽게도 ‘초빙’한다는 표현을 써서 시인 자신의 빤한 속내를 제법 점잖게 포장하고 있어 맛을 더해 주고 있다. 또한 자연스러운 구두어의 느 낌을 주는 서술에 쥐와 고양이의 상징으로 대비되는 풍부한 풍자를 담은 점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 다. 세상을 어지럽히며 시인의 청정한 삶을 방해하는 간사한 인간 군상에 대한 조소와 그들을 물리 칠 인재의 등장을 예고하는 진지한 내용이 가볍고 발랄한 어조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진사도(陳師道, 1053∼1102)는 《후산시화(後山詩話)》에서 이 작품이 “비록 골계라곤 하지만 천년 뒤 의 독자들도 새롭다고 느끼며 즐거워할 것[雖滑稽而可喜千歲之下讀者如新]”이라고 칭송했다.
8강. 중국고전소설사의 이해
▪ 문언 서사 : 백화 서사가 나오기 전에 문언을 이용하여 사건을 서술한 모든 형태의 글을 포함한 다. 《상서》와 《전국책》, 《춘추좌전》 등의 역사서와 《장자》, 《한비자》 등의 제자백가 문헌, 육조시 대의 지괴와 당나라의 전기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 백화 서사 : 원래는 백화를 활용하여 사건을 서술한 모든 형태의 글을 포함하나, 이 장에서는 주 로 단편 백화소설과 장회소설을 가리키는 말이다.
▪ 문인화 : 문학 작품이 민간에 기원을 두었으나 문인의 손을 거치면서 내용과 형식이 모두 세련되 고 고상하게 다듬어져서 새로운 장르로 자리를 잡는 현상을 가리킨다. 악부시와 송나라의 사(詞), 의화본소설, 장회소설 등이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가 문언서사
1 사건의 단순 기록에서 능동적인 서술로서 역사서 : 《書經》, 《左傳》, 《戰國策》 / 제자백가諸子百 家 : 《 孟子》, 《韓非子》, 《莊子》
2 ‘일가一家의 언론言論’으로서 《史記》 : 지식의 서술, 기전체紀傳體
3 육조六朝
- 유서類書: 《태평광기太平廣記》, 《태평어람太平御覽》, 《법원주림法苑珠林》, 《서경잡기西京雜 記》, 《수신기搜神記》, 《유명록幽明錄》
- 당唐 전기傳奇를 비롯한 문언서사 창작의 씨앗
4 지괴志怪의 기록자와 내용 :역사가 및 박물학자, 종교인(승려, 도사)이 기록자였으며,‘정 식역사’ 이외의 지식이나 우주(세계) 속의 인간 존재와 생사 등을 내용으로역사서를 변형한 짧은 기록이나 이야기로 문헌뿐만 아니라 전설, 逸話 등을 포괄하는 것이 특징이다.
5 당唐 전기傳奇
ᄀ 신괴류神怪類 : 〈고경기古鏡記〉, 〈보강총백원전補江總白猿傳〉, 〈유선굴遊仙窟〉 등
ᄂ 풍자류諷刺類 : 심기제沈旣濟 〈임씨전任氏傳〉, 〈침중기枕中記〉, 이공좌李公佐 〈남가태수전南 柯太守傳〉 등
ᄃ 애정류愛情類: 백행간白行簡 〈이왜전李娃傳〉, 심기제 〈이혼기離魂記〉, 장방蔣防 〈곽소옥전霍 小玉傳〉, 원진元稹 〈앵앵전鶯鶯傳〉, 진홍陳鴻 〈장한가전長恨歌傳〉 등
ᄅ 호협류豪俠類 : 〈규염객전虯髥客傳〉과 〈무쌍전無雙傳〉, 〈홍선전紅線傳〉, 〈섭은낭聶隱娘〉 등
나 백화서사
1 백화의 성립 :선종禪宗 불교와 선어록禪語錄, 시민市民의 언어를 기반으로공연문화의 성행과 인쇄 출판이 발전하고,당唐 변문 변문變文 ⇨ 송宋 강창講唱과 가무희歌舞戱 ⇨ 원 元 잡극雜劇으로 이어지며,장회소설章回小說이 출현한다.
2 명나라 중엽의 중국
ᄀ 안정된 통치 기반에 비해 잦은 농민반란, 도시의 문란해진 윤리강상 등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ᄂ 급진적 사상을 가진 양명학 좌파의 등장 :성인의 도보다 백성의 편안한 삶이 곧 천하태 평의 기반이란 인식이 중시되고 ‘강학(講學)’을 통해 전국으로 유포, 특히 강남 지역에 성행한다.상업과 욕망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시대의 변화와 여론을 반영하는 문학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 이지李贄, <동심설童心說>
시가 왜 반드시 옛날의 선집을 표준으로 삼아야 하고, 문장이 왜 반드시 선진시대의 것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 (그 시대의 표준 문체는) 육조의 문체인 변려문이 되었고, 그것이 변하여 근래의 문체인 고문으로 되었다가, 다시 변하여 당나라의 전기(傳奇)가 되었으며, 원 본(院本)으로, 잡극으로, 《서상기(西廂記)》라는 희곡으로, 《수호전(水滸傳)》이라는 소설로, 오늘날 과 거시험의 팔고문(八股文)으로 변했고, 고금의 지극히 뛰어난 글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문 체의 선악을) 다만 시대 추세의 앞서고 뒤짐으로만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 고염무顧炎武, 〈화음왕씨종사기華陰王氏宗祀記〉
이익이 있는 곳에서는 피를 나눈 친척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게 되니, 이에 따라 계교를 부려 속이 는 술수의 변화가 나날이 심해지고 염치의 도리는 모두 없어지게 된다. 그럴 경우 짐승들을 이끌고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는 않는 경우가 드물어질 것이다.
▪ 풍몽룡의 사상과 저작
1 사상과 삶의 파격성 :양명학 좌파에 경도. 유가 예법과 윤리를 거스르는 처신,민요, 소
설 등 비정통 문학을 선호했으며,불우한 삶으로 인해 늘 궁핍했다.
2 실용성에 입각한 ‘정교(情敎)’를 추구한 저작 :민간가요 수집 정리 : 《산가(山歌)》, 《괘지아 (掛枝兒)》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교학용 참고서인 《지낭(智囊)》, 《고금담개(古今談 槪)》, 《정사(情史)》장편소설 : 《신열국지(新列國志)》, 《신평요전(新平妖傳)》희곡 : 《묵감 재정본전기(墨憨齋定本傳奇)》 등이 있다.
▪ 강물에 버린 사랑
원제는 〈두십낭노침백보상(杜十娘怒沉百寶箱)〉(《경세통언(警世通言)》권32)이며 형식은 송무징(宋懋澄) 의 〈부정농전(負情儂傳)〉을 개편한 ‘의화본(擬話本)’이다. 주제는 기생의 비극적 사랑을 통한 시대상의 비판이다. 1년 동안의 부부 같은 생활 ⇨ 사랑의 위기 : 이갑의 파산과 부친의 진노 ⇨ 기생 신분에 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두십낭이 모은 돈 + 이갑의 친구 유우춘의 도움) ⇨ 부유한 상인의 후손 손 부의 등장, 이갑의 배신 ⇨ 패물함 공개와 두십낭의 죽음의 결말에 이르는 줄거리 얼개를 가졌다.
무애거사無礙居士, 〈경세통언서警世通言敍〉
(소설 속의) 사건이 실제라면 그 속에 담긴 이치는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건이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라 해도 그 속에 담긴 이치가 올바르다면 교화에 해로움을 끼치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에도 어 긋나지 않으며, 《시경》과 《서경》, 그리고 정식 역사의 내용에도 위반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그것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
다 장편소설의 형성과 형식 :사회경제는 도시의 발전과 오락적 수요가 생겨나고 유망한 사업으 로서 소설이 부각되며 인쇄출판이 발전한다.문화 조류로 八股文, 小品文, 南宗畵 등이 번성하 고 陽明學左派(泰州學派), 評點과 改作이 대두된다.이런 특징은 이야기 조각의 累積과 變容, 공연과 차별화된 書面化된 이야기 + 文人文化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9강. 《서유기》의 이해
▪ 81난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와 제자 일행이 대승불교의 경전을 가지러 당나라 수도 장안을 출발하여 서천 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81번의 고난을 가리킨다. 81은 고대 중국의 수 개념에서 가장 큰 수 인 9를 제곱한 것이므로, 실제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요괴
자연물이 오랜 기간 정기를 흡수하여 신령한 기운과 능력을 갖추게 된 존재, 또는 초월적 능력을 지 닌 신선에 의해 창조된 괴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가리킨다. 중국 고전소설의 요괴는 《산해경》을 비롯한 각종 괴이한 기록에 이야기꾼을 비롯한 서사 작가들의 상상이 더해져서 창조되었다.
가 《서유기》의 성립 배경 :
1 당나라 승려 현장이 629년 당시 서역 천축(天竺)으로 일컫던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지역 50여 나라를 17년간 편력하며 천신만고 끝에 경전 657부를 구해서 돌아온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 西域記)》와 작자 미상의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 그리고 민간전설 등이 합쳐지 며 비롯되었다.
2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현장이 구도행(求道行)의 여정에서 보고 들었던 서역 제국의 지 리 풍토와 아울러 기괴한 전설, 경전에 담긴 고사(故事), 기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 상들이 허다하게 서술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다분히 전기적(傳奇的)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3 이 내용이 민간에 유전되면서 마침내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 차츰 신비스러운 전설과 신화로 채색되었고, 이것이 명나라 중엽 오승은이라는 작가의 손에 의해 집대성되어 장편신화 소설 《서유기》로 태어난다.
나 《서유기》의 구조와 인물
1 줄거리에 따른 3단계 구별 :제1~7회 : 손오공의 출신과 성장,제8~12회 : 관음보살의 안
배, 삼장법사의 출신, 당 태종의 환생,제13~100회 : 삼장법사와 제자들의 81난
2 연주식連珠式 구조 :《삼국연의》, 《금병매》, 《홍루몽》와 같은 구조이며,통독通讀 VS 선 독選讀 : 각 회는 자체로 완결적인 구조를 가지고 큰 줄거리 안에 통합된다. ⇨ 공연 예술의 영향 : 說部
3 《서유기》의 인물 : 오행(五行)의 원리로 해석할 수 있다. 삼장법사(水, 土)를 중심으로 손오공 (金, 火)과 저팔계(木), 사오정(水, 土), 백마(水)가 각 인격체 안에서 다양한 성격을 드러낸다.
ᄀ 삼장법사는실존 인물과는 달리 신화적 영웅으로 변신,‘도道’의 수행자를 대표하는 마 음의 주인心主이며,‘자격미달’의 불완전한 주인공으로 고지식한 원칙론자, 변덕과 나약함, 어리석음, 명나라 때의 타락한 승려들과 사회상을 풍자한다.결점을 보완하는 미덕을 가 져 서천(西天)을 향한 불굴의 목적의식, 계율에 충실한 모범적인 승려, 손오공의 활약을 부 각시켜주는 인간적 주인공이다.
ᄂ 손오공의원숭이 형상의 유래는 자생설 VS 외래설로 회수淮水의 신 무지기巫枝祁 또는 無支祁, 《산해경山海經》의 형천刑天, 인도 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na》의 하누만Hanumān 등으로 해석한다.손오공의 탄생은 천지(天地)와 일월(日月)의 정화가 합쳐진 심령(心靈) 으로 순수한 자생적 생명체로 해석한다. 욕망에 충실한 원시 생명 ⇨ 무리의 왕(권력) ⇨ 불로장생의 열망 ⇨ 모험 ⇨ 1단계의 성공을 거치는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이름 갖기의 의미 : 존재에 대한 인식의 통로로 본능적 존재인 猻狲 ⇨ 이성적 존재 孫으로 세계 안의 ‘나’에 대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금각대왕과 은각대왕의 호리병(제34회)에서 이름名과 운명命 또는 목숨을 상징한다.전반부에서 미완의 자아에 대한 인식으로 제도와 권력에 대해 도전하며, 자아의 각성과 함께 ‘참 지식’을 위한 수행의 출발을 한다. 후반부에서 유토 피아를 향한 모험의 안내자로 또한, 스스로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수행자가 된다.
ᄃ 저팔계 :신분 내력과 역정 : 하늘의 신선 ⇨ 과오(술에 취해 항아를 희롱(제8회)) ⇨ 추 방(돼지의 태로 들어감) ⇨ 속죄(삼장법사를 수행(猪悟能)) ⇨ 보상(정단사자)의 과정을 거 친다.이름의 의미에서 猪는 朱에서 猪로 확장되었으며 거스름[抵], 머뭇거림[跙], 험난함 [阻]을 의미한다. 八戒는 승려가 지켜야 할 기본으로 계율 중 식욕과 색욕에 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悟能는 게으름을 넘어선 자신의 능력을 뜻한다.부정적 성격과 긍정적 성격의 조화 : 교활ó솔직, 게으름ó부지런함, 비겁함ó용감하고 의로움이 상존하며, 가장 평범하고 무던한, 그러므로 친근한 농부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ᄅ 사오정 :신분 내력과 역정 : 하늘의 신선 ⇨ 과오(반도회에서 접시를 깨뜨리다) ⇨ 추방 (유사하(流沙河)의 괴물) ⇨ 속죄(삼장법사를 수행(猪悟能)) ⇨ 보상(금신나한)의 과정을 거 친다.이름의 의미에서 沙모래는 유사하(流沙河)를 의미하며 사려 깊다[思]는 함의를 가 지며 사려 깊은 수행자를 뜻한다. 悟淨은 반도회를 어지럽힌 일에 대한 반성으로 깨끗함, 그리고 극락정토로 그 의미가 확장되며 일행의 내적 조화를 돕는다.
다 《서유기》의 두 가지 주제
1 《서유기》의 오락성은 시사詩詞와 사부辭賦에 반해 산문의 역할을 하며, 이야기꾼의 기교와 재 담을 통해 목숨이 걸린 전투를 해학이 뒤섞인 오락으로 표현하며 흥미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2 《서유기》의 주제 :사회 풍자와 고통받는 대중의 구원(朱鼎臣,《西遊釋厄傳》)이며.도의 완 성을 위한 수행의 과정(長春眞人 丘處機,《西遊證道書》)이다.
3 대승불교의 의의(제12회)로죽은 자를 구제하여 승천시키고, 고통에 빠진 사람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며, 무량한 수명을 누리는 몸을 만들도록 수양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여래如來가 되 게 할 수 있는 것(관음보살)으로중생의 구제를 위한 취경取經은 시대적 사명을 띤 선구자 의 길이다.
4 16세기 중국의 양면성과 《서유기》 :문화, 경제의 풍요 속에 묻힌 백성의 고난 ⇨ 환관의 전 횡(동창東廠, 금의위錦衣衛)과 과도한 세금과 요역徭役으로 잦은 농민반란민중적 반항의식 의 정점으로서 ‘제천대성(齊天大聖)’500년만의 부활 : 새로운 희망의 불씨
5 요괴의 사회적 의미 :초월자(기득권자)의 보물(권력)을 훔쳐 요술(무력과 술수)로 백성을 착 취食人하는 기득권층의 아류 또는 하수인으로 태상노군의 푸른 소(제50~52회), 미륵불의 하인 [黃眉童](제65~66회), 태을구고천존의 구두사자[九頭獅子](제88~89회), 토지신(지방관료)조차 무 시하는 토호(홍해아, 나찰녀) 등삼장법사의 고기와 불로장생 : 삼장법사는 기득권층에 반하 는 세력의 상징적 영웅으로 통치 질서의 정비를 위해 중앙에서 파견한 암행어사이며, 불로장생 은 기득권 세력의 공고화, 이권 보호 등의 은유이다.
6 중화 중심적, 봉건적 가치관의 한계 :황제를 만드는 보물(제37회)국왕의 치료하는 의사 (제68~71회)《서유기》의 이상국가는 현명한 성군의 어진 덕성으로 백성을 교화, 평화와 정 의 속에서 풍요로운 삶을 공유, 유교의 태평성대 + 불도(佛道)의 도덕적 수양이다.
10강. 《홍루몽》의 이해
▪ 아속 융합
기본적으로 통속적이고 문예적 차원에서 수준이 낮은 문학 양식이 문인의 영향을 받아 형식과 내용 의 측면에서 모두 세련되고 고상한 면모를 겸비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경지의 문예 작품이 되는 과 정을 의미한다. ‘문인화’는 문인의 측면에 치우친 아속 융합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시적 서사
서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시에서 주로 활용되는 ‘해음(諧音)’이나 상징 등의 수사법을 자주 활용하 고, 장면의 묘사에서 회화적 이미지를 중시하며, 상대적으로 역동적인 활극의 비중이 적은 형태의 서 사를 가리킨다. 서사 과정에서 시사(詩詞)를 자주, 그리고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시적 서사의 한 특징이다.
▪ 문학적 전통
문학작품의 창작은 일정한 역사 시기 동안 특정한 맥락을 가지고 이어지면서 소재와 이미지, 구상, 형식 등의 측면에서 창의적으로 계발되거나 변형되는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어떤 ‘맥락’을 문학적 전통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가 아속雅俗의 융합 : 고대 중국 민간문학의 아화雅化 추세와 문학적 성취
1 아속 융합 : 기본적으로 통속적이고 문예적 차원에서 수준이 낮은 문학 양식이 문인의 영향을 받아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모두 세련되고 고상한 면모를 겸비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경지의 문예 작품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인화’는 문인의 측면에 치우친 아속 융합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홍루몽》의 형성 과정 : 조설근曹雪芹 《石頭記》(80회)와 조설근 사망 후 정위원程偉元, 고악高 顎의 후반부 40회가 첨삭되어 활자 인쇄판의 120회본이다.
3 《홍루몽》의 계산된 삼중구조 :신통력을 가진 돌과 신선 : 전체 배경인간으로 환생한 돌 의 일생 : 실질적 중심 이야기가부賈府와 대관원大觀園
나 시로 쓴 소설 《홍루몽》의 성립 배경과 특징
1 시적 서사 : 서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시에서 주로 활용되는 ‘해음(諧音)’이나 상징 등의 수사 법을 자주 활용하고, 장면의 묘사에서 회화적 이미지를 중시하며, 상대적으로 역동적인 활극의 비중이 적은 형태의 서사를 가리킨다. 서사 과정에서 시사(詩詞)를 자주, 그리고 유기적으로 활 용하는 것도 시적 서사의 한 특징이다.
2 ‘시적 사유’로 제시된 다양한 주제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불교적 인생관몰락하는 봉건 왕조의 운명을 통한 역사적순결한 정신적 사랑 VS 속된 세속적 사랑
3 《홍루몽》의 해음諧音 놀이 : “원래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하늘을 보수할 때, 대황산大荒山 무 계애無稽崖에서 높이가 12길[丈]에 너비가 24길이나 되는 단단한 돌 3만 6천 5백 1개를 만들 었다 하오. 하지만 와황씨媧皇氏는 이 가운데 3만 6천 5백 개만 쓰고, 남은 하나는 이 산에 있 는 청경봉靑埂峰 아래에 버려놓았다오. 그런데 누가 알았겠소? 이 돌은 단련을 거친 후에 이미 영성靈性이 통해 있었던 게지요. 이 돌은 다른 돌들이 모두 하늘을 보수하게 되었는데 저만 혼 자 재주가 없어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원망하고 탄식하며 밤낮으로 슬피 울고 부 끄러워했다오. (제1회)”
➠ 大荒 = 大謊, 無稽 = 荒唐無稽, 청경(靑埂; qīnggěng) = 정근(情根; qínggēn)
4 《홍루몽》의 등장인물은 남자 495명과 여자 480명으로 모두 975(성명과 칭호가 있는 이 732)명 이 등장하며, 작품에 언급된 고대의 제왕, 유명인사, 후비后妃, 선녀, 부처나 신선 등을 제외한 실제 등장인물은 721명이다.
다 문학적 전통의 집대성된 《홍루몽》
1 명청 장회소설의 영향으로흥성과 쇠락의 가정사家庭史를 다루며, 《금병매》 이후의 세정世 情소설이며 재자가인才子佳人소설이다. ‘돌’의 전세역정轉世歷程 : ‘삼석기三石記’: 《수호전》, 《서유기》‘色空’의 인생관 : 《서유보西遊補》, 《수당연의隋唐演義》 등 단순한 모방적 계승을 넘어서 창의적인 발명의 성과이다.
2 《홍루몽》의 전승 과정 :
“공공도인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하더니, 『石頭記』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시대와 세상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 써서 가지고 돌아와 세상에 신기한 이야기로 내 놓았던 거라오. 이때부터 공공도 인은 천지만물의 본질적 진리인 ‘空’을 통해서 순간적이고 거짓된 현상인 ‘色’을 보았고, ‘색’으 로 말미암아 가상이 낳은 각종 감정인 ‘情’을 만들어 냈으며, ‘정’을 전함으로써 ‘색’으로 들어갔 고, ‘색’으로부터 ‘공’의 참뜻을 깨달았소. 이에 그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情僧으로 바꾸고 『석 두기』의 제목을 『情僧錄』으로 바꾸었다오. 東魯 땅의 孔梅溪는 그 책을 『風月寶鑒』이라 불렀지요. 나중에 曹雪芹이 悼紅軒에서 이 책을 10년 동안 읽고, 5번이나 덧붙이고 빼며 고쳐 써서, 目錄을 편집하고, 章回를 나누어, 제목을 『金陵十二釵』라고 붙였지요. 아울러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덧붙였다오. (제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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