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田渡 碑
丙子胡亂과 [화냥년], [호로자식]
가슴아프고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이다.
사람들이 평소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를 욕할 때 “화냥년”,
그리고 버릇없는 못된 사람 주로 남자를 말할 때“호로자식"
이런 욕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욕들의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것 같아 그 역사적인 유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丙子胡亂
1636년(丙子年) 後金은 국호를 淸으로 바꾼 후,
조선과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兄弟관계를 폐기하고
새로 君臣관계를 맺어 貢物과 군사 3 만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선이 거부하자 20 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大軍에 밀린 朝鮮軍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전력의 열세로 1637년 1월 30일,
조선왕 인조(仁祖)는 성문을 열고 세자와 백관(百官) 등
500여명과 함께 삼전도(三田渡:)나루를 향해 나아갔다.
청(淸) 태종 홍타이치의 20 만 대군에 포위된 지 45일만이었다.
삼전도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벌써 수항단(受降壇)을
높이 쌓아 놓았고, 거기서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禮)를 올렸다.
조선 왕조가 창업한 지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패(敗)하면 치욕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밖에선 청병(淸兵)들이,
어미는 진중(陣中)에 붙잡아 두고,
그 어미 앞에서 갓난아이를 언 땅에 굴려 죽이는
짐승 같은 짓을 심심풀이로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무릎을 꿇고, 淸과 君臣(군신)의 義(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斥和論(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오달제,윤집등도
淸으로 끌려갔다.
[화냥년]
仁祖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온 백성들이 좋아하다보니
며칠후 백성들이 궁궐 앞에 모여들어 淸나라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는 물론 아내를 구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仁祖는 淸에 끌려간 인원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婦女子들로서, 그수가 60 만 명이나 됨으로
淸에 사신을 보내어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淸나라는 끌려간 사람들을 등급을 매겨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함으로 仁祖는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이 각자 재산을 팔아서 그 돈으로 청나라에 가서
데려오도록 하여 상당수의 女子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女人들을 還鄕女(환향녀)라
부르면서 온 동네에서 고생하고 돌아왔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이 還鄕女들은 淸나라에 끌려가서 못된 청군들의
성노리개로 性關係를 배워와서 온 동네 남자들을 모두
해치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女子들이 사회문제화되고 있었으나
나라에서는 묘한 방법이 없으므로 그대책을 각 가정에서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각 가정에서는 老人들이 밤낮으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부녀자들의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였음은 물론,
부득이 외출을 할 때도 치마 같은 것을 뒤집어 쓴 후 눈만 내놓고
다니게 하고 게다가 감시자를 동행케 하였다.
이때부터「환향녀」를 '화냥년'이라고 하며 멸시를 했다.
[호로(胡虜)자식]
이들 환향녀들은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중국 북방의 이민족을 이르던 말,
즉 오랑캐) 자식이라 하여 사회에서 냉대하였다.
역사적 의의
환향녀나 호로자식들은 멸시의 대상이 아닌 피해자들이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왕이 평소에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지 못했고
또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고.
전쟁이 나자 왕 밑에 신하들은 왕을 홀로 두고
도망가기 바빴고 또한 남자들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나약한 여성들만 끌려가서 청군들의 노리개가 되어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돌아왔는데 조선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지는 자가 없이 모든 것을 불쌍한 여자들에게만
죄를 뒤집어씌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청태종 공덕을 새긴 삼전도비가 훼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