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면 우선 양반의 고장이란 생각 먼저 난다. 지금도 우리의 유교적 옛 풍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안동이라고 한다. 안동, 봉화, 영주,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밀집한 수많은 고택과 종택들을 쉽게 만날수 있는것을 봐도 그것을 짐작할수있다.
조선 시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을 가진 많은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숫한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곳이 이곳 안동지방이다. .
안동은 원래 신라때에는 고창이란 이름 이였으나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패권을 놓고 다투다 안동지방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지방 토착세력인 김선평( 신안동김씨 시조 ), 권행( 안동권씨 시조 ), 장정필( 안동장씨 시조 )이 고려를 도와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 왕조의 개국에 결정적 역할 하므로서 삼태사란 칭호를 받았고 그후 당시 신라의 수도인 경주의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고 해서 지방 이름을 안동이라 했다고 한다. 안동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조선의 대표적 학자요 거유인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농암 이현보 등 수많은 학자와 정치인 낳았고 일제 강점기 만주와 국내에서 항일운동에 앞장 섰던 분들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던 석주 이상룡, 외 일송 김동삼, 기암 이중업, 공산 송필준, 백하 김대락,소창 김원식등 일일이 그이름을 거명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우국지사들을 배출한 고장이다.
타 지방에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목숨걸고 싸웠지만, 경북지방, 그중에서도 유독 안동에 항일지사들이 많은 이유는 학봉 종택과 무관치 않다고 한다.
구한말 학봉의 11대 종손 서산 김흥락은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고 학봉의 종손이란 신분으로 안동과 경북일대에서 대단한 신망과 권위를 지녔다고한다. 그런 그에게 일제가 들어오면서 자신의 집에서 참담한 굴욕을 겪는다. 그 참담한 굴욕을 도저히 받아 들일수 없었던 유림들은 의병운동과 항일투쟁에 나섰다. 1896년 7월 학봉 집안과 김흥락이 겪었던 굴욕은 다음과 같다.
김회락 의병대장이 지휘하는 100여병의 의병이 안동시 북후면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자 김회락은 간신이 도망하여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 되었던 학봉 종택에 숨었으나 발각되어 결박 되고만다. 이에 화가난 왜경은 김흥락과 그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등 평소에 의병활동을 했던 집안 어른 10여명을 포박하여 종가 큰 마당에 꿇어앉히고, 살림을 전부 마당에 꺼내어 금비녀 등 쓸 만한 물건은 전부 가져가고 큰 살림을 못쓰게 부수는 등 종가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한참동안 분탕질을 한후 다른 분은 풀어놓고 김회락 대장과 같이 활동한 김진의 두분을 안동경찰서( 안동관찰부) 로 압송 하였다. 김진의는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김회락은 왜경의 총살 위협에도 조금도 기세가 꺽이지않고 "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보수를( 원수갚도록) 가르쳐라" 고 지켜보면 가족들에게 소리치며 당당하게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어 의병대장의 처절한 일생을 마감 하였다. < "서산 김흥락의 독립운동과 그 여맥">
의병대장 김회락은 김흥락과 사촌간이다. 왜병을 피해 사촌형님의 집이자 종가인 학봉종택에 은신해 있다가 벌어진 일이다. 안동의 어른이었던 김흥락은 왜경에게 포박 당해 자기집 마당에 무릎꿇는 수모를 당했고, 사촌동생 김회락은 총에 맞아 죽어야만 했다. 안동 일대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녔던 김흥락이 왜경에게 포박당해 마당에서 무릎꿇어야 했던 사건은 안동의 유림들과 학봉 집안을 포함한 의성 김씨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이 치욕으로 인해 안동 유림과 학봉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산 김흥락의 제자중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만 60명이다. 훈장을 받은 숫자만 계산해서 60명이니 훈장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그런가 하면 안동 일대에 거주하는 의성김씨 내앞문중 가운데에서 훈장을 받은 이가 27명이다. 그중 학봉의 후손만 11명이다. 한 집안에서 27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것은 전국 최고가 아닌가 한다.
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을때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 이다. 어린 김용환은 하늘처럼 보였던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같다. 그는 21세 때 이강진 의병에 가담 하여 전투에 참여 하기도 했다.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작심한 것이다. 그런데 그방법이 드라마틱 했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 재산인 전답 700두락 18만평을 ( 현싯가 200 여억원) 모두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말년에 종가 살림이 거의 거덜난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김용환은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났었다. 명문가 종손이 되어가지고 집안 살림을 망해 먹은 대표적인 사례로 학봉 종손 김용환이란 이름 석자가 거론 되었다. 그러나 이는 김용환의 철저한 위장이였다.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이 위장이 너무나 철저해서 집안 사람들도 종손인 김용환이 진짜 노름꾼인 줄 알고 원망이 자자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낸 그의 비밀스런 행적이 여러 자료에서 들어났다. 그는 1946년 임종에 이르로서도 끝내 그비밀을 밝히지 않고 죽었지만, 근래에 그이 독립운동을 증거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자,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많은 소회를 <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 라는 제목의 서간문을 남긴바 있다.
" 그럭 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수없는 딱한 사정, 신행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맏긴 돈, 그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씨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이 모든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것 저 모든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 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집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 400년을 이어온 학봉 선생 고택의 구국 활동 >)
학봉 종손이 파락호로 위장하고 그 많던 종가 재산을 독립군 자금으로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외동딸 장롱 살 돈마저 써버려 큰어머니가 쓰던 헌 농을 갖고 시집 갔다는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사연이다. 그 돈을 노름으로 탕진한 줄 알고 평생 아버지를 원망해온 딸의 감회가 어떠했겠는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죽을때에도 끝내 발설하지 않은 김용환의 결의와 각오가 놀라울 뿐이다. 짐작컨대 그 결심은 그가 열 살 때에 하늘같이 여긴 조부가 왜경에 수모를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 양반동네 소동기> 라는 책의 저자인 윤학준이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1930년대의 형평사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학봉 종손인 긴용환을 꼽았을 정도로 김용환의 삶은 극적이였다. < KBS 역사 스페샬 과 명문가의 이야기 중에서 일부 발췌 >
안동은 경북 지방이 거지반 다 그렇듯 산이 많고 뜰이 적어 물산이 풍부하지 못하여 전라도 지방에 비해 음식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진 못했다. 그런데도 몇가지 안동만의 특별한 음식이 있다. 요즘은 경향 각지에 잘알려져 있고 TV 홈쑈핑의 단골메뉴가 된 간고등어가 그중하나다. 바다가 먼 내륙 지방인 관계로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그 옛날, 보부상들에 의해 바다에서 부터 옮겨지는 생선은 목적지에 도착 하기전에 이미 다 썩어 못쓰게 되어 버리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출발전에 소금을 듬뿍 쳐서 가져오다 중간에 다시한번 소금질을 하고 운반하니 생선에 간이 잘배어 들어 그것이 지금의 안동만의 특산물인 간고등어가 되었다고한다. 또 헛 제삿밥이라는 것도 있다. 말 그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은 제삿밥이다. 물류 이동이 활달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옛날에는 안동에선 최고의 손님 대접이 7첩 반상 이라한다 밥과 국을 제외하고 다섯가지 반찬이 상에 오르는것이 7첩 반상이다. 최고의 손님 대접이 다섯가지 찬 을 내 놓는 것이니 평소에는 두 세가지 찬으로 만족 해야했다. 그런 그들도 가끔은 떡 벌어지게 한 상 차려놓고 먹고 싶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날이 바로 제삿날이다 . 유교적 풍습으로 조상에게 올리는 제삿밥은 아무리 잘차려도 그것이 흉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날 만큼은 평소와 달리 한 상 잘차려 먹을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관습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 헛제사밥이다. 전라도 사람이 안동에 와서 반찬 가짓수가 적은데 놀라고, 안동 사람은 전라도 지방에 가서 밥상을 받아보고는 반찬이 너무 많은데 놀랐다고 한다
이와 같은 안동 지방의 특징에 대하여 대략적으로 공부를 하고 위 바이크 팀이 출발한 것은 10월도 중순에 접어든 16일 아침 7시였다. 차량 두대에 10명이 나눠 타고 중앙고속도로에 들어서니 푸른하늘과 맑게 빛나는 억새꽃은 햇살 아래 보석처럼 영롱한 빛깔을 뿜어대며 바람에 한들거린다.
안동시내를 지나 낙동강을 건너 남후면 사무소에 차량을 주차해 놓고 하회로 방향을 잡고 출발하였다. 낙동강 지천을 따라 가는 들녘은 눈이 부시도록 노란 빛깔을 마음껏 뿜어내는 벼 이삭이 풍요의 상징인양 우리의 앞길을 반기고 남빛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다 먹지않고 바라만 봐도 배가부를 것같다 지난 여름의 치열했던 노동의 댓가를 가감없이 그대로 농부에 품에 돌려주는 것이 땅이 우리에게 우리에게 말없이 보여주는 진리다. 낙암정 가는 길은 예전과 달리 말끔이 도로 포장이 되어 있어 편하게 오를수 있엇지만 그래도 오르막은 여전히 힘들다. 낙암정 에 잠시 들러 낙동강변의 수려한 풍광을 바라보며 다리 쉼을 하며 숨 고르기를 하고 나서 하회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가는 길은 한산하고 차량 통행은 그리많지 않으나 이따금식 4대강사업 대형 덤프트럭 들이 먼지를 풍기며 질주 하는 바람에 자전거를 탄 우리들은 위협을 느끼곤 하였다.
마애리 선사유적지 유물관에 들려 관람후 강변 억새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풍산읍 하리에 있는 예안이씨 종택인 충효당을 찾았다.
종택은 마을길을 따라 안쪽 깊숙히 들어가면 약간 경사진 언덕 위에 나지막한 야산을 배경으로 풍산뜰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자 정면으로 누각인 쌍수당, 우측으로는 안채가 조촐하게 서있다. 쌍수당은 몸채가 휜기둥이 떠받들어 주는 누각으로 북쪽방향으론 쌍수당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서쪽 방향으로는 백원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쌍수당과 안채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으면 오랜세월을 말해주듯 착갈아 앉은 목질의 색감이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다.
예안이씨 충효당 종택은 임진왜란 이전인 1555년 풍은 이홍인이 건축하여 지금까지 약 500여년의 세월을 간직한 조선중기의 고택으로 보물 553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은 임진년 왜란 당시 향리 의병장으로 구담지역에서 왜적을 방어하여 왜군이 안동지방을 침범할수 없게 활약 하였고 1594년 진중에서 순국하여 나라에서 정충각을 정려 받았고 또한 그의 9세손 이항오는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정효각을 정려받아 후에 이집에서 뛰어난 충신과 효자가 났다고 하여 충효당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그후손인 이준교씨의 설명에 의하면 쌍수당이란 뜻도 충과 효를 함께 닦는다는 뜻이고, 백원당은 충과 효는 백가지의 근원이란 말이라고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찾아온 답사객에게 불편해 보이는 몸으로 싫다는 내색없이 집의 특징과 조상의 내력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는 그의 모습에서 명가의 후손 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충효당을 나온 자전거는 하회를 향해 달려간다 풍산읍을 지나자 바로 소산리다. 조선조 말 세도정치로 이름을 떨쳤던 안동김씨들의 본향으로 청음 김상헌의 청원루가 있고, 안동권씨 수곡종택, 효도의 상징으로 알려진 삼구정있는 마을이다. 안동김씨 하면 우리는 먼저 세도정치를 떠올리게 된다 순조대부터 흥선 대원군이 들어서기 전인 철종때까지 수많은 정승 판서를 배출하며 나라를 농단하여 결국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한 안동김씨, 그들의 원래 본향이 바로 소산리다. 그 안동김씨들을 우리는 흔히 장동김씨라고도 부른다 그들이 인왕산 자락인 장동에 모여 살아서 그렇게 부르게된 것이고 그들의 선조가 병자호란때 척화파로 유명한 김상헌이다. 김상헌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선 청나라와 화친을 해서 백성들이 전화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명길에 맞서 오랑케와는 화친이란 있을수 없다는 명분만 내세우며 척화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후 향리에 청원루(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뜻 )짓고 칩거 했던곳이 이곳 소산리다. 지금도 소산리에 살고있는 안동김씨들은 자기네는 세도정치로 나라를 망해먹은 장동의 김씨들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며 그들을 안동김씨라 하면 안되고 장동김씨라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을 좌측에 있는 삼구정에 먼저 들려 돌아본후 청원루와 삼소재 까지 보려 했지만 시간 관계로 그 두 군데는 생략하고 하회로 향했다.
하회로 가는 916번 지방도로는 노폭이 좁고 갓길이 없어 자전거 타기엔 적당치 않지만 어쩌겠나 길은 그것뿐인데, 먼저 하회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있는 부용대에 올랐다. MTB싱글길 같은곳을 통과하여 오르려니 숨이차다. 몇몇은 내려서 끌바를 하고 또다른 몇몇은 타고 오르니 어느새 부용대 정상.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고 간혹 외국인들도 눈에 띈다. 역시 하회마을은 부용대에서 내려다 보아야 제격이다. 보는 눈맛이 시원하다. 강건너로 보이는 하회는 가을햇살을 받아 맑게 빛나고 있었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잘어루러져 있는 모습이 타임머신을 타고 몇백년뒤로 돌아간듯하다.부용대에 올라온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지른다. 절벽아래 강에는 서서히 흐르는 물살을 따라 조각배 한척이 관광객을 싣고 오가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롭게 보일수 없다. 은비늘이 반짝이는 강물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다시 부용대에서 내려와 화천서원 앞을 지나 옥연정사와 겸암정사를 들러보고 강가 백사장 나루터로 내려왔다. 옥연정사는 몇년전 개봉된 YMCA 야구팀을 소제로 하여 개화기 우리나라의 풍속을 잘그려낸 영화의 무대이기도하며 얼마전 부터는 고건축과 향토역사에 관심이 있는분 한 가족이 내려와 살며 외국 관광객들을 맞고있는 모습이 TV 프로램에 소개된것을 본적있다. 이제 하회마을로 들어가려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하는데 혹시 자전거는 안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 회원 한 분이 먼저 내려가 뱃사공과 협의한 결과 뱃삯만 내면 싣어 준다고 하여 모두 무사히 강을 건너 마을로 들어갈수있었다.
하회란 이름은 물이 돌아 흐른다는 한자말로 현재 1~2리로 나누어져170 여가구 450 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풍수상 톡특한 지형인 산태극 수태극 모양으로 마을이 물위에 활짝핀 연꽃과 같다고 하여 연화부수형 이라고도 하고 배가 막 떠나려는 모습의 행주형 이라고도 하여 지금도 우물을 깊게파면 뱃바닥에 구멍이 뚫려 배가 가라 앉는다 하여 우물 파는것과 돌담을 쌓는것을 기피한다고 한다. 마을의 개척역사는 허씨터전에 안씨문전, 류씨배판이란 향언과 하회탈 제작에 얽힌 허도령의 전설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온다. 고려말 풍산 류씨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들어오고 이어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전쟁을 진두 지휘하며 전란을 이끌었던 서애 류성룡 형제로 말미암아 하회는 류씨들의 집성촌이 되고 영남의 대표적 반촌으로 변모해 갔다. 또 부용대, 만송정( 솔밭 ), 강과 백사장등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하회 별신굿등 민속놀이가 전승 잘 보존되어 마을 전체가 주요 민속자료로 지정 보호 되고있다.
이제 그 하회를 본격적으로 둘려 보기위해 마을로 들어 서니 사람이 너무 많다. 인산인해 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도저히 차분하게 둘려 볼수 있는 분위가 아니다. 가는곳 마다 사람. 사람. 사람. 문화유적 답사지라고 감히 말할수 있는 차분한 분위기는 전혀 없고 여늬 관광지 하고 조금도 다름없는 왁자지껄 그자체다. 안되겠다 싶어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과 겸암의 종택인 양진당만 대문 밖에서 대강 들여다 보고 얼른 그곳을 피해 강변의 길을 따라 병산서원 으로 향했다.
병산서원 가는 길은 강옆으로 난 한가한 비포장 길을 따라가다 농로를 지나 산으로 접어 들어 잘 닦힌 임도를 어느정도 가면 등산로 같은 길을 끌바를 하며 가야한다. 끌바 길이가 약 400여m 힘은 들지만 그런대로 아기자지한 것이 재미있었다. 병산서원은 조용하고 고즈넉 하겠지, 만대루에 올라 백사장 넘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 동안 라이딩에 흘린 땀을 들이며 잠시나마 쉬어야 겠다는 기대감으로 도착하니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방송국 CF 촬영으로 구경하는 사람과, 스탭들 인해 어디 발부칠곳이 제대로 없다. 기대했던 만대루는 연기자와 스탭, 촬영장비로 꽉차있어 밑에서 잠시 올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쉽지만 병산서원을 출발했다. 먼지나는 비포장 도로를 지나면, 우리처럼 배를 타고 강을 건너지않고 도로를 통해 들어가는 원래 하회마을 입구를 지나 다시 916번 지방도로를 타고 아침에 출발한 곳으로 가야하나, 그러지 않고 우리는 풍산뜰을 가로질러 농로를 타고 오전에 들린 예안이씨 충효당이 있는 하리마을 앞까지 바로 질러갔다. 이제 부터는 아침에 온길을 되짚어 가야한다. 벌써 풍산뜰에는 지는해가 뉘엿뉘엿 깔리기 시작한다. 벌겋게 물들은 저녘노을이 비닐하우스에 반사되는 농촌의 저녘풍경이 아름답다. 마을마다 밥짓는 연기가 땅바닥에 낮게 깔리우고 놀던 아이들을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이제는 볼수 없는 오래전의 충경이지만 . ..... 내일 산길 라이딩을 위해 숙소가 마련된 봉화로 가기위해 아침에 타고온 차량이 기다리는 남후면 사무소로 향해 땅거미가 길게 드리우는 길을 따라 우리는 힘차게 페달을 밟을 것이다. 즐겁고 행복한 뒷풀이 시간을 상상하면서.............. 모두들 수고 하셨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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