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위한 선의 지혜] 5. 세계적인 명상 붐과 한국불교의 과제 3
“치유 명상 붐은 깨달음 명상 알릴 기회”
불교 존재 가치 없는 명상법
인도에 불교 없는 것과 같아
돈벌이 수단 세속화된 명상
동체대비 원력행 되진 못해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유래한 불교 명상법을 배워간 서구의 명상가들은
명상을 과학화하고 프로그램화하여 세계적인 치유 명상 붐을 일으켰다.
서구의 치유 명상 붐은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도 긍정적인 면이 많다.
명상의 본산이라 할 불교계에도 깨달음 명상을 알릴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이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 경험으로 영어가 보급되었던 미얀마, 스리랑카 등
남방 상좌부 승가에게는 위빠사나 명상을 서구 세계에 전파할 기회가 열렸다.
중국의 강점으로 해외로 망명한 달라이라마의 티벳불교에도 명상 붐은 좋은 인연이 되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긍정적인 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면도 있기 마련이다.
세계적인 치유 명상 붐은 불교계, 특히 한국불교에 기회이자 위기다.
왜 불교에 위기인가?
불교의 깨달음 명상은 불교의 존재 가치이자 본질적인 자산인데,
치유 명상가들은 불교에서 깨달음은 버리고 명상 방법만을 가져다 상품으로 만들고
프렌차이즈식으로 보급하여 시장을 독점해버렸다.
불교의 깨달음 명상은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비유하자면, 불교계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장에서
손님을 빼앗기고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마치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져 버린 현상으로 비유할 수 있다.
브라만교의 숙명론적인 윤회설을 중도의 깨달음으로 혁신하여
대안의 승가 공동체로 출발한 불교는 이후 사방으로 전파되어 인류의 4대 종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작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의 기득권을 완고하게 구축한
브라만세력이 부처님을 하나의 신으로 포섭하고
이슬람 침략자들이 불교도에 박해를 가하자
인도의 불자들은 브라만(힌두)교에 흡수되거나 사라져 버렸다.
만약, 세계적인 명상 붐에 대하여 불교계가
불교의 깨달음 명상과 치유 명상의 같은 점과 차이점에
정견을 세우고 바르게 안내하지 못한다면,
치유 명상 붐에 깨달음 명상이 흡수되거나 같이 세속화되어
불교 명상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조계종 새 총무원장 스님이 취임하여
명상 포교 종책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만시지탄이나 조계종은 불교 명상 중에서 가장 빠른 수행법인
간화선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겠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간단치 않다.
이제부터 치유 명상의 문제와 과제를 살펴보자.
서구 치유 명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서구의 치유 명상이 서양인들에게 폭넓게 보급되어 눈부신 성공을 구가하는 때에
미국의 한 불자 교수가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책을 출간하였다.
미국에서는 〈McMindfulness(맥마인드풀니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마음챙김의 배신(필로소픽)〉이라 번역 소개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로널드 퍼서 교수다.
그는 흥미롭게도 한국불교의 태고종 스님에게 간화선을 공부하는 재가 수행자다.
퍼서 교수는 이 책에서 “지금 서구에서 유행하는 ‘마음챙김 명상’은 불교에서 배워왔지만,
불교를 버리고 명상 테크닉을 통해서 현실에 순응하고 마음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상품화된 명상”이라 신랄하게 비판한다.
퍼서 교수는 〈마음챙김의 배신〉에서 마음챙김 명상가들이
불교 명상에서 삼매, 마음챙김(알아차림) 등을 수련하고 배워가서 사용하면서도
불교에 대하여 고마워하지도 않고 불교를 버렸다고 비판한다.
즉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위해 명상법을 안내하셨는데,
마음챙김 명상가들은 불교 명상에서 배웠으면서도
불교는 버리고 명상만 가져가 과학이라 포장해서
대중들에게 명상을 상품으로 만들어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마음챙김 명상가들이 말하는
상품화된 명상은 바른 명상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스트레스와 정신 불안을 치유하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러한 명상은 마치 치통이 나면, 원인을 진단해서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 진통제를 먹어 임기응변으로 넘어가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맥마인드풀니스’, 햄버거와 같은 마음챙김이다.
집 밥이나 식당에서 일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간편식인 햄버거와 라면 같은 것으로 끼니를 떼우면
임시 방편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으나 결국 영양 결핍으로 건강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챙김 명상은
현대인들이 직면한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하고
오직 내면의 스트레스 감소와 불안한 마음을 치유하는 명상 기술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챙김 명상은 기업에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기업에서 하는 명상은 깨달음이나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근로자의 스트레스 감소와 생산력 향상에 목적이 있다.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명상이
근로자들의 정신 건강과 일을 잘 하기 위한 도구로 수단화되어 버린 것이다.
기업의 고용주 입장에서는 근로자들이 명상을 통해서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고 일을 잘 하여 생산력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것은 기업이 해고나 업무상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개인의 문제로 내면화시켜
참고 견디는 힘을 키우게 하는데 명상을 이용하게 만든다.
숭고한 가치의 명상이 기업 생산력 증대를 통한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마음챙김 명상은 급기야 학교는 물론 군대에까지 광범하게 활용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긴박한 전투 현장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평정심으로 승리하기 위해 마음챙김 명상을 가르치고 있다.
서구에서 마음챙김 명상은 이제 전쟁에서
적군을 많이 죽여서 승리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까지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음챙김 명상은 부처님이 가르친 무아와 해탈로 가는 깨달음 명상이 아니라
자기가 더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어 잘 사는
이기적인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퍼서 교수는 비판한다.
이것은 곧 서구에서 마음챙김 명상이
자본주의 세속화에 완전히 순응하는 잘못된 결과라 진단한다.
그는 마음챙김 명상에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퍼서 교수는 마음챙김 명상의 치유적인 기능은 분명 가치가 있지만,
현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과장 광고를 없애야 하며,
개인의 내면 치유만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적인 문제를
바로 보고 개선하여 공동체의 치유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서구 치유 명상의 문제
서구의 치유 명상은 불교의 깨달음 명상에서 배워가서 크게 성공하였다.
하지만, 치유 명상은 불교의 가치인
깨달음과 중도(팔정도)를 배제하면서 삶의 도구, 수단이 되어 버렸다.
누구나 명상을 하지만, 깨달음을 향한 지혜와 자비의 실천, 세상의 행복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치유 명상이 수단화, 상품화, 세속화되어 간다는 비판을 불러 왔다.
실제, 서구의 명상가들 중에는 심각한 지탄을 받는 이가 있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크게 이름을 날린 오쇼 라즈니쉬(1931~1990)가 그런 인물이다.
그는 인도 출신의 명상지도자인데
미국으로 건너가 불교의 여러 경전과 선어록을 강의하며 명상을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중심으로 오리건주에 자치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공동체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다가
지역 주민들과 충돌하자 살인과 생화학 테러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동적인 명상을 강조하며 나체 춤이나 집단 성행위 등을 명상으로 가르쳤다.
이것은 미국 사회에 큰 화제와 동시에 파문을 낳아
결국 사회 여론의 지탄을 받아 명상 공동체는 무너졌고 라즈니쉬는 인도로 추방당했다.
라즈니쉬의 명상과 공동체의 엽기적인 행각은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라는 다큐멘터리(넷플릭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라즈니쉬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처했고,
그의 불교 경전과 선어록 강의 저서들은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고 지금도 추종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자기 명예를 높이고 롤스로이스를 99대나 소유하는
사치와 욕망을 추구하는데 불교와 명상을 이용하였고,
그렇게 추종자들과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다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명상을 안내하는 명상지도자가 명상을 수단화,
세속 상품화하면서 불교의 정견과 계율의 가치를 버렸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치인 정견과 깨달음이 빠진 명상은
현대인에게 스트레스 감소와 일시적인 마음의 평정심을 가져다주겠지만,
그것이 생활화되어 자기도 행복하며 남도 행복하게 하는 동체대비 원력행으로 나아가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불교의 정견 없는 치유 명상은 목적지를 잃은 배와 같다.
사바세계에서 생사 윤회라는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가려면 반야의 배를 타야 한다.
그런데 그 배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없는 배라면 참으로 곤란하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기보다는 배에 타고 있는 것이 안전하고 도움이 되지만,
그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배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서구의 치유 명상가들이 불교의 깨달음 명상을 수행하고 배워서
과학화, 프로그램화하여 서구 시민들에게 명상의 가치를 알리고 활용한 것은 크나큰 성과다.
그것은 마땅히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치유 명상의 한계를 바로 보지 못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상품화와 돈벌이 수단으로 명상을 세속화한다면 그것의 문제와 한계를 알려주어야 한다.
▶한줄요약
불교의 정견 없는 치유 명상은 목적지를 잃은 배와 같다.
2023. 03. 03
박희승 교수
현대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