耳溪集卷三十三 / 墓誌銘
同知中樞府事鄭公墓誌銘 幷序 a242_034d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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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錫百。字朋之。姓鄭氏。遠祖在高麗時。爲東萊戶長。以恭儉喜施與。稱長者。其後遂大昌。爲東方甲族。人以爲積善之報。入我朝。有若翼惠公蘭宗。佐成宗。策名旂常。有若文翼公光弼。相中宗救士禍。名
德載太史。有若林塘公惟吉,水竹公昌衍。父子繼相。以文章雅望名世。子司寇公廣成。以袁楊之世。脫屣榮利。君子稱其大勇。寔生翼憲公太和。相三朝。秉勻軸。有大勳勞於國家。實公曾大父也。大父諱載岱。工曹參議。考諱赫先。通政牧使贈左贊成。妣贈貞敬夫人延安李氏。縣令贈吏曹參判泳女。領議政時白玄孫。生三男。長曰錫三。都承旨。仲曰錫五。左議政。公其季也。公以肅宗己卯正月二十一日生。英宗丙辰。蔭補寧陵郞。陞廣興奉事。戊午。中司馬。轉尙衣院禮賓寺直長。遷司宰監主簿,刑曹佐郞,正郞。壬
戌。除平康縣監。甲子。陞載寧郡守。三載解歸。是後歲有除。入爲司饔主簿,漢城庶尹,北部都事,掌隷司議,宗親典簿,掌苑別提,儀賓都事,司饔僉正。出爲大興郡守,咸興判官,殷栗縣監。此其內外官歷也。歲戊子。公壽滿七十。以子晩淳侍從恩。進階通政。爲僉知中樞。間爲五衛將。癸巳。擢嘉善。以特旨授同知中樞。甲午。進嘉義。以辛丑九月十七日考終。享年八十三。是年十一月初六日。葬于西原池谷里負坤之原。配貞夫人全州柳氏。承旨泰明女。生後公二年。歿先公四年。始權窆于龍仁。乙巳四月某日。合祔于公墓。擧四
男二女。長晩淳。文科大司憲。次宜淳。蔭參奉。次華淳。生員。今府使。次文淳。早歾。女適縣監洪冕浩,郡守洪載淵。俱無子。庶子三。涑監牧官,潝,潗。庶女三。李英圭,趙喆,李儒觀妻。晩淳娶良浩先君贈吏曹判書洪鎭輔女。一男東簡。二女婿。曰朴獻源,李澈。宜淳娶縣監李普運女。二男東藝,東采。二女婿。曰李在安,安錫良。庶女二。洪秉喆,韓光淵妻。華淳娶左議政李思觀女。無子。以族子東萬爲後。文淳娶大司憲李彝章女。亦無子。子東采。涑子相裕。潗子後裕。良浩以通家子。事公於鄕閭。竊覸公性質寬厚。器度通儻。其接人也。裏
襮坦坦。和氣溢於言面。人無親疎貴賤。一以誠愨待之。口未嘗言人短長。急人之困如飢渴。不計有亡。故屢典州郡。家常空匱。終不以屑意。雅喜林園。無官則輒疋馬出郊。種樹課耕。曳杖消搖。混跡於山翁野叟。人不知爲官人也。尤篤於孝友。遇先忌。旣耋。必澡躬茹素。與仲氏議政公。居異衖。非在公則日常造。湛樂永夕。姊妹之貧者。與分衣食。視諸甥如子。親戚咸倚以爲歸焉。夫人亦有懿行。善事舅姑。贊成公嘗住鄕舍。夫人竭誠致養。至於親操井臼。手拮園蔬以供之。贊成公每謂李夫人曰。吾婦孝敬如此。吾菜食甘於
芻豢矣。治家有法度。妾媵無間言。終曁公享大年。受榮誥。婚歲再屆。爲設重巹之筵。袍笏捧觴。兒孫滿前。一世莫不艶慕。此豈無所致而然哉。不佞嘗論鄭氏之先。以篤厚立心。以勤儉成家。以謙冲處世。故官尊而名不虧。門盛而人不競。用能保族宜家。子孫長世。如公可謂能世其家。而食其厚報者也。是宜銘。以詔後生。銘曰。
質而不矯。沾沾者之愧也。敦而能施。齪齪者之畏也。旣壽旣福。以昌其後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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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耳溪集) 저자 홍양호(洪良浩) 생년1724 몰년 1802 간행년도1843
동지중추부사 정공 묘지명 병서 〔同知中樞府事鄭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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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석백(錫百)이고, 자는 붕지(朋之)로 성은 정씨(鄭氏)이다. 원조(遠祖)는 고려 시대에 동래 호장(東萊戶長)이 되어 공손하고 검소하며 베풀기를 좋아하여 장자(長者)로 일컬어졌다. 그 뒤로 드디어 크게 창성해져 우리나라의 명문대족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선행을 쌓은 보답이라고 여겼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익혜공(翼惠公) 난종(蘭宗) 같은 분이 성종을 보좌하여 공신에 이름이 올랐고,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 같은 분은 중종을 보좌하여 사화(士禍)를 바로잡아 이름과 덕행이 역사서에 실렸다. 임당공(林塘公) 유길(惟吉)과 수죽공(水竹公) 창연(昌衍)은 부자가 연달아 재상이 되었으며 문장과 명망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의 아들 사구공(司寇公) 광성(廣成)은 원씨(袁氏)와 양씨(楊氏) 같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영리(榮利)를 헌신짝처럼 버리니, 군자들이 그 큰 용기를 칭송하였다. 이분이 익헌공(翼憲公) 태화(太和)를 낳았다. 익헌공은 세 조정에 재상이 되어 국정을 담당하여 국가에 큰 공훈을 세웠으니, 실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의 휘는 재대(載岱)이니 공조 참의를 지냈다. 부친의 휘는 혁선(赫先)이니 통정대부에 오르고 목사를 지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니, 현령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이영(李泳)의 딸이고,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의 현손이다. 아들 셋을 두니, 맏아들은 석삼(錫三)으로 도승지를 지냈고, 둘째는 석오(錫五)로 좌의정에 올랐으며, 공은 막내이다.
공은 숙종 기묘년(1699, 숙종25) 정월 21일에 태어났다.
영조 병진년(1736, 영조12)에 음직으로 영릉 참봉(寧陵參奉)에 보임되었다. 이듬해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로 승진하였다.
무오년(173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상의원 직장, 예빈시 직장으로 옮겼다가 사재감 주부, 형조 좌랑, 형조 정랑으로 옮겼다.
임술년(1742)에 평강 현감(平康縣監)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744)에 재령 군수(載寧郡守)로 승진하였다가 3년 만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이후로 해마다 제수되어 내직으로는 사옹원 주부, 한성부 서윤, 북부 도사, 장례원 사의, 종친부 전부, 장원서 별제, 의빈시 도사, 사옹원 첨정이 되었고, 외직으로는 대흥 군수(大興郡守), 함흥 판관(咸興判官), 은율 현감(殷栗縣監)이 되었다. 이것이 내외직을 역임한 이력이다.
무자년(1768, 영조44)에 공의 연세가 만70이 되자, 아들 만순(晩淳)이 시종신이 되었다고 하여 은혜를 미루어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그사이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계사년(1773)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하계)에 발탁되고 특지(特旨)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갑오년(1774)에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상계)에 올랐다.
신축년(1781, 정조5)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3세이다. 이해 11월 6일에 서원(西原 청주) 지곡리(池谷里) 부곤(負坤)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승지 유태명(柳泰明)의 딸이다. 공보다 2년 늦게 태어나 공보다 4년 일찍 졸하였다. 처음 용인(龍仁)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가 을사년(1785) 4월 모일에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4남 2녀를 두니, 맏아들은 만순(晩淳)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다음은 의순(宜淳)으로 음직으로 참봉을 지냈다. 다음은 화순(華淳)으로 생원이 되었고 지금 부사(府使)이다. 다음은 문순(文淳)으로 일찍 죽었다. 딸은 현감 홍면호(洪冕浩), 군수 홍재연(洪載淵)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나, 모두 아들이 없다. 서자(庶子) 셋을 두니, 속(涑)은 감목관을 지냈고, 흡(潝)과 집(潗)이다. 서녀(庶女) 셋을 두니, 각각 이영규(李英圭), 조철(趙喆), 이유관(李儒觀)의 처가 되었다.
만순(晩淳)은 나의 선군이신 이조 판서에 추증된 홍진보(洪鎭輔)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아들 하나를 두니, 동간(東簡)이다. 두 사위는 박헌원(朴獻源)과 이철(李澈)이다. 의순(宜淳)은 현감 이보운(李普運)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두 아들은 동예(東藝)와 동채(東采)이다. 두 사위는 이재안(李在安)과 안석량(安錫良)이다. 서녀(庶女)는 둘인데, 각각 홍병철(洪秉喆)과 한광연(韓光淵)의 처가 되었다. 화순(華淳)은 좌의정 이사관(李思觀)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자식이 없어 족자(族子)인 동만(東萬)을 후사로 삼았다. 문순(文淳)은 대사헌 이이장(李彝章)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또한 자식이 없어 동채(東采)를 자식으로 삼았다. 속(涑)의 아들은 상유(相裕)이다. 집(潗)의 아들은 후유(後裕)이다.
나는 통혼한 집안의 자제로서 공을 향려(鄕閭)에서 섬기며 가만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공은 성품이 관후하고 도량이 통창하여 남을 대할 때에는 안팎이 평탄하여 온화한 기운이 말씀과 낯빛에 넘쳤으며, 친소나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성심으로 대하였고, 입으로 남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남의 곤궁함을 급히 여겨 구제하기를 기갈 든 듯이 하여 집안에 재물이 있건 없건 따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차례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면서도 집안은 항상 궁핍하였으나 끝내 신경을 쓰지 않았다. 평소 임원(林園)을 즐거워하여 관직이 없으면 곧 필마를 타고 교외로 나가 나무를 심고 밭을 갈았으며 지팡이를 끌고 소요하여 자취가 산골 노인이나 들판의 늙은이와 섞이니, 사람들은 공이 벼슬하는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다.
효성과 우애에 대해서 더욱 독실하였다. 돌아가신 부모의 기일을 만나면 이미 늘그막임에도 반드시 몸을 재계하고 소식(素食)을 하였다. 중씨(仲氏) 의정공(議政公)과는 다른 마을에 살았는데, 공직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날마다 찾아가 즐거워하며 밤을 지샜다. 자매 중에 가난한 자와는 의복과 음식을 나누었고, 여러 생질을 보기를 자식처럼 하니, 친척들이 모두 의지하여 귀의처로 삼았다.
부인 또한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시부모를 잘 섬겼다. 시아버지 찬성공(贊成公)이 일찍이 시골집에 거처할 때에 부인이 정성을 다하여 봉양을 하였다. 심지어는 직접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고 손수 채마밭의 푸성귀를 따서 올리기까지 하였다. 찬성공이 매번 아내 이 부인(李夫人)에게 말하기를 “우리 며느리의 효성과 공경이 이와 같으니, 내가 푸성귀를 먹어도 고기보다 더 달다오.”라고 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시첩들도 불평하는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는 공이 오랜 장수를 누림에 이르러 영예로운 고명(誥命)을 받았다. 혼인한 해가 재차 돌아오자 회혼례를 열었는데, 관복에 홀을 들고 술잔을 올리는 자식과 손자들이 앞에 가득하니, 온 세상에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내가 일찍이 논해보건대, 정씨의 선조는 독실함과 후덕함으로 마음을 세우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으로써 집안을 이루고, 겸양과 소탈함으로 처세하였으므로 관직은 존귀해져도 명성은 무너지지 않았고 문호가 성대해져도 사람들이 비방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능히 종족을 보존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여 자손들이 대대로 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니, 공과 같은 분은 능히 가문의 명성을 이어 그 두터운 보답을 누린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분은 명을 지어서 후손에게 알려줌이 마땅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질박하여 꾸미지 않으니 / 質而不矯
잘난 체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고 / 沾沾者之愧也
돈후하여 능히 베푸니 / 敦而能施
소견 좁은 자들이 경외하도다 / 齪齪者之畏也
이미 장수하고 이미 복을 받았으니 / 旣壽旣福
그 후손들 창성하리라 / 以昌其後嗣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21
註;본란 제 128호와 관련됩니다. 고전번역원에서 번역되어 2024.2.1.자로 공시되었기 재차 올립니다.
첫댓글 동지중추부사 정공 휘(諱)석백(錫百)묘지명 〔同知中樞府事鄭公諱錫百墓誌銘〕 잘 읽고 보존하여 익히겠습니다.
전번에는 안되었는데 번역이 되었네요. 23世(贈이조판서吏曹判書公) (諱;석증(錫曾) 자료도 찾아봐주세요. 번역이 안되어 있어요.
23世 本生妣東萊鄭氏墓誌(吳晉周妻1681-1708)
23世 형관공(亨觀公) (諱;형관(亨觀) 1704-1722)
23世 평양서윤공(平壤庶尹公) (諱;석보(錫保) 1719-1769)
23世 성균진사정공(成均進士鄭公) 諱;근(瑾) 1680-1755)
陽坡公(諱;太和) 묘지명 잘 보았습니다 !
諱 錫百公의 墓誌銘 잘봤습니다
덕분에 선조님의 墓誌銘 잘 봤습니다.
군태님의 좋은정보글 잘공유하고 흔적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