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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58)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낙동강) ⑤ 김해(金海)
2020년 11월 10일 (화요일)▶ 백파 출행
이제 양산시 ‘물금’에서 출발하여 부산광역시 구포를 경유하여 사상구와 사하구의 낙동강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부산의 ‘낙동강하구둑’까지 가는 여정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양산시(梁山市)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양산과 마주하고 있는 김해시(金海市)를 그냥 지나쳐갈 수는 없다. 특히 김해는 유서 깊은 가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이다. 양산과 김해는 낙동강이 남해로 들어가는 막바지 하류의 양안(兩岸)에 위치한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신라와 가야의 옛 땅인 두 지역의 지리적 환경과 문화 등 그 역사적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낙동강 유역이라는 공간과 역사의 시간을 교직하여 선현들의 삶과 문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김 해(金海)
김해시(金海市)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동부에 있는 지역이다. 김해는 낙동강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산시 물금읍 낙동강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김해시의 동쪽은 양산시 물금읍, 부산광역시 북구와 강서구, 서쪽은 창원시, 남쪽은 남해(南海), 북쪽은 밀양시 하남읍과 삼랑진읍과 접하고 있다.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가야연맹체의 중심국이었던 가락국(금관가야)의 도읍지였다. 2천 년이 지난 고도(古都) 가야의 땅, 김해의 하늘을 바라본다. 저 무연한 하늘 아래 인간들의 치열한 삶이 명멸해 갔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진영읍(進永邑), 주촌면(酒村面), 진례면(進禮面), 한림면(翰林面), 생림면(生林面), 상동면(上東面), 대동면(大東面), 동상동(東上洞), 회현동(會峴洞), 부원동(府院洞), 내외동(內外洞), 북부동(北部洞), 칠산서부동(七山西部洞), 활천동(活川洞), 삼안동(三安洞), 불암동(佛岩洞), 장유1동(長有1洞), 장유2동(長有2洞), 장유3동(長有3洞) 등 1개읍 6개면 12개동이 있다.
김해의 자연환경
김해는 지리산 ‘영신봉’에서 분기한 낙남정맥(洛南正脈)이 낙동강을 만나 그 맥을 다하는 지역이다. 낙남정맥(洛南正脈)은 지형상 낙동강 남쪽에 위치한 정맥으로,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거의 끝나는 지리산의 영신봉(1652m)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북쪽으로 남강의 진주와 남쪽의 하동·사천 사이로 이어져, 고성을 경유하여 동북쪽으로 함안 / 마산·창원과의 경계를 이루며 높이 300∼800m의 높고 낮은 산으로 연결되어 김해시에 이른다. 고성군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북상한 낙남정맥은 마산의 무학산(761m) 천주산(639m)을 경유 창원시의 정병산(567m)에 이르러 김해시에 접어든다,
낙남정맥(洛南正脈)의 김해시 구간은 정병산(567m) 비음산(517m) 대암산(607m) 용지봉(744m) 황새봉(393m) 금음산(376m) 망전고개(14번도로) 나발고개(58번 도로) 영운리고개(21번 도로) 신어산(631m) 장척산(531m) 475고지(백두산 갈림길) 동신어산(460m)을 지나 상동면 매리에서 낙동강을 만나 그 맥을 다한다.
낙남정맥은 김해시 한 가운데를 동서로 지나가므로 김해시의 읍면을 나누는 마루금을 이룬다. 그래서 김해시는, 낙남정맥의 북쪽은 진영읍, 진례면, 한림면, 생림면, 상동면 지역이고, 정맥의 남쪽은 장유면, 주촌면, 삼계동, 구산동, 삼방동, 대동면 지역이다.
지세(地勢)를 보면, 시의 북반부는 낙동강의 유수에 의해 침식되어 단절되었다가 다시 돌출된 낙남정맥의 지맥이 지나가 평지가 적고, 300~700m의 산들이 솟아올랐으나 차츰 고도가 낮아져 하구 쪽의 평야부와 맞닿아 있다. ‘대동수문’은 밀물 때 바닷물이 흘러드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하며, 관개(灌漑)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김해평야는 낙동강의 상·중류에서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되어 이룩한 우리나라 최대의 삼각주의 충적평야이다
중앙부는 낙동강 삼각주의 거대한 평야부를 이루어 이 시의 시가지와 일부의 농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김해시의 동부는 낙동강(洛東江)이 부산광역시와 경계를 이루며 남류(南流)하다가, 중앙의 삼각주 평야부를 배후지로 한 뒤 하구 부근의 명지도에 이르러, 물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동부의 본류와는 달리 폭이 현저히 좁아진 지류로서 남해에 도달한다.
김해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소하천으로는 주촌면 덕암리 쪽의 황새봉(393m)에서 발원해 주촌면·장유면을 관류하며 농경지를 형성하고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조구천(潮溝川)과, 진례면 산본리의 남쪽 용지봉에서 발원해 진례면·생림면을 북류하며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화포천(花浦川)을 비롯해, 동쪽의 대조천·예안천, 시 중심부의 해반천, 서쪽의 진례천·주촌천·죽동천, 서남쪽의 내삼천·죽동천 그리고 남쪽의 율하천·사촌천 등이 있다.
김해(金海)의 역사
김해지방은 예로부터 농경(農耕)에 유리한 자연환경과 철(鐵) 산지의 보유, 해운(海運)의 이점 등을 활용해 부(富)와 기술을 축적하여, 기원전 2세기경에는 고대국가의 틀이 잡히기 시작해, 삼한시대에 ‘구야국(狗耶國)’이라는 소국으로 발전했다. 삼국시대에는 ’가야국(加耶國)으로 발전해 가야연맹체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2년(삼한시대)에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가락국[金冠伽倻]를 건국해 10대 491년을 이어 가야연맹체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532년(법흥왕 19)에 11대 구해왕(九垓王, 仇衡王)이 신라에 투항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가, 680년(문무왕 20)에 신라시대 9주 5소경의 하나로 금관소경(金官小京)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칭하였다.
* ‘신라 5소경(五小京)’은 신라가 삼국 통일 후 전국 통치체제인 ‘9주 5소경(九州五小京)’으로 전국을 9개 주로 나누고 작은 수도인 소경을 둬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친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동쪽의 김해 금관경, 서쪽에 청주 서원경, 남쪽에 전주 남원경, 북쪽에 원주 북원경, 중앙에 충주 중원경을 설치했다. 지방의 피정복민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들어 940년 김해부로 강등된 후 ‘임해현’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곧 임해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김해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23개면이 14개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 김해읍으로 승격되었다. 1934년 낙동강 일천식개수공사 완공으로 낙동강 하류의 상습 수해지가 비옥한 평야로 바뀌었다. 1931년 김해면, 1942년 진영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대저면에 1938년 일본군 군용비행장이 설치되었다.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대저면이 읍으로 승격했으며, 1976년 김해 국제공항이 개설되었다.
부산의 도시 팽창에 따라 1978년 군의 동남부인 서(西) 낙동강의 강동지역 대저읍, 명지면과 가락면 일부가 부산직할시 북구, 1989년에는 가락면, 녹산면이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1981년 김해읍이 시(市)로 승격되었다가,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해군과 다시 통합되어 하나의 도농통합 김해시가 되었다.
김해의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
김해(金海)는 유서 깊은 역사(歷史)의 고장이다. 그러므로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선사시대(先史時代)와 가야(伽倻)의 유적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모두 문헌에 전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는 유적·유물들이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김해시 상동면의 ‘우계리주거지’는 ‘가야의 주거지’로 추정된다. 장유면 수가리패총에서는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와 골각기·방추차·흑요석 등이 출토되었고, 한림면 용덕리패총에서는 신석기 말기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봉황동의 김해회현리패총(金海會賢里貝塚, 사적 제2호), 부원동패총, 장유면 유하리의 유하패총(柳下貝塚, 경상남도 기념물 제45호), 대동면 괴정리패총 등은 삼한시대 유적이다. 그리고 봉황동의 봉황대(鳳凰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는 가락국의 궁지였다고 한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宋公殉節巖(송공순절암)’이라고 새겨진 서상동지석묘(西上洞支石墓, 경상남도 기념물 제4호), 기원전 4∼3세기에 축조된 내동지석묘(內洞支石墓, 경상남도 기념물 제97호), 명법동지석묘군, 광석지석묘, 용성지석묘, 장유면의 무계리지석묘와 유하리지석묘, 내연지석묘군, 연지지석묘, 용곡고인돌, 주촌면의 양동리지석묘와 망덕리지석묘, 지라지석묘 등이 있다.
* ‘구산동지석묘’는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 형식으로 우리에게 ‘고인돌’로 더 익숙하다. 구산동지석묘는 길이 10m, 너비 4.5m, 높이 3.5m, 무게가 350t에 달하는 국내 최대 고인돌로, 2007년 구산동 택지개발지구 공사 중에 발견됐다. 김해시는 세계적으로도 이만한 크기의 지석묘가 발견된 사례가 없어 세계 최대 규모로 추정했다. 김해시는 2007년 발굴 당시 확인 못 한 매장 주체부 추가 발굴·정비 사업을 거쳐 2021년 문화재청에 국가사적 승격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서상동의 ‘수로왕릉’(首露王陵, 사적 제73호)과 구산동의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사적 제74호)은 각각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과 허 왕후(許王后)의 능으로 전해진다. 전(傳)김해왕릉은 가락국 제2대 거등왕의 무덤, 능동고분군은 가락국의 제4대 거질미왕의 무덤으로 전하고, 김해구산동고분군(사적 제75호)은 약 6세기경에 조성된 것이다. 수로왕과 수로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향화를 받드는 전각으로, 1878년(고종 15)에 건립된 ‘숭선전(崇善殿)’에서 이루어지는 ‘숭선전 제례’는 춘`추향 2회로 춘향은 음력 3월 15일, 추향은 음력 9월 15일이며 시간은 상오 10시부터 약 1시간동안 거행된다.
* 1884(고종 21) 10월 8일 세운 숭선전 신도비(崇善殿神道碑)의 비문(碑文)에, 수로왕의 건국과 이후 가락국의 역사, 신라. 고려. 조선 세 왕조의 수로왕릉에 대한 향사(享祀)의 내용, 그리고 허 왕후와 관련된 일화 등을 차례로 기술해 놓고 있다.
한편, 김해대성동고분군(사적 제341호)에서는 토기류와 공구·무기·마구 등의 철기류, 벽옥제옥장 등의 옥류가 출토되었고, 4∼6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김해칠산동고분군(경상남도 기념물 제98호)에서는 토광묘·목관묘·횡구식석실분·옹관묘 등의 다양한 묘제가 조사되었으며, 대동면의 김해예안리고분군(사적 제261호)에서는 총 125체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장유면 삼문리의 능동석인상 및 상석(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1호)은 가락국 왕릉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능동마을의 뒷산에 있는 고분 앞에 있는 문인석상과 상석으로, 능묘를 옹위하는 당시의 조각양식과 능묘제도의 변천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산성으로 어방동의 ‘분산성’(盆山城, 사적 제66호)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고려시대에 수축하고 임진왜란 때 개축했으며, 산성의 둘레 약 900m, 면적은 5만 721㎡이다. ‘천곡성’도 가락국시대에 축조한 성으로 전한다. 김해부사 박위가 수축한 ‘김해읍성’은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주촌면에 있는 ‘가곡산성’이라고도 부르는 ‘양동산성’(良洞山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91호)은 남북의 두 성문에 초석이 남아 있으며 폭 2.5m, 둘레 약 800m이다. 각성산성 주위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연질토기편이 확인되었다.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구산동의 구지봉(龜旨峰, 경상남도 기념물 제58호)도 이 고장의 주요 유적이다. 천연기념물로 한림면에 김해 신천리의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185호)가 있고, 주촌면 천곡리에 김해 주촌면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307호)가 있다.
수로왕릉(首露王陵)
수로왕릉은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에 있으며, 사적 제73호이다. 수로왕(首露王)은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로 왕위에 올라 서기 48년 인도의 야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았으며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에 영남관찰사 허엽(許曄)이 능을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능의 경내에는 수로왕, 수로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하여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등 여러 건물과 신도비, 공적비 등 석조물이 있다. 능 앞의 묘비는 조선 인조25년(1647)에 세운 것이며 숭선전은 고종 21년(1884)에 임금이 내린 이름이다.
사적 제73호인 수로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서 봉분의 높이는 약 5m에 이른다. 이 능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소재지와 위치가 부합되고 있어서 수로왕릉으로서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 왕릉은 신라 말의 이 지역 호족인 충지(忠至), 고려시대 양전사인 조문선(趙文善)과 관련한 기적(奇蹟)을 보였던 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80년(선조 13)에 경상도관찰사였던 허엽이 수축하여 상석·석단·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는 능비를 세웠는데 '駕洛國首露王陵'(가락국 수로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로왕릉을 도굴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에 의하면 "광 속이 무척 넓고 두골의 크기가 구리로 만든 동이만 했다. 손발이나 사지의 뼈도 매우 컸으며, 널 옆에 두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고 나이는 20세쯤 되었는데, 이것을 광 밖에 내다놓았더니 금시에 사라져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 순장된 사람들일 것이다"라고 하여 순장묘일 가능성을 짚고 있다.
숭선전(崇善殿)
1878년(고종 15)에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의 현액을 내리고, 김씨· 허씨 양성을 교대로 참봉을 맡게 했다. 이때 안향각(安香閣)·석양·비각 등이 설치되었으며, 왕릉의 전면에는 가락루· 영신루· 회로당 등의 건물도 있다. 능역은 건물 15동 47칸, 임야 1만 5,170평이다.
숭선전(崇善殿) 앞에 세 기기의 비석이 있는데, 가장 왼쪽에서부터 「가락국태조대왕 납릉후릉중수비」「가락국태조왕중수기적비」, 「중건시조비」,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것은 「숭선각」 건물, 그 안에 「숭선전신도비」가 안치되어 있다.
1884(고종 21) 10월 8일 세운 숭선전 신도비(崇善殿神道碑)의 비문(碑文)에는, 수로왕의 가락국 건국과 이후 가락국의 역사, 신라. 고려. 조선 세 왕조의 수로왕릉에 대한 향사(享祀)의 내용, 그리고 허 왕후와 관련된 일화 등을 차례로 기술해 놓고 있다.
숭선전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과 왕후 허씨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건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1호이다. 이곳 숭선전에서는 나라에서 춘추제례(음력3월 15일과 9월 15일)를 행하고, 정월 초하루, 추석, 동지에는 숭선전 참봉이 다례를 올리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향을 한다. 안향각은 춘추제례에 사용할 향과 축을 국가가 하사하면 이곳에서 보관한다.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20에 있는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의 능이다. 수로왕릉과는 떨어져 있다.사적 제74호. 지정면적 32,920㎡, 무덤의 지름 약 16m, 높이 약 5m이다.
왕비의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로서 서기 48년 가야에 와서 수로왕의 비가 되고 왕자 열 명을 두었는데, 그 중 두 아들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대를 잇게 했다는 것이다. 두 아들이 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시조가 된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무덤의 밑둘레에는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방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혼유석(魂遊石)을 놓았고 아울러 묘비(墓碑)가 세워져 있는데, ‘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之陵(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지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1647년(인조 25)에 세운 것이다.
파사석탑(婆娑石塔)
파사석탑은 수로왕의 비 허왕후, 황옥(黃玉)이 동한 건무(東漢建武)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파사석탑은 옛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본탑은 허왕후께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왕후 곁에 두어야 한다며 옮겼다.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시집을 오면서 불교를 전래하고 형제인 허보옥 즉, 장유화상이 가락국에 와서 대국승으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탑은 네모진 사면의 오층이고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은 조금 붉은 빛의 옥문무늬가 있고 질도 달라 우리나라의 것이 아니다. 닭 벼슬피에 가루로 만든 파사석과 일반석으로 실험한 결과 파사석 부분은 물기가 계속 남아 있는 반면 일반석은 건조하여 말라버렸다고 한다.(출처 : 문화재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 경남 김해시 가락로 190번길 1에 있다.
수로왕릉 납릉정문 안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양
파사탑의 돌이 인도에서 생산되는 돌이라는 것 외에, 수로왕릉의 정문에 서로 마주보는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 쌍어문양도 허황후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근거로 여겨진다. 물고기 두 마리를 서로 바라보게 배치하는 그림은 인도 갠지스강 중류의 '아요디아' 지역 일대에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고유 문양(文樣)이기 때문이다.
수로왕비릉에 딸린 부속건물로서는 숭보재(崇報齋)·외삼문·내삼문·홍살문[紅箭門]이 마련되어 있다. 이 무덤은 평지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75호로 지정된 김해 구산동 고분군과 인접해 있어 무덤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土壙墓] 또는 돌방무덤[石室墓]일 가능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로왕릉과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으며, 왕릉에 비하면 시설이 빈약하고 수로왕비릉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오고 있다.
* [답사 과정] ▶ 수로왕비릉(09:40 도착. 관람 15분. 09:55 출발) - (208m. 도보 5분) - 구지봉(10:00 도착. 관람 10분. 10:10 출발) - (819m. 도보 13분) - 김해박물관(10:23 도착. 관람 1시간. 11:23 출발) - (0.9km. 4분) - 대성동고분박물관(11:27 도착. 관람 40분. 12:07 출발) -(1.3km. 6분. 점심 1시간) - 수로왕릉(1:13 도착. 관람 1시간)
김해, 가야사(伽倻史) 이야기
이곳 김해 지방은 수로왕이 가락국(駕洛國)을 건국했던 곳인 만큼 수로왕(首露王)과 관계된 설화가 많이 전하며 지명유래설화도 풍부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실린 내용이다.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
—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 대강(大康) 연간에 김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 3월 계욕일(계浴日)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龜旨)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龜何龜何
머리를 내밀어라. 首其現也
만일 내밀지 않으면 若不現也
구워먹으리라 燔灼而喫也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 首陵은 죽은 후의 諡號)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김해 구지봉(金海 龜旨峰)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 편 기록에 의하면,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탄강(誕降)하였고, 아도간, 유천간 등 9간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는 가야의 건국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또한, 구지봉에서 구간과 백성들이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춤을 추며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적인 시가(詩歌)로 고대 국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B.C 4세기경 남방식 지석묘가 있어 그 역사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석묘 상석에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 여기까지는 『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 실린 수로왕 강림신화이다. 수로왕의 탄생과 6가야의 건국, 수도와 궁실 건립이 주된 이야기다. 이 후의 이야기로 수로왕과 신리의 탈해와의 다툼, 허 왕후와의 혼인(허왕후설화), 수로왕이 죽은 후 수로왕릉과 사당에 얽힌 설화 등, 그리고 신라에 합병된 후 고려시대까지 김해지방의 연혁과 수로왕릉에 할당 토지 결수에 얽힌 이야기, 2대 거등왕부터 마지막 왕인 9대 구형왕까지의 연혁 등 뒷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다.
수로왕의 허 왕후(許王后) 이야기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잉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媵臣)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媵臣)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 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이상 『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이야기는 대부분 설화적이고 꾸며진 흔적이 많아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점이 많다. 「가락국기(駕洛國記)」 건국부터 멸망까지 부자상속으로 왕위 계승을 한 것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과 비교해 볼 때 믿기가 힘들고, 가야가 멸망한 다음부터 사용된 김씨 성을, 왕실의 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하는 김해 김씨의 족보를 참조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일부학자의 허 왕후 설화를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하여 한국문화를 남방 기원설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그러나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린 「가락국기」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신라와의 관계 등을 파악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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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탄생과 번성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삼국의 구도가 완전히 정립되기 전 이들 고대사의 주역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발전하던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상도 서부지역에는 ‘가야’(伽倻)가 있었다. 가야는 기원전·후부터 562년까지 존재했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현 경남 함안), 고령가야(高寧伽耶, 현 경북 함창), 대가야(大伽耶, 현 경북 고령), 성산가야(星山伽耶, 현 경북 성주), 소가야(小伽耶, 현 경남 고성), 금관가야(金官伽耶, 현 경남 김해), 비화가야(非火伽耶, 현 경남 창녕) 등의 명칭이 나온다.
또 가야는 중국의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변한 12국에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현 경남 밀양), 접도국(接塗國, 현 경남 마산 합포),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현 경남 고성군), 고순시국(古淳是國, 현 경남 진주), 반로국(半路國, 현 경남 산청), 악노국(樂奴國, 현 경북 고령), 군미국(軍彌國, 현 경남 곤양),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현 경북 고령), 감로국(甘路國, 현 경북 김천), 구야국(狗倻國, 현 경남 김해), 주조마국(走漕馬國, 현 경북 김천 조마면), 안야국(安邪國, 경남 함안), 독로국(瀆盧國, 부산 동래)등이 있었다.
특히 <삼국유사>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는 가야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가야 9간(干)이 추장이 되어 각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 이에 하늘로부터 보랏빛 줄이 내려와서 보니 붉은 보자기 안의 금합에 6개의 황금알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아도간이 이를 집으로 가져 간지 12시간 만에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알이 어린아이로 변했는데, 그 중 먼저 태어난 이가 수로(首露)였다. 그는 이후 금관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나머지 다섯 아이는 각각 5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야는 낙동강 서쪽지역 평야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부족국가이고 그 통로는 낙동강이었다. ― * 『삼국유사』의 기록과 상주 공금지와 왕릉과 왕비릉 그리고 오봉산 산성과 고분군 등을 근거로 하여 보면 고령가야가 함창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학계에서 전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설화는 아홉 간(干)으로 대표되는 김해지역의 토착 세력과 수로집단이 연합하여 금관가야국(변한 12국 가운데 구야국을 건국한 사실과 이후 그 국가를 중심으로 가야연맹체를 결성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지역은 일찍부터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를 비롯한 한예(韓濊)와 중국 군현세력들이 이곳에서 철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해 중국의 군현 및 왜 등과 경상도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금관가야는 중국 군현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이를 경상도 내륙의 여러 국가와 왜 등에 공급해 중계무역의 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금관가여는 이를 기반으로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의 쇠락
번성을 이루던 금관가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경자대원정’ 이후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왜·가야 세력과 동맹을 맺고 신라는 이에 맞서고자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다. 400년 왜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신라국경에 집결한 왜군을 격파한 후 가야의 종발성(從拔城, 현 부산진구로 추정)까지 진격했다.
이 사건 등으로 인해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게 된다. 고구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백제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해 경쟁구도에서 뒤처지게 된다. 신라의 고구려의 간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지만 고구려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고 문화 전파의 계기가 되었기에 이를 통해 자신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러나 가야제국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금관가야는 쉽게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된다. 반면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대가야(지금의 고령)와 아라가야(지금의 함안)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후기 가야연맹체를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보더라도 쉽게 할 수 있다. 금관가야의 유적지들을 살펴보면 5세기 전까지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왕과 귀족 등 지배층의 묘가 조성되며, 번성했던 당대 문화들을 반영하는 유물들도 출토된다.
하지만 5세기 후반부터는 대형 고분군의 축조가 단절됐으며 김해 능동고분군이나 덕정고분군, 두곡고분군, 예안리고분군 등 축소된 모습의 고분군이 나타난다. 이러한 정황들은 ‘가락국기’와 같은 사실기록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구전설화인 ‘황세와 여의’에 의하면 이 당시 신라와 잦은 전쟁을 했다고 한다. 이 설화의 배경은 금관가야의 아홉 번째 왕인 겸지왕 때로, 그는 구형왕의 아버지다. 황세는 이 당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달처럼 기우는 금관가야의 운명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역사로 남은 금관가야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의 기록을 보면, 가야의 구형왕(仇衡王)과 세 아들이 금관가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법흥왕(法興王)은 이를 기뻐하며 그에 맞춰 예를 갖추었고, 금관가야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오랜 세월 정설로 받아들여져 금관가야가 군사적 충돌 없이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알아왔다.
하지만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는 이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제 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가야의 구형왕은 친히 군졸들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 맞서 싸울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구형왕이 당시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 법흥왕의 군대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금관가야와 신라의 국력차이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신라는 이미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힘을 떨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그 첫 대상국으로 금관가야를 선정한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광개토대왕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금관가야로서는 이러한 신라에 섣불리 대응하기에는 국력이 미력했던 것이다.
김수로왕이 세운 나라이자 지난날 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라는 이름은 한낱 과거의 영광에 불과했고, 맹주의 지위는 이미 대가야(大伽倻, 고령지방)로 넘어 간 상태였다. 따라서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신라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멸망을 준비한 것이다. 구형왕은 동생인 탈지 이질금을 보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해 신라에 들어간다.
전기 가야 맹주국인 금관가야(金官伽倻)는 이렇게 몰락하고 함안의 안라국(아라가야)과 고성의 고자국 등의 가야 서부 제국이 활발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반면에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경상 내륙지방 소국들이 5세기 후반에는 세력을 확대하여 후기 가야연맹을 결성했다. 소백산맥(백두대간)을 넘어 섬진강 유역의 호남 동부지역까지 확대되었으나 6세기에 백제에게 패하여 호남지역을 잃고, 522년에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을 극복하려 했으나 530년을 전후하여 신라에 넘어가고 말았다.
540년대 이후 가야제국은 대가야(고령) 안라(함안)의 이원체제로 분열되었다. 백제와 신라 사이의 교섭을 통한 독립을 하려했으나 550년대에는 백제에 복속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백제의 관산성(關山城, 옥천)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562년에 대가야국은 신라의 습격으로 함락되면서 후기 가야 연맹이 종식되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 이야기
산청 왕산 골짜기 돌무덤은 우리나라 유일의 적석총 피라미드형 7단으로 쌓아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특리와 화계리 일대에 걸쳐 있는 왕산(王山, 고도 924m)은 구형왕릉(仇衡王陵)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왕산과 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왕산은 현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쌓아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은 모두 층계로 된 왕릉이 왕대암(王臺菴)이다.” 그리고 「대동지지」 ‘산청편’에는 “가야국 구형왕릉(仇衡王陵)이 왕산사 뒤 돌무더기 둔덕에 있다. 왕산사 절은 구형왕이 거주한 수정궁이다. 구형왕의 사당이 산 아래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산청군지」에는 “지리산에서 맥이 와서 왕산사의 주맥을 이루었고, 김해 김씨가 사당을 건립하여 수호한다.”라고 기록했다.
금관가야(金官伽倻)의 10대 임금인 구형왕(仇衡王)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거대한 돌무덤은 구형왕릉(사적 제221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구형왕은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재위한 왕이다.
산청 왕산 자락에 있는 능(陵)은 가야(伽倻)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의 무덤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적석총(赤石冢)으로 알려졌다. 7단으로 쌓은 피라미드형식의 왕릉 주변에는 등나무나 칡넝쿨이 자라지 않고, 까마귀나 참새 따위의 새들도 왕릉위로는 날지 않는다고 한다. 뼈에 저린 망국의 한이 서려서인지 이끼나 풀도 자라지 않고,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비함으로 언제나 씻은 듯이 주변이 맑고 깨끗하다.
왕산(王山)은 계곡이 아름다운데 크고 작은 잡석들로 일곱 층을 쌓은 높이 7.15m짜리 거대한 돌무더기 주변에는 어른 허리높이 정도의 돌담이 둘러쳐 있다. 4층 정면에 사각으로 된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벽으로 막혀 있어 그 속의 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돌무덤 앞 비석에는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이라 새겨져 있다. ‘駕洛國’(가락국)은 삼국시대 신라에 복속된 가야를 뜻하고 ‘讓王’(양왕)은 '나라를 바친 왕'을 말한다. 신라에 항복한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는 뜻이 된다. ― 사적 214호
법흥왕 19년(서기 532년), 금관국의 왕 김구해(金仇亥, 仇衡王)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아들 무력과 손자 서현(김유신의 아버지)과 더불어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구형왕은 이미 승산 없는 싸움에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신라의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의 직위를 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구형왕은 이를 거절했다.
전쟁에서 패하면 포로들은 노비가 되기 마련인데, 구형왕은 포로가 된 군사들을 노비가 아닌 백성으로 받아줄 것을 부탁하고 자신은 적에게 나라를 바친 왕이니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는가,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산청의 왕산사에 머물다 5년 뒤 죽음을 맞이했다.
이곳이 왕릉이란 사실은 1798년 산청유생 민경원에 의해 왕산사의 나무궤에 보관되어온 탄영스님의 「왕산사기」와 구형왕, 계화왕후의 영정, 의복, 녹슨 칼, 활, 유품 등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이후 후손들이 왕과 왕후의 향화를 받들어 지금까지 220여 년 동안 제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현세에 이르러 이 돌무덤의 주인이 진정 구형왕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사료의 뒷받침이 부족하여 구형왕릉이라 확정을 받지 못하고 「전(傳) 구형왕릉」이라 불리고 있다.
김(金)은 쇠(鐵)를 어원으로 하는 금관국(金官國)
가락국인 금관가야(金官伽倻)는 김해와 부산 일대에 많은 고분군과 부장된 유물을 남겼다. 특히 김해에는 금관가야와 관련된 주요 유적지와 고분군이 널려있다. 왕궁터인 김해시 봉황동유적지와 예안리 고분군, 구산동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 특히 후기 가야 고분군으로 알려진 원지리 고분군은 20여기에 달한다. 그리고 동래 복천동 고분군은 광개토대왕의 남정 전까지 고분조성이 이루어졌고, 조성이 중단된 때로부터 가락국이 패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와 함께 가야의 장례풍습 중에 주요특징은 많은 유물을 함께 묻는 후장(厚葬)이어서 토기와 다양한 유물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독무덤과 널무덤이 함께 나타나고 부장품과 더불어 순장의 풍습은 북방문화의 영향일 거라는 설이다. 금속유물은 철정과 철제 갑옷과 금동관이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철이 주종을 이루고 금, 은 등의 귀금속과 옥이 출토되었다.
금관가야와 그 시대 상황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 정세는 급박했다. 북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부여가 약화되고 고구려가 세워졌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중국 한나라가 지배한 한사군이 한반도 동남부에 세워졌으나 곧 사라졌고 고구려에 이어 백제가 세워졌다. 한반도 남쪽 김해를 중심으로 김수로왕과 다섯 형제들이 여섯 개의 가야국을 세우고 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가 가야국 전체를 총괄했다.
이 무렵 경주 서라벌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연합체 부족장들이 ‘이사금’이란 칭호로 박씨, 석씨, 김씨가 번차례로 왕이 되었다. 왕자의 세습제가 아닌 민주주의 의회형식의 족장 협의체로 왕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고대 국가로는 믿기 어려운 민주주의 체제였다. 17대 내물왕 때 ‘마립간’이란 칭호로 김 씨가 왕위를 지속했는데 19대 눌지 마립간 때 백제와 나제동뱅을 맺고 6세기 초, 22대 지중왕 때에 낙동강 유역의 가야를 평정하게 된 것. 이때부터 국호를 ‘신라(新羅)’로 명명하고 마립간에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신라의 품계는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이면 성골(聖骨)로 불리고, 부계와 모계 중에 어느 한쪽이 왕족이거나 다른 한쪽이 귀족일 때는 진골이라 했는데, 성골이거나 진골들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금관가야 후손 김유신(金庾信) 장군
가야의 후예인 김유신(金庾信)은 김춘추(金春秋)와 결혼동맹과 삼국통일 전쟁에서 전공을 세움으로 신라 진골귀족들과 동급의 성과를 올려 사후 흥무대왕에 추증(追贈), 신라왕이 되었다. 김춘추는 삼국통일을 위업을 달성한 태종무열왕이다.
한민족(韓民族)개념이 정립되기 전까지 한반도에는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서로의 영토 확장을 위해 싸웠지만 삼국을 하나로 통일을 한 나라가 신라(新羅)다. 여기에 무장 김유신(金庾信)이 당대의 권력층인 왕과 귀족들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을 제치고 최고의 위인으로 등장한다. 김유신(金庾信)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통일에 큰 업적을 남긴 명장으로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당나라와 연합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김유신의 조상은 신라에 의해 532년(법흥왕 19)에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김유신의 아버지는 각간(角干, 신라의 최고위급 관직) 김서현(金舒玄)이다. 할아버지는 각간 김무력,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 고조부는 겸지대왕이다. 김유신 가계는 이미 겸지대왕 때부터 신라 귀족과 혼인으로 맺고 있었다. 나라간의 혼인은 화친이나 교섭의 방법으로 정치에 활용하는 것이 고대 국가들의 외교방법이었다. 김유신의 어머니 역시 신라의 왕족 출신인 ‘만명부인’이었다.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지만 신라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 출신 만명부인과 가야 출신의 김서현 장군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하여 외가 왕족들로부터 눈길을 끌었고, 부친 김서현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사위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당시에 가야 출신이라는 점은 김서현과 김유신 부자에게 여전히 불리했다. 김유신(金庾信)은 가야계라는 열등감보다는 신라 왕족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 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부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해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를 이끌면서 남다른 기개로 삼국통일을 꿈꾸었다고 한다.
이후 김유신(金庾信)은 무인으로서 크고 작은 전투마다 참가해 전공을 세우고 특히 여동생이 김춘추와의 혼인으로 하여 스스로 입지를 다져갔다.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629년(진평왕 51)에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결혼동맹으로 하여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는데도 공을 세웠고, 삼국통일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김씨 집안을 다른 진골귀족들과 동급으로 끌어올렸다. 김유신 자신도 생전의 전공으로 사후 흥무대왕에 추증되어 신라의 왕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손자인 김윤중도 북방의 말갈족을 평정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처럼 금관가야 후손들은 신라에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며 대 반전을 이루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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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Kimhae National Museum, 國立金海博物館)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 건국설화의 배경인 경상남도 김해시 구지봉 기슭에 터를 잡아 1998년 7월 29일 설립되었다. 가야의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지만 더불어 부산, 경남 지역의 선사시대 문화와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된 변한의 문화유산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건축가 장세양이 설계한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철광석과 숯을 상징하는 검은 벽돌을 써서 철의 왕국으로 불리던 가야를 표현했고, 2006년 완공되어 교육관으로 사용되는 가야누리는 지하 2층, 지상 3층 건물로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비례를 사용해 본관의 배경 같은 요소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박물관의 심볼마크는 가야 유물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새와 물결 문양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문양이 사용되고 있다.
본관 1층 전시실은 낙동강유역의 선사문화, 가양의 여명, 가야제국의 발전을 주제로 꾸며져 있고, 본관 2층 전시실은 가야인들의 생활과 가야의 철기 문화, 그리고 가야 토기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교육관인 가야누리에는 가야의 건국신화, 가야의 마을, 가야 토기 체험, 고고학 발굴장 등을 테마로 한 영상 체험실 및 체험 학습장이 갖춰져 있다.
박물관 광장과 전시실 입구에 마련된 야외전시장에는 고인돌, 돌널무덤과 같은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가야의 무덤이 실물 그대로 옮겨져 복원·전시되고 있다. 1,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 국립김해박물관은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 길 19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대성동고분군(大成洞古墳群)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와 김해공설운동장 사이의 동서로 뻗은 구릉지대에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길이 약 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지대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있기에 매우 적합하다. 현재 구릉의 정상 일부분을 제외한 주변의 경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토광묘),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가야의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덧널무덤은 나무판을 조립하여 널(관)을 만든 것으로, 이전에 통나무관을 이용하던 것에서 나무판널을 사용하는 시기로의 전환이 1세기경임을 보여준다.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목류, 중국제 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 고대무덤 형식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며, 중국제 거울이나 토기류에서 한·중·일의 문화교류 상황을 밝혀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대성동고분박물관(大成洞古墳博物館)
대성동고분박물관은 1990년부터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거친 대성동고분군을 1998년부터 가야유적 정비개발계획을 통해 재정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2003년 개관하였다. 2009년에는 박물관 증축을 통해 기획전시관을 추가로 개관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과 서로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도록 유물 중심의 전시보다는 입체모형과 영상자료, 실물 크기의 무덤 복원, 금관가야인의 모습과 생활상 복원, 무사들의 복장 등 다양한 보조 자료를 통해 고대의 구야국과 금관가야의 사회와 문화상을 일반인이 재미있고 알기 쉽도록 구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은 연면적 2,902.12㎡에 유물을 상설 전시하는 주전시관과 대형무덤 2기를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한 야외 노출전시관, 기획전시와 교육을 시행하는 기획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전시관에서는 안내 공간인 도입의 장, 금관가야의 기마인물상과 무사상을 전시하고 있는 개관의 장, 대성동고분군 출토 유물을 복원·전시하고 있는 고분의 장, 금관가야의 대외 교류상을 보여주는 교류의 장, 당시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농기구·토기·장신구 등을 전시하고 있는 문화의 장 등 주제별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노출전시관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최초의 왕묘라 할 수 있는 29호 목곽묘와 이것을 파괴하면서 설치된 39호 목곽묘를 발굴 당시의 상태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26에 위치하고 있다.
김해의 유교문화재
유교문화재로는 동상동에 사충단(四忠壇,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이 있고, 대성동에는 김해향교(金海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가 있는데 1408년(태종 8)에 창건해 1770년 현 위치로 이건한 것으로 대성전·동무·서무·내삼문·명륜당·동재·서재·풍화루 등이 있으며, 흥동에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백성들에게 한글로 내린 선조국문교서(宣祖國文敎書, 보물 제951호)가 있다. 교서는 홍동의 선조어서각(宣祖御書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호)에 보관되어 있다.
대동면 주동리의 산해정(山海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학문을 연구하고 강도(講道)한 자리이며, 이 밖에 진례면 청천리에 낙오정, 담안리에 첨모재(瞻慕齋)가 있다.
산해정(山海亭) → 신산서원(新山書院)
김해시 대동면의 중심에 위치한 대동면주민센터 쪽으로 가다보면, 이정표에 조선시대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며 지냈던 산해정(山海亭, 대동면 주동리 소재)으로 향하는 진입로가 표시돼 있다. 진입로로 들어서 골짜기로 올라가면 몇 채의 민가가 나오고 그 끝에 산해정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신산서원(新山書院)은 조선시대 조식과 신계성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산해정에 창건한 서원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 건물이다.
조식 선생은 부친상을 마친 30세에 처가가 있는 이곳 김해(金海)로 옮겨왔다. 1531년(중종 26년) 때의 일이다. 그는 장인어른의 도움으로 이곳에 산해정을 짓고 18년간 학문과 제가 강학에 힘썼다.
산해정 입구에는, 늘 푸른 대나무의 절개를 찬미한 남명 선생의 시비(南冥先生詩碑)가 세워져 있는데 시의 제목이 「산해정에 대나무를 심으며(種竹山海亭)」이다. 대나무처럼 곧고 꿋꿋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마음이 돋보인다.
先君孤不孤 선군고불고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髥叟側爲隣 염수측위린 소나무가 이웃되어 있는데
莫時風霜看 막시풍상간 바람 불고 서리치는 때 아니더라도
犄犄這見眞 의의저견진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
산해정의 입구인 ‘進德門’(진덕문)에 들어선다. 산해정의 첫 관문인 진덕문은 '덕으로 나아간다'라는 뜻으로 선비의 학문 수양과 교육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진덕문을 지나면 ‘新山書院’(신산서원)의 편액이 걸려 있는 강당 안에 ‘山海亭’(산해정)의 편액이 걸려있다.
넓은 마당의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마음속에 의로움을 쌓는다’는 뜻 서재인 ‘有爲齋’(유위재)와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동재인 ‘喚醒齋’(환성재)가 자리하고 있다.
산해정은 마치 커다란 새가 날개를 편친 듯이 둘러선 포란형의 지세를 갖추고 있다. 특히 동네 밖에선 서원 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 밖을 보면 멀리 부산의 시가지까지 살펴볼 수 있어 천혜의 요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산해정 내부의 넓은 마당과 깔끔한 서원에선 선생의 맑은 풍모와 성망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듯하다.
산해정 처마 아래 걸린 수많은 현판에는 서원을 중건한 선비들의 이름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여기서 학업을 정진했던 선비들은 훗날 서원 철폐령으로 폐지됐던 서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복원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세월의 단단함이 서린 감나무 뒤뜰에는 공경하고 엄숙하다의 ‘祗肅門’(지숙문)을 지나면 ‘崇道祠’(숭도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 송계(松溪) 신계성(1499-1562)의 위패를 모셨다. 서원 서쪽에는 돗대산이 있는데 예전에 차산(次山), 조차산(曺次山)으로 불렀다. 안타깝고 애통한 사연이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룬 경상우도의 대표적인 학자로 그의 의(義)와 경(敬)을 존중하고 실천하는 선비정신은 많은 제자들을 감화시켜 남명학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선생은 평소에 경의검(敬義劍)과 성성자(惺惺子), 즉 검과 방울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재야 지식인으로서, 실천을 중시한 그의 사상은 임진왜란 시기 의병활동으로 계승되었고 그의 여러 상소들은 아직도 충언의 본보기로 남아있다. 그의 사상은 중년기에 완성되었으며 그 시기를 김해 대동면 산해정에서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어, 남명 사상사적 측면에서 김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식 선생의 제자 중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곽재우, 정인홍, 조종도 등은 의병을 일으켜 스승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조식(曺植)과 김해(金海) 산해정(山海亭)
조식은 22세 때인 1522년(중종17)에 김해에 살고 있는 있던 남평 조씨(南平 曺氏, 23세)와 결혼하면서 김해(金海)와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26세가 되었을 때 부친상을 당해 합천군 삼가현 판현 갓골(현 삼가면 하판리 지동마을)에서 장례를 치르고 3년 시묘를 하게 된다. 그리고 30세가 된 1530년(중종25)에 어머니를 모시고 당시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에 터전을 잡았다.
조식은 재산이 넉넉한 장인의 도움을 받아 대동면 주동리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인 강학소 산해정(山海亭)을 지었다. 이 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강학하였다. 이때 호(號)를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남쪽 큰 바다’, 즉 ‘천지(天池)’를 일컫는 ‘남명(南冥)’으로 지었다.
부인 남평 조씨는 아들과 딸 하나씩을 낳았다. 딸은 상산 김행에게 시집 가 두 딸을 낳았다. 그 첫째 딸이 성주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결혼했다. 곽재우는 남명에게 외손녀 사위이다. 동강은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 김창숙의 선조이다.
선생 36세에 첫 아들 차산(次山)이 태어났다. 아들은 똑똑하고 깊어서 남명이 크게 기대하고 사랑했다고 한다. 어느 날 마을에 종이품 이상 관헌이 타는 가마가 지나자 같이 공부하던 아이들이 몰려가 구경하면서 부러워하기 바빴는데 차산은 그대로 앉아 ‘사내대장부의 뜻이 어찌 거기에 있을까’라고 하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남명도 아홉 살 때 죽을병이 걸렸다 살아난 적이 있지만, 아들 차산(次山)은 살아나지 못했다. 돗대산을 옛날에는 차산(次山), 혹은 조차산(曺次山)이라고 불렀는데, 남명이 44세 되던 6월 11일 아들 차산을 돗대산에 묻었는데 이후 이 산을 ‘조차산’이라고 불렀다.
1545년(인종1) 김해에서 모친(인천 이씨, 70세)이 돌아가시자 합천 삼가현 갓골에서 장사 지낸 뒤, 갓골에서 시묘(侍墓)를 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45세다.
1548년(명종3) 갓골에서 모친 3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그 해 48세의 나이로 김해에서 합천 삼가로 이거한다. 삼가에서 ‘뇌룡정(雷龍亭)’을 건립하고 강학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61세에 산청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568년(선조1) 7월, 남명 첫째 부인 남평 조씨(南平曺氏)가 김해에서 69세로 사망하였다. 그 묘소는 김해 대동면 주동리 산해정 앞산 오미등에 있다. 1572년(선조5) 72세에 조식은 산청 산천재에서 사망하여 묘소는 산청군 덕산에 있다. 현재 남명은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산청의 덕산서원(德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김해의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대성동에 1408년에 창건한 김해향교(金海鄕校)가 있다. 형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을 교육·교화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 33)에 부사 정기남(鄭奇男)이 중건하였다. 1683년(숙종 9)에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88년에 김후수(金後修)와 부사 이하정(李夏禎)이 중건해 지금의 자리인 송악산으로 옮겼는데, 50여 명의 교생(校生)을 정원으로 하는 중설향교로서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향교 이외의 공립 교육시설로는 800년(정조 24)1에 함허정(涵虛亭) 옛터에 설치한 양사재(養士齋)가 있었는데, 1821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고 취정재(聚精齋)로 이름을 바꾸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사설 교육시설로는 16세기 중반에 남명(南冥) 조식(曹植)이 산해정(山海亭)을 건립해 후학을 계도한 것이 처음인데, 나중에 신산서원(新山書院)으로 편액을 받았다. 그 밖에도 1642년(인조 20)에 설립한 구산동의 구천서원(龜川書院), 1703년(숙종 29)에 건립한 진례면 신안리의 송담서원(松潭書院), 1708년 삼방동에 건립한 예암서원(禮巖書院), 1811년(순조 11)에 건립한 물봉서원(勿峰書院), 1832년에 건립한 진영읍 신룡리의 미양서원(薇陽書院) 등이 있었는데, 단이나 유허비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김해의 불교문화재
불교문화재로는 상동면 감로리의 감로사지에 고려시대의 석탑귀부석등대석 등의 석불이 있고, 장유2동 대청동의 장유화상사리탑(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1호), 삼방동의 김해은하사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구산동마애불(龜山洞磨崖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6호), 진영봉화산마애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이 있으며, 구산동요지에서는 4기의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의 유적으로는 자연암벽에 폭 3cm 정도의 굵은 선으로 음각된 초선대마애석불이 있으며, 한림면의 안곡리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이 있다.
김해 신어산(新魚山)
김해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신어산은 수로왕의 왕비 허 왕후(許王后)와 인연이 깊다. 신어산 기슭의 은하사(銀河寺) 대웅전 ‘쌍어문양(雙魚紋樣)’은 인도 고대 아유타국의 상징에서 가야의 표식이 되었고 신어산(新魚山)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허황옥이 도착할 당시, 김해평야는 삼각주가 아니고 파도가 넘실대는 넓은 만(灣)이어서 허황옥과 30여 명의 일행이 탄 배가 도착하자 망산도(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죽림동 뒷산 추정)에서 횃불을 들어 인도했다는 『삼국유사』「가락국기」기록이 보인다.
신어산 능선의 기암괴석은 자성이 아주강한데 자철석 계열의 화강암이다. 금관가야 시대 고도로 발달한 철기(鐵器) 문화는 김해지역의 철광산과 연관이 있다. 가야인들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광물의 용도를 먼저 알아내었다. 신라의 금속세공으로 만든 찬란한 금관과 장신구, 활자문화를 꽃피운 고려의 직지심경, 조선의 갑인자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가야의 세련된 철기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신어산 은하사(銀河寺)
신어산 중턱에 자리한 산지형 사찰인 은하사는 가락국 수로왕 때 장유화상이 창건했다. 원래는 서림사라 하였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1629년(인조 7년)에 대웅전(大雄殿)을 중수한 이후 1649년(효종 1년), 1801년(순조 1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대웅전(大雄殿)은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계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축물의 정면과 측면의 길이가 비슷하여 정사각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이 일반 대웅전에 비해 특이하다.
김해 9경 ― 김해시 선정
* [제1경] 김해 9경의 첫 번째 명소는 ‘봉하마을’이다. 김해시 진영읍 봉화산 봉수대(烽燧臺)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와 묘역이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2009년 5월 23일) 전 대통령은 경상남도 김해 출생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이후 정계에 입문해 제13·15대 국회의원직을 역임했다.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국민의 정부에서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역임했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2003년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2008년 대통령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 방위로 확대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노 전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 전 대통령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으며, 노 전 대통령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아내가 받았다는 노 전 대통령의 주장과는 달리,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와 조카사위 연철호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노 전 대통령 일가의 640만 달러 수수 의혹은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같은 뇌물 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그 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 내렸다. 노무현이 사망하면서 법무부는 노무현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시켰다. 사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노무현 재단의 주장에 따르면 500만여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권위주의를 타파했다. 좌충우돌 소신 있는 언행으로 양 진영에서 모질게 비난받았지만, 오히려 퇴임 후 인간적 매력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 [제2경]은 김해시 진례면에 있는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인데, 건축·도자 전문 미술관으로 미술관 전경이 뒤쪽에 있는 논과 어우러져 전망이 좋다.
* [제3경] ‘수로왕릉’은 김해시 가락로 93번길 26에 있는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무덤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님 주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역사유적지이다. [김해] 수로왕릉, 봉황동유적, 대성동고분군, 구지봉, 수로왕비릉 등이 있다.
* [제4경] ‘김해연지공원’은 김해시 금관대로 1368번길 7에 있다. 대단지 아파트 가운데에 있는 인공호수인데 자연미와 조형미를 감안하여 만들어진 휴식공간으로 계절에 따라 다양한 경관을 느낄 수 있다.
* [제5경] ‘화포천 습지’는 김해시 한림면 한림로 183-300.는 우리나라 최대의 하천형 배후 습지로 노랑부리저어새와 큰기러기를 비롯한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다양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 [제6경] ‘장유 대청계곡’은 김해시 삼문동 불모산 산자락에 양갈래로 형성된 6km의 긴 계곡이다. 산림이 울창하고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는 등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계곡을 따라 30분쯤 올라가면 장유암이 있으며 경내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법을 전파했다고 하는 장유회상의 사리탑이 있다.
* [제7경] ‘신어산 철쭉’인데 신어산은 김해시 삼방동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과 허황옥 왕비의 신화가 어린 성산(聖山)으로 해마다 5월이면 철쭉으로 장관을 이룬다. 신어산에는 천 년 고찰 은하사가 있다.
* [제8경] ‘가야유적’은 김해 경전철을 타고 박물관역에 내리면 김해박물관, 구지봉, 수로왕비릉을 둘러볼 수 있으며, 수로왕릉역에서 내리면 대성동 고분군, 수릉원, 수로왕릉을 둘러볼 수 있어 경전철을 통해 가야문화 유적을 탐방할 수 있다. 김해 경전철은 2011년 9월 16일에 정식 개통했다.
부산 김해 경전철은 부산과 김해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하여 광역 발전을 도모하고, 김해국제공항과의 접근성을 높여 업무와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특히 부산 김해 경전철은 부산의 사상(괘법동)에서 김해국제공항을 거쳐 김해시 삼계동을 이어줌으로써 대도시 부산과 인접해 있고 기능적으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김해시에 경제성, 정시성, 안정성을 제공함으로써 탄소배출이 없는 친환경 대중교통 수단이다. 환승역으로는 부산 도시철도와 연결되는 사상역과 대저역이 있다. 대저역에서는 부산도시철도 3호선, 사상역에서는 부산도시철도 2호선과 환승이 된다. 서부산유통지구역과 괘법 르네시떼역 사이 낙동강 구간을 감전철교로 횡단한다. 서울의 신분당선처럼 무인으로 운행한다. 전체 노선의 길이가 23.4km로, 2011년 9월 16일에 개통되었다. 총 21개의 역이 있는데 김해시에서는 김해시청, 봉황역, 수로왕릉역, 박물관역, 연지공원역 등을 이용하면 가야의 유적지 등 명소를 편리하게 탐방할 수 있다.
* [제9경] ‘분산(천문대) 전경 및 운무’는 김해시 어방동 천문대에서 바라보는 가야고도 김해의 전경(야경)이 아름답고 안개가 낄 때는 임호산 봉우리와 김해 전체를 뒤덮는 운무의 장관이 펼쳐진다.
김해의 현충시설
김해는 의기(義氣)가 살아있는 고장이다. 그래서김해에는 현충시설이나 독립운동시설이 많다. 예로부터 남다른 충의의 고장임을 말해주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김해의 충혼탑을 비롯하여 김해3ㆍ1운동기념탑(내덕동 산49-1), 환산 이윤재 선생 어록비(김해도서관 내), 야암 김종훤 지사 독립운동기적비(삼계동 화정공원 내), 독립지사 면산 김선오공 추모비(관동동 덕정공원 내), 의사 배치문 기적비(내동 연지공원 내), 기미독립의거기적비(연지공원 내), 한뫼 이윤재 선쟁 기념조형물(외동 나비공원 내)이다.
장유 용두산 「김해 3ㆍ1운동기념탑」은 1919년 4월 12일 장유면 무계리시장에서 3,000여명이 참여했던 지역 최대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한 시설이다.
「김종훤 지사 독립운동 기적비」는 1919년 4월 12일 장유 무계 3ㆍ1운동을 주도한 김종훤 지사(1878~1940)의 기념비이며 김선오 공 추모비 역시 무계 3.1운동에서 일본 헌병의 총탄에 순국한 김선오 지사(1865~1919)를 추모한 시설이다.
연지공원 김해독립기념광장 내 「배치문 기적비」는 김해 한림면 출신으로 의열단 등 타 지역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김해 출신 대표 독립운동가 배치문 의사(1890~1942)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이다.
김해도서관 내 「환산(한뫼) 이윤재 선생 어록비」와 나비공원 내 이윤재 선생 기념조형물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순국한 김해 출신 국어학자인 이윤재 선생(1988~1943)을 기념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 [어록비의 내용] ▶ "너희들은 독립을 보리라." /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잠시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 국민으로 떳떳이 살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이윤재 선생
1888년 12월 24일 김해부 우부면 답곡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서 아버지 이용준(李容俊)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에서 고등과정을 배우면서 선생은 우리말과 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1913년 마산 창신학교 등에서 우리말과 국사를 가르쳤다. 이때 주시경 선생의 학문을 스스로 배우며 한글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 재직 중 영변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신채호 선생의 도움으로 북경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역사를 배우고 1924년 귀국하였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 ·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였다. 조선어학회에서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말 큰사전》편찬을 시도하였고, 일제 몰래 세상에 있는 우리말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발각되어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검거되었다. 선생은 함남 홍원경찰서에서 모진 고문과 살기 어려울 정도의 구타와 폭력을 당하였다. 결국 선생은 수감생활 중 1943년 12월 8일 새벽 5시 옥중에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양산과 김해, 어제와 오늘
양산(梁山)은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고을을 품고 있고, 김해(金海)는 낙남정맥이 시의 중심부를 지나고 있다. 강원도 태백시에서 분기한 두 산줄기 모두 낙동강(洛東江)을 만나,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양산과 김해는 유서(由緖) 깊은 고장이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의 동서(東西)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하나의 낙동강 문화권’에 속하지만 그러나 그 역사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각축과 화합의 과정을 거쳐 왔다. 다시 말하면 가야(김해)와 신라의 세력(양산)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황산진을 통하여 사람들과 물자가 활발하게 교류하여 왔다. 특히 양산은 영축산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산군을 터전으로 하여 통도사, 내원사와 같은 신라의 불교문화(佛敎文化)가 크게 성하였고, 김해는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운 지역이다. 수천 년 동안 낙동강을 중심으로 번성하면서 많은 굴절을 겪기도 했지만 현대화의 물결 속에 양산(梁山)의 신도시로 개발되고, 김해(金海)는 남도의 하늘문인 김해국제공항을 중심으로 갖가지 교통망이 사통팔달 연결되어 있다,
김해는 김해국제공항, 부산항 등 국제적인 교통망과 남해고속도로 제2지선·중앙고속도로 지선 등 3개의 고속도로를 갖추고 전국을 연결하는 최고의 교통요건을 갖추고 있다. 교통은 부산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매우 편리하며, 부산∼광주간의 남해고속도로가 시를 동서로 지나고, 부산∼마산간의 국도와 그 외에도 많은 지방도는 이 지역에의 접근성을 높이는 주요 기반시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의 북부에는 경전선이 지나 교통의 요지이다. 2011년 9월 김해시 가야대(삼계)역에서 부산광역시 사상(서부터미널)역을 잇는 부산—김해경전철이 개통되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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