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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및서평 스크랩 내가 읽은 이 달의 작품(말씀/송재학) - 손진은
김 명 추천 0 조회 30 11.05.12 06: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가 읽은 이 달의 작품(현대시학 09.2) - 손진은

 

 

말씀 - 송재학

     

  적멸보궁 뜨락의 얼레지 군락은 텅 빈 곳을 채우는 비의 말씀을 잘 담았습니다 얼레지와 얼레지 사이가 빼곡했기에 여섯 겹 꽃잎은 적멸의 낙수받이 노릇을 잘 견딥니다

  몇 년 후 봄의 적멸보궁 앞 용맹정진하는 작은꽃 무리를 만났습니다 角과 숨을 깍은 제비꽃은 차마 햇빛을 떠받치지 못하지만 꽃 울타리 안에 고이는 말씀을 담으니 그게 죄다 도로 제비꽃입니다

  꽃들의 떨림을 다 합치면 적멸입니다 적멸을 다 합치면 꽃이기도 하나요

  부처가 없다는 적멸은 때로 무엇이나 부처로 만드는가 봅니다 혹 처음부터 당신이 부처였던가요 누구나 적멸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말씀의 결가부좌도 거기 있습니다

-『유심』 09. 1-2월

 

말의 적멸보궁으로 잡은 꽃

                                                                                                                                                            -손진은

 

송재학의 시에 눈여겨보아야 할 특징이 있다면 무엇보다 닳아버린 일상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순우리말이나 특정분야의 전문용어까지 시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문주의자다. 끊임없는 독서와 사유, 그리고 여행을 통해 새로운 시와 시어를 찾고 만들어 낸다. 상투성에 대한 경멸과도 연결될 이런 특징은 90년대에 이미 <곰비임비> 같은 향가, 고려가요 이래 사람들의 입속에 맴돌았던 언어들을 발굴(<일장춘몽 쓸개는 곰비임비 햇빛에 널어라>, 「마흔 살」), 일반에 전시했던 데서도 익히 드러난다. 그는 이에 더하여 생물학적, 고고학적인 지식이 수반되는 용어들까지 시에 사용한다. 편의상 근작들만 인용하여 본다.

 

촉과 오늬는 너무 멀어 보이지 않지만 슴베의 화살대는 입 꾹 다물고 하늘과 바다의, 틈새의, 기억을 찾았다

-「수평선」(『문학과 사회』 08. 가을)

 

홑지느러미 가름끈이 아름다운 소리책입니다……누군가 이곳에 와서 그가 가진 짓소리를 다 게워놓았습니다……그렇게 능화판 호접장 소리책 한권이 만들어졌습니다

-「소리冊」(『시와정신』08. 겨울)

 

잔무늬청동거울이라 내 새치마저 숨는구나

-「자두밭 이발소」(『시인세계』08. 겨울, 이상 밑줄 필자)

 

<오늬>는 화살의 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에어낸 부분이며, <슴베> 활대 속에 들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이다. 또 <가름끈>은 책 읽은 부분을 표시하기 위해 꽂는 끈이고, <짓소리>는 길게 뽑는 복잡작위의 소리이며, <능화판> 마름모꼴 사방연속무늬를 일컬으며, <잔무늬청동거울>은 우리가 항용 다뉴세문경이라 칭하는 거울이다.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하여 그가 얼마나 언어에 고심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련한 시계 수리공이 거기에 맞는 작으나 긴요한 부속품 하나를 찾아 돋보기를 낀 채 핀셋으로 빼꼼히 빈 공간에 끼우는, 마침내 그것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을 때 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물살을 생각해 보라. 시에 쓰이는 단어는 다른 단어와 문장, 시 전체와 친족의 것으로 이루어져야 하므로 단어 하나는 주변의 언어들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눈치를 본다. 송재학은 이런 친족어가 만들어내는 언어의 자장을 감지하는 시인이다. 그는『우리말 갈래사전』등속의 책을 활용하여(「토요일, 시를 쓰기 위해 집을 비울 때」, 『풍경의 비밀』, 랜덤하우스, 179면) 시를 쓴다. 마침내 마침맞게 들어맞는 그 언어의 선택은 얼마나 많은 다른 말들을 갈아끼운 결과물일까. 이런 시어들은 다른 시어로는 대치되기 어려운 뉘앙스와 감각을 가짐으로써 시에 위의와 기품을 더하며, 동시대 여타 시들과의 차별성도 확보한다. 그는 시를 만들고 있지만 그 언어의 세공은 기운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 언어들이 그의 시에 감각을 부여한다.

 

송재학 시의 두 번째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감각이다. 사실 모든 인식은 감각에서 유래한다. 감각을 수반하지 않은 인식은 철학과 같이 딱딱하여 시를 부서지게 하거나, 너무 물러터져서 시에 긴장을 무너뜨린다. 예컨대

 

아침상에 올라온 생선,

이건 심해의 중심에서 정육면체 각을 떠온 느낌이 아니라

냄새가 먼저이다

-「생선」(『서시』08. 여름)

 

고 했을 때 그의 오브제(아마 고등어나 갈치이리라.)에 대한 감각 <심해의 중심에서 정육면체 각을 떠온 느낌>이란 표현은 <싱싱하다>, <파들거린다> 등속의 언어가 거느리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런 감각의 격렬함 내지 불꽃이 그의 시에 생명을 부여한다. 이런 감각의 생생함은 자연스럽게 인식을 끌어당기는데, 약간 부패한 것 같은 생선이 대낮과 만나면 합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행 건너 이어지는 구절을 인용한다.

 

하지만 아직 아침,

서서히 시간이 지난다면 이건 세상과 재빨리 섞이면서

혹은 세상이 이것에 주저리주저리 달아줄 핑계가 얼마나 많으랴

얼마나 마침맞는, 송재학 특유의 시적 인식인가. 이 시는 아침=생선, 오후=부패라는 시적 조합을 만들면서 <처음의 순결하고 설레는 시간은 세상에 때가 묻으면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게 마련이다>라는 진실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 생의 침전물을 분석한다. <아침 생선은 신선해야 한다>라는 신선한 화두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품은 의미 있다. 그게 시적 효용이요 기능이다.

 

짧은 지면이니 군말을 줄이기 위해 한 마디만 더한다면 송재학은 세상의 유정물과 무정물을 구분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의 조어능력이 더해지면 시는 새로워진다. 예컨대 고물이 통통한 배를 두고 그가

 

하지만 내 시선에 붙잡힌 것은 눈꼬리가 샐쭉한 舟船綱의 포유류이다

-「환승」(시인세계 08. 겨울)

라고 했을 때 그는 舟船이라는 무정물에 생물분류 계열인 綱(계 강 목 속 종의 하나)을 결합하여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배를 고래로 비유한 시인이 많음에도 그의 시가 빛나는 것은 예측하지 못한 적실한 언어 하나를 시의 문맥 속에 고스란히 통합시키는 능력 때문이다. 이는 올챙이 모양의 글씨를 두고 <과두체 內簡>(「늪의 內簡體를 얻다」, 『시안』 08. 가을)이라 할 때나, 꼬리지느러미 모양을 <尾?體>(<여늬 소리는 바위 품에 尾?體로 파고드는 중입니다>, 「소리冊」, 『시와정신』 08. 겨울)로 잡을 때도 여실히 드러난다. 더구나 그의 시는 노래를 지향하고 있어서 언어의 탄력과 침묵을 아울러 느끼게 한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같은 시는 의미보다는 음악으로 우리 핏줄에 스며들지 않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으려 하는 송재학의 시 「말씀」(『유심』 09. 1-2월호)은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특징 중 둘째와 셋째 특징을 주로 담고 있다. (그가 순우리말을 구사하지 않은 것은 인식을 위주로 하는 이 시의 속성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교의 관념세계를 시로 감각화하려는 의지는 충분히 보인다.) 인식의 기반은 불교이다. 그렇다고 이 시가 교리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교리에서 불러내어 독자적인 깊이로 언어를 체화시키고 있다. 또 문체는 묘사보다는 해석적 진술을 기반으로 하는 특유의 수사에 주로 기대고 있다.

 

이 시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시어는 <적멸보궁>이라는 말이다. (참고로 송재학보다 앞서 적멸보궁이라는 시어를 그의 시에 의미 있게 활용한 시인으로 정진규가 있다. 그의 시에서 적멸보궁이라는 말은 고요의 깊이와 관련된다. <뺑소니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상스러웠다 그런 말엔 적멸보궁이 없었다> 정진규, 「未遂」). <적멸보궁>이라는 말에 따라 시의 전체문맥이 움직인다. 그러기에 이 말은 이 시의 자성磁性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는 ‘金星理髮’이라는 글자가 있는 문짝으로 입구 문을 만든 자두밭에서 흥미로운 시 제목을 가져온 「자두밭 이발소」(『시인세계』08. 겨울)의 발상과도 같다. 주지하다시피 <적멸보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적멸도량회를 열었던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비롯된다.『화엄경』에 따르면 적멸보궁은 본래 두두룩한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그 요체는 부처는 없으나 언제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부처가 없다는 적멸은 때로 무엇이나 부처로 만드는가 봅니다> 같은 구절이 그것을 드러낸다. 즉 이 시는 생/사, 가시/불가시라는 양분법이 지워지고, 대립적인 징표들이 통합되는 지점에서 돋아난다.

 

이 시는 의미단락이 시인에 의하여 친절히 나누어져 있다. 산문시처럼 이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들여쓰기로 의미를 분할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들여쓰기에 따라 이 시를 네 개의 의미단락(meaning sentence)으로 나누고 각각의 의미단락을 일상적인 의미로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적멸보궁 뜨락의 얼레지 군락은 텅 빈 곳을 채우는 비의 말씀을 잘 담았습니다 얼레지와 얼레지 사이가 빼곡했기에 여섯 겹 꽃잎은 적멸의 낙수받이 노릇을 잘 견딥니다

?몇 년 후 봄의 적멸보궁 앞 용맹정진하는 작은꽃 무리를 만났습니다 角과 숨을 깍은 제비꽃은 차마 햇빛을 떠받치지 못하지만 꽃 울타리 안에 고이는 말씀을 담으니 그게 죄다 도로 제비꽃입니다

?꽃들의 떨림을 다 합치면 적멸입니다 적멸을 다 합치면 꽃이기도 하나요

?부처가 없다는 적멸은 때로 무엇이나 부처로 만드는가 봅니다 혹 처음부터 당신이 부처였던가요 누구나 적멸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말씀의 결가부좌도 거기 있습니다

-「말씀」 전문(『유심』 09. 1-2월, 번호 필자)

 

?적멸보궁 뜨락에 빼곡이 핀 얼레지 군락은 비에 가늘게 파들거리면서 적멸을 이룬다.

?몇 년 후 봄에 본, 적멸보궁 앞 떼로 모인 가늘고 연약한 제비꽃들은 햇빛을 견디지도 못하지만 울타리 안에 고인 말씀을 다 모아 꽃을 피운 것 같다.

?(이렇듯) 적멸이란 꽃들의 떨림을 다 합친 것이고 (역으로) 적멸을 다 합쳐 꽃이 되기도 한다.

?부처가 없다는 적멸은 무엇이나 부처로 만든다. 혹 당신이 처음부터 부처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꽃들에는 누구나 적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씀이 결가부좌를 틀고 있다.

 

적멸보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항상 적멸의 법에 대한 말씀을 수반한다. 따라서 시인은 <텅 빈 곳을 채우>며 내려오는 빗방울의 말씀에 바르르 떠는 그 앞 얼레지 꽃들에서 적멸을 읽는다. 꽃잎 위에 촉촉이 떨어지는 빗방울과 흘려보내는 낙수소리는 온 천지간에 내리는 말씀과 거두어가는 말씀에 다름 아니다. <비의 말씀>, <적멸의 낙수받이 노릇>은 이런 이유에 근거한다. 그러나 시인은 초점을 얼레지꽃에 둔다. <얼레지 군락은 텅 빈 곳을 채우는 비의 말씀을 잘 담았습니다>. 얼레지 군락은 그 자체로 말씀을 담는 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단락은 오랜 시간의 경과 후에 일어난 일을 다룬다. 몇 년 후 봄의 적멸보궁 앞에서 시인은 이번에는 <각(角)과 숨을 깎은>(아마 가늘고 연약하다는 의미 같다.) 제비꽃을 본다. 그 제비꽃들은 얼레지꽃들이 진 자리에 핀 얼레지꽃의 현신일까. 수년 전의 얼레지꽃의 적멸이 만들어낸 꽃일까. 그 제비꽃 무리들은 쏟아지는 햇빛도 잘 견디지 못한다. 시인은 이번에는 <꽃 울타리 안에 고이는 말씀을 담으니 그게 죄다 도로 제비꽃입니다>고 발화한다. 몇 년 동안 시인의 인식이 성장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햇빛도 잘 견디지 못하는 연약한 생명인 제비꽃은 울타리 안에 고이는 적멸이 담겨서 피어난 꽃, 적멸이 모여서 핀 꽃이라는 것이다. 그 연약한 꽃 무리가 용맹정진하고 있는 대견한 모습! 우리는 두 의미단락에서 <담다>라는 동사가 의미를 실현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두 단락의 모형문장은 각각 <얼레지 군락은 텅 빈 곳을 채우는 비의 말씀을 잘 담았습니다>, <꽃 울타리 안에 고이는 말씀을 담으니 그게 죄다 도로 제비꽃입니다>가 된다. 적멸보궁이라는 공간이 무한정의 그릇이라면 그 안에서 피어 있는 꽃들 역시 그릇이요 작은 적멸보궁인 것이다.

 

세 번째 의미단락(<꽃들의 떨림을 다 합치면 적멸입니다 적멸을 다 합치면 꽃이기도 하나요>)은 전반부가 첫 번째 의미단락을, 후반부가 두 번째 의미단락을 각각 요약한 진술이다. 즉 <꽃들의 떨림을 다 합치면 적멸입니다>는 비 맞는 얼레지 군락의 떨림에, <적멸을 다 합치면 꽃이기도 하나요>는 角과 숨을 깎은 제비꽃의 개화에 대응된다. 이 단락은 앞의 내용을 수렴하면서 시를 확장시키는 기능을 한다. 시인은 적멸이란 단순히 <없음>의 상태가 아니라,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무엇인가 살아 있는 것으로 수런거리는 내적 실체라는 것을 꽃을 통해서 읽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의미단락은 꽃에서 출발한 적멸의 내포를 <무엇이나> <누구나>의 사물일반 인간일반에로 확대시킨다. 시인은 <적멸은 때로 누구나 부처로 만>든다고 하고, 가상청자인 당신(독자일 수도 있다.)이 <처음부터 부처였나요> 반문하며, 끝으로 그 꽃들에는 누구나 적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씀이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는 것으로 시를 맺는다. 결국 시인은 작은 생명단위인 꽃을 통해 적멸을, 인간 생사의 모든 비밀을 다 읽은 셈이다.

 

꽃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시인은 꽃들이 말씀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과, 그 꽃들 역시 적멸이 모여서 핀 생명이라는 것을 몇 년에 걸쳐서 깨닫게 되고, 거기서 만상이 적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불교적) 진리의 시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적멸이며 말씀을 문자로 옮기는 인위적인 노력은 언어도단에 가깝다. 자연은 그 자체로 적멸을 가장 장 실현하고 있는 이법이요 매개인 것이고, 또한 말씀의 적멸보궁인 것이기 때문이다. 송재학은 이번 시를 통해 그 한계에 도전해 본 듯하다. 그는 특유의 언어감각으로 꽃이라는 대상과 그 주변의 작용을 통해 적멸보궁에서 내리는 말씀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 실현해 놓았다. 함의와 비의를 반쯤 섞어 낮은 목소리로 우리 귓가에 속삭이는 송재학의 언어 역시 <말의 적멸보궁>에 가깝다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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