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수 시집 호수의 책
이 책에 대하여
맑고 물큰한 호수는 오늘도 제본 중이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싶거나 새와 구름의 말을 읽고 싶은 날/ 지나온 발자국만큼 긴 편지를 써도 좋을 여백과/ 새와 구름의 말이 있는 호수로 간다// 운동장이자 학교이자 도서관이기도 한 그곳엔/ 청둥오리가 새끼들에게 한가로이 책을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햇살이 아침의 빗장을 열자/ 갈대는 호수의 이야기 하늘에 써 내려간다/ 구름은 그림자 놀이하듯 상형문자로 화답하지만/ 막 도착한 철새 몇 마리/ 하얀 설원과 늑대의 이야기 펼쳐 놓기 바쁘다/ 먼 데 산은 바위와 소나무와 옹달샘이 호수의 뿌리가 아니냐며/ 제 그림자로 조곤조곤 서툴게 쓴다// 호수의 독서광은 물고기인 것을 호수를 보면 안다/ 자면서도 책을 읽고 책에 빠져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으니 다리조차 없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스스로 책이 되지는 못하지만/ 왕버들은 호수로 들어가 단단한 책이 되어 중심을 잡고 있다// 부치지 못할 편지는 오늘도 출렁이는 물결로 지우고 돌아선다/ 넘치면 흘려보내고 부족하면 채워가는 호수엔/ 날렵한 소금쟁이가 먼지를 털며 새로운 여백의 공포를 즐기고 있다
―「호수의 책」 전문
집안은 모름지기 사람의 공간인데/ 점점 사람은 줄어들고 개들이 자리하면서/ 사람의 족보에 오르고 있다// 잘 조련된 개는/ 짖지도 않고 짝을 찾지도 않고/ 꼬리를 흔들며 온몸으로 주인만 섬긴다/ 개 팔자 좋다 하여// 함께 사는 사람 팔자도 좋아지는지/ 개 가족 얼굴이 훤하다// 여의도에도 둥근 개집이 있다/ 사납게 싸우며 짖어대기 일쑤다/ 차라리 개들이 모여 있다면/ 꼬리를 흔들며 충성할 것이다
―「개판」 부분
우리말 중에서 “개”와 관련된 표현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개같다’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음을 뜻하고, ‘개자식’ 또는 ‘개새끼’는 어떤 사람을 좋지 않게 여겨 욕하여 이르는 말을 가리킨다. 유사한 맥락에서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개판”은 상태, 행동 따위가 사리에 어긋나 온당치 못하거나 무질서하고 난잡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뜻한다. 강익수가 ‘개’나 ‘개판’을 도입한 이유는 “사람”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사람’과 연결된 단어로는 “집안”이나 “족보”가 있는데, 시인에 의하면 “개들이”, “사람의 족보에 오르고 있다” 곧 ‘사람’의 위치에 ‘개’가 자리하는 가치 전도 현상이 발생한다. 특히 “여의도에는 둥근 개집이 있다”라는 진술을 통해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비판하고 풍자한다. ‘국회의사당’은 ‘둥근 개집’이 되고, ‘국회의원들’은 “사납게 싸우며 짖어대기 일쑤”인 “개들”이 되는 것이다.
나무와 새, 다람쥐가 먼저 철이 들었으므로
사람은 그들과 어울려 살면 그만이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나무가 나무로 살고 다람쥐가 다람쥐로 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가게가 없으니
콩나물값이 얼마인지 몰라도 좋았고
도로가 없으니
자동차로 얼굴을 내민 사람도 없었다
해와 달도
때가 되면 길 위에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온통 눈이 내려
마음마저 하얗게 물들면
분수없이 푼수만으로도도 넉넉한 곳
꽃피는 게
어찌 땅속에 뿌리를 둔 이들만 피우냐고
화사한 웃음꽃 피운다
하늘 아래 바보스럽게 살수록
행복한 곳
곰배령
―「곰배령」 전문
이 시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강익수의 다채로운 시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작품일 수 있다. 시인이 주목하는 대상은 “나무”, “새”, “다람쥐”, “해”, “달”, “눈”, “꽃” 등으로 구성되는 ‘자연’이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사람”보다 “먼저 철이 들었”다. 자연과 대비되는 사람은 “가게”, “콩나물값”, “도로”, “자동차” 등과 연결된다. 사람은 세속적인 성격을 벗어나기 힘든 반면 자연은 이를 벗어난다. 강익수는 ‘사람’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연’과 “친구가 되어”서 “웃음꽃”을 “피”울 때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분수없이 푼수만으로도 넉넉한 곳”을 찾아서 “하늘 아래 바보스럽게 살”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곰배령”이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고개인 동시에 자연과 사람이 일체화되는 이상향(理想鄕)으로서의 “행복한 곳”임을 굳게 기억하자.
강익수는 여기에서 이번 시집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그는 “호수” 계열과 “책” 계열을 동시에 추진한다. “호수” 계열에는 “새”, “구름”, “청둥오리”, “햇살”, “갈대”, “철새”, “설원”, “늑대”, “바위”, “소나무”, “옹달샘” 등이 있는데 이것들을 포괄하면 ‘자연’이 된다. ‘책’ 계열에는 “제본”, “말”, ‘읽기’, “편지”, “운동장”, “학교”, “도서관”, “쓰기”, “이야기” 등이 있는데 이것들을 아우르면 ‘인간’이 된다. 이 시는 일차적으로 ‘호수’는 ‘호수’이고, ‘책’은 ‘책’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은 ‘호수’가 ‘책’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연’은 ‘인간’과 다르지 않고, ‘인간’은 ‘자연’에 속한다. 곧 ‘호수는 책이다.’ 호수를 경험하는 일은 책을 읽는 일이다.
늪의 두려움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평온에서부터 시작하듯 사랑도 그랬다// 너와 나 사이의 와는 언제부턴가 징검다리 같았다 냇가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마을 친구들과 돌팔매질하며 싸웠어도 다음날이면 웃으며 징검다리를 건너 오가기도 하였고 많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서로 바라보다 돌아가듯 우리도 그랬다// 지금이라는 것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의 경계선이라는 것을 너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차창 너머 풍경에도 없는 듯 유리창이 있다는 것을 사는 것이 먹먹해서야 알았다// 인간(人間)은 왜 사이 간(間)을 쓰는지 알기까지 몇 번의 찬바람이 지나갔다
―「사람의 길」 전문
시인은 “우리”를 구성하는 “너와 나”에서 접속 조사 “와”에 주목한 후 ‘와’를 “징검다리”에 비유한다. 시적 화자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인간(人間)”을 대표한다. 강익수는 인간에 내재하는 “사이 간(間)”에 집중하는데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와”와 연결된다. 그는 ‘인간’ 또는 ‘사람’의 핵심으로서 “사랑”을 선택한다. 시인에 따르면 사랑은 “평온”과 “두려움”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동한다. 또한 “지금” 또는 ‘현재의 시간’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 사이에 위치한 “경계선”임을 강조한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유리창”인 셈이다. 이 시는 인간의 본질을 ‘경계’ 또는 ‘사이’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요컨대 강익수는 ‘평온’과 ‘두려움’ 사이에서 끝없이 움직이는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람의 길”임을 밝혔다.
강익수의 첫 시집 호수의 책을 검토하였다. 12편의 시에 담긴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가없이 넓게 펼쳐진 에메랄드 색 호수와 저 멀리 우뚝 선 산봉우리의 만년설을 환하게 맞이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자연’을 이해하고 ‘사람’을 탐구하며 ‘사랑’을 지향한다. 강익수가 파악하는 ‘사람’ 또는 ‘인간’은 ‘자연’과 대비되거나 연동된다는 점에서 개성적이다. 자연의 순수함 앞에서 인간은 경계심을 풀고 친구가 된다. 또한 평화와 공포의 이중적인 상황에서 피어나는 꽃으로서의 사랑은 사람에게 주어진 진정한 방향이자 가능성이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에 의하면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Nature is the art of God.)” 또한 미국의 작가이자 심리학자인 토니 로빈스(Tony Robbins, Anthony Robbins)는 “완벽해지려고 애쓰지 말고, 단지 인간으로서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라.(Don't try to be perfect; just be an excellent example of being human.)”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 따르면 “사랑은 두 몸에 사는 하나의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Love is composed of a single soul inhabiting two bodies.)”
강익수는 신의 예술로서의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겸손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자연과 진정한 교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의 영혼으로서의 사랑을 수용할 것을 강하게 믿고 있다. 우리는 자연과 사랑의 가치를 신뢰하는 인간에게, 행복이라는 이름의 안식처가 허락될 것이라는 시인의 예언에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 강익수의 삶과 시에 영원한 행운이 함께 할 것을 기대한다.
--- 강익수 시집 호수의 책,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