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방콕은 '천사의 도시'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도시이다. 아름다운 해안선이 2.614 km에 달하고 동쪽으로는 태국만 , 서쪽으로는 안다만해를 끼고 있으며,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지아와는 국경을 접하고 있다.
프랑스만한 크기의 약 513,115 평방 km에 달하는 국토의 약 28%가 삼림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 41% 가량이 경작지로 구성되어 있다.
태국은 밀집된 심장부와 본토, 그리고 말레이반도에 이어진 긴 남반도로 이루어져 있다. 남북간의 거리는 약 1,700 km이고 동서간의 거리는 약 800 km이다. 산림지대가 약 전체의 28%를 농경지가 약 39%를 차지하고 있다. |
|
위치 |
중국남쪽, 말레이반도 위 |
지리적 특징 |
남으로 말레이시아. 동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 서로 미안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 |
면 적 |
51.3 만 ㎢ (남한의 약 5배) |
인 구 |
약 62.2 백만명 ('99) |
수 도 |
방콕 |
주요 민족 |
타이족 (Thai, 81.5%), 화교 (13.1%), 말레이족 (2.9%), 기타 (2.5%) |
주요 언어 |
타이어 - 성별에 따라 표현 달라짐. 국경지대의 소수민족 언어를 쓰면 법적제재 |
종 교 |
불교 (소승,95%), 회교 (4%), 기독교 (1%) |
교 육 |
의무교육 6년 |
전 기 |
220 볼트 | |
|
※ 북부 산악지대 |
소수민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북쪽 지방은 삼국시대 때 당나라에 끌러갔던 우리민족의 후예로 짐작되는 '야후족', 얼마전 태국내 병원인질극을 벌였던 '카렌족', '리수족', '아카족' 등의 다양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코끼리들이 숲에서 일을 하고 겨울철 기온이 딸기나 복숭아와 같은 과일을 재배하기에 알맞은 지대이다. |
|
※ 북동부지역의 고원지대 |
5.600 년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명이 번성했으며 주로 메콩 강에 접하고 있는 지대이다. |
|
※ 중앙 평원 |
기름진 쌀과 과일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지대이다 |
|
※ 동쪽의 해안 평원 |
아름다운 해변을 지니고 있으며 여름휴양지로 유명한 지대이다. |
|
※ 동쪽의 산악지역과 계곡 |
수량이 풍부하고 낙차가 커 수력발전을 하기에 알맞은 지대이다. |
|
※ 남부지역 |
주석 채굴 고무경작. 어업의 중심지인 곳이다. | |
|
|
|
|
|
태국의 국기 뜨라이롱 (Tri-Rong)기 |
이것은 현 랏따나꼬신 왕조의 6대왕인 라마 6세의 집권기인 1917년 10월 1일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 전에는 붉은 바탕에 깃대를 보고 단위에 서있는 코끼리 모습의 국기를 사용하다가 1916년에는 붉은 바탕에 깃 폭의 1/6비율 너비로 흰 줄을 양쪽에 넣은 모양을 사용하였고, 1년 후인 1917년 청색, 흰색, 붉은 색의 국기 모양(위 참조)으로 바꾼 것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 | |
|
|
태국의 국화 수련 |
국화: 수련 꽃말: 신비. 청결 학명: Nymphaea tetragana Georgi. 과명: 수련과 영명: Nympbaea Water Lily | | | |
|
인구는 대략 6천 2백만명 정도로 타이, 중국인이 대부분이고 그 밖에 말레이, 라오스, 인디언, 그리고 버마인들이 그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공식어는 태국어지만 엘리트 층 및 상업적 용도로 영어도 통상적인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태국의 국교는 소승 불교 (Theravada Buddhism)로, 태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신앙심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 남쪽 지역민들이 믿는 이슬람교를 비롯해 힌두교와 기독교 등의 종교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초기의 태국지역 사람들은 중국의 남부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타이 (Thai)" 라는 국명은 "자유"를 의미하는 태국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제껏 외세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태국은 국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
|
|
|
|
드라바티 몬왕국 (550 - 1253) |
|
후난황제가 3세기후 지배해 나콘파톰이 수도였다. 675년 드라바티가 크메르황제하에 총독의 임기를 행사했다 (11세기).
차오프라야 유역의 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농업의 가능성에 매료되 쌀을 경작했던 태국인들은 11세기에 중국 남쪽에서 이주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초 , 타이족은 북쪽의 란나 , 파야오 , 수코타이에 조그만 공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238년에 이르러서는 2명의 타이 지도자들이 크메르 영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최초의 독립왕국인 수코타이 (행복의 새벽이라는 의미)를 세웠다. | |
| |
|
수코타이 왕국 (1238 - 1419) |
향후 차오프라야강 유역을 따라 발전하게 되는 타이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태국의 국교인 테라바다불교 (Tehravada Buddhism)를 확립하고 , 태국 문자의 발명 , 미술 , 조각 , 건축과 문학 등 태국 예술 형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수코타이 왕국은 치앙마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1238년에 드라바티를 압도해 크메르를 병합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00년경에 쇠퇴일로를 걸으면서 결국에는 신흥 아유타야 (Ayutthaya) 왕국의 종속국이 된다. | |
|
|
아유타야 태국왕조 (1350 - 1767) |
14세기에는 수코타이와 다른 그 밖의 작은 왕국들을 차례로 병합해 부와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350년에 건립된 이 아유타야 왕국은 챠오프라야 강 남부 멀리까지 영토하에 두었다. 1767년 버어마의 침략을 받기까지 태국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사절단 (시암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 1511년 도착했으나 동남아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태국은 결코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417년간 33명의 왕이 통치한 아유타야 왕국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켰다.전체적으로는 크메르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라비아 , 인도 , 중국 , 일본 및 유럽과도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 아유타야의 붕괴는 프랑스의 파리나 영국 런던의 붕괴와 비견할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탁신왕이 버어마를 몰아내고 수개월만에 타이왕국을 재건하였다.
| | |
|
방콕시대 (1767 - 1932) |
부르만들은 1767년 아유타야의 수도를 함락시켜 새로운 지역, 즉 현재의 방콕으로부터 차오프라야를 건넌 톤부리에 새 수도를 설립했다. 1782년에 이르러 차크리왕조의 초대 왕인 라마 1세가 차오프라야 강 유역의 방콕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현재의 왕궁은 이 기간에 2번째 왕이었던 챠크리 장군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19세기에 완벽한 군주제 통치를 했던 몽굿(라마4세:1851~68년)왕이 태국을 근대화하기 시작했다. |
그의 아들 쥴라롱콘 (라마 5세 : 1868~1910)왕이 노예제도 폐지와 철도창시 전보서비스 과학교육 등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서구방식의 표출은 1932년 입법부가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가의 완벽한 군주대치를 요구하는 태국 지식인들의 무혈폭동을 야기시켰다.
|
|
혁명은 또한 군대와 오늘의 태국정치가 계속될 수 있도록 정부를 제제하는 시민단체 사이에 분쟁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통치가 끝난 후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쎄니 프라모지하의 시민정부가 국가를 다스렸다. 1947년에 무혈군대반란이 마샬 피불 쏭크람 전투를, 1957년 이와 유사한 폭동이 마샬 싸릿타나랏 전투를 일으켰다.
싸릿은 1963년에 죽고 그의 후계자인 타놈 키티카촌 (최후의 마샬 전투) 장군이 1968년에 적은 기간 동안 정치적인 시민통치를 주도했으나 1971년 쌓여있던 불안 때문에 군사통치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1973년 싸냐 다르마삭티가 임시 시민정부를 창설했다.1975년에 치뤄진 선거는 다수당 창당에 실패해 쎄니프라모지와 쿡크릿 파라 모지가 각각 연합정부를 만들었으나 분단된 국가를 통일하는 데는 실패했다.
쎄니는 1976년 공직에 재선됐으나 나중에 그해 쌍가드 차롤유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반란으로 쫓겨났다. 타닌크라이비치엔이 수상이 되었으나 1977년에 크리앙삭 초마난 장군 지휘하의 무혈반란으로 대치되었다. 1979년 선거는 크리앙삭을 선거로 선출된 정부의 수상으로 공직에 재임시켰으나 1980년에 사임했다. |
| | |
|
현재의 태국 |
|
입헌 군주제로 1932년 이래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압둘야뎃 ( H.M. King 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국왕들은 국회를 통하여 입법권을 ,수상이 이끄는 내각을 통하여 행정권을, 사법부를 통한 사법권을 행사해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실상의 국가 통치자는 국왕이다 | |
|
한국과 태국의 관계 |
태국과 한국의 관계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인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국의 옛 이름인 싸얌 왕조는 1391년과 1393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교역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해로에 나타나는 해적 때문에 교류가 중단되었으나, 단절된 양국관계는 1950 년 태국정부가 3,650명의 태국 젊은이들을 유엔군의 일부로써 한국전쟁 (6.25)에 파견함으로써 재개되었다.
태국 군대는 129명의 사상자와 1,139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나머지는 한국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돌아왔고 젊은 세대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
태국은 한국과 우방 관계를 지속해 온 국가로 1949년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 한국 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1972년까지 한국에 주둔하기도 했다.
1959년에 정식으로 양국간에 외교관계가 성립되었고 1981년 양국간 사증면제협정 체결로 한국인은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비자 없이 90일간 태국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