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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말씀 : 계1:9~20. 2024년 1월 14일 일요일 오전 11시
9절입니다. [나 요한은 또한 너희 형제요 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인해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노라.](계1:9).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 사도이면서 장로입니다. 그는 “나 요한은 또한 너희 형제요.”라고 합니다. 성직자 계층은 없습니다. 천주교는 사제나 신부나 교황 같은 계급이 있지만 베드로는 바울을 일컬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벧후3:15)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형제가 되시며,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히2:11).
요한은 자신을 “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개인이 환란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크고 작은 환란이 있고 고난을 견디어 내고 이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박해를 받게 됩니다(딤후3:12).
하나님의 왕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이 남겨 놓으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지 않으면 함께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고난은 현재 그리스도의 왕국과 영광이 아닌 ‘환란과 인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할 때,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할 때 우리는 고난을 받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인해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노라.”(9).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언”-이것은 유대인들이나 무슬림들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지고 그분을 증언하는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요한은 밧모라 하는 섬에서, 수많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은 때로 그 증인들에게 고난과 순교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런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일들이 놀랍게 일어납니다.(벧전4:3, 빌3:10,딤후1:8, 요16:33, 행14:22)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류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옥중 서신을 썼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로 가서 새 언약의 신비들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꽃피고 열매 맺는 은혜의 역사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요한은 밧모란 섬에 유배되어 계시를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 가 그곳에서 이방 제국의 역사를 차례대로 계시 받았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꿈의 해석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면서 동굴에서 많은 시를 지었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으면서 내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요한은 밧모 섬에 있었는데 지금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주의 날은 주일(週日-Sunday)이 아닙니다. 주의 날은 큰 환란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입니다.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날이 아닙니다. 자, 몇 구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울부짖을지어다. {주}의 날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날이 [전능자]에게서 나온 파멸같이 오리니](사13:6). 주의 날은 온 땅에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 ‘울부짖어야 할 파멸의 날’입니다. [보라, {주}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로 인한 잔혹한 날이 와서 그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가 그 땅의 죄인들을 그곳에서 끄집어내어 멸하리니](사13:9).
주의 날의 성격은 “진노와 맹렬한 분노로 잔혹한 날”입니다. 주의 날이 어떤 날인지 말씀들을 보십시오. [{주}께서 자신의 군대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시리니 이는 그분의 진영이 심히 크며 자신의 말씀을 집행하시는 분이 강하시기 때문이라. {주}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 날을 견딜 수 있으리오?](욜2:11).
주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집행하시는 날로 곧 심판을 집행하신다는 날입니다. 주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다고 말합니다.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될 것이나](욜2:31). 주의 날은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저 크고 주목할 만한 [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될 것이나](행2:20). 베드로는 오순절에 “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아니라 주목할 말한 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 날은 우리에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주목할 만한 날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대언자들이 기록한 주의 날이 요한 계시록에서 그 봉인이 풀렸음을 봅니다. (참조-암5:18,20. 옵1:15, 습1:14)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을 때에...”(10). 성령 안에 있다는 표현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성령 안에 있다는 “영적인 상태”에 관한 표현이 아닙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움직임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체험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러한 사람을 알았는데(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2-3).
바울은 자신이 이 땅에서 셋째 하늘로 채여 갔다고 말합니다. 그는 돌에 맞아서 죽은 상태였던지라 사람들이 그의 몸을 도시 밖에 두었는데(행14:19)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그가 하늘로 채여 올라갔습니다. 사도 요한이 영 안에 있었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요한은 몇 차례나 영 안에서 이리저리 데려 감을 당했고 그 때마다 주님이 보여 주시는 것들을 보았습니다(계4:2,17:3,21:10).
“내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0).
요한은 성령 안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voice)’은 주님의 음성입니다(11). 음성(voice-목소리)는 계시록에서만 41번 나오는 표현입니다.
주께서 임하실 때 나는 소리가 ‘나팔 소리’입니다. [셋째 날 아침에 천둥과 번개와 짙은 구름이 그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므로 진영에 있는 온 백성이 떨더라.](출19:16). 시내 산에 강림하신 주의 임재와 더불어 그들은 나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구름이 주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눈에 보이는 표적이라면 천둥과 나팔 소리는 귀에 들리는 표적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음성으로 천둥소리를 내시고 그 음성은 ‘나팔 소리’ 같습니다(삼하22:14, 욥26:14, 37:4,5). 여러분들 가운데 주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그리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천둥이 바로 주의 음성으로 인해 나는 소리입니다. 이 음성이 지금 난다면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저 하늘로 들림을 받습니다(고전15:51,52, 살전4:16). 밧모 섬에 있던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 안에서 들림 받았던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이르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churches-지역 교회들)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라, 하시더라.](계1:11).
요한은 자신의 뒤에서 나는 음성(voice), 그가 들은 음성은 이것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11). 요한은 이미 한 차례 이 음성을 들었으므로 보지 않고도 이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셨는데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밧모에서 동쪽으로 보면 반월 모양으로 차례대로 위치해 있는 교회들입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11). 요한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에베소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행11:26,안디옥) 사람들이 있었던 초대 교회의 선교의 중심지입니다. 각 교회의 이름에는 그 특징을 나타내는 뜻이 있는데 2~3장에서 보겠습니다.
교회의 이름들이 갖는 의미로 보면 교회의 특징들이 쉽게 드러나 보입니다. 이 교회는 인류 2000년 교회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본 것들을 기록하여 이 교회들에 보냈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 6개 교회는 그냥 지역 이름에 교회란 말이 붙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계2:1), 서머나에 있는 교회(계2:8), 버가모에 있는 교회(계2:12),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계2:18), 사데에 있는 교회(계3:1),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계3:7)입니다.
그런데 한 교회는 지역명의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의 교회”입니다(계3:14).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사람들의 권리, 인권, 민권, 여권 등 온통 사람들의 권리를 뜻하는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이란 철학, 가치를 지닌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현대 교회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순위에 있고 사람을 존중하고 높이고 사람들의 의견을 따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말로는 모두 주님의 교회라고 하지만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가 아니고 사람이 먼저이며, 그리스도가 먼저가 아니라 돈이 먼저인 교회입니다. 성경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들의 인권, 종교, 학문, 학벌, 신학, 철학,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먼저인 교회입니다.
신본(神本), 신권(神權)은 없고 인본주의(人本主義)만 물결치는 그런 교회입니다. 크리스천들이라고 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 배를 섬기고, 맘몬을 섬기고, 탐욕을 부리는 배교한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주님은 계시지 않고 모양만 있으며 주님은 문 밖에 계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요즘은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이 한결같이 ‘사람이 먼저다’고 외칩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의 핵심 사상입니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이 미래다. -사람이 믿음이다. -사람이 자원이다. -사람이 희망이다.
12절입니다. [내게 말씀하신 음성을 알아보려고 내가 돌아섰으며 돌아설 때에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는데](계1:12). 요한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 같은 음성,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보기 위해 뒤로 돌아섰는데, 돌아설 때 그는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습니다. 일곱 금 등잔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성경 자체를 보면 됩니다. 성경은 성경이 스스로 해석합니다.
1:20절b,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이 본 일곱 금 등잔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요한이 돌아서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일곱 등장대의 일곱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성막이나 성전에 있는 등잔대와 다릅니다(출25:31-37). 성전에 있는 등잔대는 한 개에 일곱 가지가 연결되어 있는데 계시록에는 각각의 등잔대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한 개의 민족, 국가로 구성되어 있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각 지역별로 떨어져 있음을 나타냅니다.
13-16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지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그 모습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영광 받으신 이 분의 모습은 장차 우리가 입게 될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롬8:29, 빌3:21, 요일3:2).
13절입니다. [그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께서 발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더라.](계1:13). 요한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을 보기 위해 돌아섰는데 그가 본 것은 일곱 금 등잔대였습니다(12). 성막에 있는 등잔대처럼 한 개의 등잔대에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등잔대입니다.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입니다(1:20). 그 일곱 등잔대의 한 가운데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께서 발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13). 그 분은 전에 죽으셨다가 지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의 영을 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몸, 실체, 실물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의 아들 같은 모습이었지 그룹이나 스랍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 예수님은 아무런 모습이나 형체가 없는 영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이십니다.
요한이 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보던 그 모습이었으나 그가 본 예수 그리스도의 옷차림은 초림 때 육신에 입으셨던 모습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 옷은 지상에서 대언자들이나 대제사장이 입던 옷이 아닙니다. 주님은 왕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본 예수님의 옷은 대언자나 제사장이 아닌 전형적인 왕의 모습입니다.
“등잔대” 이 시대의 등잔대, 등불은 크리스천들입니다. 침례 요한은 타오르며 빛나는 등불이었습니다(요5:35). 우리 몸도 타오르는 등불입니다(눅12:35).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 세상이 빛이셨습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산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겨질 수 없느니라. 사람들이 등잔불을 켜서 통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잔대 위에 두나니 그러면 그것이 집 안의 모든 자들에게 빛을 주느니라.](마5:14-15).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빛을 비추는 등잔불”이라고 하십니다. 등잔불은 누구나 볼 수 있게 등잔대 위에 둡니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주목하는 등잔불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세상의 등잔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누가 영광을 돌립니까? 빛을 비추고 사람들에게 보여 준 이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로서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빛을 비춰 주고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14절입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핵심은 일곱 등잔대가 아니라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다고 말합니다. 요한이 본 예수님은 동양인의 검은 머리나 양키들의 금발이 아니라 완전히 양털같이, 눈같이 희다고 말합니다.
구약에 능한 사람이라면 다니엘 7:9에서 이미 이 구절을 읽었을 것입니다. 주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전의 모습을 다니엘이 말합니다. [내가 보니 마침내 그 왕좌들이 무너져 내리고 [옛적부터 계신 분]께서 앉아 계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으며 그분의 왕좌는 맹렬한 불꽃 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더라.](단7:9).
동시에 이 구절은 이사야 1:18을 기억나게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주님께서는 우리의 붉은 죄를 자신의 머리털처럼 눈같이,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깨끗함, 순수, 정결함입니다.
[그는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라리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53:2). 대언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때의 외모에 대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시고 영광 받으신 주님은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지신 분입니다. 초림 때 예수님의 모습은 연한 초목,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라고 합니다. 차이가 느껴집니까? 예수님은 초림 때와 부활 후와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신 주님의 모습의 차이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같고.”(14). 지상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그분의 얼굴을 때리면서 “대언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눅22:64)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가 요한이 본 그분의 눈은 ‘불꽃’같았습니다. 불꽃같은 주님의 눈을 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달군 듯한 정제된 놋 같으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소리와도 같고](계1:15). 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달군 듯, 정제된 놋 같다고 합니다. 이 역시 다니엘이 예전에 본 것과 같습니다. [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보라, 어떤 사람이 아마포 옷을 입었고 그의 허리에는 우바스의 정금으로 띠가 둘렸더라. 그의 몸은 또한 녹주석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개 모양 같으며 그의 눈은 등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의 색깔은 연마한 놋 같으며 그의 말소리는 한 무리의 소리 같더라.](단10:5-6). 다니엘서를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동일한 것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다니엘이 보았던 그 분을 영 안에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광스런 몸이 어떤 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흙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광스런 몸은 녹주석 같습니다. 팔과 발의 색깔 역시 연마한 놋 같습니다. 주님의 발이 용광로에서 달군 듯, 정제된 놋과 같다고 했으므로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올라가면 정확히 그분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요일3:2, 빌3:21, 롬8:29).
저 하늘에서 우리의 몸이 녹주석 같고, 팔과 발의 색깔이 연마한 놋, 정제된 놋과 같다는 사실은 성경을 읽고 믿는 이들만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이런 진리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읽고 공부하는 계시록이란 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알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성경이 말한 그대로 믿기 어렵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믿는 자에게는 알기 쉽고 깨닫기 쉽습니다.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소리와도 같고”(15). 그 분의 음성은 물들의 소리(겔1:24, 43:2), 천둥의 소리와 같습니다(계14:2, 19:6). 여러분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한없이 부드럽고 감미롭고 여성스럽고 황홀한 음색을 지닌 그런 음성인 줄로 생각했던 분들은 조금 놀랄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은 성경 곳곳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하늘로부터 천둥소리를 내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자신의 음성을 내시며](삼하22:14). 천둥소리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번개 뒤에 한 음성이 우렁차게 외치나니 곧 그분께서 자신의 뛰어난 음성으로 천둥소리를 내시느니라.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때에 그분께서 그것들을 멈추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음성으로 놀랍게 천둥소리를 내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큰일들을 행하시나니] (욥37:4-5). 주님의 음성은 우렁차게 울리는 천둥소리입니다.(참조:욥40:9).
요즘 도시 생활을 하는 분들은 천둥소리를 거의 듣지 못할 것입니다. 번개와 더불어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는 정말 들을 만합니다. 주님은 음성으로 천둥소리를 내십니다. [{주}의 음성이 물들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천둥소리를 내시나니 {주}께서 많은 물들 위에 계시는도다.](시29:3).
많은 물들(셋째 하늘 아래 물-시148:4)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천둥소리를 내십니다. 주의 음성은 나팔 소리와 같습니다(계1:10, 4:1). 계시록에서 요한이 들은 주의 음성은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었습니다. 일곱 등잔대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소리” 같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저 하늘에 계신 주의 음성, 음색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흔히 천상의 목소리, 천사의 목소리, 신의 목소리라 칭송 받는 가수들의 목소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주의 음성, 천사들의 음성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습니다.
16절입니다.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이 나오고 그분의 용모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계1:16).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가 갈릴리에서부터 따랐던 그분의 모습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영광을 받으신 주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별이 있습니다. 이 별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습니다. 20절에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20)라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스스로 말씀을 풀어 주고, 의미를 정의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어 사전이니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 보지 않아도 주의 말씀을 알고 믿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일곱 교회의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이 나옵니다. 이 검은 성령의 검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엡6:17). 주의 말씀은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합니다(히4:12). 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주의 영, 주의 호흡(숨)입니다.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날 터인데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살후2:8). “자신의 입의 영으로” 적그리스도를 소멸시킨다고 하십니다. 요한이 본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은 ‘주의 말씀, 주의 호흡’입니다.
“그분의 용모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16).
예수님의 용모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의의 해(태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시기에 새 예루살렘에는 해와 달이 필요 없습니다. [그 도시 안에서 빛을 비출 해와 달이 필요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었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계21:23). 이 빛은 해, 달, 별과 같은 광체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빛의 근원이신 분에게서 나오는 빛입니다. 아무도 볼 수 없고, 보이지 않고,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빛을 주시는 도시가 새 예루살렘입니다. 거기는 해와 달도 필요 없고 전기도 어떤 다른 불빛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일곱 등잔대 가운데 계신 주님의 용모까지 본 그대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본 것과 일치합니다. [또 내가 보니 그분의 허리 모양으로부터 위는 마치 속에서 사방으로 불타는 불의 모양과도 같았고 호박색과도 같았으며 내가 보니 그분의 허리 모양으로부터 아래는 마치 불의 모양 같았고 그것이 사방에 광채를 가지고 있더라. 사방으로 퍼지는 그 광채의 모양은 마치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 모양 같았는데 이것은 {주}의 영광의 모습을 가진 모양이더라. 내가 그것을 볼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말씀하신 분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7-28).
에스겔은 주님의 모습을 볼 때에 “마치 속에서 사방으로 불타는 불의 모양과도 같았고...사방에 광채를 가지고 있더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분의 용모가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 둘이 보인 반응은 동일합니다. 에스겔은 그것을 볼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겔1:28). 요한은 어떠합니까?
17절입니다.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매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내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1:17).
그분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고(겔1:28), 요한은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고, 다니엘은 몸 안에 기력이 다 빠진 채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얼굴을 댄 채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홀로 남아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안에 기력이 남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내 아름다움이 내 속에서 변하여 썩은 것이 되었고 아무 기력도 내게 남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그의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얼굴을 땅에 댄 채 깊이 잠들었느니라.](단10:8-9).
육신의 눈으로 주의 영광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던 바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행9:4). 바울은 땅에 쓰러져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변화산에서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대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습니다(마17:6). 주의 영광을 보고 그 음성을 들을 때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오늘날 주를 보았다는 체험 간증을 하는 이들과 너무나 다릅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는 간증을 하는 이들의 체험을 보면 성경과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느낌, 체험, 보고 들은 것보다 성경기록이 훨씬 더 확실하고 옳습니다.
사도 요한은 들었고(10), 돌아섰고(12), 보았고(12), 쓰러졌습니다(17). 이것은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말씀하신 분에게로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말씀하신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돌아선 후에야 비로소 주님을 봅니다. 일단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면 그는 죽은 자처럼 쓰러집니다. 자신이 죽은 사람은 자기 견해, 자기주장, 자기 자랑이나 영광, 자기 확신 등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을 본 사람들은 “나는 죽었노라.”, “내가 산 것이 아니요..”란 생각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한은 일어서지 않았고 주님은 그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4:1에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요한은 죽은 것같이 쓰러져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로 들림 받는 순간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은 채로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17절입니다.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내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17). 주님은 쓰러진 요한 위로 오른 손을 얹으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17)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나는 예수니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자신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큰 환란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란 말보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란 말씀을 더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 만군의 주께서 야곱을 부르실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인 자가 시온에게 이르기를...”(사41:27). [누가 그 일을 이루고 행하였으며 처음부터 그 세대들을 불러내었느냐? 나 {주}가 마지막 세대와 함께 첫 세대를 불러내었나니 내가 곧 그니라.](사41:4). [이스라엘의 [왕], {주} 곧 그의 구속자인 군대들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니라. 나 외에는 신이 없느니라.](사44:6). [오 야곱아, 내가 부른 자 이스라엘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한 나는 마지막이니라.](사48:12).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오 이스라엘을 ‘오 야곱아’라고 부르시는 주 하나님이셨습니다.(vs 1:11, 17, 22:13).
18절입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 (계1:18). 주님은 요한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은 주의 날 성령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 그분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밧모 섬에 유배되었던 요한은 일곱 금 등잔대 가운데 계신 그 분의 모습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다 보았고 그 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죽은 자처럼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는데 주님은 요한에게 손을 얹으며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1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그분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서 내려 돌무덤에 옮기고 돌로 입구를 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금 살아 계십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분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셔서 죽은 자들로부터 태어난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교주들은 죽고 묻혔고 썩고 없습니다. 그들은 얼마를 살다 죽었다는 사실에서 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으나, 지금 살아 계십니다.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18). 사망은 몸을 붙잡아 두고 지옥은 혼을 붙들어 두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서 지옥에 가셨을 때(행2:27) 지하 세계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셨는데(벧전3:19) 그분이 그것들을 지으신 분이요, 그분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옥에는 여러 문들이 있습니다. 사망의 문 역시 여러 개입니다. 열쇠들(Keys)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문이 여럿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망의 문들이 네게 열린 적이 있느냐? 혹은 네가 사망의 그늘의 문들을 본 적이 있느냐?](욥38:17). 욥은 사망의 문들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살인자요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계9:6). 다윗 역시 ‘사망의 문들’(시9:13, 107:18)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하심으로 “지옥의 문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문들의 열쇠들을 지니신 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에도 문과 창들이 있고 지옥과 멸망에도 문들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몇 가지 종류의 열쇠가 나오는데 왕국의 열쇠들(마16:19), 지식의 열쇠들(눅11:52),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계1:18), 다윗의 열쇠(계3:7), 바닥없는 구덩이의 열쇠(계9:1, 20:1)가 있습니다. 주님은 길이시고(요14:6), 양들의 문이십니다(요10:7). 믿음의 문(행14:27).
19절입니다.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하고](계1:19). 주님은 요한에게 세 가지로 구분해서 기록할 것을 명하셨는데 “네가 본 것들, 지금 있는 것들, 이후에 있을 것들”입니다. “네가 본 것들...”은 일곱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를 말하는데 바로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본 것들은 1장에서 본 일곱 금 등잔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계1장).
“지금 있는 것들”은 일곱 교회의 모습입니다(계2,3장). “이후에 있을 것들”은 4-19장까지의 큰 환란의 모습과 20-22장의 천년 왕국과 영원의 모습입니다. 지금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 안에서 주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혹자들은 교회 시대(1-3장), 큰 환란(4-19장), 천년 왕국과 영원(20-22장)으로 나눕니다.
20절입니다. [네가 본,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에 대해 기록하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주님은 두 번이나 “네가 본...네가 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요한은 일곱별과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습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입니다. 별들은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이 있고, 천사들을 뜻할 때가 있습니다(욥38:7, 유13, 마2:9).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이 교회들은 요한이 살던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지역 교회들이었는데 각 교회들에 주신 말씀의 내용들은 교회사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며 동시에 현재 요한이 주의 날 성령 안에 있다는 점에서 큰 환란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일곱 교회의 특성들로 볼 때는 신약 교회들의 역사적 흐름을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용되는 용어들은 현재 교회에 맞지 않고 큰 환란 때 이 땅에 있는 환난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으로 규정짓거나 교리로 못 박아 버린다면 해석 불가능한 것이 많습니다.
여기서 천사들이 누구인가? 논쟁이 있습니다. 천사들이나 교회의 일꾼들은 구원의 상속자들을 섬기는 자들은 맞지만, 교회의 천사들을 교회의 사역자들(감독, 장로, 목사)이란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도들, 대언자들, 목사, 교사, 장로, 감독 등이 ‘천사’로 불린 예는 성경에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천사는 어떤 민족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단10:13,20).
천사는 어떤 개인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히1:13-14, 마18:10).
천사는 어떤 교회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장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이것을 ‘신비’라고 하셨습니다. 신비는 비밀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고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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