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의 작품 세계와 독창적 기법
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 속에 새긴 우리네 삶의 정경
박수근은 18세 때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데뷔하여 1965년 51세로 작고할 때까지 33년간 화가로 활동했으나 해방 전후와 6.25 전쟁으로 인한 공백이 있어 제대로 그림을 그린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작업도 까다롭고 오래 걸려 작품의 수가 많지 않은 편이다.
큰아들 박성남씨는 “유화는 350점 이내, 수채화·소묘(데생)·삽화를 합쳐도 500점 정도”라고 헤아렸다. 외국인들에게 팔린 작품도 많이 돌아와 해외에 있는 작품은 20여 점쯤 될 것이라고 했다.
박수근의 작품이 한국인에게 사랑받고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은 이처럼 작품 수가 많지 않은 희소성도 한 요인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양구 박수근미술관, 몇몇 대학 박물관 등이 주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고, 개인들이 보물처럼 간직하는 작품이 대다수여서 거래되는 작품은 극소수다. 따라서 호당(우편엽서 크기) 가격이 가장 높다. 화랑들에 따르면 40여 년 전보다 작품 값이 1만 배나 올랐다고 한다.
우리 정서에 와닿는 매력
박수근이 사랑받는 더 큰 이유는 작품성에 있다. 한국인이면 대다수 그의 작품에 공감하고 감동을 느낀다. 그만큼 우리 정서에 와 닿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소재다. 그의 그림에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 애정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담겨있다. 둘째는 소박한 아름다움이다. 박수근의 그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박수근의 예술관과 진실한 마음이 배어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셋째는 독특한 표현 양식이다. 박수근은 물감을 여러 차례 발라올려 화강암 표면과 같은 우툴두툴한 재질을 만들어 낸 후 여기에 단순한 선묘로 대상의 형태를 새겨 넣어 암각화 같은 느낌을 줄 뿐 아니라 고향의 흙 같은 수수한 멋을 살려내고 있다.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작품들
박수근의 활동 기간은 초기·중기·후기로 나누기도 하나, 크게 해방 전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시기와 6.25 전쟁 중에 남하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선전에 첫 번째 입선한 작품은 이른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였다. 이때만 해도 아마추어 티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소재는 시골집을 배경으로 한 향토적인 풍경이었다. 5년 후 두 번째 입선작 역시 수채화로 [일하는 여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시골 아낙네가 아이를 업고 절구질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 토속적인 정취가 풍겼다. 세 번째 입선작은 나물 캐는 소녀들을 그린 수채화 [봄]이다. 아이를 업은 소녀와 또 다른 소녀가 들판에서 나물 캐는 모습이 동적으로 표현되었고, 역시 소재는 농촌의 사람들이었다. 1938년 다섯 번째 입선작은 유채로 그린 첫 작품 [농가의 여인]이다. 두 번째 입선작 [일하는 여인]과 같은 소재인 절구질하는 여인이 모델인데, 차이점은 아이를 업지 않았고 유화 물감을 썼다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단순한 구도지만 당시 농촌의 생활 감정을 소박하게 담아냈다.
박수근, [모자], 1961년
캔버스에 유채, 45.5×38cm
다음 해는 수채로 그렸던 첫 입선작 [봄이 오다]를 유채로 그린 [여일]을 발표했다. 혼자 익힌 유화여서 기법은 익숙하지 못했지만 농촌 풍경의 일상을 다룬 주제가 호평을 받았다. 1941년 20회 선전 입선작은 [맷돌질하는 여인]으로 신혼의 아내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어서 더욱 우리 정서에 와 닿는다. 그 다음 해에는 아내와 첫 아들을 모델로 그린 [모자]로 입선했고, 그 이듬해 역시 아내를 대상으로 그린 [실을 뽑는 여인]으로 선전 출품을 마쳤다.
모두 8회에 걸친 입선작들의 소재는 흙냄새나는 농촌 풍경과 부지런히 생활하는 아낙네들의 소박한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박수근은 주제와 형식에서 가장 한국적인 화가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박수근의 작품 주제를 ‘가난’과 ‘노동’에 초점을 맞추려는 사람들도 있으나, 박수근은 농촌을 토속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려 했다. 강원도 양구의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수근은 밀레처럼 농촌의 정경, 그중에도 일하는 여인들을 즐겨 그렸다. 조선의 화가 김홍도가 그 시대 삶의 모습을 풍속화로 남겼듯이 박수근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자연과 사람들을 주제(모티프)로 삼아 후세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것이다.
박수근은 모델을 써서 인체를 선으로 묘사하는 소묘(데생)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인물을 묘사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이는 혼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양구 시절에 풍경과 인물을 쉼 없이 스케치하면서 기초를 쌓은 결과지만, 그는 외형만 묘사한 것이 아니라 농촌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과 생활 감정까지를 몸에 익혀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이뤄냈다.
국전 중심의 창신동 시절 작품들
아내 김복순에 의하면 금성중학교 미술 선생 시절 그림을 그렸지만 전쟁 중 폭격으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공산 치하에서 남하해 전쟁을 겪는 동안에는 군산에서 부두 노동으로 연명했고,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다.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
11회 선전 입선 작품 [봄이 오다]를 들고 있다. 1954년.
박수근이 남한에서 작가 활동을 재개한 시기는 서울에 정착한 1952년경이지만 본격적인 창작 작업은 창신동에 집을 사서 그림 그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1953년부터였다. 박수근은 마루의 화실에서 완성한 작품 2점을 전쟁으로 중단했다가 2회로 속개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출품하여 [집]은 특선을, [노상에서]는 입선을 차지하면서 화가로서의 길을 다시 열었다. 특선은 입선작 중 소수의 우수작을 가려 주는 상이라고 보면 된다.
공백기가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생존에 허덕이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온갖 역경 속에서도 그림만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소박한 주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윤곽선, 흰색·회갈색·황갈색 주조의 평면적 색채, 그리고 명암과 원근이 거의 배제된 독특한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 도록』
특선작 [집]은 도록에 [우물가(집)]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화면에 꽉 차게 초가집을 배치했고 집 앞 우물에서 물을 길어 빨래를 하는 아낙들과 소녀의 모습을 그린 농촌의 정경이다. 같은 제목의 작품이 몇 점 있지만 이 작품은 평면 구도가 탄탄하고 색채와 질감에서 박수근 특유의 개성이 드러나 있는 수작으로 꼽힌다. 입선작 [노상에서]는 전쟁 후에 먹고살기 위해 길 위에서 장사를 하는 여인네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박수근 작품의 소재별 특성
박수근의 작품은 소재별로 인물, 풍경, 정물로 나눌 수 있다. 풍경과 인물, 인물과 풍경이 어우러진 그림들도 적지 않다.
평론가 오광수는 박수근의 인물 그림을 ‘일하는 사람들’과 ‘길 위의 사람들’로 나눴다. ‘일하는 사람들’은 선전 시대에 그린 [맷돌질하는 여인], [실을 뽑는 여인] 등을 비롯하여 1950~60년대에 서울에서 그린 [기름장수], [소금장수], [빨래터], [시장의 여인들] 등 꽤 많은데 한결같이 여인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길 위의 사람들’은 [노상의 사람들], [노인], [대화] 등 남자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과 [노상의 여인들], [앉아있는 여인] 등 여인들을 그린 것, 그리고 남녀를 함께 그린 작품들로 살펴볼 수 있다.
박수근의 풍경은 집과 마을, 산과 나무 등으로 가를 수 있다. 집과 마을에는 골목이나 판자촌도 등장한다. 나무는 고목이 많아 잎이 달린 나무는 흔치 않다. 많이 그리지는 않았지만 꽃그림도 몇 점 있다. 정물은 감자, 가지, 복숭아, 감, 굴비, 책가방, 고무신, 그리고 소와 고양이 등등 생활 주변의 소재들을 대상으로 그렸다.
박수근, [빨래터],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50.5×111.5cm
왜 길 위이고 노상인가
일하는 사람들은 박수근이 선전 시절부터 즐겨 그려온 소재지만 길 위(노상)의 사람들은 남한에 정착하면서 새로 등장한 주제이다. 왜 길거리이고 길바닥일까?
박수근 인물 그림의 공통점은 인물들이 실내에 있지 않고 바깥 공간에 있다는 것이다. 바깥 공간 중에서도 길 위나 길가에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다.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시장에서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노상에서 쭈그리고 앉아 쉬거나 대화하는 사람들, 그림 그리는 소녀나 노는 아이들도 한결같이 집안이 아닌 마당이나 골목에 있다.
“박수근 작품에 있어 길이란 대단히 중요한 공간이다. 길은 단순히 통로로서의 기능 외에 시장이 형성되기도 하고 작은 광장이 되기도 하고 놀이의 공간, 또는 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길 위의 사람들은 단순히 가고 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고, 모여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쉼터의 사람들이고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이다.”
- 평론가 오광수
여기서 다시 박수근이 살던 6.25 직후의 서울로 가볼 필요가 있다. 휴전이 되어 전쟁의 포성은 멈췄지만 서울 거리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 번듯한 빌딩이나 사무실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회관이나 어린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바깥에 나와 생활해야 했다. 일자리가 없는 할아버지들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은 맨발로 골목을 뛰어다녔다. 소녀들은 동생을 등에 업은 채 놀이를 하기도 했다.
박수근이 살던 창신동에는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동대문에서 가까워 사람들 왕래가 많아 노점상들이 즐비했다. 길바닥에 과일이나 먹거리 등을 좌판에 놓고 쪼그려 앉은 아낙네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여인들에게는 노상이 생활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은 함지나 좌판 혹은 광주리에 물건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곡식이나 소금, 채소나 생선 등을 팔기 위해 종일 노상에 앉아 있어야 했다. 가지고 나온 것을 다 팔아도 몇 푼 안 되지만 여인들에게 노상 장사는 온 가족이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생계수단이었다. 날이 저물면 여인들은 좌판을 머리에 이고 총총히 집으로 돌아갔다.
차츰 서울 인구가 늘면서 장이 서기 시작했다. 노점들이 한데 모인 시장터에는 날마다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당시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자 사람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는 곳이었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창신동에 정착한 박수근은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았다. 그가 길 위의 사람들을 자주 소재로 택한 것은 50, 60년대 주변 생활공간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일상이고 모습들이었기 때문이다. 창신동 시절에 그린 작품들은 제목부터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노상], [노상의 사람들], [시장여인들], [소금장수], [기름장수], [좌판] 그리고 쭈그리고 앉아있는 [노인]과 [여인] 등이 그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이나 길 위의 사람들은 한 명, 또는 두 세명을 그린 작품들이 많지만 시장의 풍경처럼 많은 사람들을 한 화면에 배치한 군상그림들도 있다. 구도도 서있는 사람, 앉아있는 사람, 배치도 좌우 또는 상하로 다양하고, 모습도 아기 업은 소녀, 광주리를 인 여인, 수건을 두른 여인, 모자 쓴 할아버지 등 남녀노소가 망라되어 있다.
박수근, [시장의 사람들], 1961년
하드보드에 유채, 25×62cm
박수근 그림의 순박한 사람들
박수근의 사람 그림 몇 점을 감상해보자. 작은 그림 중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작품 중 하나가 [기름장수](1953년)이다. 아들 박성남의 기억으로 창신동 집골목에 기름장수가 살았다. 글을 몰라 엄마가 편지를 읽어주거나 써주면 기름 한 병을 주고 가곤 했다고 한다. 머리에 기름병을 담은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렸으며, 검은색의 곡선으로 윤관을 잡고 굵은 붓질로 질감을 살렸다. 두상이 작고 어개가 좁은 아낙의 모습에서 고단하지만 끈질긴 삶의 무게가 전해지는 작품이다.
[빨래터](1950년대)는 여러 점 그렸는데 그중 한 점이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박수근이 빨래터를 자주 그린 것은 아내 김복순을 처음 본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각선 구도에 각기 다른 여인들의 뒷모습에 노랑, 분홍, 옥색 등 색을 입혀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박수근의 인물 그림에는 아기 업은 엄마와 소녀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 두고 가난의 표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 시절에는 돌볼 사람이 없어 엄마나 누이가 아이를 업어서 키웠다. 박수근에게 아이는 생명의 귀한 존재였고 미래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기 업은 소녀](1953년)나 [절구질하는 여인](1952년)에서 엄마와 누이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
국전 11회 출품작 [소와 유동](1962년·호암미술관 소장)과 13회 출품작 [할아버지와 손자](1964년·국립현대미술관 소장)는 두 점 모두 말년의 박수근이 투혼을 다한 대작들로, 구도가 탄탄하고 주제를 밀도있게 형상화한 대표작들이다.
노상의 여인을 그린 작품 중 [앉아있는 여인](1963년)은 소금을 파는 아낙의 무료한 모습을 담았음에도 꽉 짜인 구도와 질감이 구도적인 종교화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농악](1960년대)은 박수근 인물 그림 중에서는 색다른 소재로 매우 동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박수근은 원숙기에 농악을 주제로 여러 점을 남겼는데 군상(무리 지은 사람들)의 배치가 독특하고 세부 묘사가 뛰어나 농악의 울림이 들리는 듯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청소부](1963년)는 박수근 인물 그림에서 보기 드문 이색 소재(일하는 남성)여서 정감을 더해주고 있다.
박수근, [농악], 1962년
하드보드에 유채, 59.3×121cm
박수근의 인물들은 가난한 사람들인가?
박수근은 6.25 전쟁 후 어려웠던 시기에 작가로 활동해 거리의 사람들이나 일하는 여인들을 많이 그렸다. 이를 두고 어느 평론가는 ‘궁핍한 시대의 풍경’이라고 하고, 또 어느 평론가는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인간상은 헐벗은 모습으로 표현된다“고 했다. 또 ”역사의식이 없다“는 비판을 가하는 평자도 있다.
그 시대가 궁핍했고 서민들도 가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수근이 그린 것은 시대의 가난이었지 정신의 가난은 아니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박수근에게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헐벗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진솔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박수근 그림에 등장하는 일하는 사람, 거리의 사람들은 절망하는 빈민이 아니라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았던 보통 사람들이며, 그래서 결코 삭막하지 않고 정겨운 삶의 정경들을 보여주고 있다. 평론가 오광수는 “박수근이 그리는 대상은 사람들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끼리 나누는 감정의 교류까지를 포함한 것이 된다”고 했다.
박수근의 작품 속에는 삶의 풍경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빨래를 하기도,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길을 걸어가기도, 때로는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그들은 삶의 힘겨움에서 벗어나 일상 속에서 잠시 휴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활에 찌든 궁핍한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생활하는 풍경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삶을 영위하는 우리들과 이웃들의 모습인 것이다. 특정 시공간에 얽매여 있는 모습이 아니기에, 보편적인 한 시대의 삶의 모습이며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나무와 집과 사람들이 어우러진 드라마가 있는 풍경그림들
박수근은 생전에 인물 그림 다음으로 풍경을 많이 그렸다. 풍경 그림 중에는 집과 동네 골목 등을 담은 마을 소재의 그림들과 산과 들을 그린 풍경화가 있다. 그리고 박수근의 상징처럼 된 고목과 나무, 그리고 여인들을 함께 배치한 걸작들이 많다.
집과 마을 그림으로는 1953년 국전에서 특선한 [집(우물가)]과 [초가마을](1960년), [마을풍경](1960년대), [골목안](1950년대) 등이 손꼽힌다. 6.25를 겪은 피난민들은 [판잣집](1950년대), [판자촌](1960년대) 등의 그림을 보고 향수에 젖는다.
박수근, [고목과 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45×38cm
박수근은 ‘나무 화가’로 불릴 만큼 나무를 많이 그렸고, 특히 고목과 나목에 여인들을 배치한 풍경 그림들은 애호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나무 소재의 그림 중에서도 박완서의 소설 『나목』으로 유명해진 [고목과 여인](1964년)은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히며, 책 표지나 포스터에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이밖에 [나무와 여인]시리즈, [나무와 행인](1960년대), [귀가](1962년), [귀로](1959년)등도 정감을 안겨주는 작품들이다.
잎을 떨군 나무 사이나 고목 곁으로 함지를 인 여인들이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나무와 여인], [귀로]에서는 삶의 고단함보다는 옛날의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는 여인네 주변에 나무가 있음으로 해서 길이 암시되고 여인네들의 모습 또한 한결 정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박수근은 귀가하는 엄마의 손을 잡은 아이와 그 뒤를 쫓는 강아지까지 한 화면에 연출함으로써 소박하면서도 다감한 우리네 삶의 일상을 드라마처럼 보여주고 있다.
박수근은 고목이나 나목 외에도 나무를 많이 그렸는데, 잎이 그려진 나무는 몇 점 안되고, 앙상한 가지만 그린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두고 박수근 나무는 갈등의 시대를 상징한다느니, 헐벗은 생활의 표현이니 하는 해석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평자들의 주관일 뿐이다. 잎이 없는 나무나 고목은 박수근이 추구하는 조형적 요소이고 이야기(스토리텔링)을 담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겨울나무는 춥고 외롭지만 화가는 거기에 사람들을 배치함으로써 나무와 사람이 어우러지는 따스한 정경을 연출하고 있다.
일상의 정감이 묻어나는 박수근의 정물과 스케치
박수근의 정물 그림은 많지 않으나 인물이나 풍경에서 볼 수 없는 세밀한 묘사와 색채로 정감이 묻어난다. 생활 주변의 소재들을 연필과 수채로 그린 작품들을 다수 남겼다. 대표적인 정물 그림으로는 [감자](1952년), [굴비](1962년), [복숭아](1957년·고대박물관 소장) 등이 꼽힌다. 수채화로는 [청색 고무신], [책가방] 등이 눈길을 모은다.
박수근은 유화를 그리기 위한 밑그림도 다수 남겼다. 미술 용어로는 이를 데생 또는 소묘라고 하며, 선으로 대상의 형태를 표현하는 기술을 말한다. 드로잉, 스케치라는 용어도 함께 쓰는데, 특히 데생과 소묘는 그림의 기초가 되는 만큼 매우 중요하다.
박수근은 미술학교에서 가르치는 이 과정을 거치치 않았지만 혼자 미술 공부를 하던 시기에 습작을 많이 하며 기초를 다졌고, 창신동 시절에도 틈만 나면 딸의 몽당연필로 주변의 사물들을 간략한 선으로 그려내는 스케치와 데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유화로 그린 [노상](1960년대)의 밑그림이 된 똑같은 형태의 데생이 있고, 특히 나무를 그린 스케치들이 많다. 박수근의 그림들이 갈수록 높이 평가되고 사랑을 받는 이유는 독학임에도 불구하고 기초가 단단하고,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일구었기 때문이다.
안정적 구도가 많지만 상하 대칭도 시도
구도란 주어진 공간 안에 대상을 배치시키는 작업이다. 그림에서 위치뿐 아니라 모양, 색깔 등을 어떻게 짜임새 있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박수근은 형태를 탄력있게 묘사하는 솜씨도 뛰어나지만 특히 화면의 구도를 매우 짜임새 있고 세련되게 조화시키는 역량을 보이고 있다. 화가 김영주는 박수근의 화면에 대해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으면서도 꾸민 데가 보이지 않고, 여유 있는 배합에서 위치의 경영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의 성품처럼 화면의 내용은 겸손하고 다정스럽다”고 요점을 짚어냈다. 치밀하게 계산되었으면서도 꾸민 데가 보이지 않고, 겸손하고 다정스럽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박수근 예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박수근의 인물과 풍경의 구도를 분석해 보면 대체로 수직과 수평, 대각선, 좌우와 상하로 구분되는데, 전체적으로 동적이기 보다 안정적 구도 쪽으로 쏠리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구도는 화면을 위와 아래로 나누어 서로 다른 장면을 대비시킨 작품들이다. 1960년대에 집중적으로 그린 [농악] 시리즈는 다양한 구도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중에는 화면 위쪽과 아래쪽에 각기 다른 방향의 농악대를 배치해 율동감을 살린 작품도 있다.
국전에 추천작가로 출품했던 [소와 유동](1962년), [할아버지와 손자](1964년)도 화면 위쪽과 아래쪽에 주제나 인물을 배치시켜 보다 넓은 공간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대표작으로 꼽힌다.[소와 유동]은 위에 소를 배치하고 아래쪽에 네 명의 아이들이 둘러앉아 노는 모습을 담았는데, 영상의 한 장면 같은 연출의 효과를 보이고 있다.[할아버지와 손자]는 아래쪽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앉히고, 위쪽 공간에는 노상에 앉아 있는 남자들과 함지를 이고 귀가하는 여인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평면 그림임에도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주제와 구도, 선묘와 질감이 조활르 이우고 있어 박수근의 말년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박수근 그림의 특징은 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불 같은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쓰고 있다.”
생전의 박수근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전통 문양이 새겨진 기와 등을 수집해 여기에 먹물을 묻혀 찍어내는 탁본 작업도 많이 했다. 바탕 화면의 질감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는 화강암 지대다. 박수근이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양구에도 화강암이 많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박수근의 독창적 질감은 어려서 양구 일대서 접한 자연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우리 산하에서 몸에 익힌 화강암의 거친듯하면서도 소박한 재질과 토속적인 색채로 향토적인 친근감을 자아내는 박수근 화풍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박수근 그림의 질감을 내는 기법에 대해 아들 성남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캔버스 바탕에 기름을 섞지 않은 물감을 그대로 바른다. 바탕의 올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캔버스를 가로와 세로로 번갈아 가면서 10회 이상 칠한다. 십자 모양의 반복 작업을 통하여 우툴두툴한 질감을 얻는다. 물감이 마르면 요철의 커다란 덩어리는 긁어낸다. 그다음 암갈색의 표면 질감이 나타나면 그 위에 단순한 선묘의 직선으로 대상을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전체적 통일성과 분위기의 조화를 이루도록 마무리 손질을 한다.”
여러 번의 밑칠을 통해 바탕을 쌓아 올린 후 형태를 잡고, 다시 우둘투둘한 질감을 만들어 나가면서 전체적인 마무리를 한다는 설명이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64년
하드보드에 유채, 19.7×44.5cm
박수근은 독특한 화면 효과를 얻기 위해 흰색 물감을 많이 썼으며, 여기에 회색과 갈색을 섞은 회갈색 또는 황색과 갈색을 혼합한 황갈색 주조의 두터운 질감을 만들어냈다. 아들 박성남은 질감에서 배어 나오는 색깔을 서해안 갯벌색, 기왓장이나 토기의 고풍스런 색감, 나무의 찌든 색감에 비유했다. 햇살이 비치면 갯벌의 색깔과 분위기(아우라)가 변하듯 박수근의 그림도 보는 각도나 조명에 따라 아우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텁게 물감을 쌓아올려 거친 요철이 생기고 씨줄날줄의 열십자 터치가 흰색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꽃잎이나 눈송이 같은 효과를 살려낸다. 이 같은 화면에 굵은 선으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그려 넣으면, 마치 상감청자나 마애불처럼 표면을 파서 형태를 새겨 넣은 것처럼 보인다. 이 기법이 박수근 그림을 독창적으로 보이게 하는 비결이다.
“이 기법을 통하여 그가 얻어낸 예술적 효과는 마치 한국의 산천에 즐비한 화강암 암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바위에 새긴 불상)처럼 그 대상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거기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다만 거기에 묘사된 대상이 부처가 아니라 정직하고 순박하고 꾸밈없이 살아가는 서민의 모습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 평론가 유홍준
박수근의 그림 속 인물들은 움직임도 감정도 없는 목석인가
어떤 평자는 박수근이 그림 속 대상들을 부동의 형태로 고정시켰다고 말한다. 인물에 표정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박수근이 유화를 그리기 위해 대상을 스케치한 밑그림(데생)들은 움직임이 없는 평면 형태다.그러나 유화는 다르다. 두터운 질감 속에 형태를 새겨 넣어 오래된 벽화처럼 형태가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한참을 찾아야 대상을 떠올릴 수 있다. 처음 대하면 거칠고 단순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것도 정지된 상태로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박수근의 그림 속 인물들은 움직임도 감정도 없는 목석은 결코 아니다.
박수근, [시장],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5.8×37.2cm
박수근 작품 소장자인 존 릭은 박수근 그림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해요. 저는 그의 소박한 접근 방식이 좋아요. 박수근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지만 한참 보고 있으면 사람들의 소박한 표정을 상상할 수 있어요.”
평론가 최열도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조금 기다려 보면 어떤 소리가 흘러 나온다”고 했다. 단색의 평면화에서 입체적인 표정이 보이고 소리까지 들리는 것, 이것이 박수근 그림의 독창성이고 매력이다. 박수근의 그림을 주의 깊게 보면 인물이나 나무가 정지된 형태가 아니라 항상 움직임과 함께 이야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제가 그리는 그림은 색조에 대해서 큰 변화는 없으며 단색조로 그리는 그림이 많습니다. 혹 전체 화면을 살리기 위해서 약간의 색을 쓸 정도입니다.”
- 박수근
두터운 질감과 강렬한 직선, 회갈색의 화면 작업은 기교가 없는듯 하면서도 치밀한 세련성으로 충만되어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미의 원형질이라는 것이다. 많고 많은 화가 중 유독 박수근이 진정한 국민화가로 꼽히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이처럼 한국인의 소박한 모습을 통해 한 시대의 진실함을 담았기 때문이다. 우리 산하에서 흔히 접하는 화강암처럼 질박한 질감(마티에르) 속에 꾹꾹 눌러 새긴 박수근의 그림은 우리의 토속성과 정서가 배어있어 시공을 초월해 감동을 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수근의 작품 세계와 독창적 기법
[출처] 박수근의 작품 세계와 독창적 기법|작성자 물같이 바람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