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동북공정의 목적 그리고 대한호국회의 꿈
길림성(吉林省)은 요령성(遼寧省), 흑룡강성(黑龍江省)과 더불어 동북삼성(東北三省) 중의 하나다. 최근 중국정부가 동북삼성에 대한 개발을 추진하고 있긴 하지만 길림성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장강 유역의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낙후된 곳이다.
길림성의 동남 방향에 있는 집안현(集安縣)은 남으로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하고 있는 곳으로, 북한과 중국을 잇는 교통의 요지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릉과 장수왕릉, 호태왕비를 비롯한 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남아 있어서 한국의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는 곳이다.
“웬일이십니까, 어르신?”
책상 위에 쌓인 수십 권의 책들을 뒤적이며 노트에 무엇인가를 끄적이고 있던 육십 중반의 중늙은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짧게 깎은 머리는 흰머리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고, 보일 듯 말 듯 주름이 몇 줄 그어진 이마 아래엔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쓴 사람이었다.
“고생이 많네.”
어깨까지 내려온 눈이 부실 정도로 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노인은 중늙은이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주름이 없고 홍안이어서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운 노인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시립한 중늙은이를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백여 평은 됨직한 공간에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어서 언뜻 도서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책장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찾거나 찾아낸 자료들을 살펴보며 무엇인가를 찾아 기록하고 있었다. 그들 중 아무도 노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모두 바빠 보이는 모습이었다.
“진노제(秦老弟). 쉬면서 일하게. 그러다 쓰러지겠네.”
노인의 음성에는 안타까움과 걱정이 스며 있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진노제라 불린 중늙은이, 진국충(秦國忠)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아는 그였다.
그는 이제 오십칠 세의 나이었지만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먹어보였다.
“일이 많습니다. 저기 있는 연구원들 모두가 일주일에 반은 집에 가지 못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쉴 수는 없는 일이죠.”
“하아.”
진국충의 말을 들은 노인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진국충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엔 연민이 어려 있었다.
“이 일의 중요함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네에게 할 말이 없구먼. 그의 후예가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내 탓일세.”
어르신의 탓이 아닙니다. 누가 어르신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승리에 취해 방심했던 저희들의 잘못이죠.“
두 사람은 연구실을 나왔다.
그들이 나온 연구실은 삼천여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오 층 건물의 일 층에 있었다.
대지는 이 미터 정도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담과 건물 사이에는 잘 관리된 잔디가 깔려 있었다.
잔디밭은 넓어서 관상수들이 여기저기 심어지면 미관이 더 좋아질 법도 했다. 하지만 눈을 씻고 보아도 담 안에 심어진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잔디밭 사이로 난 소로를 걸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말없이 걷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곽 형님은 어떠십니까? 외상은 치료했지만 내상이 심하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 곽 아우의 왼쪽 어깨를 부순 권(拳)에 실린 기운이 그의 심장을 상하게 했네. 생명은 구했지만 내상이 완치되려면 한두 해는 필요할 듯하네.”
“천단무상진기는 여전히 무섭군요.”
진국충의 부드럽던 눈에 차가운 살기의 날이 서고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권을 펼친 자의 천단무상진기가 칠성(七成) 수준에 머물렀기에 망정이지 조금 더 진전되어 있었다면 우리는 곽 아우의 시신을 보아야 했을 걸세.”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해야 할 말이 있었으나 쉽사리 말문이 열리지 않는 듯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런 노인의 분위기에 오히려 곤란을 느낀 것은 진국충이었다.
“어르신, 그 아이들의 일은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슬픈 일이기는 하나 그들의 죽음으로 천외천부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지 않았습니까!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닙니다.”
“하아. 미안허이. 운아와 대위의 죽음이 너무나 마음 아프구먼.”
노인의 말에 진국충은 이를 악물었다. 슬픔과 분노가 그의 가슴속에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앞의 노인을 원망하지 않았다. 천수백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속에서 이런 일은 끝없이 반복되어 왔다.
진운과 진대위, 그의 두 아들은 민족을 위해 일하다가 죽었다. 그들에 앞서
천외천부와의 전쟁 속에 죽어간 수많은 조상들이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을 것이다.
“강 형님과 하 형님이 그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련님도 있지만 그분들만으로 그자들을 찾아내어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진국충의 말속엔 일말의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찬경이가 이룩한 조직이 아직 건재하네. 적의 정체가 천외천부의 후예들임이 분명하게 드러난 이상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네. 작은 나라니까. 하지만 만사불여튼튼이지. 한국에 장로 두 명과 무단(武團)의 아이 열 명을 더 보냈네. 강 아우와 하 아우 그리고 군아와 그들이 힘을 합한다면 그자들을 제거하는 데 무리는 없을 것이네.”
“장로 두 분을 더 말입니까?”
지난날 백두대전(白頭大戰)을 겪은 후 회에 남은 원로원의 장로는 모두 여덟 명이다. 곽병량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이상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장로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원로원의 장로들이 지닌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 중 넷이라면 그의 눈앞에 있는 당대 대한호국회의 회주(會主), 대륙무성(大陸武聖) 양천종(梁天宗)도 승리를 장담한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천외천부만 상대한다면 전력이 넘치지만 상대해야 하는 것은 그들 뿐만은 아니니까.
“은현진인(隱現眞人)을.
그렇네. 그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면 상대하기 정말 힘든 사람이지. 처음 강아우와 곽 아우를 보낸 것은 군아를 도와 그를 상대하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은 그뿐만 아니라 천외천부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일세.“
“장로님들 중 어느 분을 보내신 겁니까?”
자네 형과 주광 장로일세.
주 형님과 영충 형님을요? 영충 형님이 신중한 분이라는 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지만 이번 일에 보내시는 건 조금 걱정이 됩니다.
진국충의 말에 양천종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럴 분은 아니시라고 믿지만. 그분은 누구보다 운과 대위를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실까 우려가 됩니다.
진영충(秦永忠)은 진운과 진대위의 백부였다. 진국충의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국충의 말에 양천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진 장로는 지금 분노와 살기에 사로잡혀 있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냉철함을 흐리지는 않아.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지금 한국에 있는 강 아우일세.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 누군가 그를 제어해야 하는데. 함께 있는 하 아우와 이번에 보낸 주 아우는 강 아우를 제어하지 못해. 장로들 중 강 아우를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자네 형밖에 없네.
진국충은 양천종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그의 형 진영충만큼 무에 대한 재질을 타고나지 못한 탓에 원로원에 들지 못하고 대호국무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단의 현역에서 물러나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에는 그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백두대전에 참가했던 무단의 인물들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고 대부분 무공을 잃었다.
천부의 저력은 무서웠다. 그들은 무기력하게 쓰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진국충 또한 당시 천부와의 전투로 무공을 잃었다. 그의 외모가 나이에 비해 많이 늙어 보이는 것은 무공을 잃은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 이후 호국회의 힘은 아직 지난날의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백두대전 이전의 힘에 비한다면 절반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힘만으로도 호국회는 아시아의 정관계를 막후에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리고 그것은 천부가 사라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국충과 동년배이거나 그 선대의 사람들은 현재 각 국에 나가 있는 지회의
무력책임자들과는 달리 천적(天敵)인 천외천부와의 전쟁 중 친인을 잃는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슬픔과 분노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자네는 염려하지 말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우리가 하면 돼. 자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회의 누구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는 걸세. 자네가 하는 일이 생각처럼 마무리 지어진다면 후일 사람들은 자네를 사기의 기록자인 사마공에 비견되는 사람으로 기억할 걸세.
양천종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은 어느 사이엔가 걷혀 있었다.
진국충은 양천종의 말에 조금 어색한 듯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한국은 북한과 미국의 갈등 때문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실정일세. 그래서 그들은 당분간 자네가 진행하는 작업에 시비를 걸 수 없을 걸세. 이 상황이 유지될 때 자네의 작업이 마무리 지어져야해. 최근 남북한의 사학계와 일반인들 사이에 고조선부터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히는 기류가 일고 있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지 않나. 회를 만드셨던 조상님들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늘 기억하게. 자네의 일은 원로원의 장로들이 하는 일보다 백배 천배 더 중요해. 민족의 미래가 걸린 일일세.
혼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제 목숨을 걸고 이 일은 완수할 겁니다.
한마디씩 천천히 흘러나오는 진국충의 음성에선 굳은 각오가 느껴졌다.
양천종은 그런 진국충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빙긋 웃었다.
지난 날 조상님들은 저들에 관해 기록된 서적이나 유물을 눈에 띄는 대로 파괴했네. 하지만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전해지고 있어. 나 또한 문화대혁명 기간을 거치며 그나마 남아 있던 저들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고 생각했음에도 발굴되는 유물들이 적지 않네. 발굴된 저들의 유물과 유적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고는 있지만 지금은 지난날처럼 쉽게 그들의 흔적을 파괴할 수가 없네. 정보가 흐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조만간 남북한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남긴 것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본격화할 걸세. 그전에 자네의 작업은 마무리되어야 해.
양천종의 말은 무거웠다. 그의 민족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진국충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진국충은 대한호국회의 인물이었지만 외부로 알려진 신분은 전혀 달랐다. 그는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의 직속기관인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을 이끄는 책임자였다. 그리고 중국고대사연구의 전문가로 알려진 중국사학계의 석학이기도 했다.
그는 수년 전 청나라를 연 여진족의 영웅 아이신지로 누르하치를 한족출신으로 만드는 데 앞장선 사학자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였다.
게다가 그는 현재 내년 2월경 출범할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車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약칭 동북공정이라고 알려진 작업)을 중앙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양천종이 찾아온 곳은 그 작업의 연구실이었던 것이다.
어르신의 뜻은 당대에 실현될 겁니다. 앞으로 삼십 년이면 됩니다. 그 세월이면 역사 속의 동이는 우리 민족의 지방 정권으로 분명하게 자리 잡을 것이고, 그것은 누구도 뒤집을 수 없는 사실(史賞)이 될 것입니다.
말을 하는 진국충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서리고 있었다.
그래야 하네. 자네가 그 작업을 완료하기 전에 나는 자네에게 천외천부의 맥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보이겠네. 어차피 그 맥이 남아 있으면 후일 우리가 한반도를 예속시키려 할 때 남한 내에서 우리에게 호응할 자들이 발붙일 수 있는 곳이 없게 될 테니까. 그들을 지우는 것은 회의 운명이 걸린 일이기도 하고.
양천종은 손을 들어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진국충의 어깨를 대견하다는 듯
두드렸다.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따스한 가을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승미가 오성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한 지는 4년이 넘었다. 오성병원은 서울 잠실에 있는 병원으로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대형 병원이다.
야간 당직 중인 그녀는 볼 일이 급해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복도를 걷던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맞은편에서 장신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165센티인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사내는 검은 바지와 약간 헐렁한 검은색 티를 입고 있었는데 약간 마른 듯했지만 티셔츠 안의 완연한 근육이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듯 강인해 보였다.
그는 병원 안의 환자들처럼 창백한 안색인데다가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표정이 없어서 어딘지 무정해 보였다. 창백한 안색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이상형에 근접한 사내였다.
지금은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면회가 금지된 시간이고 사내의 발길이 향하는 중환자실은 면회시간 중이라도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곳이다.
그녀의 시선이 사내의 뒤를 쫓는 동안 사내는 중환자실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중환자실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저 문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지금은 면회를 할 수가 없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중환자실은 담당의사 선생님의 허락이 없으면 면회 자체가 안 되는데?
사내와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음성으로 말문을 연 이승미는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항한 사내의 시선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내는 무엇인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간호사에게 간단하게 말을 한 후 몸을 돌렸다. 그는 중환자실의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왔다. 그리고 위치를 확인했으니 더 이상 머물 이유는 없었다. 박송원을 보는 것은 조금 더 밤이 깊은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이승미는 사내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등을 돌리는 사내의 완강한 어깨 선이 그녀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사내의 모습이 복도를 돌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의 어깨가 늘어졌다.
어둠에 잠긴 오성병원의 본관 후미에 언뜻 사람의 신형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 층의 중환자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1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별관의 응급실에서 가끔씩 자동차 소리와 인기척이 들릴 뿐 병원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희미한 병원의 불빛에 드러난 한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것은 그가 내외상에서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내상은 완치되었고 외상도 거의 다 아물었다. 그가 입었던 상처의 중함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 회복속도였다.
그럼에도 그의 안색이 창백한 것은 해상 대전 당시 흘렸던 피의 양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그의 신형이 병원의 벽에 밀착하는 듯싶더니 거미처럼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벽을 기어오르는 속도는 일반인이 평지를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 더 빨랐다.
그래서 그가 중환자실의 창문 근처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3초
정도였다.
중환자실은 대략 50평 정도였고 줄지어 놓여 있는 40여 개의 병상과 그 위에 산소호흡기와 각종 생명 유지 장치를 몸에 부착한 환자들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을 뜨고 있거나 정신을 차리고 있는 환자들은 없었다. 이곳은 중환자실인 것이다.
중환자실 안을 둘러보던 한은 카운터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 두 명을 발견했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들은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한은 혀를 찼다 충실히 근무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덕분에 그의 일이 늘어났다.
한은 조심스럽게 창문에 손을 했다. 걸쇠를 걸어 놓지 않은 창문은 한의 손길을 따라 조용히 10여 센티 가량 밀려났다. 그는 열린 창문으로 오른손을 들이밀고 오른손가락 검지를 연속해서 두 번 퉁겼다.
카운터에 있던 간호사 두 명의 눈이 감기며 그녀들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한의 일선지력(一線指力)에 수혈(睡穴)을 격중 당한 것이다.
박송원이 누워 있는 병상 머리맡에 선 한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무서운 분노와 슬픔이 그의 부동심을 뒤흔들고 있었다.
박송원의 코에는 산소호흡기가 연결되어 있었고, 팔뚝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그 외에도 그는 한이 이름도 모르는 여러 가지 장치들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기계로 밀어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 그의 머리에는 수를 셀 수 없는 실밥이 아직 뽑히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대수술의 흔적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십여 일 전 마지막으로 한이 그를 만났을 때의 그 진중하면서도 패기 넘치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패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멈출까 두려울 정도로 가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박송원은 숨만 쉬고 있을 뿐 이미 반은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의사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박송원의 생명이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그의 가족들에게 통보한 상태이기도 했다.
한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박송원의 정수리, 백회혈에 장심(掌心)을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지독한!
박송원의 백회혈에서 손을 떼며 눈을 뜬 그의 입에서 저절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탄식 속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한은 박송원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상처가 심각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마 이곳의 의사들은 박송원의 상처가 교통사고로 인한 것이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송원이 교통사고로 입은 상처는 중하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인한 상처뿐이었다면 박송원은 이마의 찢어진 부분을 봉합하는 수술 정도만을 받고 퇴원했을 것이다. 그를 사신(死神)의 그늘로 걸어 들어가게 하고 있는 진짜 상처는 교통사고 후에 왔다.
박송원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가 뇌사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박송원은 하루 밤낮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오성병원의 뇌 전문의들은 박송원을 깨어나게 하는 데 실패했다. 그의 뇌사가 사고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박송원은 수술로 깨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를 뇌사에 빠뜨린 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무형의 기가 그의 뇌를 흐르고 있는 경락을 헤집어 뒤틀어 놓았다.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타인의 경락을 뒤틀 능력을 가진 자들 중 현직 국회의원이면서 한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자들은 단 한 부류밖에 없다.
대명회, 아니 이제는 대한호국회라고 불러야 하는 그자들뿐이었다.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할 분인데. 나 때문에 이렇게 쓰러지시다니.
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전신에 짙은 분노와 슬픔,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박송원은 개인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만한 경륜과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나라에 정말로 필요한 인재가 폐인이 된 것이다.
한은 박송원에 대한 테러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제문에게서 대한호국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들이 박송원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여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박송원과 만나지 않았다면 회는 박송원에 대한 테러를 이처럼 전격적으로 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해상 대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회가 어떤 생각으로 박송원을 테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회는 그에 대한 경각심이 예전에 비할 수 없이 커졌고, 그가 이 나라에서 공권력과 연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박송원의 테러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손을 쓴 자가 미숙한 것인가? 이 정도로 기를 운용할 수 있는 자가 이처럼 마무리를 제대로 짖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로군.
한은 의혹어린 눈으로 박송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박송원의 뇌를 흐르는 경락을 살펴본 후 그를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박송원의 뇌 경락은 막히고 끊어져 있었지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손을 쓴 자의 수준을 생각할 때 언뜻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는 생각을 멈추었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 박송원을 치료할 때였다.
한을 탄식하게 만든 것은 박송원의 뇌 경락이 아니라 그의 척추였다. 박송원의 척추는 흔히 엉치등뼈라고 부르는 바로 윗부분부터 경추(목뼈)에 이르는 곳까지 온전한 부분이 없었다. 가닥가닥 끊어져 있는데다가 어떤 부분은 뼈가 산산이 부서진 채 비어 있어서 쇠심을 박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박송원의 척추 상처는 수술을 하던 의사들도 이해하지 못한 상처였다. 뼈가 부러지고 끊어진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뼈의 일부가 가루가 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술을 맡았던 의사들도 그의 척추 부분은 손도 대지 못했다. 뼛가루를 몸 안에서 꺼내는 것이 그들이 한 수술의 전부였다.
그 때문에 한이 박송원의 뇌 경락을 치료한다 해도 박송원은 일어나 걸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으로서도 어떻게 손을 쓸 방도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능력이 초인적이라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부러진 것이 아니라 가루가 된 뼈를 무슨 재주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인가.
입을 굳게 다문 채 박송원을 내려다보던 한은 다시 손을 들어 박송원의 백회혈을 덮었다. 잠시 후 그의 손이 희미한 금빛 광채에 휩싸였다. 천단무상진기가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이 손을 거둔 것은 삼십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박송원은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한은 박송원의 숨결이 깊고 강해진 것을 느끼며 만족해했다. 박송원은 며칠 후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예전의 지적 능력을 온전히 갖고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뇌 경락의 손상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남은 것은 회복하고자 하는 박송원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었다.
한줄기 미풍이 몸을 스쳐가는 순간 정신을 차린 간호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환자실의 야간 당직자들은 절대 잠을 자면 안 된다. 이곳은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환자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신속하게 환자들을 살펴 본 그녀들은 그들에게서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며 웃은 그녀들은 다시 카운터 의자에 앉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두 사람이 동시에 삼십오 분 동안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리둥절해했지만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잠든 짧은 시간 동안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 있고, 그로인해 한 사람의 운명이 사신의 그늘을 빠져나왔다는 것을 그녀들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