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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 김득배 선생의 학맥과 학통
학맥과 순도殉道의 사표師表
난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목숨뿐만 아니라 한 줄의 글도 남길 틈도 주지 않고 학문의 숨통까지 송두리 채 앗아갔다. 선생의 학맥과 사유思惟를 찾아가는 한계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선생의 문맥文脈을 조명해 보겠다고 나서는 발상자체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어디엔가 잠자고 있을 문취文臭와 자료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학승學承이나 학맥學脈을 찾아나서 보기로 했다. 이 차적 자료를 통해서라도 묻혀있는 사유의 진면목을 찾아내야 한다는 불가피성에서다.
선생은 이미 10년간 공민왕의 시종신侍從臣으로 재원在元 중 그곳의 국내외 유학자들과의 교류는 물론 많은 전적典籍을 섭렵하게 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송.원대의 성리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깊이를 축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특히 호학열好學熱이 남달랐던 선생에게 전객典客직분이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을 접촉할 수 있는 촉매역할에 일조를 했을 게 틀림없다. 거기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이 원경에 만권당萬卷堂(일종의 講學所로 1314년 설립)을 차리고 원나라의 저명한 유학자들을 초빙하거나 국내의 학자들을 불러들여 학문을 즐겼던 전통이 남아있는 만큼, 학문의 성숙도를 높일 수 있는 분위기가 호학에 도움이 됐으리라 본다.
또 분위기뿐만 아니라 김득배의 학문인맥을 보더라도 감지되는 면이 적지 않다. 김득배의 은문恩門 안문개는 한국 성리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안향安珦(1243-1306)의 재종질再從姪이 되는 사람이니 부모와 자식관계 같았던 당시 좌주座主와 문생門生간의 사문師門관행으로 미루어보건대 어떤 식으로 든 은문을 통해 나름대로의 문취文臭를 접했으리라 본다.
여기서 잠시 난계의 학맥을 더듬어보면, 안향이 연경에서 『주자전서』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온 시기가 충렬왕 16년인 1290년경으로, 이후 그의 문맥을 이어 여러 후학들이 주자학 보급에 나서게 되는데, 그 중에 특히 주역에 밝았던 우탁禹倬(易東.1262-1342)의 문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동의 학문적 특색이 난계에 문사文思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난계는 합리적이고 겸양이 몸에 밴 인물로 성격이 과묵하고 신중해서 잘 나서지 않는 편이지만, 어려운 때를 만나면 호방하고 담대한 기상이 일어 전진戰陣도 피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목숨같이 중하게 여겨왔다.
이러한 기질로 해서 치로治路중 숫한 시선猜線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안녕을 지향하고 올바른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이상적인 인간세상을 만들어가고자 신선한 사고로 양차에 걸친 공민왕의 정치개혁에 과감히 참여하게 되었고, 두 차례의 홍건적 침입 시에도 군마를 몰아 전진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색깔이 분명한 이런 개성은 우탁의 문취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난계는 조일신의 모함으로 한동안 낙향해 있을 때도 선이 굵직굵직하고 강건한 역동학에 매료되어 우탁의 사향思鄕격인 예안을 찾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된다.
난계의 학맥과 학통
▣우탁의 재전再傳사문師門
『상산김씨삼원수파세보商山金氏三元帥派世譜』와『상산김씨선적지商山金氏先跡誌』및 신현의『화해사전華海師全』에 따르면 김득배는 신현申賢(1298-1377・호 不諼齊)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역동선생실기易東先生實記』,『화해사전』및 고려의 두문동杜門洞출신 범세동笵世東의『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에 의하면 신현은 우탁의 문인으로 역동이 타계하자 그의 학문을 집성集成하여 후세에 전한 사람으로 되어있다. 다시 간추리면 신현이 우탁의 학문을 정리하여 김득배에게도 전수傳授하였다는 말이 된다.
여기엔 역동의 유고정리遺稿整理사업을 비롯한 역동학의 전수임무가 신현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 것으로 보이고, 또 그로인해 신현이 역동의 제자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 하게 됨으로써 우탁-신현-김득배라는 문사구도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다. 이런 견해엔 역동학에 관심이 많은 안동대 쪽에서도 공감하는 분위기다.
“역동이…신현을 사랑하여 집성한바 책자를 가져다가 남김없이 신문정申文貞(申賢)에게 부쳐주고 붓을 대 첨삭하고 교정을 보게 하였다. 문정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지극히 정밀함을 더하여 완성시켜서는 뒤에 모두『문정집文貞輯』에 넣어 책으로 만들었더니…”
라는 신현의 기록을 인용(우탁선생의 사상. 안동대 윤천근 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화해서전』이 위서僞書의 허물에서 아직까지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나, 그간 전해 내려오는 우탁과 신현 주변의 고사나 일화들을 후대에 수집해 정리 편집 해 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통해 난계의 사문관계를 풀어보고자 한다.
대저 이 책은 철종3년(1852) 호서湖西의 공 씨가孔氏家에서 나왔다하는데, 범세동이 짓고 원천석이 편집하였으며, 1920년 초간인쇄를 거쳐 1932년 중간인쇄 한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는 고려 말의 유학계통의 현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와 자료들이 많이 수록되어있으며, 특히 이 책의 부록「동방사문연원록東方斯文淵源錄」에서 도학의 연원과 도통을 기술하고 있고, 같은 부록 「화해사전제자안華海師全諸者案」에는 229명의 방대한 관련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제자 안에 신현과 김득배 그리고 정몽주의 관계가 자세히 나오므로 이를 근거로 난계의 학문연원을 둘러보고자 한다.
김득배와 신현
신현의 연보를 보면 그는 재원在元 중 역동이 타계하자 귀국하여 아예 우탁이 머물던 예안으로 이사하고 스승의 집을 돌보며 후학교육에 전념하다가, 다시 한 번 원경을 찾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와 같은 기록과 정황을 살피건대 난계와 신현 간에 인연이 닿았을 가능성은 김득배의 재원 중과 귀국 후로 나누어 두 번의 만남을 예상할 수 있다.
먼저 난계가 전객부령으로 원에 들어간 해(1341)부터 역동이 타계(1342)하면서 신현이 원경에서 귀국하는 사이(1341-1342) 1년간과, 신현이 두 번째로 입원(1349년)하였다가 공민왕 3년(1354)에 귀국하는 전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난계가 원경에 10년간 머물던 시기(1341-1351)에 신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입원이 있었으니까(1341-1342, 1349-1351)양차에 걸쳐 약 3년간의 교유가 가능해진다는 계산이 선다. 결코 짧지 않은 이 기간에 신현이 원경에 들어와 머물고 있었다면 왕이 될 사람의 의전儀典을 맡아보고 있는 김득배와 어떤 식으로든 인적, 학문적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한다.
그 가능성은 고려 쪽의 성리학 수용과정을 보더라도 분명해 진다. 이시기는 신학문에 대한 고려인들의 욕구와 열기가 대단해서 입원入元길이 하나의 수련 과정처럼 되어있어서 숫한 고려의 문한文翰들이 다투어 원나라를 드나들던 때인데다가, 원나라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곳에 머물고 있는 고려정부의 세자나 그 수종신隨從臣들을 방문,알현하는 게 의례화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다음 국내에서의 만남은 김득배가 조일신의 간계로 한때 고향에 낙향해 있었고(1352-1356), 신현은 예안에 머물러 있던 시기다. 이때도 약 2년의 기간(1354-1356)을 예상할 수 있다.
이당시 난계의 낙향과정을 볼 것 같으면, 선생은 송도의 천박한 정치행태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비루함이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선영先塋을 가꾸는 일로 낙을 삼으며 선비의 도를 온전히 기르고 학문을 닦는 일에 전념하려고 고향에 머무르고자했다. 고향에 이르자 마침 원나라에서 오랜 관직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용궁龍宮땅을 지키고 있던 고향연배 전원발全元發(1288-1358・菊坡)선생을 찾아뵙게 되었는데 국파도 낙향하는 후학을 ‘지친 새’에 비유하며 반겨 맞아주었다(菊坡實記).
지친 새 돌아오누나/ 倦鳥歸(龍宮閑居 金蘭溪得培寄詩次其韻ㆍ용궁에 한거할 때 난계 김득배가 시를 부쳐와 그 시에 차운함)
강 넓어 큰 물고기 마음 것 놀고/ 江闊脩鱗縱
숲 깊어 지친 새 돌아오누나./ 林深倦鳥歸
전원으로 돌아옴이 내 뜻이지만/ 歸田乃吾志
진작 기미를 알아서는 아니었네./ 非是早知機
용궁의 청원정
선생이 전원발을 만나러 자주 들른 청원정. 이 자리에 같이 어울렸다는이제현도 실은 난계와 1차 정치개혁을 주관하다가 조일신의 시기를 받아 비슷한 시기에 낙향한 처지였다.
이 시에서 ‘기미를 알아서[知機]’란 말은 조일신의 모함사건을 두고 한 말인데, 그만큼 사건이 갖는 사회적파장이 컸음을 의미한다. 전월발 자신이 원나라에 있을 적부터 김득배와 조일신 등 고려의 수종신들과 두루 교류한 일이 있지만, 조일신이 그 같이 엄청난 계교를 꾸며낼 줄은 미처 그 낌새조차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시대의 인물 이만인李晩寅도 이 시를 두고 “…국파가 당시의 일을 보니 근심스럽고 간신이 흉포하게 역행함을 보고는 뜻이 없어졌다. 현의 서쪽 성화천省火川 동쪽 언덕에 암대岩臺가 그윽하고도 깊숙한데다가 청원정淸遠亭을 짓고,…”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이 당시 난계가 국파에게 보냈다는 시의 원문은 전하지 않는다.
난계 선생 상주유적지 점선ㅇ표는 생거지로 문경시 점촌읍 흥덕동 깃골 이고, 점선ㅁ표는 유학처 안동 예안 땅이다. 낙향지 용궁에서 학구學究 차 낙동강 물길을 따라 예안을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난계는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는 국파가 반가웠던지 소를 타고 성화천가의 청원정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 당시 국파는 66세, 난계는 42세였으니 ‘찾아뵈었다’는 말이 더 옳은 표현일성 싶다. 이즈음 청원정에서 전원발 뿐만 아니라 이제현, 김구용金九容과도 도의교道義交를 함께 나눈 것으로 국파실기에 나와 있는데, 청원정을 동쪽으로 돌아들면 큼지막한 암대에 김구용이 남겼다는 ‘청원정淸遠亭’이라는 음각 친필을 만날 수 있다. 이즈음 김구용이 남긴 글이 있다.
들에 있는 장원/ 野莊
문을 닫아 소인배와 접촉을 끊고/ 閉門終不接庸流
다만 푸른 산만 내 누각에 들기를 허락하네./ 只許靑山入我樓
편하고 즐거우면 시를 읊조리며 졸리면 잠을 자지/ 樂便吟哦慵便睡
이 밖의 일로 마음에 오를 것은 없네./ 更無餘事到心頭
두 분의 이 같은 깊은 정의는 국파가 난계의 부친 김록과 원나라 제과
制科에 동방으로 합격한 12인 중의 한 사람인데다가, 그의 어머니가 김득배의 문중사람(상주김씨)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까웠을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난계는 고향에서 여러 유현儒賢들과 교유 하며 오직 자연으로부터 품수 받은 심성을 함양하며 심오한 하늘과 인간의 이치를 궁구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으려 했다. 더불어 이때 틈을 내 우탁의 사향思鄕을 찾게 되었는데 편리한 물길이 예안을 찾는 일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보인다. 하지만 역동은 이미 9년 전에 타계한 후였고 그 자리를 신현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면 당시 난계가 안동에서 학문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어떠했으며, 또 안동 행적이 가늠될 수 있는가.
당시 고려에서 학문하는 양대 산맥은 입원유학入元留學과 개경이나 안동수학安東修學이다. 고려의 유수한 유학자들이 대부분 원경으로 들어가 신학문을 수용해 다가, 귀국 후 개경이나 안동으로 내려와 후학들을 길러내는 것이 정석처럼 되어있었다. 그래서 고려의 문향文鄕이나 다름없는 안동을 찾아 원근을 가리지 않고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난계 역시 지호지간指呼之間이라 할 수 있는 근거리에 머물고 있었으니 어찌 역동학易東學을 심접深接하러 가는 길을 마다했겠는가.
마침 난계가 안동에 머문 심증들이 행적에서도 간간히 드러나고 있다. 뒷날 2차 홍건적 침입 때 개경 수복전收復戰에서 선생이 기용한 주요 인사들은 거개가 이 당시 안동 길에서 만난 인연들로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선봉장을 맡았던 권희, 유격장 박강, 박구, 작전참모 임박 등이 다 안동에서 만난사람들이다. 앞서 언급했듯 문생 정몽주나 이색도 안동에 연고가 있던 사람들이고, 심지어 선생의 사위 조운흘도 이 시기 안동에 머물다가 연줄이 닿게 된 사람이다. 조운흘은 김득배가 안동을 떠난 이듬해(공민왕6년․1357) 이인복 문인으로 급제하여 안동서기가 된바 있다.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기록도 있다.『화해사전』의 부록인「화해사전제자안」에 따르면, 역동의 문인이 신현 이고, 신현의 문인이 김득배이며, 김득배의 문인이 정몽주라고 언급함으로써 우탁-신현-김득배-정몽주로 이어지는 유맥儒脈을 형성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화해사전제자문답華海師全諸者問答」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신현이 김득배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문하에 길러서 훌륭한 재목이 될 사람이 많다. 내가 보건대 정몽주는 스승 되는 그대보다 못하지 않도다.”
하자, 김득배가,
“정몽주는 가장 학문을 좋아 합니다. 나이는 가장 어리나 제가 두렵게 생각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난계가 정몽주에게 이르기를,
“신현 선생이 그대를 기리기가 이와 같으니 지금부터 그대가 질책임이 대단히 무겁도다.”
하니,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제가 일찍부터 선생님(김득배)의 교도敎導를 받아 여기에 이르도록 이끌어주신 것은 모두 선생님이 내린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김득배가 말하기를,
“신(신현) 선생의 경연經筵이 멀도다. 그대 나이가 적어서 항상 뫼시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나 그대가 이제 장성하였으니 멀지 않아 힘써 가르침을 받으면 그대의 기량이 어찌 한계가 있으리오.”
하니, 정몽주가,
“삼가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하였다.
이상은 신현과 김득배와 정몽주 간의 대화내용을 간추린 것으로 세 분의 사맥師脈에 긍정적 신념을 갖게 해주는 부분이다.
난계는 역동의 재전사문이었던 것이다.
▣역동학을 품수稟受
우탁은 일찍이 재임시절 가는 곳 마다 미신타파와 음예한 풍속을 개혁하거나 지나친 불사佛事를 제거하는 등 편불운동片佛運動에 앞장섰던 분이다. 46세 때는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으면서 충선왕이 부왕父王의 후궁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범간犯奸하는 패륜을 자행하자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며 ‘지부상持斧上疏’를 올렸다는 고사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충의와 절개가 넘치는 역동의 이 지부상소에 군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고, 근신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이 당시 김득배도 예문검열신분으로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우탁의 절기絶氣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역동에 대한 난계의 느낌이 크게 들어왔으리라 본다. 이 지부상소를 계기로 우탁은 벼슬을 포기하고 단양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 뒤 다시 성균관 좨주祭酒를 지내는 등 벼슬길에 있으면서 천도天道와 인륜을 밝히고 폐풍을 개선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예안으로 내려와 학문에 열정을 바친바 있다.
이 같은 우탁의 행동철학은 이천역伊川易(程頣易)의 영향을 받아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천을 중요시한 점이다.
천지의 영원한 생성生成을 중시하고 양강陽强한 기운을 좋아하며 곤坤(地)보다 건乾(天)을 높이고 음陰보다 양陽을 우위에 두고, 생기生機 발랄한 대부大夫의 분위기를 사랑한 측면이 있다. 즉 양의 성질을 도덕적으로 원용, 그것을 군자의 강건한 덕으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양의 본질을 군자로움으로 보고 대훈大訓으로 삼아 인간 세의 가치목표로 설정하였다. 또 의리지역義理之易의 대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입장이므로 단지 이론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한 특징이 있다. 이러한 강건한 의리실천이 우탁 학문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그의 문하들도 다분히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문색을 띠게 되어 이학理學보다는 도학道學에 무게가 실려 있는 편이다.
때문에 궁리진성窮理盡性 보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과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면이 강한데, 상주.문경.예천.영주.풍기 등 소백산맥을 따라 사는 영하읍嶺下邑 사람들의 특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지역 출신들은 대체로 호방하고 담략膽略이 있을 뿐 아니라 말 타고 활 쏘는 일에도 능해 국난을 만나면 전진戰陣도 피하지 않았다.
우탁의 유허비(위)와 역동서원(아래)
유허비는안동시 와룡면오천리에 있으며,역동서원은안동대학구내에 있는데 안동 땜 조성시수몰지구로부터 옮겨온 것이다. 때문인지 안동대에서 우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고 많은 관련논문의 출간은 물론 우탁의 선양사업에도 적극적이다.
경북 북부의 강건, 웅장한 산맥을 따라 형성된 이 같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취향과 기질은 이지역이 갖고 있는 지리적 자연환경이나 후삼국 통일전쟁을 치러낸 이 고장의 역사성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일 뿐만 아니라, 역동학에 영향 받은 바도 크다 하겠다.
지조와 대의大義를 목숨같이 여기고 지켜낸 이 고장 충의정신은 이 지역 문사文士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난계의 충의순사忠義殉死한 내면세계 역시 이 같은 역동학의 문색에서 영향 받은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공민왕 초기 양차에 걸친 난계의 정치개혁참여나, 또한 홍건적의 침입으로 두 번이나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 붓 대신 창검을 바꿔 잡고 삼군三軍을 거느린 창의倡義도 이 같은 역동학의 실사實事와 기백氣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봐야한다. 군왕에 대한 충절보다는 생민生民을 더 중시한 충의였던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고려 말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들이 그 충의를 시기하여 물 떼처럼 밀려들어 선생의 목숨마저 앗아갔다. 그 희생은 용어만큼이나 모질고 엄혹해서 효수梟首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선생의 희생을 두고 “꺼져가는 고려를 일으켜 회천대업回天大業 하려는
정경대도政經大道요 대의명분大義名分 이었다(경북대 문경현 교수).”라는 만만치 않은 후세의 평가가도 있다.
그것은 역동사상의 정맥正脈을 회통하는 순도였던 것이다
순도의 사표
그런데 정몽주는 자신의 순절殉節의미를 은문恩門의 죽음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은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지내면서 그 억울한 죽음을 제문祭文을 통해 피눈물로 하늘에 거듭 묻고 그 ‘충혼장백忠魂壯魄’이 영원히 생생하게 살아서 ‘정의의 실현을 기다릴 것’ 이라며 스스로 정의는 현실과 역사를 통해 실현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밝힌바 있다.
그러나 정몽주가 그 토록 그의 제문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겠다고 다짐하고 정열을 쏟았건만 모순의 짙은 그림자는 점점 고려를 조여들어오고 있었다. 그를 찾아온 운명은 스승이 겪었던 바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쩌지 못하는 모순을 절감한 그는 다시 한 번 정의의 실현을 역사 앞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그 길은 난계가 그랬듯 포은 역시 순도를 택했다. 그 불씨를 그의 사표인 난계에게서 얻은 것이다.
고려 유학의 산실 개성의 성균관.
포은의 순도는 너무 잘 알려져 있듯 사서육경四書六經, 아니 몇 만 마디의 말, 몇 만 줄의 글보다도 더 강한 활화산이 되어 조선 500년의 유교를 대활大活 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유교의 보편적 바탕은 윤리이지만 그 강상綱常을 지켜내는 데는 종교 못지않은 사명과 순도감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유혹과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정신력이 절대적이다.
고려의 과거제도
포은의 사표였던 난계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있으면서 정몽주의 과거시험을 맡아 본 지공거였다. 정몽주는 지공거가 출제한 홍건적대처법4)을 잘 써서 장원급제했다. 정당문학 자리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추급宰樞級으로 학자적 학덕과 품성을 지녔던 인물로 채워졌던 관계로 특히 지공거를 많이 겸임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과거에 급제하면 지공거를 ‘좌주座主’ 라 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문생門生’ 으로 자처하였다.
급제한 다음날 근정전勤政殿에서 과거급제의식을 거행하고, 그 이튿날 예궐詣闕하여 임금께 사은謝恩하고, 다시 다음날 문묘文廟를 참배 알성謁聖하는 절차를 밟았으며, 이러한 절차를 마친 뒤 거리행차까지 여는 학풍이 있었다.
천동天童이 말을 탄 급제자들을 인도하고 악수樂手가 음악을 울리며, 광대가 춤추고 재인才人이 온갖 재주를 부리며 길을 누볐던 것이다.
마침 정몽주의 과거급제의식 방방의放榜儀가 열리는 것을 보고 이색이 반긴 글이 있다.
동당시東堂試의 방방放榜에 대하여 읊다(김득배.한방신 두 만호가 주사가 되었다)
동도에서 방방한 걸 전에도 들은 듯한데/ 東都放傍似前聞
학사의 영화로움이 다시 무리에 뛰어났네./ 學士榮華更絶倫
옥띠와 동호부銅虎符(범形象의 銅 信標)는 백일하에 빛나고/ 玉帶虎符輝白日
고운 꽃 비취색 양산은 향 먼지를 일으키네./ 羅花翠蓋動香塵
용구龍駒(뛰어난 사람)는 그림자가 없다고 다들 말하거니와/ 龍駒摠說無留影
고기 눈이 어찌 구슬에 섞일 수 있으랴./ 魚目何從得混珍
이로부터 유풍이 응당 크게 떨칠 터이니/ 此去儒風應大振
한 문하생의 도리桃李(賢士)는 그 몇 번이나 봄일런고./ 一門桃李幾番春
방방의를 마친 급제자들은 곧바로 지공거를 찾아뵙고 지도받기를 자청하는 게 관례였다.
살피건대 방방행사는 지공거와 급제자 간에 맺어지는 일종의 사제관계의례라고도 볼 수 있으므로, 이렇게 일단 사제관계가 성립되면 학문적 입장은 물론 정치적 거취까지 함께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성리학이 유입 될 초기에는 직접 모시고 배운 사사師事는 물론, 풍문을 듣고 흠모하거나 저술을 읽거나 또는 사표적師表的 행적을 본받는 등 간접적으로 받는 사숙私淑을 통해서 학문적 견해를 같이 했다면, 그들은 넓은 의미의 사제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으로 스승의 예를 갖추는 것이 관행이요 규범이었다.
▣직접 사문인가
난계와 포은의 사승師承이 직접사문인가, 아닌가하는 문제는 기록이 없는데다가 정몽주 문중에선 정몽주의 자득自得을 피력하고 있어서 줄곧 논란의 대상이 돼왔으므로 이 문제를 풀려면 그 가능성을 찾아나서는 수밖에 없다.
우선 정몽주는 ‘흥국사에서 공부했다[昔曰讀書興國寺]’ 는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 다소 논란이 되는 점은 흥국사의 위치인데, 흥국사는 안동의 천등산天燈山에 있는 개목사開目寺의 옛 명칭이라는 설(安東誌)이 있는가하면, 풍양면豊壤面 삼강리三江里에 있었던 흥국사라는 설(禮泉郡誌)이 양립하고 있다.
안동의 개목사
안동시 臺庄洞 天燈山 해발500m 자락에 있다. 1984년 지방 儒人 金濟柄 외 여러 사람이 선생의‘昔日讀書興國寺’란 시를 특별히 上峰古事되어 있음에 경탄하고 뜻을 모아현판을 단 것이라는 추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당시 정몽주가 이곳에서 공부한 일을 회고하며 남긴 자작시가 개목사에 남아있다는 점이다.
옛날 흥국사에서 글을 읽어서인지/ 昔曰讀書興國寺
때때로 꿈속에서 청산 가네./ 時時夜夢桃靑山
옛적 친하던 주지승 생각 간절하니/ 舊交最憶堂頭老
틈내어 나를 위해 한번 다녀가구려./ 爲我乘還一往還.
삼강서원 위패 묘
정몽주가 삼강리 흥국사에서 공부한 사실을 기념해 후손들이세운 삼강서원이 대원군 때 훼절되면서 서원에 모셨던정몽주․이황․유성룡의 위패를 묻은 위패 묘다.
삼강리 또한 옛 서당과 학풍의 멋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어느 곳도 직접사승의 끈을 배제하기엔 선 듯 내키지 않는 입장이다. 정몽주가 이 동네 흥국사에서 공부한 사실을 기념해 그의 후손들이 세운 삼강서원三江書院(1643년 건립했다 대원군 때 훼절.흥국사지는 풍양면 망우리 서북쪽 흥국재 동면 삼강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고 정몽주가 소시少時에 이 절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 예천군지 1988간행)이 대원군 때 훼절되면서 서원 터에 조성한 위패 묘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동네를 돌아보면 그 옛날 학문을 했음직한 향호鄕豪들의 저택이 아직도 즐비할 뿐만 아니라 문중의 서재도 잘 관리된 채 건재 하고 있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예사롭지 않음으로 해서 당시의 향학의 열기를 피부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볍게 보아 넘길 분위가가 아니다. 조선의 마지막 주막이 남아있는 ‘삼강리’ 바로 그 동네다.
그렇다면 안동의 흥국사와 삼강리의 흥국사 중 어느 쪽에 진실이 있을까. 두 곳의 기록을 놓고 보면 안동이나, 풍양이나 양쪽 다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개목사는 난계가 역동의 학문을 품수 차 예안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에서, 삼강리 흥국사는 난계가 조일신의 모함을 받고 4년 넘게 낙향해 있던 곳 바로 강 건너라는 점에서다.
이상이 정몽주의 소시적少時的 일이라면, 다음 급제 후 은문 길은 장성한 후의 사승길이 되겠다.
정몽주는 공민왕 6년(1357) 김득배와 동방同榜인 어사대부 신군평申君平(?-?.신현의형으로 우탁의 문인)을 지공거로 하여 국자감시에, 공민왕 9년(1360)에는 김득배를 지공거로 하여 동당시에 각각 급제한바 있다. 국자감시든 동당시든 과거에 합격하면 극진한 예로 은문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 같은 관례는 앞서도 언급됐듯 고려가 귀족사회 성격이 강해서 가문.지연.혈연.학연 등의 인맥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좌주-문생’관계는 ‘부모-자식’간의 관계와 같아서 문생의 정치적 진로는 좌주의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되고 있었기에 문생들이 좌주로부터 사사師事를받는 게 관례화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관례로 해서 정몽주가 급제 후 은문을 찾아 사사받았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는 입장이다.
더욱이 정몽주의 급제문장이 잘되어 김득배가 “이런 재주라면 소년등과도 넉넉할 터인데…” 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그를 불러 물으니 포은이 “아버지의 3년 시묘사리를 하느라고 과거응시를 늦췄습니다.” 라고 하자, 난계가 정몽주의 인간미에 감탄하였다는 대화내용[臨皐書院記.華海師全]이 있는 것을 보면, 은문사사恩門師事의 가능성이 짙다.
그 외에 다른 정황들도 있다. 정몽주가 역학에 정통하였던 것도 우탁-신현-김득배-정몽주로 이어지는 학맥영향 때문이라 보이는데다가, 공민왕 16년(1367)에 정몽주가 주동이 되어서 우탁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祖宗으로 받들 것을 상소하여 ‘문희文僖’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고 있음을 볼 때, 포은의 학문연원은 역동으로부터 시원 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앞서『화해사전』에서 언급한 역동-신현-김득배-정몽주라는 사승관계를 확인해주는 고리가 된다고 본다.
▣사도士道의 사표
포은이 난계의 제문을 통해 ‘충의순명忠義順命을 사표로 삼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겨놓은 바 있다.
비록 유교가 종교는 아니더라도 종교 못지않은 사명감과 순도관이 있으니 바로 조선유교가 정몽주를 사표로 삼는 선비정신이 그것이다. 이 정신은 유림들을 떨쳐 일어나게 해 완고한 사내들을 부끄럽게 하였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열어주었다. 조선 유학의 교두보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중국의 도통道通은 주로 학문적 계승에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조선의 도통은 학문보다는 절의節義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왔다. 이 점을 감안하면 난계는 조선 도통의 최 상층부에 있으면서 조선조 사도의 밑그림을 제시한 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난계 문생들의 기개와 선비문화
난계 문생들의 기개와 선비문화
난계의 문생으로는 을과乙科에 장원한 정몽주를 비롯하여, 임박林樸, 백군영白君瑛 등 3인이고, 병과丙科에 든 사람으로는 신인보申仁甫, 김주金輳, 김질金質, 문익점文益漸, 박계양朴啓陽, 이준李蹲, 김군정金君鼎 등 7인이며, 동진사同進士로 합격된 사람으로는 송윤경宋允卿, 이인민李仁敏, 이자용李子庸, 김린金麟, 정천린鄭天驎, 허진許璡, 김희金禧, 이존오李存吾, 서균형徐鈞衡, 유원柳源, 이인범李仁範, 곽추郭樞, 윤덕린尹德獜, 김승원金承遠, 이사위李士渭, 김경생金慶生, 김석해金石諧, 황원철黃元哲, 이을년李乙年, 유순柳珣등 20명이다.
이들은 출사 후 교관직敎官職을 맡아 성리학 보급에 기여하는가 하면 고시관 또는 대사성을 맡기도 하는 등, 고려가 망하고서도 조선조사회 학맥개창에 선도적 역할을 한 이들이 많다. 또 상당수는 조선조 개창에 즈음하여 불사이조不事二朝의 충렬정신으로 기개와 절개를 지켜냈으며, 한편으론 근검 청렴하여 고려와 조선사회 선비문화에 큰 골격을 남긴 일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정몽주는 포항시 오천 출신으로 9세 때 영천으로 옮겨 살았고, 성장하여 안동으로 유학, 김득배와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의 문색은 난계를 닮아 과거시험답안지에서 보듯 ‘홍건적 대처방안’을 잘 써서 장원급제 하였고, 급제 후에도 병술에 밝아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를 따라 종사관으로 자주 출전할 정도였다.
정몽주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학궁이건 왕궁이건, 국내건 국외건, 평시건 전시건, 때와 장소, 경중을 가리지 않고 다방면에서 신진사대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면서 정치개혁에 신선한 충격을 주어왔다.
하지만 뒤에 이성계의 역성개창易姓開倉에 반대, 고려에 충절을 지키려다 불의의 죽음을 맞았다. 그렇지만 조선왕조 건국 후 유교적인 윤리관을 지켜낸 인물로 높이 평가되었고 그를 죽인 이방원도 왕위(태종)에 오르자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 뒤에 문묘에 배향하기까지 하였다. 조선왕조 개창에 그의 목이 필요했지만 역설적으로 왕조기반을 다지기 위해선 그의 충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포은은 포항에 오천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16개서원에 배향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은 조선왕조에서 명문으로 크게 대접받았다.
나란히 한 사표 ‘문충’이라는 같은 시호를 받고 고려 숭의전배신청에 나란히 모셔진 김득배와 정몽주의 위패
임박은 안동의 길안현 사람으로 병략에 밝아 2차 홍건적 침입 시 김득배가 도병마사로 출전하자 스승을 따라 개성참군開城參軍으로 참전, 개경수복전 기획에 참여한 핵심 참모였다. 그뿐이 아니라 절개가 굳어, 공민왕을 폐하려는 원나라의 사주를 받고 덕흥군德興君이 몽고군을 이끌고 고려로 출동할 때, 마침 사신 길의 임박과 조우하게 된 덕흥군이 그에게 “협조하면 큰 벼슬을 주겠노라.”고 꾀었으나 “신이 만일 덕흥군을 따른다면 이는 부인이 지아비를 배반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죽을 지언 정 맹세코 따르지 않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기개가 있었다.
청렴하기도 예사롭지가 않다. 제주선무사濟州宣撫使로 나가서는 선임 선무사들이 탐욕이 많고 포악해서 백성들을 괴롭혔으므로 목호牧胡와 백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으나, 임박은 털끝하나도 백성들에게 취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국가의 관리가 모두 임 선무사 같다면 우리들이 어찌 배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돌아와 성균관 좨주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성균관을 중건 하고 교육을 중흥하는 등 교육개혁에 이색.정몽주와 더불어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한때 신돈의 개혁정치에 관여했다가 ‘신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 하여 원망을 듣기도 한 그는 박상충.정도전과 더불어 반원정치를 추구하다가 친원세력 지윤에게 밉보여 서인으로 강등되어 길안과 무안등지로 유배되는 도중 살해당하였으니 그의 나이 스승과 꼭 같은 50이었다. 정몽주.문익점.이존오와 가까이 지냈고 정도전.박상충과도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였다.
이인민(1310-?)은 성주星州사람으로 이조년의 손자가 된다. 이인복과 우왕 때 권신이었던 이인임은 그의 형이다. 그러니까 그는 은문 김득배의 처 서흥김씨에게 외 6촌이 된다. 우왕 때 동지공거로 우현보禹玄寶.김한로金漢老.이방원李芳遠을 선발하기도 한 그는 정몽주와 친분이 두터웠고, 이색과도 가문적으로 가까웠다. 이들과 정치적으로 견해를 같이하여 고려 말에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당으로 몰려 이색.권중화.이숭인.권근과 더불어 유배당하였다.
이존오(1341-1371.權近의 처숙)는 경주인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위었지만 모습이 단정하고 과묵했으며 힘써 공부하고 뜻이 굳었다고 한다. 그를 기른 형이 도적에게 잡혀가서 죽자 여러 달 걸려서 형의 시체를 찾고 관에 고발하여 도적들을 다 잡아들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 정몽주.박상충.이숭인.정도전.김구용.김제안金齊顔 등과 벗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제 신돈이 정치를 독단하자 그는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니 가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며 탄핵에 나섰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그 후 공주 석탄石灘에 은둔 중 신돈의 세력이 날로 성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끝내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신돈의 세력이 아직도 치성 하냐.”라고 묻고는 “신돈이 죽어야만 내가 죽을 수 있다.”면서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이존오의 시 2편을 보자.
바람에 우는 머귀(오동나무) 베어 내어 줄 매오면
해온남풍解慍南風에 순금舜琴이 되련마는
세상에 알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덥나니.
첫 구절은 숨은 인재를 발굴해 쓰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오동에 줄을 매면 순임금의 오현금이 되리라’는 말은 숨은 선비를 찾아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토로이다. 두 번째 글은 신돈이 구름같이 무심한 척하면서 사실은 조정에 들어와서 제 마음대로 ‘광명한 날 빛’인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있음을 울분으로 토로한 것이다.
박돈지(1342-?)는 밀양 인으로 일찍부터 이색․이숭인과 교분이 두터웠고 고려 말에는 이들이 숙청당하자 그도 유배되었다. 학문이 밝았다.
이자용(1339-1385)은 본관이 영천으로 판도판서 신분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해적을 금단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귀국 시 일본에 잡혀있던 우리백성 230여명을 돌려받아왔다. 우왕 때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풍랑으로 기일에 맞추지 못했다고 하여 중국에서 대리代理로 유배 갔다가 귀양이 풀려 귀국하는 도중 순직했다.
이입존(1338-1396)은 호부상서를 지낸 이달충李達衷의 아들로 이제현의 족친이다. 이달충이 동북면도순문사로 있으면서 이성계 및 그의 부친 환조桓組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뒷날 이입존이 취중에 왕을 비방하였다가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태조가 이달충을 회상하면서“입존이 만일 참형을 당한다면 달충의 영혼이 무엇이라 하겠는가.” 라면서 참형을 면하여 주고 남해현으로 유배시켰다.
서균형(1340-1391)은 우왕 5년 우대언으로 있으면서 납합출納哈出 정벌을 위한 출동에 참여하지 않은 홍중선洪仲宣을 탄핵하여 유배시켰고, 국자감 시관으로 있을 때 우왕이 시험문제를 보려고 하자 “시험장의 문제는 밖으로 누설 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하는 기개가 있었다.
곽추(1338-1405)는 청주가 본관이며 정몽주와 우의가 두터웠다. 그가 공민왕 11년 한림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떠날 때 정몽주는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아쉬움을 남겼다.
곽군郭君은 나와 동문으로 이제껏 동열同列로 지냈도다.
포상과 징벌에 대한 직책을 맞고 있으니 그 높은 절개 누가 꺾을 소냐.
어제 남쪽에서 왔더니 지금 바퀴자국 돌아가네.
세모에 홀로 오래 머물게 되니 만나 본 잠시의 시간 아쉽기만 하도다.
밝은 태양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음침한 눈만이 온 세상을 덮는 도다.
어느 때 봄바람이 불어오려나. 만나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
같이 수레타고 먼 길 가면서 흉중에 있는 말 그대에게 다하리.
그대가 돌아가는데 무슨 글이 필요 한가 특별히 글 쓸 것이 없음을 쓰리라.
우왕14년에 정당문학으로 있기도 한 그는『두문동실기』와『청주곽씨대동보』에 고려절신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탄식하고는 신병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곽추는 태종과 족친관계(그의 처부 閔관이 태종비 元景王后의 조부임)여서 일찍부터 교유가 두터웠고, 태종이 즉위하자 그에게 예문관대제학, 의정부찬성사 등 여러 벼슬을 내리고 처남인 민제閔霽의 집에서 태종과 더불어 향연을 즐기기까지 하였으나 벼슬엔 끝내 나가지 않는 절개가 있었다.
유순(1335-1398)은 홍건적 침입 때 왕을 따라 호종하였고, 이후 경상도안렴사로 있으면서 김민金閔의 불법을 조정에 고하여 탄핵하였다.
유원(1341-1392)은 진주가 본관으로 우왕 때 밀직으로 있으면서 북방에 소란이 있자 정몽주와 더불어 동북면으로 가서 사태를 파악하고 돌아왔고, 창왕 원년에는 판개성부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김여지金汝知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공양왕 4년에 조영규가 정몽주를 죽이려고 궁궐을 수색 할 적에 소란 중에 목숨을 잃었다.
문익점(1329-1398)은 강성江城(산청)사람으로 일찍 가학을 전승하여 학문이 밝았다. 공민왕 12년에 좌정언으로 이공수를 따라 서장관이 되어 원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 처음으로 고려에 목면을 보급하였다.
그는 이색의 아버지 이곡에게 수학한 연고로 일찍부터 이색과 교분이 두터웠고 정몽주와도 또한 가까웠다. 이들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여 조준 등의 전제개혁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집 후원에 삼우당三憂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을 즐기며 만년을 보냈다.
그가 죽은 후 목면재배에 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영의정에 추증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작되고 충선忠宣시호를 내렸다.
사실 고려에 목화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백성들이 갈옷이나 삼베 같은 열악한 의류에 의지했으므로 겨울이면 동사자가 속출하는 등 추위를 이기는 방법이 없었으나 그의 목면보급으로 의류문화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사위(1342-?)는 용구龍駒가 본관이다. 정몽주와 동년으로 일찍부터 이색․정몽주와 우의가 두터웠다. 그는 정몽주.이색과 뜻을 같이하여 이성계에 대하여 반대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가 대언으로 있을 때 윤소종尹紹宗이 상호군 송문중宋文中에게 이성계를 비난하기를 “지금 이 시중(이성계)이 능히 군자를 천거하고 있으나 또한 소인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으니, 만일 그가 하루아침에 소인들의 농간에 떨어진다면 그 때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 하였는데, 이 말이 왕에게 전해져 소종을 처벌하려하자 그는 “이제 소종을 처벌하면 전하께서 직언하는 신하를 미워한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처벌을 반대하고 있다.
그가 죽자 변계량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나를 자식과 같이 돌보아 주신 어진 분이시어
지금 부음을 들으니 이것이 꿈이 아닌지 의심스럽도다.
길이 멀어 달려가 상여 줄도 잡을 수 없으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 옷깃을 적시도다.
이제 갓 이순耳順을 넘었는데 저승길로 가시다니.
김경생(1334-?)은 본관이 상주(상산)로 좌주 김득배와는 삼종질三從姪이 된다. 말하자면 그는 상주김씨 제학공파提學公派의 파조派祖 김유화金有和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직제학을 지낸 그의 아들 김후金后(1372-1404․丹邱齋)는 정몽주와 사승관계로 황희와 더불어 공양왕 원년(1389)에 급제한바있는데, 뒷날 스승이 선죽교에서 피살되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신을 거두어 이색, 송악산 승려, 가노家奴들과 함께 풍덕豊德에 장례를 치르며 만시를 남겼다. 난계가 정몽주에게 진 빚을 김후가 갚은 격이다.
내 평생 유별난 성격이 혜강과 같아서/ 平生性癖似嵆康
남의 상조문 안하기가 20년이 되었네./ 賴弔人喪二十霜
오늘에 선생을 곡하여 무한히 슬퍼함은/ 今日哭公無限痛
천고의 큰 강상을 붙들어 세웠기 때문이로세./ 爲扶千古大綱常
*혜강(223-262):중국 안휘성 북부 출신으로 晉나라 초기 시종직에 있으면서 부정을 용서하지 않고 반유교적 사상으로 권력층의 미움을 받자, 죽림에 들어 노장허무주의에 취해서 청담을 나누며 살았던 죽림칠현 중의 중심인물이다. 친구가 일으킨 사건에 말려들어 처형되었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끝내 조선이 개국되자 김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는 홀연히 처향妻鄕인 경남 산청군 단성丹城의 나무리로 낙향 입절하였다.
함께 흰 구름을 덮고/ 同被白雲像
북악산 속에서 노닐었도다./ 遊於北岳中
나는 진흙 속에 빠질까 염려하였는데/ 念我沒塵土
왕망의 하늘아래 붙어있구나./ 寄身莽蒼空
*왕망王莽(기원전45년-기원후25년)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중국 역사에서 “찬탈자”로 알려져 있으니 고려를 찬탈한 이성계의 하늘 밑에서 아직도 죽지 못하고 살아있음을 부끄러워 한 것이다.
김천시 금릉 여남 내동의 난계 사우 충의제
김후의 인생역정을 대하노라면 사람의 인연은 참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정몽주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스승 김득배의 시신을 거두어 어렵게 장례지내 준바 있는데, 이번에는 김득배의 손자 벌이되는 김후가 역시 길가에 버려진 정몽주의 시신을 거두어 예장했다는 점에서 정몽주와는 ‘의義와 이理의 인연’이 끈질기게 이어진 점이다.
그래서 일까 김후의 후손들은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에 나라가 어려움에 들자 경남지방에서 기병하여 충의와 절개의 집안으로 세간에 주목을 크게 받았다.
상주시 외남면의 난계 위패를 모신 옥성서원
이상과 같이 좌주와 문생간의 긴밀한 사승관계를 나타내는 글을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김득배를 예를 들어 언급하고 있다.
…김득배는 비록 원수가 되었으나 문과 출신으로 안우와 이방실의 모의에 따르지 않았으니 몸가짐을 곧게 하여 그대로 실천한 것이고, 평생을 저버리지 않은 정몽주 같은 문생을 두었으니, 가르침 역시 제대로 한 사람이다. 문文은 능히 몸을 빛나게 했고 무武는 능히 공훈을 세웠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정몽주의 훌륭한 수립만 보아도 이미 주고받은 연원이 있는 것이다. 정몽주는 안으로는 정습명(鄭襲明.정몽주의 아버지)의 유열遺烈이 있고 밖으로는 김득배의 배양培養이 있었으니,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한 것도 어찌 또한 알맞지 않은가? 지금 사람은 문충만 높일 줄 알고 김득배가 있었던 것은 모르므로 이를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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