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형태의 U자형 강하변이 명당으로서 행운의 기운이 감도는 땅이라는 얘기는 조선시대 이중환이 쓴 대표적인 풍수지리 이론서인 ‘택리지’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 U자형태 강의 기운에 의해 발달하게 된 도시 중에서도 정확히 어느 지점이 보다 구체적인 명당 자리인지 궁금해지게 된다.
도시란 문명과 함께 발달하기 오래 전부터 자연조건에 의해 발달해 왔다. 사람은 편안하게 느껴지는 장소에 자주 모이게 되고 또한 빈번히 모이는 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도시는 경제적인 요인과 정신적인 요인이 공동으로 작용하여 발달된 곳이다. 이런 도심지 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바로 시장이다. 시장의 위치를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대개 시장이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울의 경우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은 모두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AD 80년에 신라의 석탈해는 경주 남쪽 초승달터를 명당으로 확신하고 자신의 집터를 정하고 살아 결국 말년에 신라 제4대 왕위에까지 오르듯이 세계 여러 곳에서도 사람들은 초승달형 명당을 선택하여 그곳에 모여살아 오늘의 대도시를 이루었다. 파리, 런던, 로마, 모스크바, 베를린, 빈 등 수많은 세계적 도시들이 좋은 사례가 된다.
도심지 내에서 명당이 대체 어디인지 찾기가 어렵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으면 된다. 시장이 그중의 하나이다.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시장이 가장 이상적이다. 또한 외국으로 이민 가더라도 벽촌으로 간다면 빨리 성공하기도 어렵게 된다. 국내건 외국이건 성공하기 위해서는 큰 도시의 시장에 자리잡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시장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제반 소요비용이 고가여서 시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소요된다. 자본금이 모자랄 경우 가장 작은 구멍가게라도 차려서 시장에 자리잡는 사람이 가장 먼저 성공하게 된다. 시장은 명당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길지 순례 1
《남산》-서울의 남산과 잠실의 뽕나무
남산의 정상은 그 모양이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 따라서 지덕(地德)을 크게하려면 뽕나무를 심어야 했다. 그래서 사평리(沙坪里)에 뽕나무를 많이 심고, 그곳을 잠실(蠶室)이라 불렀다. 이 뽕나무는 궁중의 양잠(養蠶)에도 이용되었다.
길지 순례 2
《삼남의 4大 길지》
1) 경주의 양동
2) 풍산의 하회 마을
3) 임하의 천진 마을
4) 내성의 서곡 마을
특히, 천진 마을은 대현산을 등진 채 앞에는 내가 흘러가고, 멀리 왼쪽에는 낙동강으로 통한 남향의 땅이다.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으로 자손번영의 땅으로 일컬어진다. 비단(紗)은 아름다운 천이니, 고귀한 사람의 옷이 된다. 따라서 자손 가운데에 명성있는 고관이 배출된다. 이곳에 5자 등과 집이 있는데, 바로 김극일, 김성일 등의 5형제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한 집이다.
길지 순례 3
《금계포란형》-충북 충주시의 계명산
충주시의 진산은 계명산이다. 이 산의 지네 때문에 주민들의 피해가 잇달았다. 그러자 어떤 도사가 지네와 닭은 앙숙이니 산 이름을 계족산(鷄足山)으로 바꾸라고 하였다.
그대로 따랐더니, 과연 지네가 없어졌다. 그러자 충주시에서 큰 부자나 큰 인물이 태어나지 않았다. 닭이 땅을 파헤치듯이 충주의 정기를 흩어 놓기 때문이란 소문이다. 여론이 높아지자, 충주시는 예전의 이름으로 바꿀 것을 의결하여 다시 계명산이 되었다.
길지 순례 4
《한림학사를 배출한 터》-경북 청송군 현동면 도평동
이곳에 사는 남석한의 집터가 명당인데, 일찍이 10대조 되는 남돈이 영양에서 이곳으로 와 집을 짓고 살았다. 집터가 길지 였음으로 대대로 한림학사가 끊이질 않았고, 부유하고 다복하였다.
길지 순례 5
《와우형》-충북 영동군 매곡면 장척리
이곳에 사는 이우방의 집터는 와우형으로 일생을 편안하게 살 길지라 전한다. 이우방의 부친(李在和)은 30살까지 남의 집의 머슴을 살고, 해산물의 행상을 하는 등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데 장가를 들고서 현재의 집에 산 후로 행운이 찾아와 50년 동안 10만원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길지 순례 6
《분재곡(分財谷)》-전남 화순군 도림면 구례리
이곳에는 〈山水秘訣〉에 나오는 분재곡이란 산이 있다.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재물을 나누어준다는 뜻의 산이 있으니, 언젠가는 재물이 풍성할 것이라 여겨 떠나지 않는다. 호남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이 산기슭으로 터널이 났다. 그러자 공사장에 투입된 사람들은 품삯을 받아 그 산의 덕을 보았다.
길지 순례 7
《백학포란형》-평북 영변군 봉산면 조양동
이 집에는 이현이 사는데, 지세를 보면 뒤쪽에서 피도산이 일직선으로 와서 집 뒤에서 갈라진다. 이것들이 집을 둥글게 에워쌌다가 앞쪽 약 100미터 지점에서 다시 합쳐진다. 이 집에는 약 300년간 재산가가 거주했고, 한 때는 소작미 150만석을 거두는 부자가 되었다.
길지 순례 8
《조선의 발상지》-함남 덕원군 적전면 용주리
용주 마을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마을 중간으로 신적전천이 흐르고, 북쪽 산 기슭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장풍득수가 완전한 길지이다. 태조의 4대조 되는 이안사(穆祖)는 본래 전주에 살았으나 어떤 일로 전주 관찰사의 미움을 받아 그곳에 살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삼척으로 이사를 갔고, 다시 고려 고종 때에 용주리로 이사왔다고 한다. 이안사는 이곳에서 태어난 이행리(翼祖)와 함께 선주 덕원의 방어사가 되었으나, 몽고군과 싸웠으나 항복하였다.
이안사는 그후 몽고를 섬기면서 함북 경흥에서 살았고, 그가 죽자 이행리는 다시 용주리에 돌아와 살고, 다시 함흥으로 가 이춘(慶祖)을 낳았다. 이춘은 또한 용주리로 돌아와 살다가 함흥으로 가 이자춘(桓祖)을 낳았다. 이자춘은 항흥을 근거로 마천령까지 토지를 얻으며 이성게를 낳았다. 그 결과 용주리는 조선조의 발상지로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