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남자의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몰르겄소. 관천것덜이야 항시 우리 백성 편이 아니고 왜놈덜 편이었은
게.'
첫번째 남자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참 별 의심 다 허고 그러요. 사람덜이 지 탯줄 묻은 땅 떠나면 금세 죽
는 것으로 알고 뒤로 빠지기만 허니 관에서 나스는 것 아니겄소. 우리야
돈만 벌어오면 됐제, 사람얼 의심허자면 끝도 한도 없는 일이요.'
세번째 남자가 자신있게 말했다. 방영근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말에
끼여들지 않고 이틀을 보냈다. 물론 마음속에는 20원의 돈을 내놓고 사람
을 모집하는 왜놈들에 대한 의심스러움과, 정말 돈을 벌어올 수 있을까 하
는 의문과, 알 수 없는 땅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엉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말을 한다고 풀리고 가셔질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아, 배를 타기 전에 여그다가 손도장얼 하나씩 찍어.'
장칠문이 종이 한 장에 한 사람씩의 손도장을 눌러나갔다. 방영근은 장
칠문에게 세번째로 손목을 잡혔다.
'요것이 멋이다요. 알고나 찍읍시다.'
방영근은 장칠문이 끌어당기는 손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방영근으로서
는 종이에 가득 적힌 글씨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겨우 읽어
낼 수 있는 한글은 한 자도 없었던 것이다.
'머시여? 건방구지게.'
장칠문이 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건너편의 일본사람이 깜짝놀
라며 뭐라고 내쏘았다. 장칠문이 떠듬거리며 일본사람에게 몇마디 했다. 그
러자 일본사람은 고개를 홱 돌려 방영근을 꼬나보았다. 방영근은 눈길을
피했다. 일본사람은 다시 무슨 말인가를 했다.
'여건 일 잘허겄다는 계약서란 것이여. 인자 되았어?'
장칠문이 끌어당기는 대로 방영근은 종이 위에 손도장을 눌렀다. 그들은
곧 부두로 나가 배를 탔다.
'아니, 여런 손바닥만헌 배로 수만리럴 간다 그것이오?'
세번째 남자가 뱃전에서 엉덩이를 뒤로 뺐다.
'말도 많으네. 인천서 큰 배로 갈아탈 것이여.'
장칠문이 그 남자의 등을 밀었다. 감골댁은 아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지
삼출한테서 전해 들었다. 날이 걷히는 대로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
면서도 막상 그 말을 듣자 한정없이 허물어내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
었다. 스스로도 모를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기는 남편이 숨을 거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약도 소용이 없어지고, 남편의 목숨이 시나브로 사그라
들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숨이 멎게 되자 세사으이 끝이 눈
앞에 맞닥뜨렸던 것이다. 남편이 대들보면 다들은 서까래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남편이 없는 집안의 장남이어서 그러는 것일까. 아들도 대들보였다
는 것을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찬바람이 휘도는 가슴으로 하늘만 바
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아줌니, 어찌 지내시는감요.'
한쪽 어깨에 지게를 걸친 지삼출이 사립을 들어섰다.
'이, 어여 와.'마루기둥에 시름없이 기대앉았던 감골댁은 무겁게 등을 뗐
다. 풀려버린눈이 사람을 제대로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간에 돈 가져왔든게라.'
지삼출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돈? 아니여.'
감골댁은 여전히 힘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것 안되겄는디.'
지삼출은 혼잣말을 하며 지게를 벗고는,
'아줌니, 오늘이 영근이 떠난 지 나흘째요. 배 타면 딱 준다든 돈이 이적
지 안 왔는디 이리 태평치고 앉었을 일이 아니구만이라'
하며 마루에 걸터앉는 그의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났다.
'나흘? 금세 그리 됐는가'
감골댁이 눈을 껌벅이며 중얼거렸다.
'아줌니, 정신채리씨요. 이러다가넌 장가놈헌티 돈 띠믹힐 것이오.'
'머시여? 그 돈이 워쩐 돈인디!'
감골댁이 펄쩍 뛰듯 했다. 비로소 그녀의 눈이 팽팽해져 있었다.
'이적지 안 온 돈인디 앉어서넌 못 받으요. 장가놈얼 찾아가야 허요.'
'나가 그간에 넋이 빠져 있었는디, 그 말 듣고 봉게 그렇구마. 당장 나서
야겄네.'
감골댁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줌니가 일차 찾아가 보시게라. 그래 일이 잘 안 풀리면 나도 나스겄
소.'
'그려, 그려. 매여사는 몸인디 쥔집 눈치가 있제. 아여 갈 생각 말어.'
감골댁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슴살이하는 몸으로 지난번에 군산
걸음을 한것도 더없이 고맙고 미안했던 것이다. 속 깊은 의리를 지닌 지삼
출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그녀는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감골댁
은 더위를 무릅쓰며 다시 대륙식민회사를 찾아나섰다. 푸르른 색깔이 넘실
거리는 시원스러움과는 달리 뙤약볕 내리쬐는 무더운 들녘길을 혼자 걷기
는 너무 지루하고 팍팍했다.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노래를 읊조리며
걷고 있었다. 무언가 서러움이 서리고 애절함이 사무치는 느릿한 가락은
끝날 줄을 모른 채 길고 긴 들녘처럼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새애야아
새애야아아 파아라앙새애야아 노옥두우우밭에에 아안지마라아아 노옥두우
꼬옻치이이 떠러어어지며어언 청포오오자앙수우우 울고오오 가안다아>
녹두장군이 사형을 당하자 여인네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남몰래 불
리어지고 있는 노래였다. 그건 정봉준 장군에 대한 애도가이면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들에 대한 망부가였고, 이기지 못한 싸움에 대한 비원가였다. 감
골댁은 그 노래를 끝없이 되풀이하며 앞서 가버린 남편을 만나고 있었고,
언제 돌아올지 모를 아들 걱정을 삭이고 있었다. 그러다보면 들녘길도 별
로 힘겨웁지 않게 뒤로 뒤로 밀려나갔다.
'돈이요? 김 참봉헌티 준 지 오래요.'
장칠문의 엉뚱한 말이었다.
'무신 소리여?'
감골댁의 얼굴이 푸득 떨렸다.
'김 참봉이 빚 받을 돈이라고 혀서 그리 넘겨줬다 그 말이오.'
'그 돈에서 2원은 우리 돈이여!'
감골댁의 외침은 마치 울음 같았다.
'나야 모른게 거그 가서 받든지 말든지 허면 될 것 아니여.'
장칠문이 얼굴을 구기며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감골댁은 멍하니 서 있었
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 참봉이 왜 20원을 다 받아갔을까.
그리고 어째서 2원은 돌려주지 않은 것일까. 그간에 빚이 또 불어났는가.
며칠 사이에 그랬을 리가 없었다. 혹시 빚돈 계산을 잘못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에 몰리며 감골댁은 짚신을 끌고 사무실을 나섰다. 무거운 다
리를 터덕거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빚돈 계산을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
들이 몇번이고 맞춰본 계산이었다. 김가가 딴맘을 묵는구나! 감골댁의 머리
를 친 생각이었다. 감골댁은 부르르 떨었다. 그 돈이 어쩐 돈이라고. 또, 2
원이면 보통 논 반마지기 값이었다. 그런 돈을 생짜로 묵을라고! 감골댁은
전신에 힘이 뻗쳤다. 다시 집을 향해, 아니 김 참봉을 찾아서 군산으로 올
때보다 더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거 무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여. 나가 받은 돈언 딱 18원이여, 18
원, 딴소리 허덜 말어.'
김 참봉의 노기 띤 말이었다.
'아이고메, 이리 되면 누구 말이 옳단가요.'
감골댁은 발을 굴렀다.
'사람얼 멀로 보고 허는 소리여, 시방.'
김 참봉이 쥘부채로 마루를 내리쳤다. 감골댁은 꼭 무엇에 홀린 기분이
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김 참봉을 닦달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 참
봉의 서슬 앞에서 더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장가놈의 말에
의심이 생기기도 했던 것이다.
'김 참봉이란 인종도 돈 앞에서넌 못 믿을 물건인디요. 그려도 장가놈이
더 의심이 가는구만이라.'
지삼출이 골똘한 생각 끝에 한 말이었다.
'그놈이 돈욕심이 동해서 그렸으면, 그 돈 띠이는 것이 아닐랑가 몰라?'
감골댁은 분함 반, 근심 반이 섞인 마음으로 지삼출을 바라보았다.
'택도 없소. 그 돈 생짜로 묵을라다가는 지놈 목이 째질 것이요. 아줌니
도 맘 단단허니 묵어야 허요.'
'맘이야 철통인디 돈이 그놈 수중에 안 있다고. 그놈이 나쁜 맘 묵은디
다가 왜놈꺼정 옆에 끼고 있으니, 무신 존 방도가 없으까?'
'요것이 말이요, 양쪽얼 한 분썩만 만내갖고넌 누구 말이 진짠지 모르덜
않은감요. 그러니 장가놈얼 한분 더 찾아가서 꼼짝못허게 잡아채야 허는구
만이라. 그것이 먼고 허니, 그놈이 또 이십 원얼 다 김 참봉 줬다고 허면,
그렇다면 당장 김 참봉얼 대면허자고 들이대란 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