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입대담(漸入大膽 : 초기에 불씨를 끄지 않으면 점점 대담해진다)
고려(왕건이 세운 나라인 후기 고리[高麗]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는 왜구 침입에 대해 처음에는 ‘변방을 괴롭히는 대수롭지 않은 해적’으로 취급했다. 왜구로 말미암아 국가(나라 – 옮긴이)의 영토(땅 – 옮긴이)를 잃는다거나 하는 등(은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 옮긴이) (왜구의 침입은 – 옮긴이) 국가중대사로 취급하지도(다루지도 – 옮긴이) 않았다.
같은 시기 북방에서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와 왜구가 침입했을 때 고려 정부가 취한 방식을 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후기 고리 정부는 – 옮긴이) 홍건적의 난에는 전군을 동원해 (홍건적을 – 옮긴이) 막았지만, 왜구 침구에 대해서는 주로 지방 방위체계로 임했다.
그러다 왜구 규모가 점점 커지고 국정(國政. 나라[國]를 다스림[政] → 나라의 정치/나라를 다스리고 꾸려 나가는 일 : 옮긴이)이 날로 문란해지자, 고려 정부는 강경책으로 왜구 토벌에 나서게 된다.
역사적으로 (서기 – 옮긴이) 13세기에 발호(跋扈. ‘넘어가고[跋] 퍼짐[扈]’ → 힘을 멋대로 휘두르며 함부로 날뜀 : 옮긴이)한 왜구는 14세기초에 들어서면 더 규모가 커지고, 잔학성도 더욱 극심해진다.
(서기 – 옮긴이) 1323년(충숙왕 10년) 6월에는 왜구가 전라도(다른 이름은 ‘호남’ - 옮긴이) 군산도에서 조운선을 약탈한 데 이어, 7월에는 추자도와 인근 여러 섬을 약탈하고 남녀노소 백성들을 포로로 붙잡아갔다. 이에 고려 조정은 내부부령(內府副令. 후기 고리[高麗] 시대의 벼슬. 내부사[內府司 : 궁중의 재화를 보관하는 일과 상세[商稅. 장사하는 사람(商)에게 받는 세금(稅). 거래세의 일종이다]의 징수와 물가의 통제를 맡았던 관아]의 정 4품 벼슬이다 – 옮긴이) ‘송기(宋頎)’가 이끄는 부대를 전라도에 급파해 100여 명의 왜구를 참살하는 전과를 거둔다.
충정왕 대 들어서도 왜구는 더욱 창궐하여 날이 갈수록 침구(侵寇. 쳐들어와 노략질함 – 옮긴이) 빈도수가 높아졌다. 1350년 2월에는 왜구가 고성, 죽림, 거제 등지에 침입하자 합포 천호(千戶. 고리[高麗] 후기에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벼슬. 군사 즈믄[1천] 명을 거느리고 이끄는 군사 지휘관의 명칭이다 – 옮긴이) ‘최선’과 도령(都領. 고리의 관직 이름. 전투 부대의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이다 – 옮긴이) ‘양관’ 등이 이를 격파하여 300여 명을 참살(斬殺. 목을 베어[斬] 죽임[殺] - 옮긴이)했는데, 이때부터 왜구의 침공은 더욱 대형화되고 빈도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왜구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침입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저질렀다 – 옮긴이). 계속되는 왜구 침입에 따라, 고려 조정은 그 예봉(銳鋒. ‘날카로운[銳] 병기의 날[鋒]’ → 날카롭게 치는 기세 : 옮긴이)을 피해 도서지역 주민의 생명(목숨 – 옮긴이)과 재산을 보호하기(지키기 – 옮긴이) 위한 소극적인 대책으로 진도현(珍島縣)을 육지의 장흥으로 이동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왜구의 극렬한 침입은 1223년부터 1351년까지 130여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14세기 초엽까지 왜구 침입은 규모나 횟수, 피해 면에서 그다지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기간에는 고려와 일본이 진봉무역(進奉貿易. 『 고려사절요 』 에 나오는 말. 후기 고리[ 高麗 ]와 일본의 공식 무역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 통해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욕구가 충족되자 침구 규모도 국지전적 성격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규모나 형태 면에서 계획적인 약탈이나 조직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진봉무역은 일본이 고려에 방물(方物. 특산물)을 진봉(進奉. [물건을] 앞으로 나아가서[進] 받들어[奉] 바침 → 진귀한 물품이나 토산물 따위를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에게 바침 : 옮긴이)하면, 고려가 그에 대한 답례로 (일본의 사신에게 – 옮긴이) 문물을 증여(贈與. ‘보내어[贈] 줌[與]’ → 물건을 아토[‘선물(膳物)’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로 줌 : 옮긴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1263년 4월 고려가 일본에 보낸 국서를 보면, 적어도 그때까지 고려와 일본 사이엔 매년(해마다 – 옮긴이) 한 차례씩 공무역(公貿易)으로 진봉무역이 행해지고, 그때마다 2척의 진봉선(진봉하러 오는 배 – 옮긴이)이 왕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4세기 중엽인 충정왕 대에 접어들면서 왜구의 침구 규모는 날로 대형화되고 침구지역도 (후기 고리[高麗]의 – 옮긴이)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때부터 왜구는 주로 고려의 해안(바닷가 – 옮긴이)이나 도서지방에 빈번히(頻繁히. 자주[頻], 그리고 많이[繁] - 옮긴이) 침입하여 조운선을 탈취하거나 민가(民家. 백성[民]들이 사는 집[家] - 옮긴이)에 방화하고(불을 지르고 – 옮긴이) 약탈과 살육을 감행했다.
1352년(공민왕 원년) 착량 – 안흥 – 장암 전투에 이어, 왜구는 지속적인 침구를 감행해 3월에는 풍도 – 교동 – 서강을 연결하는 선을 따라 북상했다. 그러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착량 – 안흥 – 장암 지역과 갑산창, 보음도 등지에서 패퇴함으로써 이후 3개월간 왜구 침구는 주춤한다.
그러나 (왜구는 – 옮긴이) 6월 하순부터 또다시 고려의 서해안과 동해안 일대를 동시다발적으로 침공했다. 이런 동시다발적 침구로 고려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때부터 왜구는 더욱 대담해져 왜구(들 가운데 – 옮긴이) 일단(一團. ‘한[一] 덩어리[團]’ → 한 집단이나 무리 – 옮긴이)은 동해안으로 방향을 틀어 강릉까지 침구하며 관내 여러 지역을 노략질하였다.
침구 규모도 대형화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시작된 1350년 2월 (후기 고리[高麗]의 군사가 왜구 – 옮긴이) 300여 명을 참살했다는 기록은 왜구가 소규모 집단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1358년에 접어들면 왜구의 침구 규모는 더욱 대형화되어(대형화‘하여’ - 옮긴이), 3개 집단(무리 – 옮긴이)으로 나뉘어 1대는 개경(오늘날의 개성 – 옮긴이), 1대는 경상도(다른 이름은 ‘영남’ - 옮긴이) 남해안, 1대는 전라도 및 충청도 서해안으로 진출한다. 우리 국토를 중심으로 가르며 ‘침투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1379년(우왕 5년) 침구에 동원되었던 왜구 선단은 최저 20척에서 최대 500여 척으로 규모도 대형이었고 전면전에서나 실시될 법한 몇 개의 주요 작전로를 밟고 있다.
이런 침투상륙작전은 이로부터 242년이 지난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 옮긴이) 왜군(倭軍)이 부산 동래에 상륙하는 것을 시발(始發. 어떤 일의 처음 – 옮긴이)로 대대적인 조선 침공(근세조선 침략 – 옮긴이)으로 나타난다.
기습 상륙한 왜군은 3로로 나뉘어 서울(당시 이름은 ‘한양’/‘한성’ - 옮긴이)을 향해 북상하여 국토를 초토화시켰다(초토화‘했다’ - 옮긴이). 임진왜란(올바른 이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 ‘6년 전쟁’. ‘아시아의 7년 전쟁’ – 옮긴이) 시(때 – 옮긴이) 적의 침략 방식이 1358년 왜구 침구와 다른 점은 시종 육로를 중심으로 북상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때 왜(倭 ) 함대가 곧바로 서해(다른 이름은 ‘황해’ - 옮긴이) 연안을 타고 들어와 한양까지 유린했다면, 조선으로서는(근세조선은 – 옮긴이) 더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초기에 (왜구의 약탈과 침략이라는 – 옮긴이) 불씨를 잡지 못한 결과는 참담했다. 왜구는 더욱 기세를 올려 활동 범위를 해안지역에서부터 내륙지역으로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왜(倭)의 적극적인 침구 방식은 고려의 전(온/모든 – 옮긴이) 해안지역에 걸쳐 폭넓게 나타났다. 거칠 것 없이 종횡무진 한반도(코리아[Corea] 반도 – 옮긴이)를 휩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왜구는 공공연히 떼를 지어 고려군이 주둔해 있는 연해에 나타나 당당히 식량을 요구하는가 하면, (후기 고리[高麗]의 군사들에게 자신들의 – 옮긴이) 대규모 침구를 예고하는 등, 위협과 공갈을 가하는 대담한 행동마저 서슴지 않았다.
… (중략) … (왜구[倭寇]는 – 옮긴이) 고려 말에 이르면 수만명에 이르는 대집단을 이룬다. 이처럼 왜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대형화되고(대형화‘하고’ - 옮긴이) 정규군화(化) 되어 간다. 도적 무리가 오랜 침구 경험을 통해 하나의 ‘시스템(system. 질서 있는 조직 – 옮긴이)’으로 발전한 것이다.
대규모 왜구 침구에 대응하느라 고려 말 국정은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고려는 북방의 외적(주션[‘여진(女眞)’으로 불리는 겨레의 바른 이름]족이나 북원[北元] - 옮긴이)과 맞서면서 남쪽으로는 왜구와 싸워야 하는 등 이중 부담으로 더욱 피폐해졌고, (이런 부담은 – 옮긴이) 종국에는 왕조의 종말을 가져왔다.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 초에 들면 왜구 침입은 규모나 잔인성 면에서 고려 말에 비해 크게 약화된다. 반면, (왜구의 – 옮긴이) 약탈물에 있어서는(약탈물의 종류는 – 옮긴이) 고려 말보다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이전의 왜구 노략질 대상은 주로 양곡(糧穀. 양식[糧]으로 쓰는 곡식[穀] - 옮긴이)과 (종으로 부려먹거나 팔 – 옮긴이) 사람이었는데, 이때부터는 점점 대담해져 무엇이든 자원이 되는 것이면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 태종 6년엔 약탈 양곡이 1회에 4천 90석(石)[한 석은 160㎏이므로, 무려 654t 400㎏[654 톤 400 킬로그램]을 약탈당했음을 알 수 있다 - 옮긴이]이나 되었다.
“왜적이 전라도 조선(漕船.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 – 옮긴이) 14척과 호송 병선(兵船. 전쟁에 쓰는 배. 오늘날로 치면 군함 – 옮긴이) 1척을 안행량에서 약탈하여 갔고, 또한 왜선 18척이 밤을 타서 침략하여 쌀 4천 90석을 탈취하여 갔다( 『 태종실록 』 6년 4월조 ).”
왜구는 대담하게도 군부대 내(안 – 옮긴이)에까지 들어와 불을 지르고 군량을 약탈해 가기도 했다.
“왜선 14척이 서주 서근량(鋤近梁)에 입구하여 병선 2척을 불태우고 삼도도체찰사 군영에 저축한 군량 200여 석을 약탈하고 그 영을 불살랐다(『 태종실록 』8년 5월 ).”
이 같은 대담한 구도(寇盜.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짓을 하는 사람 – 옮긴이)행위는 왜구의 특징으로, 상대가 얕잡혀 보이면 대책 없이 교만해지고 대담해지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시차(時差. 일정 시간과 시간과의 차이 – 옮긴이)를 넘어 우리가 ‘일본인’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크게 부합된다(들어맞는다 – 옮긴이).
(옛 기록에는 – 옮긴이) 왜구들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명종 10년 5월 13일 왜선 60여척이 대선단을 이루어 달양성에 침입했는데, 약탈 시(때 – 옮긴이)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왜구가) 황족을 당당히 앞세우고 검과 창을 휘두르며 고성방가에 박수(拍手)치면서[손뼉을 치면서 – 옮긴이] 돌아다녀, 그 소음이 천지에 진동하였다.”
이는 왜구의 사기가 충천(衝天. ‘하늘[天]을 찌름[衝]’ → 기세 따위가 북받쳐 오름 : 옮긴이)한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자, 다른 한편 우리 군대를 얼마나 얕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상 대규모 국가적 침탈이든, 소규모 침구든, 왜침(倭侵. 왜인[倭]의 침략[侵] - 옮긴이)이 멈춘 적은 없다(이 말은 ‘중세 말기 이후, 서기 17세기 초 ~ 서기 1867년을 빼고는 왜국[倭國]의 침략이 멈춘 적은 없다.’로 바꿔야 한다 – 옮긴이).
또한 일본으로부터의 침략 행위가 종식된 적도 없다(이 말도 사실과 다르다. 일본의 에도 시대에는 해적질을 비롯한 “침략 행위”가 – 적어도 근세조선을 향해서는 – 벌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옮긴이).
오랜 왜구 침탈사는, 적을 초기에 섬멸하지 못할 때에는 끝내 국가적 전란에 휩싸인다는 점을 명확한(뚜렷한 – 옮긴이)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 → 13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