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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奉化氏(봉화 금씨)
본관(本貫): 봉화(奉化)
시조(始祖): 금용식(琴容式)
유래(由來):
봉화(奉化)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의 고사마현(古斯馬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옥마현(玉馬縣)으로 고쳐 내령(奈靈:영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성현(奉城縣)이 되었다가 1289년(충렬왕 15)에 지금의 명칭인 봉화현(奉化縣)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금씨(琴氏)는 중국(中國) 위국(衛國)에 연원(淵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景王:제24대 왕) 때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금우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古代)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건너온 금응(琴應)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금씨(琴氏)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을 시조(始祖)로 전하는 기록도 보인다.
금씨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를 비롯하여 계양(桂陽)·안동(安東)·평해(平海)·봉산(鳳山)·문화(文化) 등 6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모두가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정축보(丁丑譜:1937년판)까지 관적(貫籍)을 봉성(鳳城)으로 칭관(稱貫)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봉화(奉化)로 통칭하고 있다.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봉화(奉化)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慶北)지방에 집단세거하며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져 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금의(琴儀)
일세조(一世祖) 의(儀)는 1184년(명종 14)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어사(御史)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고 누차 승진(陞進)하여 1215년(고종 2)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관의 종2품 관계)로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책록되어 판이부사(判吏府事)에 이르렀으며, 1230년(고종 17) 향년(享年) 78세로 졸하니 왕(王)이 김포(金浦) 봉황산(鳳凰山)에 예장(禮葬)을 명(命)하고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묘지(墓地)가 장릉(章陵:고려 원종의 능) 지역인 교산(喬山)의 금표내(禁標內)에 들어간다고 하여 1727년(영조 3)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奉化郡 祥雲面 下訥里)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금휘(琴暉)
고려조(高麗朝)에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핵심인물로 권력을 남용하던 최 우(崔 瑀)에게 죽음으로 항거했던 휘(暉)는 의(儀)의 아들로 노지정(盧之正)· 김희제(金熙 ) 등과 함께 억울하게 손위(遜位) 당한 희종(熙宗)의 복위를 모의하다 좌절한 절신(節臣)이다.
금훈(琴薰)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규( )의 7세손 훈(薰)은 원종(元宗) 때 원(元)나라에 가서 제주도(濟州道)에 웅거한 삼별초(三別抄)의 토벌을 위해 원병(援兵)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금휘(琴諱)
조선조에 와서는 은진 현감(恩津縣監) 회(淮:시조의 12세손)의 셋째 아들 휘(諱)가 세조(世祖) 때 문무(文武) 양과(兩科)에 급제하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금유(琴柔)
담양 군사(潭陽郡事) 극해(克諧)의 아들 유(柔)는 태조(太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특히 그는 4읍(四邑)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稱頌)을 받았는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영동(永東)의 신관(新館)에서 그의 사람됨을 칭송하는 시(詩)를 지어서 남겼다.
금난수(琴蘭秀)
선조(宣祖) 때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지내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난수(蘭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공(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성주 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금응협(琴應夾)
재(梓)의 아들 응협(應夾)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학풍(學風)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금보(琴輔)
첨정(僉正) 원수(元壽)의 아들 보(輔)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이 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서화가(書畵家)로 명성을 떨쳤다.
금응석(琴應石)
응석(應石)은 자기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앞장서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이 「적선정(積善亭)」이라는 편액을 써 주어 덕망을 칭송하였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琴嵩(금숭) :文科文宗1年(1450) 式年試丁科
琴尙絃(금상현)(1587 丁亥生) :文科仁祖2年(1624) 式年試丙科
琴暹(금섬)(1659 己亥生) :文科肅宗16年(1690) 式年試丙科
琴詩述(금시술)(1783 癸卯生) :文科憲宗10年(1844) 增廣試丙科
琴椅(금의)(1489 己酉生) :文科中宗14年(1519) 式年試丙科
琴愷(금개)(1562 壬戌生) :文科宣祖34年(1601) 式年試丙科
琴業(금업)(1557 丁巳生) :文科宣祖34年(1601) 式年試丙科
琴柔(금유)(1557 丁巳生) :文科太祖5年(1396) 式年試丙科
琴聖奎(금성규)(1636 丙子生) :文科肅宗4年(1678) 庭試乙科
(금충달)(1594 甲午生) :文科仁祖2年(1624) 增廣試丙科等 모두 68名의科擧及第者가 있다. (文科 14名, 武科 2名, 司馬試 52名)
琴熙星(금희성)의 전설.
속병을 고친 약수.
조선 정조 때 유면한 학자 금희성 선생은 오랜 속병이 있어, 아무 약을 먹어도 났지 않아 몹시 고생을 하였다.그런데 우연이 영양 석보를 흐르는 물을 마시자, 그 고질병이 이상하게도 씻을 듯이 다 낳아 버렸다 한다.
그래서 선생은 병을 고친 뒤, 그 곳에 정자를 짓고 藥泉亭(약천정)이라 이름하고 그 정자에서 공부도 하고 풍류도 즐기며 살았는데, 그 소문을 듣고 鄭基會(정기회) 선생을 비롯 여러 명사들이 찾아 들어 시부(詩賦)를 읊으며 함께 즐겼다고 한다. <출전: 영양군지>
琴梧(금오)의 효행.
날짐승도 도와준 병구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 자칭 죽창 처사(竹窓處士)라는 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이 선비가 바로 효자로 손꼽히는 금 오(琴梧 : 1486-1573)다. 금오는 봉화 금씨 16대 손으로 자는 백재(伯材)이고 호는 죽창(竹窓)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고 마음 착한 아이로 동네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 으며 효성이 지극한 그는 부모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문재(文才)에도 뛰어난 그는 서른 한 살에 생원(生員)이 되자 여러 번 조정에 천거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과거를 단념하고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측근에서 권유가 잦자 이를 견디다 못 해 그만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이 곳 뒷곁 마을(북지 1리)로 오게 되었다. 외부와는 일체 접촉을 끊을 양으로 심산유곡을 찾아 든 것이다. 이곳에 자리를 잡자, 그는 모옥(茅屋 : 띠집)을 짓고 그 집 둘레에는 빽빽이 대나무를 심었다.
그리고는 항상 푸르른 대나무 숲속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자신을 ‘죽창처사’라고 자칭하였다. 금오의 호가 ‘죽창’인 것도 여기에 기인된 것이다.
금 오가 이곳에 와서 살게 된 지 20 년이 되던 해 늦은 봄날이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죽림(竹林) 속 모옥(茅屋)에서 문하(門下)의 황 준량(黃俊 良), 권 동보(權東輔) 등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글을 읽고 있을 때다. 그의 아버지께서 병환이 드신 것이다. 여든 살을 바라보는 나이긴 하나 지금까지 쟁쟁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병을 얻어 몸져누운 것이다. 잔병 한 번 없던 아버지가 병을 얻어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눕게 되자, 금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원을 불러 약을 썼으나 잘 낫지 않고 병세는 오히려 더 해만 갔다. 금오는 가슴이 아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 병을 고쳐 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자식이 되어 부모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면 그는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병을 대신 앓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이 고 대신 앓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앓아 누운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는 금오는 아버지의 신음소리를 들을 적마다 가슴이 메어 견딜 수가 없었다.
수년 전에 어머니를 사별한 금오는 아버지의 병마저 고쳐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한다면 이는 천하에 없는 불효라고 생각했다.
이 때 금오의 나이 예순 한 살로 환갑이 되는 해이다. 자신도 환갑을 맞는 노인이고 보니 젊을 때처럼 기력도 덜했으나,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도 않고 오직 아버지 병간호에만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병든 아버지께서 미음을 들지 않으면 자신도 밥을 먹지 않았다. 집안 식구들이나 문하생들이 식사를 권해도 그는 듣지 않고 막무가내다.
며칠이 지났다. 아침 햇살이 방안을 환히 비추는데 금오는 그 때까지 아버지 머리맡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앞산 골짜기에서
“꿩, 꿩, 푸드득.”
하는 장끼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이 때쯤이면 꿩이 알을 낳는 때이다. 암 꿩이 알을 낳을 때는 수꿩이 반드시 지키고 있다. 암꿩이 한쪽 산기슭 떡갈나무 밑 으슥한 곳을 찾아 보금자리를 치고 알을 낳게 되면 수꿩은 그 반대 쪽에서 멀리 망을 보게 된다. 그리고, ‘꿩, 꿩,’하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는 잘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고 알을 낳으라는 뜻이다. 빨리 알을 낳고 자기 곁으로 오라는 신호이기도 하다니 이런 걸 보면 미물인 꿩의 세계도 신기하기 만하다.
이 때였다. 짝을 찾는 꿩의 소리를 들은 아버지께서 갑자기 꿩고기가 먹고 싶으니 산 꿩〔生雉〕을 잡아 오라는 것이다. 금오는 반가웠다. 아무것도 먹지 않던 아버지가 음식을 들겠다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뿐이었다. 당장 꿩을 잡으러 뛰어 나가고 싶었으나 날아다니는 꿩을 어떻게 붙잡아 온단 말인가? 귀신 듣는데 떡말 못 한다더니 꿩 소리를 듣고 꿩고기 먹고 싶다니 금오는 기가 막혔다.
지금 같으면 그물을 친다거나 총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당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너른 산야에서 제 멋대로 날아다니는 꿩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고심 끝에 막대기를 들고 꿩을 좇아 보았으나 허사였고, 아버지의 병세는 더해만 갔다. 희대의 명의 편작도 치병에 처방은 하였으나 그 약을 구하지 못해 죽고 말았다지만, 병에는 약이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병에는 꿩고기가 특효약이다. 지금까지 갖가지 약을 다 써 봐도 차도가 없는 터에 꿩고기가 먹고 싶다니 이는 필연코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라고 믿었다. 꿩을 구하지 못한다면 아버지를 죽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금오는 애타는 심정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낮이 되자 방안이 더워서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꺼져가는 아버지의 목숨을 건지려고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를 올렸다.
“우리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주소서. 꿩 한 마리를 구하게 해 주소서.’ 하고 두 손을 합장하고 정성껏 빌었다. 이 때였다. 난데없이 꿩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는가? 깃털이 벌건 장끼였다. 세차게 날아든 이 꿩은 머리를 방에 부딪혀 방구석에 떨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금오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꿩을 내린 것이다.
금오는 곧장 꿩을 장만하여 푹 고았다. 손수 정성 드려 고아서 아버지께 드렸더니 다른 음식 같으면 입에 대지도 않던 아버지께서 하나도 남김없이 모 두 다 먹고 나서 잠을 한잠 주무시고 나더니 지금까지 앓던 병이 씻은 듯이 나아 일어나게 되었다.
금 오는 한없이 기뻤다. 이제는 걱정과 근심 없는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옛 말과 같이 복불병행 (福不倂行), 화불단행 (禍不單行)이라더니 안일 무사한 생활이 이 가정에 오래 가지 못하였다. 노쇠한 아버지께서 또다시 신병이 발생하여 생명이 위독하였다. 자리에 눕게 된 아버지는 갖은 약을 다써 봐도 백약이 무효이고 끝내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금 오의 애통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아버지의 묘 앞에 초막을 짓고 3 년 동안 부모의 은혜를 추모하는 효행에 들어갔다.
초막에 거처하는 동안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난데없이 흰 까치(白鵲) 한 마리가 날아와 금오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다가 3 연상이 끝나 초막을 헐고 하산 할 때야 비로소 까치도 어디론가 가 버렸다 한다. 금오와 더불어 시묘살이를 함께 한 것이다.
이렇듯 한평생 부모에게 효도로 지낸 금 오의 행적은 사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잊혀지지 않고 옛이야기 삼아 우리 생활에 귀감이 되어 영원히 빛을 내고 있다.
출전〈봉화군 문촌초등학교 손 교감 〉
〈 참고 문헌 〉 奉化郡誌, 奉化琴氏族譜
琴弘達(금홍달)의 효행.
어리광부리는 육순의 아들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아현 (牙峴)에 조그마하게 자리 잡은 정자가 있으니, 그 이름이 애일당(愛日當)이요, 애일당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비각이 효자각 〔孝子閣, 또는 旌閭閣〕이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봉화 금씨의 후손 홍달(弘達: 1633-1704) 이 그의 부모님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고(1670), 홍달의 사 후에 그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정려각〔효자각〕이 세워졌다.
효자 홍달이 이 곳 아현에 와서 살기는 그의 아버지 금 시리(琴是理)때 부 터였다. 그의 아버지는 성품이 순실(純實)하고 제행(制行)에 법도가 있을 뿐 더러 자식들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짐승들도 제 새끼를 위하는데, 인격의 파탄자가 아닌 이상 제 자식을 귀여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어버이가 어디 있을까만 그의 아버지는 지극히 자애로운 분이어서, 자식들을 위하여 산자수명한 이 곳에 처음으로 정착하였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효자가 태어남은 당연하지만 홍달은 예사 효자가 아니다.
효행은 부모에게 성력(誠力)을 다하여 시하의 도리를 행하는 것으로 남보다 행적이 뛰어났을 때 효자라 하지만 홍달의 효행은 특이하다.
홍달이 서른일곱 되던 해에 정자(애일당)를 짓고 부모님을 봉양하는 곳으로 삼았다, 아담한 정자에 부모님을 모셔 놓고 지성으로 봉양하는 것이다. 아침저녁 문안드리기부터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이르기 까지 불편 없이 해 드렸다. 게다가 행여 심심하기라도 할까 봐 아버지 친구 분도 자주 모셔 드리고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다. 또한 부모님께서 자식들의 걱정을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삼 형제가 한 집에 살면서 더욱 우애를 돈독히 하고, 크고 작은 일들이 있으면 언제나 부모님께 고하여 부모님의 의사에 따랐다 한다.
학문이 깊은 홍달은 큰 벼슬이라도 해서 입신양명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있으나, 언제나 부모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과거 같은 것은 아예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한평생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홍달은 부모님 앞에서는 어리광도 부리고 어린 아이의 행세를 곧잘 했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노인이 장성한 자식들이라도 외출할 때 ‘길조심해 라”고 당부한다는 말은 익히 들어 온 바와 같이 , 부모가 보기에는 환갑을 지낸 자식이라도 어린애로 보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진대 부모님께 애띤 모습을 보이는 것이 또한 효라고 생각하고 명절이 되면 부모님 앞에서 엉금엉금 기기도 하고 부모님 품에 안기기도 하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갖은 짓을 다하여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렸다. 이 때 부르던 노래가 금효자 수친곡(琴孝子壽親曲)이라 하여 전래하고 있다.
또한 홍달은 부모님께 봉양하려고 정자 앞에 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렀다 하며, 이 못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아무리 가물 때라도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듯 이 정자에서 부자 자효(父慧子孝)하는 것을 보고 이 시선(李時善)이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으니 명필 이 제(李齊)가 현판을 써 붙인 것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효자 홍달의 효행 행적은 오늘날 우리로선 믿기 어려운 불가사의(不可恩議)한 일들도 많다.
오포초구(烏哺草寇), 동월난치(冬月卵雉), 한수금리(寒水錦鯉醒) 등 자친의 병환과 관계되는 일화로서 날짐승이나 물고기까지 홍달의 효심에 감복하여 도와주었다.
홍달의 어머니께서 토사곽란이 걸려 갑자기 설사를 하고 창자가 뒤꼬이며 그 통증을 참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이 병에는 초두구(草頭寇)가 특효약이 어서 급히 이 약을 구하는데 인근 약국에도 없어 홍달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붕 위를 날아가던 까마귀가 초두구 한 봉지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홍달은 너무 고마웠다. 그 약을 달여 드렸더니 어머니의 병환은 씻은 듯이 나았다.
홍달이 하루는 병환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께서 난데없이 꿩알이 먹고 싶다는 것이다. 때가 한겨울이라 꿩알을 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홍달은 꿩을 찾아 나선 것이다. 활을 메고 숲속을 헤매니 숲 저쪽에서 까투리 한 마리가 푸드득거리며 머리 위를 스쳐가지 않는가! 홍달은 이 때다 하고 급히 활을 잡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명중 한 것이다.
땅에 떨어진 꿩을 들어 당장에 배를 갈라 보니 기이하게도 그 꿩의 뱃속에는 알을 품고 있었다. 홍달은 너무나 반가워서 집으로 막 달려와 그 알을 삶아 아버지께 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무척 기뻐하시며 꿩알을 드시더니 앓던 병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곧장 완쾌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되었다.
늦은 가을 어느 날에는 친환(親患)에 쓰려고 은어를 구하러 나갔는데 때마침 홍수가 졌다. 늦은 가을이니 강물은 차고 홍수가 범람하니 은어가 있을리 없었다.
그러나, 홍달은 은어를 잡으려고 강변을 방황하고 있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난데없이 큰 은어 한 마리가 사장에 뛰어나와 퍼덕거리지 않는가. 홍달은 얼른 그 은어를 잡아다가 고아 드렸더니 병이 낫게 되었다.
이처럼 홍달의 효심은 기적을 낳기도 했다. 그의 나이 71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의 효행 사실이 더욱 널리 알려져서 조정에까지 알게 되어 당시 예조 판서 김 복도(金復度)가 정려(旌閭)하고, 그의 명을 받아 정언 윤 동수(正言 尹東壽)가 옛 집터 자리에 효자각〔정려각〕을 세웠으니 (1812) 오늘날에도 이 고장 후세들에 귀감이 되어 길이길이 흠모하게 하고 있다.
출전〈봉화군 문촌초등학교 손 교감〉
〈 참고 문헌 〉 奉花郡誌, 奉化琴氏族譜, 孝烈行誌
항렬자(行列字)
26 基(기)
27 銖(수),錫(석),鏞(용)
28 淵(연),洛(락),洙(수)
29 秉(병),東(동)
30 夏(하),昌(창),燮(섭)
31 重(중),敎(교),在(재)
32 謨(모),鎬(호)
33 道(도),漢(한)
34 休(휴),植(식)
35 晋(진),炳(병)
36 喆(철)
37 鐘(종)
38 永(영)
39 相(상)
40 榮(영)
봉화금씨(奉化琴氏)는 남한에 총 4,693가구, 19,6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추원재追遠齋와 1세조 영렬공 금의 단소
실버신문(까치소리)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동성동본의 혼인. 간통제 폐지. 본적지 폐지 등 급변하는 윤리도덕관에 따라 근본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씨족의 근원을 찾아 일가친척의 혈손을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영주지역에 산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의 가문에 대한 연원을 살펴보기로 했다. 조상과 가문에 대한 고정관념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편집자 주 -
효제신양(孝悌信讓)에 따라 충신과 효자 많이 배출한 가문
◎ 본관 및 시조의 유래
奉化 琴氏는 먼 조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들어올 때 琴應이라는 분이 함께 들어와 琴氏 가문을 열었다는 설과 공자의 제자 금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화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이다. 奉化 琴氏의 始祖로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태사인 동원군 容式 이나 세수가 불분명해 容式 의 후손인 英烈公 의(儀)를 1세조로 하여 세를 이어오고 있는 가문이다.
英烈公 儀는 고려 명종(1170-1197) 때 大科에 급제해 벼슬을 두루 역임했으며 특히, 이규보, 이인노, 조충을 길러낸 인물이다.
奉化 琴氏의 奉化는 慶尙北道 奉化郡을 의미하며 과거 지명은 봉성(鳳城)이었으므로 鳳城 琴氏라고도 했다. 琴氏들이 세거하는 곳에 따라 계양, 안동, 강화, 평해, 금산 등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나 이들 모두 奉化 琴氏의 후예들이므로 1983년 族譜 編纂 때 奉化로 統一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고산정孤山亭(경북유형문화재 제274호) |
◎ 역대인물소개
始祖 琴容式 이후 뚜렷한 행적을 남긴 이는 전하지 않고 중시조 儀(1153-1230)가 1184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220년 벽상공신이 됐으며 수태보문하시랑 중서문하평장사판이부사에 치사된 인물이고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英烈公이 청도의 감무로 나가 있을 때 일 처리에 있어서 굽히지 않는 강직함을 보여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 했다고 한다. 여러 차례 과거시험 총 감독관인 지공거를 역임하면서 고려조 유명인물인 이인로, 이규보, 임영령 등을 문하에 두었다.
奉化 琴氏는 英烈公 부터 고려정계에 진출하면서 명문으로 등장해 맏아들 耆는 호부원외랑, 둘째 규는 공부원외랑, 넷째 暉는 좌우위대장군, 다섯째 희는 합문부사를 지냈다. 가까운 집안의 공부시랑, 경상도 안찰사를 역임한 8세 薰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왕명으로 원에 가서 원병을 청하는 역할을 했다.
▲ 봉화 금씨 군위공 종택 |
12세 淑이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낙향해 안동, 예안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특히 다섯 자제가 문과, 무과에 합격해 그가 살던 집을 지금도 오자등과터(五子登科基)라 부르고 있다. 또 12세 克諧는 포은의 문인으로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해 담양군사을 지냈으며 이후 4세가 내리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리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금인배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 방간을 사위로 삼으면서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으나, 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에 패하고 귀양 가게 되자 처족인 琴氏도 영향을 받아 조선조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러한 연유로 금문들은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는 儒學 정신에 입각해 향리에서 忠孝를 실천하는데 노력해 조선조 문과급제자는 14명에 불과하다.
◎ 봉화금씨의 세거 유래
봉화 금씨들은 경북 일대봉화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으며,충북 옥천영암, 경기도 에 터를 잡고 世居하기 시작했고 13세 琴 美 의 후손은 충북 옥천군에 옮겨가 세거했다. 14세琴元彭 이후로 안동군 풍산읍에 터를 잡고 17세 琴士龍 이 경기도 화성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1983년 통계에 의하면 경북 봉화군, 영양군, 안동군, 영주군, 문경군, 대구시, 충북 옥천군, 경기도 용인, 인천시 강화군 등지에 세거해 있다. 특히 봉화군 세거촌은 마을 터가 비봉포란(飛鳳抱卵)형으로 거문고 금(琴)과 조화를 이뤄 가문의 번성을 이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조에 들어와 봉화금씨는 특출하게 높은 관직이나 명예로운 관직에 오른 이는 드물고, 다만 조선 초기에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간을 거처 이조판서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된 금유, 대사간을 역임한 금고, 세조 때 문무 양과에 급제해 문명을 떨친 琴徽 등이 관직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금문의 가훈인 효제신양(孝悌信讓)에 따라 충신과 효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琴蘭洙 는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 왜병 격퇴에 많은 공을 세워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의 동계정사에 제향됐다.
1593년 권율 수하에서 권응수, 김응서 등과 협력해 적막사 40여동을 불사른 금윤선, 조중봉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금산대회전에서 순절한 금응신 등이 있다. 그 외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금경,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난적평정에 기여한 금옥,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다 붙잡혀 옥사한 금달연, 향중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돼 활동한 금용하 등이 있다.
▲ 매헌집梅軒集과 태자리 수운정睡雲亭
▲ 종선정種善亭(경북유형문화재 제264호) |
◎ 현대인물소개
봉화금씨의 대종회는 대종회장 琴億淵을 중심으로 崇祖愛族의 精神을 바탕으로 宗族間의 親睦을 圖謀하고 先祖의 遺業을 繼承시켜 奉化琴氏의 繁榮과 社會的地位向上을 目的으로 1981년 5월 개정하였고, 종보편찬위원회에서는 1984년 1호 종보로부터 2014년 60호 종보 발행까지 금문의 귀중한 기록을 정리하여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근세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1985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봉화금씨는 전국에 2만355명이고, 2000년도 통계에 의하면 7144가구에 인구 2만3489명에 이르고 있어 희성에 속한다.
그리고 부산, 대구, 대전, 포항, 옥천,봉화, 안동, 영주, 용인, 영양, 상주, 문경,태백, 경주지역 권역별로 종친회가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봉화금씨 종손으로는 금철호(琴喆浩)(50세)현재 교직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봉화금씨 영주 종친회장은 금정진(琴政鎭)(76세), 총무국장 금화수(琴和洙)(67세)의 활발한 종무활동으로 타문(他門)의 칭송을 받고 있다. 금번 취재는 성균관유도회(成均館儒道會)영주지부 감사 금동률(琴東律)(70세)께서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송인선 실버기자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보는 곳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