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꼬마리씨 하나의 추억"
- 청도 자계서원,적천사,이호우/이영도 시인 생가,삼랑진 만어사 트래킹
지난 토요일은 겨울속 봄을 만끽한 날이다.이를 때는 누구나 나그네가 되고 싶어 산으로,들로 발길을 돌린다.겨울 여정을 떠나다 찾은 외진 곳에서 젖게 되는 상념은 일상에 찌든 우리네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준다.나는 이런 광경이나 느낌을 황홀경의 풍경이라 말하고싶다.일년에 대여섯번 조우한다.
아무리 좋은 산이나 절,혹은 명소라해도 관광버스가 다니고 몇십명 씩 패거리로 오가는 그런 곳은 될수 있으면 사양한다.등산객을 가득 태워 목적지에 도착해 한차씩 쏟아내면 이들은 죽자 사자 마치 투사처럼 정상까지 내달은다. 그런 산행은 이미 죽은 여정이 된다.여행은 과정 전부가 중요하고 오가는 여정 또한 참으로 중요한데 보통 이런 등산은 그 중간과정을 전부 생략하기 때문이다.
산에 가도 될수 있으면 관광버스가 진입하지 못하고 오직 자가용이나 오프로드차만 갈수 있는 그런 산만을 그래서 나는 선호한다.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트레킹을 좋아하는 몇몇과 함께 나의 애마 물소를 타고 팔조령을 넘어가고 있다.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를 찾아가는 길이다.
유등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이서면소재지 거의 다와서 각남면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동창천을 연결하는 서원다리에서 좌회전하면 고즈넉한 한채의 고가가 마을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뒤로는 부드러운 산능선이 길게 누운 용처럼 포근하게 마을을 품안에 안고 있는 듯하고, 마을 앞으로는 청도천이 흘러, 청도팔경의 하나인 자계제월의 운치를 더해준다. 흔히 보는 평화로운 따뜻한 시골마을이지만 이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이유는 16세기 절의의 선비 탁영 김일손 선생의 얼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자계서원은 절효 김극일, 탁영 김일손, 삼족당 김대유를 향사하는 사액서원이다.
내가 탁영 김일손 선생과 자계서원에 대한 정보를 의미있게 입수한 것은 몇 년전에 지금은 폐간된 부산매일신문에 난 기사와 최근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남명 조식편과 각 분야의 국사학자들이 우리 역대 인물 63인에 대한 평전을 엮은 한국사인물열전을 통해서이다.
탁영 김일손은 사관 재직당시 훈구세력의 중심인물 이극돈의 비행과 스승 김종직의 절의를 나타낸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가 이를 계기로 일어난 무오사화 때 35세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 황우가 회왕을 죽인 고사로 세조가 단종을 죽인 것을 비유하여 이를 비방한 것이라 모함을 당한 사건이다.
훈구파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공훈을 세운 정치세력들인데 고위관직을 독점하고 경제적으로도 그 기반이 막강하였다.이에 비하여 수풀속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라는 뜻의 사림은 고려말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영남지방에 낙향한 길재의 제자들로서 성종때 김종직의 등용이후 관계에 등장하여 훈구세력의 비리를 공격하는 3사의 관리에 주로 포진하였기에 이 둘의 갈등과 분열은 계속되었고 급기야 사화로 이어졌다.
그는 문장과 충절의 선비이며 정서와 풍류도 즐겼으며 탁영금(그가 즐겨 쓰던 거문고)은 신금으로 이름이 높았다.정여창과 더불어 탐승유람과 악양의 뱃노리등으로 서정과 낭만을 찾기도 하였다.중국 사신으로부터 당송팔대가의 거두인 한우의 문장과 방불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탁영이 처형되던 날 그의 고향인 이곳 서원리의 운계천이 피로 물들고 3일간이나 역류하여 이때부터 자계천으로 바뀌었고, 서원 이름도 자계서원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선생의 학풍과 의로움을 기리고자 마을 이름을 서원리라 했다.
그때 심은 은행나무는 한스러움에 못 견디어 올곧은 직필등 탁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라 지금도 울창하다.자계서원에는 선생이 수학한 운계 정사가 아직도 남아있으며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자계의 한맺힌 역사의 상처를 딪고 울창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자계제월은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 앞을 흐르는 청도천의 거울같이 맑은 물에 비치는 보름달의 황홀함과, 와룡산 기슭의 연못을 얼싸안은 자계서원에 보름달의 황홀함과, 와룡산 기슭의 연못을 얼싸안은 자계서원에 보름달이 비치는 아름다운 월경을 말한다. .선생의 숭고한 혼과 정신이 도도히 흐르는 이곳은 청도 사림의 진원지이다.
1518년(중종 13) 김일손(金馹孫)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자계사(紫溪祠)를 창건하여 그의 위패를 모셨다. 1576년(선조 9)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5년(광해군 7) 중건되어 김극일(金克一) ·김대유(金大有)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661년(현종 2) ‘자계’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 복원되었다.
건물로는 묘우(廟宇) ·신문(神門) ·강당 ·동재(東齋) ·서재 ·전사청(典祀廳) ·영귀루(詠歸樓) ·외삼문 ·고자처(庫子處) ·천운담(天雲潭) ·탁영대(濯纓臺) 등이 정갈하게 잘 배치되어 있다.
여기를 조용히 빠져나온 우리는 청도읍을 지나 밀양방면으로 가다가 청도읍 원리에서 좌회전 하여 원리 마을로 깊숙이 빨려들어간다.그림같은 초가집,기와집,슬레이트등 옛집이 간혹 나오고 어떤 집에서는 한낮에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기도 한다.한참을 가다보니 은행나무 두 그루가 떡 버티고 있는 적천사가 나타났다.이 적천사 뒤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화악산인데 청도 남산을 넘어 오면 여기에 이를수 있다.
복사꽃 만발할 때 오면 길 양옆이 전부 복숭아밭이어서 그야말로 무릉도원을 연출한다. 길고 좁은 길이 또한 운치를 더한다. 이 절 주지스님인 덕현스님은 “무엇보다도 2km에 달하는 사찰 진입로가 너무 협소하여 최소한 승용차 두 대가 서로 교행할 수 있도록 도로불사를 위해 진력하고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대로 놔두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적천사는 청도지방 주민들의 정신적 귀의처이며 기도도량이다.
1천 3백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도량은 동화사의 말사로 사기(寺記)에 의하면 서기 664년 (문무왕 4년) 원효대사가 수도하기 위하여 토굴을 지음으로 개창이 되었다고한다.
또 828년(흥덕왕 3년) 심지왕사가 중창하였으며 고승 혜철(惠哲)이 수행한 곳으로도 유명한 도량이다.
고려시대에는 지눌(知訥)이 1175년(명종 5년)에 크게 중창했는데 당시 참선하는 수행자가 500명이 넘었으며 지눌의 중창직전 이 절에는 많은 도둑떼가 살고 있었는데 지눌이 가랑잎에 범 호(虎)자를 써서 신통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도둑떼를 쫓아냈다는 전설로 유명한 부처님의 보처 적천사는 역사 못지않게 기도가피 또한 영험한 곳이다.
임진왜란때 건물 일부가 소실된 것을 1664년(현종 5년)에 왕의 하사금으로 중수하였는데 이때 지금의 사천왕상을 조성하니 지금으로부터 3백 40년의 연륜을 간직한 성보이다.
1694년(숙종 20년)에 태허화상이 크게 중건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한말에 의병들이 이 절을 중심으로 활동하게되자 관병들이 이 절의 요사채와 누각 일부를 소각시켰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천왕문을 들어서서 조계문을 지나면 중앙에 남향한 대웅전이 있고 좌우에 적묵당과 명부전이 있으며 대웅전 뒤쪽으로 좌우에 조사전과 영산전이 자리하였다.
적천사 목조사천왕 좌상이 당당히 문화재적 가치를 높혀주고 있으며 또한 적천사 괘불은 사천왕과 함께 현종 5년에 조성한 것인 데 마에 천연채색으로 관음탱을 정교하게 그렸다.대웅전벽을 따라 최근에 그려진듯한 불화는 부처님 일대기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듯하다.그림 의미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풀어보니 그림의 정체가 풀린다.
이밖에도 대웅전 삼존불 후불탱화도 성보이며 특히 수령 800년을 자랑하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천왕문 우측에 있는데 그 높이가 28m이며 둘레가 11m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고려 명종때 보조국사 지눌이 사찰을 중건하고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주장자 두 개를 꽂았더니 이것이 살아나 800년 역사를 지켜온다는 것이다.
절 주위에는 이 절의 사격(寺格)을 증명하는 부도군이 있는데 18기는 완전한 형태이나 그 외에도 10여기의 부도가 절을 중심으로 산재하여 모두 합하면 28기에 달하는 고승의 부도가 고찰임을 증명해 준다.
대웅전 오른쪽 500m 산속에는 여섯기의 부도군 위쪽에 이 절이 항일운동의 발상지로 해방의 초석을 다졌던 건국기념탑 1호가 5층의 위용을 자랑하며 당당히 자리하니 호국도량으로서도 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절 이름이 바위 적자와 내 천자임을 보아도 예사스럽지 않은 절임을 알 수 있으며 절 주위의 산세가 마치 어머니가 태아를 품고있는 지형이라 나한기도를 하면 득남하거나 자식이 없는 집에 반드시 소생을 얻는 길지라고 한다.사세가 왕성할 때는 도솔암, 은적암 등 4개의 산내암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큰 절에서 30분거리에 도솔암만 남아 기도처로 이용하고 있다.주위에 소나무가 많이 있어 솔향기를 맡으며 걸으며 기도하는 즉 올여름 일반인 및 신도들을 대상으로 명상프로그램을 계획중에 있다한다.
대구에서 왔다고 하는 네명의 보살님들에게 오룡차를 얻어마시며 덕현스님의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떠나야 할 시간이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있었는데 배고픔을 깜빡 잊고 있었다.
봄빛을 즐기며 우리는 이제 청도읍을 지나 유천으로 가는 길이다. 왼편에는 산기슭을 깎아 길을 내는 대구∼김해간 대동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황토빛을 드러낸 산허리가 흉물처럼 보인다. 이호우 시조시인의 생가가 있는유호리는 방금 다리를 지난 다리의 좌우측으로 하천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마을이다. 그러니까 이 마을로 가려면 어쨌든 잠시 밀양땅을 거쳐 다시 청도땅으로 들어서야 하는 셈이다. 도계와 군계가 하천을 경계로 하다보니 생긴 일이다.
한재 미나리마을 가는길이 유호리마을 직전 오른쪽에 있다고 하면 더 설명이 쉬울 게다.
흔히들 한재마을에 가서 그냥 미나리에다가 고기만 먹고 대구로 되돌아 가버린다.정대리보다 더 깨끗하고 아직 잘 모르는 곳에서 미나리를 먹었다는 성취감이나 포만감을 느끼며 말이다. 한재마을을 관통하면 각남면이 나오고 헐티재로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차원을 뛰어넘어 한재의 '굽은소나무'라는 식당에서 새파란 겨울미나리에 돼지고기를 싸서 점심을 채우고 영남인의 영원한 시조시인인 이호우,이영도 시인의 고향인 유호마을에 당도하기로 한다.
유호리(楡湖里)는 청도천과 동창천이 합류하는 평탄한 지점에 노루목 고개를 등지고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 뒤는 산능선이고 앞은 하천으로 산곽수촌(山廓水村)의 풍경이다. 밀양군과 접하여 있기 때문에 청도라기보다는 밀양이라는 감이 짙다. 아마도 유천역(현재 상동역-철도)이 밀양땅에 있으므로 그런감이 짙은 지도 모른다. 고려시대부터 역로가 통하여 역(驛)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이다.
유호어화(楡湖漁火)라.
이도 청도팔경중의 하나이다. 야간에 동창천 하류에서 "관솔불"이나 "유화(油火)"로 고기잡이하는 야경은 물속의 불빛과 더불어 명암을 거듭하는 강 마을의 모습을 그린 한 장의 그림 같다. 이런 야경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같다.그러나 작년 봄에 와도 살구꽃은 없었다.이호우 시인은 다른데서 이 시를 썻는 것 같다.아니면 어쩌면 잃어버린 우리들 현대인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썼는지도 모른다.고향은 아무데도 없다.고향은 우리들 마음에 있고 산악회나 모임이 잘 유지되는 그런 모임의 내부에 있다.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자연을 그리워하며 그곳 품안에 있을려고 한다.헝가리 소설가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를 총체성의 회복이라고 하지만.
이호우시인 동생인 이영도 시인은 누구인가.청마 유치환과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청마 유치환이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李永道)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를 그의 사후에 출판한 것이 1967년 서간집 제목이다.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일찍이 결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에게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청마의 시 《행복(幸福)》 중의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나는 오늘도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했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에서 따온 것이다.
시인이 생전에 ‘강을 따라 곳곳에 정자가 많고 봄이 와서 노고지리들이 하늘에 봄길을 틔워 유록(柳綠) 수양버들 사이로 살구꽃들이 구름같이 무르익고 산의 골짜기와 기암들의 단애에 진달래들이 피를 뿌린듯 붉으면 인근의 부로들이 강에서, 혹은 정자에서 농주에 햇미나리와 수어(숭어)회를안주하여 연일이다시피 시회를 마련했다’고 회고했던 그 마을은 아직도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을까.
엉뚱하게 ‘물침대 입하’라고 쓰여 있는 여관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만큼 이 마을도 현대의 시간앞에서는 버틸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초록색 대문 앞에 이호우·이영도 생가’라는 안내판이 친절히 붙어 있으나 대문은 항상 살짝 닫혀져 있다. 담 너머로 넘겨다 봐도 인기척은 없으나 그냥 살짝 밀치고 들어가면 된다.
원래 이 집은 드물게 솟을대문이 있는 큰 집이었는데 그 대문은 사라졌고, ㄱ자형의 안채와 본채만 남아 있다. 뜰앞에는 한국문인협회 명의로 된 이호우,이영도 시인의 자그마한 동판기념비가 있다.마당에는 목련나무가 서 있고 살구나무 대신 감나무가 군데군데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나도 아려 눈을 감네/라고 노래한 시인의 감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탓일까. 마당 복판의 화단이 여간 정갈한 것이 아니다. 혼자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이호우의 6촌 제수 안주남 할머니가 자기의 솜씨라고 한다.
다행히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시인의 생가를 둘러보다 고개를 들자 바로 집 뒤를 두르고 있는 아담한 푸른 동산이 눈길을 끈다. 그 산은 시인이 ‘옥같이 생애를 다투어 철 다를 줄 몰라라’라고 했던 대나무와 ‘빈 겨울 지지도 못하고 남아 떠는 솔이여’라고 노래한 소나무로 치장하고있어 아쉬우나마 살구나무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듯하다.
생가를 나와 우리들은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본다. 비로소 이 동네의 남다른 구석이 눈에 들어온다. 일제시대의 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 하면 옛날의 시골극장,정미소,소리사(전자제품 수리소)도 보인다. 강변의 좁은 도로를 따라 유천초등학교로 거슬러 올라가자 둑길엔 물쪽으로 고개를 숙인 고목이 남아 있고, 수양버들도 몇그루 눈에 띈다. 그리고 작년 봄에는 강변에 흐드러진 자두꽃이 피어 있던가…, 어렴풋이나마 그 옛날 유천마을의 그림을 떠올릴 수도 있을 듯하다.
밀양 시내를 가로질러 낙동강변을 따라 한참을 달리면 고개가 두 개 나오고 삼랑진읍에 닿는다.두 산길은 밀양강을 내려다보며 굽이친다.오른쪽으로 펼쳐지는 질펀한 들과 산아래 흐르는 푸른 밀양강을 내려다보며 달리는 이 길은 차량들이 거의 없어 고요하다.
1960년대풍의 어느 도회를 연상케하는 그래서 '장군의 아들' 영화세트장 같은 인상을 지울 수밖에 없는 삼랑진읍에 우리는 도착한 것이다.삼랑진은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이어서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했다.기차역도 부산방면과 마산방면으로 여기서 갈라진다.
삼랑진읍은 일제시대의 적산가옥과 6,70년대식의 건물들이 길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마치 시계의 태엽이 정지되어 시간이 멈춘듯하다.조금전 청도 유호리의 거리풍경과도 흡사하다.
삼랑진역에서 좌회전하면 만어사가는 길이다.
자그마한 들이 나오고 들머리 끝에 우곡리라는 마을이 있고 마을을 지나 서 있는 절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산길을 오른다.절까지 오르는 숨가쁜 산길의 호젓한 맛과 절 밖의 황량한 풍경들 그리고 절 앞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과 그너머 무척산의 고운 능선을 헤아리는 재미와 추억은 잊을수 없다.
만어사까지 가는 길은 꿈결같다.문명의 때가 비교적 덜 묻어서 여기에 사는 이들은 아직도 소박한 삶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대여섯채의 촌집이 나타나고 마을 이름도 없을법한 오지마을이 나온다.산닭을 키워 이를 통나무 바베큐 요리를 내놓는다는 허름한 식당도 지나친다.꼬불꼬불 산길을 한 십오여리를 달렸을까.수천,수만가지의 올졸망한 바위들이 신기하게 누워있다.이른바 너덜계곡이다.삼국유사는 이 돌들을 고기라 하여 만어석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여기가 너무나 좋아 몇차례나 온바 있다는 한 시인은 바위 하나하나를 그 생김새에 따라 갈치,고등어,꽁치,명태등으로 명명하기도 하였다.삼국유사를 배출한 동시대의 사람들의 상상력도 지금보다 못지 않았으리라 본다.돌들을 고기라 비유했으니 말이다.
거의 모두 주둥이를 솟구치고 있는 물고기 형상을 하고 있는 수천 개 바윗덩이들이 범종처럼 뎅그렁 뎅그렁 소리나는 종석이 널린 절이 萬漁寺이다.
만어산 정상(해발 670m) 턱밑에 이 만어사가 있고 46년 김수로왕이 창건했다고 한다.건물은 오래된 것이 없어 별 볼 게 없으나 전형적인 고려시대 탑인 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돌로 두드리면 맑은 쇳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탑이다. '1181년 고려 명종 11년에 중창하며 삼국유사의 어산불영 기록을 참고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는 3층 석탑(보물 제466호·일명 보현탑)이다.
또 미륵전이 있는데 미륵전 안에는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돌이 되었다는 5m높이의 미륵바위가 있다.약간 비스듬히 서있는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이 만어사 앞 축대위에 올라서보니 거대한 너덜지대가 펼쳐져 있는데, 이 너덜의 바윗덩이들은 범종의 그것과 흡사한 소리가 나 신비감을 주고 있다.
이 종석지대는 주차장 동쪽 바로 옆으로 바라보인다. 여기의 돌들은 모두는 아니지만 세 개중 한 개는 뎅그렁 하는 목탁소리나 종소리가 울린다.
쇳 소리가 나는 바위들은 대개 밑부분이 단단히 옭죄어 있지 않고 가볍게 얹힌 것들이다. 하지만 얹힌 돌들 중에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들이 있고, 반면 밑부분에 단단히 틀어박힌 돌 중에도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있다. 이로 보아 암석의 질에 따라 종소리가 나고 나지 않고의 여부가 달라지는 것이 확실하다.
만어산 종석 너덜은 폭이 약 100m, 길이는 500m쯤 된다. 골짜기를 가득 채우다시피 하여, 그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되고 있다.
이 곳 스님들 얘기를 빌면 이 종석너덜의 돌들은 청석(靑石)이라서 무게가 다른 돌들보다 유난히 무겁다고 한다. 비중이 다른 암석에 비해 1.5배쯤 되며, 세종대왕때 편경(編磬)을 이 만어사 돌을 가져다가 만들었다고 한다. 석질이 이렇듯 여물기 때문에 석재로도 이 만어사 청석은 쓸모가 커서 일제 때 이미 이 돌을 일본으로 실어내간 적이 있다고 한다. .
땀흘리는 신비의 미륵불도 청석으로 조성했다.
만어사 종석 너덜 앞의 낙왕대. 수로왕이 이따금씩 앉아 쉬곤 했다는 곳이다.
미륵전 뒤의, 동해 용왕의 아들이 화했다는 미륵바위 또한 그 형상이 수면을 향해 떠오르고 있는 물고기의 형상이다. 그 아래의 바위에는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얼룩에 불과한 것 같은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나라에 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심하게 습기가 차는 등, 신통력이 있다고 한다.
혀를 깨물고 붉은 피를 마구 쏟으며 지는 저녁놀의 풍광은 어디 바다뿐이랴.
억산,운문산,가지산과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가 한눈에 들어
오고 저녁놀에 물들고 있는 산봉우
리들의 저녁 예불은 이보다 더하리라.
사바세계 저아래 삼랑진 낙동강
은 그날 저녁놀에 조용히 조용히
깊어만 가고 있었다.
삼랑진읍내 어느 허름한,막 썰어주는 횟집에서 회에 소주 한잔을 걸치고 누군가가 삼랑진읍에 오면 옛날식 다방에 앉아 차를 시켜 마셔보라고 해서 우리는 백마다방에 앉아 향수어린 분위기를 음미한다.
삑삑거리는 녹음기에서 그야말로
....♪♪ 옛날식 다방에 앉아♪♪......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우리 산오름 시지프스 회장님과 오버랩된다.회장님의 애창곡이기 때문이다.
가만. 아까부터 가랭이가 가렵다.긁다가 보니 문디가시 같은게 붙어 있는게 아닌가.문디가시는 자그마한 침같은 것일 테고 이것은 도꼬마리 씨이다.
돌방하니 작은 씨앗에 미세한 바늘이 붙어 있는 것.
아침부터 쏘아대는 아내의 잔소리가 갑자기 그렁그렁하다.
오늘도 어딜 나갈려고 그려.얘들하고 공부도 좀하고 집안 청소도 좀 해주지.작년에 타계한 임영조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도꼬마리씨 하나'
멀고 긴 산행길
어느듯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여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산을 좋하하여 매주 산을 오르는 우리 회원들은 특히 이 시를 항상 외우고 다녀야 할 게다.
두 부부 모두 주말마다 뛰쳐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가정을 위해 어린 얘들이 있는 부부는 둘중 하나는 집에 머물러야 한다.한사람의 희생이 있어야 하나는 자유롭게 다닐수 있기 때문이다.
4행에서 6행까지는 우리 인생의 고비와 위기이다.더 직접적으로는 부부간에 있을 법한 고비이기도 하다.이런 인생의 고개를 넘고보면 위의 시처럼 결국 내 주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내이다.다니면 다닐수록 아내에게 잘해줘야 겠다는 생각 꿀둑같다.
다 떼어내는 듯 싶은데 누군지도 모르고 집에 까지 따라와서 한두개씩 달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 도꼬마리씨이고 이런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게다.이는 바로 내 아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꼬마리 씨는 아내이기도 하고 여행 자체이기도 하고 도시속의 음유시인인 임영조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바로 시(예술)이기도 하다.
먼 여정, 저물 녁에 서서 지난 날을 되돌아보니 남겨진 건 아내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갈 사람은 아내뿐.
산의 정상에 오르고서야 발 아래의 세상이 보이듯 이러한 원숙한 인생의 경지에는 언제쯤 이르러 세상이 제대로 보이는 것일까.
첫댓글 사람이 많은곳보다 인적이 드문곳을 찾아다니는 천석고황님.. 산방님들에게도 트레킹할수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시면 좋겠내요. 님덕분에 이런 좋은글을 대하니 감사할따름이내요..
어느 한 쪽의 희생도 없는 가족 단위의 여행이라면 더더욱 좋을 텐데....그지요? 카페에도 여건이 허락지 않아 등산이 어려운 회원을 위하여 트레킹의 소모임이라도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고황님 번개함하시죠...이곳에 가고싶은디...채금지시~~오~!..번개안하면 도꼬마리씨처럼 바지가랑이 잡고 따라다닐꺼구만요~~!(흔히 말하는 도깨비풀을 말하는겁니까?)
차향님! 이번주는 정모잖아요.다음주나 다다음주에나 한번 번개 쳐서 가도록 하죠
김공! 간만에 그 진가를 보는듯 하오. 예서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분발해 주시오 ㅋㅋㅋ
이런 트레킹 같은 소모임 참석하고 싶군요,좋은곳 있으면 함께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