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혜의 자연 그대로
-손에 닿을 듯한 지척의 섬, 대마도-부산에서는 고작 49.5km,
♥ 프롤로그 - 넋두리 몇 마디
내겐 대마도는 항상 안타까운 섬이다. 그 하나는 지척에 있어도 쉬이 찾지 못해 안타깝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국토가 아님에 안타깝다. 대마도가 우리 영토라면 여권도, 비자도 필요 없을 것이요, 출국 수속이나 입국 수속 같은 귀찮은 과정이 또 무슨 소용이람. 제주도보다 가까우니까 배 삯도 쌀 것이고. 그러면 이웃 마을 다녀오듯 관광하고, 등산하고, 낚시도 하고, 자전거 하이킹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인 데도, 그럴 수 없는 현실이니,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섬, 대마도이다. 그래서 오늘도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며, 국력을 키우고 힘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중국의 요동반도, 만주벌판과 함께 대마도도 우리 땅으로 되돌아 오게 해야 한다고 넋두리해 본다. 아니, 우리 대에서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후대에서라도 반드시 찾아 와야 할 땅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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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본래는 우리 땅인 것 같은데, 우리 조상들이 빼앗겼는지? 그들에게 준 것인지? 귀찮다고 버린 것인지? 어찌된 것인 줄은 잘 모르지만, 지금은 남의 땅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욱 그 섬 대마도에 가보고, 가서 뭔가 느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동안 그 곳 대마도에 갈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아 무던히도 애를 태웠다고나 할까.
그런데 다행히도 2010년 3월 13일(토)부터 3월 14일(일)까지 1박 2일로, 여행 경비가 여느 경우보다 1/3이나 싼 20만원에 대마도 관광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주선하신 여러분들, 특히 신동성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대마도는 어떤 섬인가
대마도(對馬島, Tsushima)는 나가사키현에 속하며 쓰시마시 아래에 6 개 읍이 있다. 총 면적은 709㎢ 로서 제주도의 1/2의 크기이며 거제도의 1.7배 정도로 일본에서 3번째로 큰 섬이다, 이 섬은 상(上)대마, 하(下)대마로 구분하고 남북 길이 82km, 동서 18km로 새우 모양의 섬이다.
지리적인 거리로 따지면 일본 본토보다는 우리나라와 더 가까운 섬이다. 부산에서의 거리가 49.5km로 일본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까지의 거리는 138km이다. 완도에서 제주도까지의 거리가 90km이니 제주도보다도 더 가까운 섬이다.
대마도는 본섬 외에 109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사람이 사는 곳은 5곳, 나머지는 모두 무인도이다. 섬 전체의 88%가 해발 400m 내외의 산이며 울창한 "스기(삼)"나무가 대부분이다. 시에서는 공짜로 나무를 배어 가라고 하는데도 운반비 등 부대비용이 만만치 않아 모두 포기한다고 한다. 그리고 본토에서 볼 수 없는 많은 대륙계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예부터 대륙(한반도)과의 인적 물적 교류의 창구로서 많은 사적 등 문화유산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섬이기도 하다.
인구는 약 4만 6천 명 정도인데, 국경의 섬이다 보니 전략요충지가 되어 이들 중 반 이상이 군인 또는 공무원이며 실제 토착주민은 2만여 명에 불과하다. 이중 40%가 이즈하라항에 거주한다. 젊은이는 드물고, 거의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대마도의 주력 산업은 관광이지만 관광 인프라(Infra)는 턱없이 부족하다. 섬 전체에 변변한 회사도, 공장도 없어 모든 공산품은 외지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 인(因)해 깨끗한 공기와 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은 바다, 그리고 조엽수림을 주축으로 하는 원시림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대마도의 관광자원으로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본토보다 한국이 더 가까워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반도에 의존도가 높아,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95%가 한국인으로 대마도는 일본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국만 바라보고 사는 처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대마도의 최남단 이즈하라항으로 향하다
08 : 00 부산 국제 여객선 터미널 1층 대아고속해운 앞 피켓 옆 ‘딸기 여행사’(부산시 남구 대연6동 1763-2 2층, 051-643-8870, 8871)의 이윤형 가이드와 미팅했다. 그의 핸드폰 번호는 한국에서는 011-841-9834이고, 일본에서는 080-1791-8205이다. ‘한 개의 핸드폰만으로도 로밍하면 두 곳에서 사용하는 데 있어 별로 불편이 없을 텐데……’, 하고 괜한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대마도 여행은 대아해운의 독점 항로이니, 독점에 따른 횡포가 없을지……???
09 : 00 출국 수속을 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입구 관문> <씨플라워호에 승선>
09 : 30 대아고속해운 소속 씨플라워호에 승선했다. 드디어 부산국제 여객선 터미널을 출발하여 가지 못해 늘 애만 태우던 대마도로 향해 가는 것이다. 부산 쓰시마 간은 대아고속 해운이 매일 1회(화요일 제외) 왕복 운행하고 있으며, 쓰시마 북부의 히타가쓰항까지는 불과 1시간 20분 정도, 남부의 이즈하라항까지는 2시간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는 매우 쾌청하다. 약간의 파도가 쾌속선을 흔들었으나 배는 힘차게 나아갔다. 미리 확인해 본 일기 예보로는 오늘 대마도도 맑은 날씨가 계속 된다고 한다. 그리고 타고 가는 씨플라워호는 그렇게 깨끗하거나 편하지는 않았지만 불편하지도 않은…. 정말 그냥 평범한 여객선이었다.
낚시 가는 분들이랑, 등산 가는 분들이 우리와 같은 일반 관광객들보다 많은 것 같았다.
<씨플라워호 내부의 모습>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11시경 되어서 눈앞에 나타난 것은 육지, 저것이 바로 대마도로구나 하는 설렘을 갖게 했다. 그런데 내가 탄 배는 대마도와 동쪽으로 3-4km 떨어진 바다에서 일정한 간격을 사이에 두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부산서 출발하여 약 3시간, 대마도의 가장 남쪽 지역이면서 대마도시청이 있는 이즈하라항이었다. 그 때의 시각이 12시 30분.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국을 담당하는 일본의 출입국 관리들은 우리나라 말로 묻기도 하며 우리를 입국시켰다. 그들이 우리말을 하니 의외라 싶기도 하고 반가웠다.
<이즈하라 항구의 풍경> 이즈하라 시내의 모습
이즈하라항의 전경(全景)
우리는 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마친 후, 바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
그들 특유의 별도로 제작한 도시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락 그대로 밥을 먹는가 보다, 그러나 식당에서는 국물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 별도의 시락국을 끓여 우리에게 제공했다. 그런데 젓가락만 주었다. 숟가락은 없었다.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냥 국물 그릇을 들고 마시란다. 갑자기 상놈의 짓이라 느껴졌다. ‘섬나라 시-껌은 뱃놈의 짓거리가 그대로 드러난다’고 욕설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어찌 사내 대장부가 점잖지 못하게 국그릇을 들고 후룩룩 마셔야 하는지? 그래도 숟가락을 안 주니 나 역시 별 수 없이 국그릇을 들고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법에 따라야 하고…….
다른 이야기 하나. 일본의 식사는 개인 밥상으로 모든 것이 철저히 개별적이었다. 우리는 찌게든 비빔밥이든 한 그릇에 이 사람 저 사람의 숟가락이 들락거리며 먹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면 항상 별로라 생각했다. 여럿이 함께 한 그릇에 있는 죽을 먹었을 때, 죽의 1/3 도 못 먹었는데도 끈적거리던 죽이 풀어져 물이 되는 경우를 보고 뭔가 개운하지 않는 비위생적 현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개인 밥상이니 진실로 마음에 들었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한국에서는 여자들끼리 팔장을 끼고 걷거나, 남자들끼리 어깨에다 손을 얹고 걷는 것은 어디에나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례란다. 또 한국에서는 친구나 가족과 같은 이불을 덥고 자는 등, 물건을 공유하거나 몸과 몸의 접촉을 중요시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은 되도록이면 상개방과의 거리를 없애려 하고 일본은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려 한다는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시에도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의 모든 것은 쪼막쪼막하고 자그마하고 이쁘고 앙징스럽다. 도로도 폭이 너무 좁아 이 길로 차가 제대로 다니기나 하겠나 싶어도 그 좁은 길을 이리저리 피해 잘도 다니고 또 다니는 차들이 너무 귀여울 정도로 작은 차들만 다닌다. 우리나라 1500cc급의 엘란트라, 엑셀, 베르나 정도의 차는 이곳에서 중․대형차에 아마 속할 것이다. 대부분 마티즈나 티코 정도의 아주 작은 차들이 주류를 이룬다. 밖으로 허세를 내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도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일 것 같다. 그리고 좁은 도로의 중간에 분리선 같은 표시 라인이 대부분 없었지만, 그래도 사고가 거의 없다니 그들의 질서 의식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리고 택시의 모양도 네모형이 참 많았고 식당 앞의 개천은 맑다 못해 너무 맑아서 거짓말 조금 보내서 마셔도 될 정도로 깨끗하였고 쓰레기 봉지하나 구경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물고기 떼들이 유유히 노는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관광 중, 휴지 하나를 발견했는데, 한국인이 버렸을 거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국 관광객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대부분의 집 앞에는 미니 화단들이 조성되어 있어서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는 일본임을 실감케 했다.
점심 식사 후, 가이드가 오늘 일정에 대해 안내했다. 몇 군데 우리나라와 유서 깊은 곳을 방문한단다.
‘딸기 여행사’의 이윤형 가이드의 일정 안내
먼저 수선사를 방문했다. 점심을 먹은 곳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 백제시대 비구니 법묘 스님이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아담하고 소담스러운 절이다.
<수선사의 입구의 대문 모습>
수선사에는 무엇보다도 최익현 순국비가 있는 곳이다. 조선 말 1905년 광무 9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여 다음 해 6월에 제자 임병찬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 중 체포되어 1906년 대마도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순국비는 1986년 한․일 양국의 뜻있는 사람들이 세웠는데, 이곳에 비를 세운 이유는 순국한 곳이 대마도이고 이곳 수선사에서 장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순국비 옆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었다.
<최익현 순국비>
‘임은 갔으나 임의 높은 뜻과 고귀한 정신은 살아남아 길이 후세에 애국애족의 정신을 심어 주고 있으니, 이제 아무런 걱정없이 구천에서 편히 쉬소서.’하고 순국비를 참배하면서 마음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일본에서는 사산이나 낙태한 아이의 영혼인 미즈노꼬(한국에서는 수자령이라고 한다.)를 보호하는 자장보살을 어린아이용 턱받이나 사탕이나 장난감 등을 옆에 놓기도 하며, 큰 사찰에서는 수백명의 자장보살을 모시기도 한다. 그래서 대마도에서는 빨간 턱받이를 한 자장보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수선사의 빨간천을 두르고 있는 자장보살>
다음으로 일본 통신사가 묵었다는 ‘국분사’를 찾았다.
학봉 김성일 선생의 시비 가 서 있는 사찰 입구와 ‘국분사’
좌편에 정재(淨財)라는 함에 100円을 투입해야 들어 갈수 있는데... 여기에서만 입장료? 아니 정재비를 받고 있었다. 정재 즉 청소비라고 한다.
과거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숙사였다는 ‘국분사’에 서산선사와 김성일(金誠一;1538∼1593)비가 세워져 있었다. 김성일(金誠一)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며 학자로 호는 학봉(鶴峯)이며, 안동 임하 출생이다.
쓰시마번(對馬藩)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위해서 전력을 다하였고 약 200년 간 12회에 걸쳐서 통신사 사절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한 교류와 우호관계를 21세기 한․일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대마 역사관 자료관" 앞에 1992년 조선통신사비를 세웠다고 한다.
조선통신사비
낮 12시가 되면 우리 귀에 익숙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고향의 봄' 동요가 흘러나오는 대마도(이즈하라)시청을 지나고 이웃에 있는 고려문을 들어서면 조선통신사비가 있고 대마역사자료관이 있다.
대마 역사민속 자료관 앞의 고려문
이 고려문(門)은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세웠던 솟을대문이다. 현재의 형태는 태풍으로 인해 훼손된 것을 1989년에 복원한 것이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국교가 정상화 되고 외교사절의 목적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모두 12회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파견된다. 외교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 학문을 논하는 종합적인 축제였으며 한·일간에 문화가 흘러가는 통로 역할을 했다. 처음 세 번째까지는 막부 장군의 국서에 대한 회답과 전쟁 때 잡혀간 포로를 송환하는 임무를 띠었으며 나머지 9번은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을 축하하기 위해 에도(江戶, 도쿄)까지 갔다 왔다. 이는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조정 탐색의 목적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 모자 쓰고 말 위에 올라탄 이들은 모두 조선인, 모자 벗고 걸어가는 이들은 모두 일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가늠해진다. 자료관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보존되어 있었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육로로 간 뒤, 부산부터는 쓰시마 도주의 안내를 받아 배로 쓰시마를 거쳐 시모노세키~오사카~요도카와(淀浦)에 상륙했다. 그 때부터는 육로로 쭉 교토까지 간다. 1711년 통신사 때 일본측의 접대 지출 총경비는 은 1백만 냥, 인부 33만 명, 말 7만7천600 마리 등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그 다음으로 ‘팔번궁 신사’와 ‘하치만궁 신사’의 방문으로 일본 신사문화를 찾게 되었다.
여기는 팔번궁 신사 이다. 대마도의 대표 격인 신사(神社)인데 입구에는 어김 없이 "토리이"가 방문객을 맞는다
하치만구 신사와 신사 앞에 있는 일본 국화(國花)인 국화(菊花) 문양의 벚꽃(사꾸라)
신사 앞 마당 한곳에는 우리나라 커피 자판기 같은 기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동전투입구에 100円을 넣으면 그 날의 운수가 적힌 점종이가 자동으로 출력된다. 그날 운수가 吉하면 점종이를 집에 가져가고 凶하면 토리이(鳥居)나, 나무에 둘러쳐진 새끼줄에 매달아 둔다고 한다. 결국 그날의 흉한 운수는 神에게 맡기는(위탁)한다는 것이다. 점종이자판기? 나뭇가지에 매달아 둔 점종이(흰 색)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신사 참배 때에는 먼저 두 번 손바닥을 쳐서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허리를 굽혀 합장한 뒤 다시 두 번 손바닥을 치고 물러난다고 한다
神社 내부 모습
여기 신사에 기부한 사람에게는 금액과 이름을 각명하여 비를 세운다.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다음으로 덕혜옹주의 결혼 봉축비를 찾았다. 금석성에 있었다.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이 회갑 때 얻게 된 고명딸 비련의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쓰시마번주 소다케유키 백작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정혜(正惠)가 있었으며 1955년 이혼 후 1961년 귀국한 덕혜옹주는 1989년 낙선제에서 별세하였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처음에는 카나이시 성내에 대마도 거주 한국인들이 건립했는데, 2001년 11월 10일 대마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복원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와 대마도주의 아들 쇼다케시 백작과의 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비 안내 표지판
시내 하천 - 벽과 바닥 공사가 우리 보단 세련되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슈퍼마켓
<일본인이 숭배하는 사당-거의 집집이 있었다>
관광을 마치고 면세점에 들린 후 25명이 3대의 봉고에 나눠 타고 오늘의 숙소인 대아호텔(T.0920-52-3737)에 갔다. 대아호텔은 씨플라워Ⅱ를 운행하는 대아고속에서 운영하는 호텔로서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어 전망이 아름다우며 호텔 부대시설로 대중온천이 있어 무료로 이용이 가능했다
대아호텔
호텔에는 아직 이른 봄인데도 제주도처럼 유채꽃이 피어 있었다. 확트인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7시에 저녁 식사란다. 6시부터 목욕탕에서 목욕할 수 있다고 했다. 여장을 풀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탕의 시설은 미흡했으나 냉․온탕의 물은 좋았다. 충분히 피로를 풀고 방으로 올라오니, 아직 7시가 아닌데도 저녁식사가 완료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개인별 밥상이었다. 그 밥상을 각자 들고 가서 먹으면 되었다. 반찬은 4-5가지였으나 그 내용면에서 오늘 저녁은 좀 달랐다. 개인별 회도 몇 점 있었고, 초밥도 2-3가지 있었다. 무엇보다 다른 것은 특별히 마련한 회였다. 우리는 활어를 즐기나 호텔에서는 급냉시킨 선어(鮮魚)회를 제공했다. 지난 번 오사카에 갔을 때는 접시채 먹는 회는 구경할래야 구경할 수 없었는데, 오늘 저녁은 접시 채 먹는 회였다. 일본에서 접시 채 몽땅 먹는 회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며 가격도 만만찮다고 했다. 이번 대마도 연수단 단장님의 특별 배려가 고마울 뿐이다.
저녁을 먹은 후 잠시 산보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다들 산보한다든가 삼삼오오 모여 놀았으나 우리 부부는 방으로 들어가 TV를 보면서 휴식을 취했다. 배를 타고 온 탓인지 피로했다.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는가 보다.
◆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 대마도의 북단으로, 그곳의 문화 유적과 자연에 빠지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6시에 목욕탕 문을 열었다. 목욕 마니아로서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인 목욕을 위해 어김없이 목욕탕을 향했다. 그런데 호텔 앞 유채꽃이 너무 아름답기에 서둘러 목욕을 끝내고 유채밭을 향했다. 사진도 찍으며 즐겼다.
유채밭에서 포즈를 취한 아내와 일행들
그러다가 7시에 기상, 8시에 아침 식사, 9시에 호텔을 떠난다는 이야기에 단체 생활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시계를 몇 번이고 보기도 했다.
오늘 우리를 태우고 다닐 버스는 45인승 대형 버스는 아니지만 우리 일행 27명이 타고 나서도 몇 좌석이 남는 중형버스였다. 버스는 이즈하라항의 대아호텔을 떠나 바로 북쪽으로 향했다.
382번 국도는 대마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유일의 국도이다. 험준한 이곳 지형 탓에 매우 비좁은 왕복 2차선 도로는 맞은편에서 좀 큰 차라도 오면 비켜서고 조심스레 지난다. 대마도에는 터널을 100여 곳이나 뚫었단다. 운전석이 오른편에 있고 주행선도 우리나라와는 반대 차선으로 주행한다. 가이드 말로는 3일 정도 지나면 이곳 운전 습관에 적응이 된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클락션을 눌러대는 우리와 달리 통행자 위주의 일본 운전습관은 클락션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커브에서 비켜준 상대방 운전수에게 감사의 클락션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마도에는 도로에 과속방지턱이 없었다.
이즈하라 시내에서 한 30분 달렸을까? 다리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 다리를 만제키다리라 했다. 하(下)대마에서 상(上)대마로 연결하는 만제키 다리니….
<만제키 다리>는 대마도의 남섬과 북섬을 갈라놓은 다리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러․일 전쟁 때까지 상․하대마도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구일본 해군의 군함 출입을 위해 가운데에 운하를 파서 남, 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섬을 동․서의 바다로 연결하였다고 했다. 현재의 다리는 세 번째로 만든 다리라 했다. 차에서 내려 잠시 다리를 구경했다. 아름답지는 않고 투박하게 설계된 야무진 다리였다. 그러나 이 다리 위로 산책하면서 바라본 아소만의 풍경은 절경이었다.
<만제키다리>
다시 10여 분을 달리다가 차가 멈춘 곳은 에보시다께 전망대에 오르는 입구이었다. 에보시다께 전망대는 대마도의 거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아소만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환상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에보시다께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소만
대마도의 중앙에 펼쳐진 아소만은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과 무인도가 이루어 내는 환상적인 곳으로 이키쓰시마 국립공원에 지정되어 있는 잔잔한 파도의 해역이다. 특히 아소만의 시카약 등 대자연 속에서 즐기는 레저는 우리 한국인 관광객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했다.
에보시다께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도중
그 전망대에서 내려와 와타즈미 신사에 들렀다.
와타즈미 신사는 고대신화시대의 신사로 현재 천황의 127대 조상과 관계되는 유서깊은 신사였다.
와타즈미 신사1
와타즈미 신사는 일본 천황의 조부,조모를 모시고 있는 海宮으로 옛부터 용궁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본전 정면에서 아소만 바다까지 토리이(鳥居, 우리나라의 솟대)가 나란히 서 있다. 덕혜옹주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며 규모는 우리나라 사찰의 지장전 정도로 규모가 작은 것 같다. 일본 신사가 대부분 다 그렇다.
와타즈미 신사2
여러 개 토리이의 바다로 향한 방향을 측정한 결과 경주와 일직선 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조 시 2m 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 앉아 파도가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고 했다.
두 개의 나무 기둥을 두 개의 나무가 가로지르는 모양인 '토리이(とりい, 鳥居)'는 신사의 입구 역할을 하는 것으로 '토리이(とりい, 鳥居)'의 안쪽은 신성한 구역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토리이(とりい, 鳥居)'는 '토리(とり, 鳥, 새)'가 '이(い, 居, 있는 곳)'라는 뜻으로, 새가 앉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신사에 수컷새를 봉납할 때 새가 앉는 곳으로 사용된 것인데, 신사의 입구 역할을 하면서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대한 새가 앉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래서 '토리이(とりい, 鳥居)'는 신이 사자로 내려보내는 거대한 새가 앉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토리이(とりい, 鳥居)'는 수없이 많은 신사의 입구에 반드시 있기 때문에 일본을 상징하는 문화적 코드로도 사용되고 있다.
신사에는 신사의 일을 관장하는 주인이 있는데, 이를 '칸느시(かんぬし, 神主)'라고 한다. '텐노오(てんのう, 天皇, 천황)'로 불러야 할지, '일왕(日王)'으로 불러야 할지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 국왕의 직업은 바로 '칸느시(かんぬし, 神主)'다. 일본의 건국 신화에 의하면 일본은 신이 만든 '신코쿠(しんこく, 神國, 신국)'라고 하는데, 그 신을 모시는 신사의 '칸느시(かんぬし, 神主, 주인)'가 일본의 국왕인 것이다.
와타즈미 신사 관람 후에 1시간여 차를 탄 후에 도착한 곳은 역관사 순난비와 무궁화가 있는 한국전망대이다. 대마도 가장 북단에 위치한 와니우라는 한때 왜구의 본거지였으며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요 집결지로 군량을 보관하던 곳이라 한다. 현재도 일본의 공군과 해상 자위대가 부근에 주둔하고 있어 그 군사적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는데, 이곳 와니우라의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에 팔각정 건축물 한 채가 서 있다. 바로 이 건물이 '한국전망대'이다.
한국전망대
쓰시마 최북단에 위치한 "한국전망대"는 일본에서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이다. 건물 안에는 부산, 김해, 진해를 가르키는 지도판이 있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부산시의 거리가 보이고, 특히 야간에는 부산항의 불빛이 아름답다고 한다. 이 전망대는 설계 단계부터 한국 학자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벽돌 등 한국산 자재 사용 등으로 철저하게 한국풍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으므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다 건너편으로 부산시와 거제도까지 바라다 보인다고 한다. 그 날은 시야가 흐려 부산과 거제도가 보이지 않았다.
전망대 앞의 공군과 해군 일본자위대 시설물
한국전망대 바로 옆에는 '조선 역관사 조난비가 세워져 있다.
와니우라 이곳은 한국과 대마도 간의 주요 항로가 되어 왔으며, 1703년 2월 5일(음력, 숙종 29년) 당시 대마도에서 5대 번주(藩主, 섬 전체 우두머리) 종의진(宗義眞)이란 자가 습봉(襲封, 제후가 윗대의 영지를 물려받음)하는 일이 일어났다.
조선역관사 조난비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사절단 파견을 위하여 실무진들을 먼저 파견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역관(譯官)이다. 역관은 일종의 통역사이지만, 당시에는 단순한 통역 이외에도 실질적 외교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에서 파견된 역관 108명과 이들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측 역관 4명이 부산항을 떠나 대마도에 입항을 하기 직전,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에 의해 그만 앞바다의 암초들에 의해 배가 좌초되면서 112명 전원이 사망을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조선역관사 조난비'는 바로 이때의 사고를 추념하고 당시 사고의 배경이 선린우호를 바탕으로 한 국제교류에 있음을 감안하여, 1991년 3월, 한․일 양국 유지들의 힘을 모아 세워진 비이다. 비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이러한 유래와 함께 당시 사망한 112명 역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이 서 있는 기단 역시 의도적으로 112개의 돌로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부산과 핸드폰 통화가 된다고 하기에 시범적으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봤는데 그럭저럭 통화가 되었다. 대마도에서 핸드폰 통화가 로밍 없어도 된다는 것은 진실임이 증명되었다고나 할까.
거기서 우리 한국을 조망하다가 도노자키로 가서 점심을 먹고 일본 100선 해수욕장에 해당하는 미우다 하마 해수욕장으로 갔다. 일본 100選 해수욕장으로 뽑힐 정도로 작지만 아름다운 해안을 가진 곳으로 맑은 물과 함께 수심이 얕아 가족끼리 휴양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었다. 우리나라의 해수욕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작지만 주변 풍광은 아름다웠다.
미우따하마 해수욕장에서의 호연지기
곳곳에 쓰레기가 파도에 밀려 수북히 쌓여 있는 게 보인다. 하얀 스티로폼 덩어리와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쓰레기들이다. 초록의 산, 파란색의 바다. 그리고 연안의 모래……, 그 위로 수많은 쓰레기들……, 모두다 한국(주로 부산)에서 밀려온 것들이란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대마도 사람들과 함께 일 년에 수 차례 쓰레기를 줍는데 쓰레기의 양이 많아서 역부족이라고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해수욕장에서 나와 우리의 홈플러스와 같은 대형 마트에 들러 구경겸 필요 물품을 구입한 후 히타카즈항으로 이동했다.
16 : 00 대마도 히타카츠항에서 드림플라워호를 타고 부산으로 향발했다. 약 1시간 20분이 지난 후 17:20분에 부산국제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간단한 입국 수속 후 1박 2일간의 짧은 여정으로 인해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 에필로그-이번 여행에서 발견하고 배운 것은?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대마도와 우리는 문화가 차이는 큼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은 음식점에 먹을 것을 들고 가는 것은 금지한다, 주문한 것만 음식이 나오지 우리처럼 기본음식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신용카드 결제가 일상화되어 있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은 술을 조요히 마시고 옆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려 마시는 일이 없고 손윗사람과 함께 담배를 피운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 여성은 없다. 반드시 꿇어 앉는다. 그리고 일본 화장실은 휴지를 변기에 버려도 막히지 않아 안심하고 휴지를 변기에 버리도록 했다. 물이 좋아 바로 수돗물을 마셔도 괜찮았다.
가장 인상 깊은 쓰시마의 좋은 점은 자연이 너무 아름답고, 공기가 아주 맑았다. 대체로 조용하고 친절했다. 그리고 마을들이 모두 깨끗했다는 점 등이다.
이들 외의 대마도에서 ‘내가 느낀 일본이 한국과 다른점’은
1. 도시와 농촌과 산촌에 있는 도로가 매우 좁다.
2. 농촌의 집들이 아주 큰 편이나(방들이 작다)넉넉해 보인다.
3,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하고 서로 양보 운전을 잘 하고 있다.
4. 자동차 차고가 아닌 길가에 세워 둔 차가 없다.
5. 산에 산소가 없고, 절이나 동네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납골당)가 있다.
6. 시내가 맑아서 물고기가 헤엄쳐 다닌다.
7. 식당에서 주는 음식이 개인별로 따로이다.
8. 다방과 노래방이 드물다.
9. 관광지에 가든 식당과 여관이 없다.
10. 관광지에 유인 매점이 거의 없다.
11. 생선회를 좋아하면서도 바닷가에 횟집이 없다.
12. 관광버스에서 노래하고 춤추지 않는다.
13. 길에 사람이 거의 없다.(모두 직장에서 일)
14. 집집마다 쓰레기 분리 수거를 잘 하고 길에 쓰레기가 전혀 없다.
15. 집집마다 꽃을 많이 가꾸고 있다.
16. 친절하고 인사를 잘 한다.
17. 아이들이 드나드는 전자 오락실이 없다.
18, 병원과 약국이 드문 편이다.
19, 간단한 약은 슈퍼에서도 판다.
20. 교회나 성당이 보이지 않는다.
21. 마을마다 신사가 있고, 거리 모퉁이에 작은 집 모형을 만들고 작은 불상 같은 것을 비치하고 예배한다.
22. 보신탕 등 보신 식품을 파는 간판이 없다.
23, 목장이나 가축을 집단적으로 기르는 곳이 안 보인다.
24. 과수원이 안 보인다.
25. 까치와 갈매기가 없고 까마귀와 독수리, 매가 많다.
26. 대부분의 가옥이 목조 기와집이다.(습기가 많고 지진의 위험 때문인지)
그런데 그들은 우리에게 원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쓰시마 섬을 방문하신 한국인 관광객 여러분께!
쓰시마에서는 한국인과 습관 차이로 이해서 쓰시마 도민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사항을 지켜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합시다.
1. 일본에서는 차는 좌측 통행, 보행자는 우측 통행이므로 주의하십시오
2. 쓰레기는 반드시 숙소로 가져가거나 쓰레기통에 버려 주십시오.
3. 화장실에서 사용한 휴지는 반드시 변기 안에 버려 주십시오.
4. 일본의 음식점은 주류와 그 외의 음식물을 반입하게 되면 반입료를 내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전에 양해를 얻기 바랍니다.
5. 스낵바 이용 시에는 사전에 요금을 확인해 주십시오. 시간제로 요금을 정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6. 슈퍼에서 계산을 하기 전에 음식을 먹거나 상품을 개봉하지 마십시오.
7. 온천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물을 끼얹거나 샤워를 해주십시오.
8. 시라다케는 신안의 산이므로 나무를 베거나 풀을 베지 마십시오.
9. 나무에 산악회 표시 리본을 달지 마십시오.
10. 일본 법률에서는 외국인의 밑밥낚시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의 어업 규제에 관한 법률 제 3조를 위반할 경우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400만엔 이하의 벌금, 또 이 두 가지가 병가될 수 있습니다.
11. 전복, 소라, 성게, 굴, 다슬기. 떡조개, 미역 등의 수산물을 어업 조합 이외의 사람이 채취하는 경우엔 20만엔 이하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어업법 제 14조)
대마도….
그 곳은 분명 우리의 땅이었다.
척박한 땅이었고 조선조나 일본에서도 대마도는 버려진 땅이었다.
대마도는 세종 때 우리 영토에 편입되었다.
대마도는 막부시대 이전까지 일본 땅으로 속한 적이 없다.
당파싸움에 휘말린 우리 조정의 못난 탓으로 대마도는 관심밖의 땅이 되어 버렸고
그틈에 일본은 대마도를 발판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대마도는 일본땅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작금에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 시점에서 독도는 우리 땅임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옛 우리의 땅이었던 대마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
대마도를 '국제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드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모든 국가 간의 분쟁에서 그러하듯이 그것은 국력이 우선된다.
비록 지금은 일본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을 지라도
국력을 키워 대마도를 우리의 땅으로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대마도는 광개토대왕 비문,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적 근거가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마도의 심벌 "들고양이" 보도 블럭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마도 여행의 경우>
일반적으로 1박 2일인 경우 일요일 출발은 249,000원, 수요일과 목요일 출발은 279,000원, 금요일, 토요일 출발은 309,000원이다. 2박 3일인 경우 월요일 출발은 369,000원, 수요일과 목요일 출발은 399,000원, 금요일, 토요일 출발은 419,000원이다. 이는 이즈하라의 대아호텔 급 2인 1실 기준이다. 전(全)일정 숙식, 선박비, 부두세, 현지 교통비, 여행자 보험 ,기사&가이드 봉사료 포함되나 희망 옵션은 유따리 해수온천 1,000엔(한화15,000원), 아소만 체험 관광(유람 +선상낚시+생선회) 3,000엔(한화40,000원), 생선회 1,000엔(한화15,000원), 특식(이시야끼, 이리야끼) 각 3,000엔(한화 40,000원)등이 있으며, 모든 옵션은 출발 전 예약해야 하며 사전 예약 없이 현지에선 할 수 없다.
● 대마도 연수 참가자
연번 |
성명 |
성별 |
근무처 |
비고 |
연번 |
성명 |
성별 |
근무처 |
비고 |
1 |
오용술 |
남 |
부산시교육청 서기관 |
|
14 |
김영숙 |
여 |
개인사업 |
|
2 |
정한숙 |
여 |
오용술 처 |
|
15 |
김옥희 |
여 |
동진연마 대표 |
|
3 |
이성형 |
남 |
부산시교육청 서기관 |
|
16 |
정형원 |
여 |
느낌광고기획 |
|
4 |
이형우 |
여 |
이성형 처 |
|
17 |
양수목 |
여 |
삼성생명 |
|
5 |
오흥기 |
남 |
부산시 교육청 사무관 |
|
18 |
임숙영 |
여 |
영진여행사 대표 |
|
6 |
이욱환 |
남 |
부산시 교육청 사무관 |
|
19 |
김순점 |
여 |
대명여고운영위원장 |
|
7 |
신윤순 |
여 |
부산시 교육청 사무관 |
|
20 |
마석황 |
남 |
부산정보고 교사 |
|
8 |
김종원 |
남 |
전 전자공고 교감 |
|
21 |
신금봉 |
남 |
다우치과 원장 |
|
9 |
신동성 |
남 |
성심보건고교장 |
|
22 |
정원근 |
남 |
가스안전공사 부산지사 과장 |
|
10 |
신기성 |
남 |
(주)중앙교육 |
|
23 |
정원태 |
남 |
거창대성고 교감 |
|
11 |
신용은 |
남 |
전 시청과장 |
|
24 |
배수열 |
남 |
대덕여고 교사 |
|
12 |
김경란 |
여 |
상당중 교장 |
|
25 |
김영숙 |
여 |
배수열 사모님 |
|
13 |
강금주 |
여 |
이듬갤러리 관장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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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산은 대마도가 지척이라 참 가기가 쉽군요! 본래 독도도 우리 땅, 대마도도 우리 땅 아닌가요? 근데 사진이 하나도 안 나왔답니다.
파일을 처뭅해서 올리려고 했지만 용량이 커서 안되는 군요. 사진을 복사해서 붙였지만 안되는 군요. 배수열 선생한테 연락해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