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현감공(21세 휘 대성)의 재고증이 필요하다.!
장천문중 내 宗派는 谷城縣監公(諱 大成)派다.(기묘보 1卷 p117~204) 公은 仁遜의 子요 晉寶의 孫이며 習讀公 由亨의 曾孫이다. 生終年 미상이고 묘소는 장흥군 남면이다.
1. 주요행장 (1999년 己卯譜 지장록 p103 존재공 작성 충의록 내용) :
都摠(武科)經歷으로 丙子胡亂(1636~1637)을 당하여 1)東宮이 심양으로 들어가는데 2)익위사(翊衛司) 관원을 모두 무신만 뽑아서 任命하니 무신이 모두 분이 나서 성을 내어 말하기를 평상시에는 3)桂坊의 좋은 벼슬은 문관이 모두 탈취(奪取)하고 이제 멀리 사지에 가는 때를 당하여서는 도리어 우리들을 가게 한다고 하면서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公이 홀로 큰소리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비록 임금의 명령이 없더라도 마땅히 앞을 다투어 자청해야 하거늘 항차 좋은 벼슬을 주어서 명령하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가? 臣은 말고삐를 잡고 마음을 다해 도와 護衛할 것을 청하며 비록 피를 요동 땅에 바를지라도 사양하지 않겠노라”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장하게 여기었다. 左翊衛로써 瀋陽에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고 東宮을 모시고 돌아옴에 고향과 가까운 地方官으로 임명하여 곡성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않되 병으로 終하였다.1)동궁 : 왕세자 소현세자를 말한다.2)익위사(翊衛司) : 왕세자(소현세자)의 侍衛를 맡은 관원3)계방(桂坊) : 동궁이 있는 곳, 왕세자 익위사의 별칭
2.필자의 의문점 : 公의 행장과 충의록에는 生終年이 수록이 되어 있지 않아 주변 선조들의 태생을 확인 해본다.
21세의 6촌 再從형제들은 公을 포함하여 모두 12명(3명 后无)으로 최고 연장자는 판사공(휘 덕홍)으로 생년이 1537년이고, 최연소는 안항공(휘 덕후)로 1556년 태생이다. 나머지 7명은 그 사이에 태생하였다.
22(廷字)세 公의 子(휘 후징, 생종년 미상)를 포함한 재종질(7촌)은 17명으로 이중 최고 연장은 판사공의 장자인 정망으로 1558년생이고, 최연소는 주부공(휘 덕남)의 子 음선무랑공(휘 정우)으로 1598년 태생이다. 나머지 15명은 그사이에 태생하셨다.
公과 삼종(8촌)에 해당되는 행원문중 내 21세(大字) 경우는 17분(9분 后无)이다. 최고 연장은 괴봉공(휘 대용)의 생년이 1530년이고, 최연소는 부장공(휘 대홍)으로 1564년 태생이다. 나머지 6명은 그 사이에 태생하였다.
22세의 경우 9명으로 최고 연장은 괴봉공의 장자인 수정당공(휘 홍주)으로 1558년 태생이고, 최연소는 영장공(휘 대경)의 子 남은공(휘 효징)으로 1603년 태생이다. 나머지 7명은 그사이에 태생하였다.
장천문중과 행원문중 산하 종중 내 21~22세 선조들의 태생 시기가 형제간에 년차가 있으나 일정하다. 公은 관산파 장천문중 종파(큰집) 21세손이다. 당대에는 연령 20세 안팎이면 혼례를 하였다. 부친이신 20세 인손공이(1500년 안팎 추정) 公을 늦게 보았다고 하더라도 조카들에 해당되는 22세 선조의 연령 때에 태생하여 병자호란 종료(1637년) 후 소현세자를 시위하고 심양에 다녀왔는지? 생년과 행장에 대해 의문점이 많아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사료된다.(丙子胡亂과 관련 功을 세운 22세 청금공(諱 廷勳 1578~1652), 병조참판공(諱 廷喆 1583~1657), 반계공(諱 廷鳴 1589~1640)있다.
....필자가 舊)장흥위씨 홈페이지에 게재한 내용임.
3.새로운 사실 : 필자는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려고 최근 전남 곡성군(문화관광과)에 곡성현감공의 역임을 질의하여 위문 내 면주, 충의록과 다른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곡성현감은 1487~1944간 266명이 역임하였고, 이중 公은 제 38대(1565년 1월~7월) 현감을 역임하였다.(37대 전임자 : 1563년 8월~1564년 12월, 39대 후임자 : 1565년 9월~1566년 12월) 곡성군에서 필자에게 송부한 “곡성군지”는 1956년 곡성군노인회에서 편집 발행한 것으로 첨부된 4P 우측 상단 2번째에 “魏大成”의 인명이 확인된다. 또한 역대 옥과현감에서는 16P 우측 하단 첫번째에 존재공 “魏伯珪”의 인명과 1796년 3월~1797년 윤 6월의 재임기간이 확인된다.
4.필자 추정 : 곡성현감공의 증조는 18세 습독공(유형)으로 면주에 생졸년이 기록되지 않으나, 1450~1530년 추정한다.
조부에는 19세 장자 진손 1471~, 차자 진동 1474~, 삼자 진보 1477~, 각각 면주에 생졸년 기록이 없어 습독공과 사자 진수, 오자 진현의 생년에 맞춰 추정하며, 사자 진수 1480~1564(85세), 오자 진현 1483~1564(82세)은 비교적 장수하였다.
조부는 19세 진보(1477~, 추정)...부 20세 인손(1500~ 안팎 추정)...21세 곡성현감공 대성 1520~1525년 생년을 추정하고 1565년 1월~7월 곡성현감 재임 중, 40대초중반에 병환으로 타계함을 추정해본다.
습독공과 친분 있는 남추강(효은)은 1454~1492년이다. 영천자(신잠)는 1491~1554년으로, 습독공과 남추강은 비슷한 연령으로 추정되고 산정재에서 수창 詩를 남겼다. 영천자는 1521년에 장흥 유배시 습독공과 연령차가 있으나 산정재(지금의 백산재)에서 만나 수창함을 추정해본다.
5.결론 : 곡성현감공의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어 위문 내 재고증이 필요하다고 사료됨.
곡성현감공(21세 휘 대성)의 후손은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강원도 영월군 서면 신천리 출신이 해당된다.
곡성군청(문화관광과)에 전화를 하여 저의 이름을 밝히면서 장흥 관산 방촌마을 태생이라고 하자 업무담당 학예사님은 존재선생 후손이라고 하면서 친절히 응답해 주면서 협조 해주어 뿌듯하였습니다.^^
휼륭하신 조상님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내용이 많이 어렵습니다.
본문 내용으로 보면
존재공이 쓴 충의록에 21세 휘 대성께서는 동궁을 호위해서 심양에 갔다라고 수록돼있는데, 이번에 곡성문화원을 통해 확인한 바 심양간 부분은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21세 휘 대성께서
족보에 생종년이 없는 점으로 봐서 존재공께서 혹 족보에 올리실 때부터 제대로 파악이 안 되었을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싶네요.
임진왜란은 1592년
정묘호란은 1627년
병자호란은 1636년
21세 선조들께서는 임진왜란에 활략을 했습니다.
21세 선조들은 병자호란에 활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큰집손이면, 현재 21세 최고 연장자인 괴봉공 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심양에 간 분 중에는 대표적으로
심양왕환일기 저자이신 병조참판공(휘 정절)이죠.
병조참판공은 22세입니다.
충의록 수록 내용으로 보면 21세 큰집손이 22세처럼 심양을 갔다는 점이, 의문이 든다는 것 같아요.
곡성현감공의 지장록 내용은 대부분 괴봉공의 장손자이신 문화현령공(휘 산보 괴봉공파 23세)의 행장과 대동소이합니다...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에 다녀온 분은 문화현령공(1637~1640)입니다.귀국후 都摠經歷(1640년 4월9일),문화현령(1640년 12월27일)에 임명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위문에서 공식적으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다녀오신 분은 병조참판공(22세 휘 정철)과 문화현령공(23세 휘 산보) 두 분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곡성현감공은 후금이나 청나라 시절에 이미 돌아가셨을 것으로 판단됩니다.이번에 곡성현감공에 대한 내용을 새롭게 발굴하신 백강 아재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눈팅 중이지만 대단들 하십니다!!
뿌듯합니다.
곡성현감공(谷城縣監公)
공의 휘는 대성(大成, 21世, 仁遜의 子)이다. 인조의 항복으로 호란(胡亂)이 막을 내린 후 동궁(東宮)이 인질로 청(淸)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다. 이때 동궁의 수행원을 놓고 무신(武臣) 일색으로 발탁하자 무인들의 불평이 이만저만했다.
공은 비록 “부당하기는 하지만 나라가 어려운데 문관과 무관이 다투면 되느냐”며 파견을 자원했다. 조정은 공이 파견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곡성현감(谷城縣監)으로 임명했다.
장흥위씨 홈피에는 위와 같이 되어 있네요.
백강위원님의 글을 다시 자세히 정독해 보겠습니다.
백강위원의 논리는 합리적으로 정확해 보입니다. 곡성현감 제위기간이 역사적 기록으로 명확하기 때문에 문화현령공과 혼동을 존재공께서 하셨으리라 보입니다. 문중의 거시적인 門史는 원산소장님의 요람집필로 집대성되었으나 미시적인 부분은 더욱 깊고 정교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앞으로 씨족문화연구위원들께 많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