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선 목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은 노벨상입니다. 매년 인류의 문명에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했거나 세계평화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정해서 이 상을 주는데, 이 상을 받으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가 됩니다. 그렇다고 노벨상은 UN에서 주는 상도 아니고 가장 힘이 많은 미국 정부가 주는 상도 아닙니다. 이 상은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개인이 자기 재산을 내놓아서 만든 상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을 제정한 노벨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런데 노벨이 자기 전 재산을 털어서 이 상을 제정한 데는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어느 날 한 프랑스 신문에 그가 죽었다는 오보(誤報)가 났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서 큰 돈을 번 죽음의 장사꾼 알프레드 노벨 박사가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노벨 역시 자기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군사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죽은 다음에 죽음의 장사꾼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노벨처럼 그렇게 극적인 삶의 전환점을 경험하지는 않았겠지만, 때로는 문득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별로 의미가 없게 보이고, 그렇게 수레바퀴 돌아가는 것처럼 변화 없이 반복되는 삶에 붙들려 있는 자신이 무기력하고 한심한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꿈이 있었고 높은 이상을 추구했었는데, 먹고 사는 문제에 발목 잡히고 가족 부양하는 책임을 떠맡다 보니, 세월은 벌써 저만치 흘러가버리고 해놓은 것은 하나도 없이 나이만 먹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즐거운 일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문제에 부딪치면서 인생이 고달프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왜 사니?’
솔로몬이 경험하고 관찰한 인생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인생여정을 지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평가하는 것들이 각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130년의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창 47:9)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인생을 살다 간 천상병 시인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고 가장 큰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자기 인생을 무척 자랑스럽고 즐거운 것이었다고 평가했을 것 같은데,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애를 써서 얻으려고 하는 것들은 세월 앞에 무상하고, 보다 고상한 가치의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돈도 그렇지요. 돈이 많으면 편안하고 즐겁게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죽도록 고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돈을 많이 모았다고 해서 기대하던 것처럼 행복하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재물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설령 돈이 많아서 편안하고 즐겁게 살았다 한들, 그것을 자랑이라고, 참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느끼는 불행의 감정은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좋은 옷 사 입히고 싶고 맛있는 음식 먹이고 싶습니다. 학교도 가장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맘껏 할 수 있는 엄마는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보면 다 자기 애인으로 만들고 싶어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사회에서 영원히 퇴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가고 맨날 놀러다니기만 하면 좋겠지만, 결코 용납되지 못할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욕구를 억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불만이라고 합니다. 불만이 많다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했던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고 했어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만족하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억제하면서 보다 가치 있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메카니즘은 비교와 경쟁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던 사람이 열심히 저축을 해서 포니 자동차를 샀습니다.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동차 오너가 되었고, 그래서 그 동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동네에서 다른 사람이 소나타를 샀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행복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연봉이 1억 이상이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백만 원 받는데 내가 백이십만 원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다 이백만 원 받을 때 나만 백팔십 만원 받으면 괴로워서 못 삽니다. 솔로몬은 비교와 경쟁의 상대가 없을 만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면에서 솔로몬은 톱을 달렸고 수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바람을 잡는 것처럼 무익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경쟁에서 이긴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할 때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일까요?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고민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인생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었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너는 세상에서 뭐하다 왔니?” 이렇게 물으시면, 우리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솔로몬처럼 맘껏 즐거움만 추구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사업을 크게 하고 정신없이 일만 하다 왔다고 하는 것이 좋은 대답이 되겠습니까?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다보니 세월이 다 흘러버렸다고 변명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할 말이 없으면 입을 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만을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다고 생각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중년이 돼서 갑자기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가기도 하고, 자식들 키워놓고 퇴직한 후에 선교사가 되어 헌신하는 분들도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뭔가 의미 있는 삶을 갈망합니다. 한 번뿐인 우리 인생을 보다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편안한 삶과는 결별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살기보다는 남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결단이 필요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은 있으면서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서 고생을 하는 일이라는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모두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그런 정신으로 작은 것들을 실천하면서 살면 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해밀턴에 갔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이름이 샐리라는 분이었는데, 아직 60대니까 할머니라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만. 남편이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시고, 역시 암으로 아내를 잃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혼을 했는데, 이분이 하는 일은 한 구호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월급을 받지 않고 일을 하니까 자원봉사자이지, 사실은 그 단체의 직원입니다. 공장지대에 허름한 사무실을 얻어서 주말에는 게라지 세일을 해서 사무실 경비로 쓰고,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우간다에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타지키스탄에서도 활동을 했었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점점 강경하게 대처하는 정부에 의해 추방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자기 남은 인생을 헌신해서 즐겁고 보람 있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부모가 죽거나 또는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우고 학교 보내고,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그렇게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전해들을 때, 그리고 자기가 그 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뿌듯합니까? 이런 것은 세월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행복입니다. 공적인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추구했던 행복이 세월이 흐른 다음에 허무하게 느껴진 것은 그것들이 모두 나를 위한 즐거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말을 유심히 보세요. 모두가 ‘내가’ ‘나를 위하여’ ‘나의’ 이런 단어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를 위한 행복의 추구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돕는 데서 얻는 행복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샐리 할머니가 그렇게 일하면서 경험한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해 주는데, 별 일 아닌 것 같으면서도 감동적이고,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면서도 무한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70세 되는 것을 별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80세, 90세까지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물이 참 귀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은 평생 물을 긷는 데 허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호단체나 개발기구들의 중점사업 중 하나가 우물을 파서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 샐리 할머니가 교회들을 방문해서 후원요청을 하면서 우물 파는 프로젝트를 설명했는데, 한 부인이 그날 밤에 집에 가서 바쓰를 했답니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서 목욕을 하는데, 자꾸 낮에 들었던 아프리카 사람들이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몇 시간씩 걸어서 물을 길어오기도 하고, 땅에 고여 있는 더러운 물을 마시기도 하는데, 자기는 깨끗한 물을 가득 받아서 목욕을 한다는 것이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목욕을 끝내고 수표에 7천 달러를 적어서 샐리에게 보냈습니다. 우물 하나 파는 데 만 달러가 드는데, 그 부인이 보내준 돈에다 조금 더 보태면 우물 하나 팔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한 마을 사람들이 걱정 없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감동은 잘합니다. 그러나 그 감동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잘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샐리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처음 그 구호단체에 헌신했을 때, 본부에서 사람들이 와서 안수를 하고 임명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좁은 사무실만 한 칸 덜렁 얻었을 뿐, 아무것도 없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할 일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자면 컴퓨터도 있어야 하고, 프린터며 팩스 등 여러 가지가 필요한데,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텅 빈 사무실에서 기도만 했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책상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중고 가구점에 가서 책상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혹시 책상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책상은 있으니까 필요하지 않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분이 또 전화를 했습니다. 다른 필요한 것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형편을 이야기했더니 그분이 컴퓨터랑 모든 필요한 사무기기를 다 구입해 주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그분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거실 카펫이 너무 낡아서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더랍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야 남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감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가 엽전 두 냥 헌금하는 것에 예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자기 먹을 것 안 먹고 쓸 것 아껴서 내놓는 것이 진정한 희생이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내 것 다 챙기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두 가지는 결코 병립할 수 없습니다. 내가 희생하고 내가 양보해야 의미 있는 일이 발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자신을 희생하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셨고, 그래서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입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한숨만 쉴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일에 구체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 부인이 집에 가서 바쓰를 하다가 마음이 괴로웠다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삶을 돌아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오신 거예요.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만 하고 지나버린다면, 다가오신 하나님을 밀어내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또 교회 차원에서도 선하고 의미 있는 일에 더욱 관여하고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보람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신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와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거기서 훨씬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급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라줘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던 주님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도 더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리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산 제사(롬 12:)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