辭說時調의 형식과 美學的 특성
김 학 성(성균관대)
<요약 및 초록>
旣存의 연구에서 사설시조의 形式은 시조 형식으로부터의 脫定型性의 면모만 지나치게 강조되어 그 진정한 모습이 부각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사설시조는 시조의 엄격한 형식적 틀인 巨大틀(3장으로 詩想을 완결, 각 章은 4개의 마디로 구성, 종장의 첫마디는 3음절로 함)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준수하고, 微細틀에서는 音步數를 상당 정도 일탈하되 2음보격의 연속으로 확장해 나가는 ‘억제 속의 확장발화’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사설시조의 2보격은 단순한 民謠調의 2보격과 다른 辭說調의 그것임을 밝혔다.
사설시조의 미학적 특성은 평시조의 엄정하고 단아한 형식적 틀을 율격상, 어조상, 악곡상으로 어느 정도 일탈하는 ‘파격의 미학’에 있다. 이는 ‘여유에 바탕한 일탈’이라는 민족미학에 기저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당대의 미학으로서 사설시조는 ‘自然의 眞機’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 핵심어; 정형성, 탈정형성, 억제발화, 확장발화, 민요조, 사설조, 파격의 미학
Ⅰ. 사설시조에 관한 先入見과 몇 가지 誤解
사설시조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시조가 兩班계층의 문학양식임에 반해 그것과 대립되는 平民문학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사설시조가 평시조와 달리 일정부분 整齊된 律格에서 벗어나 있어 格式이나 形式을 중시하는 양반계
층과는 意識이나 태도에 있어서 判異한 차이를 보이는 서민계층의 그것을 반영한다는 점,
*현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양반층의 思辨的 지향과 달리 世俗的 차원을 지향한다는 점,
*언어적 표현에 있어서도 詠嘆과 敬虔이 아닌 풍자와 해학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든다.
장경렬, 「사설시조의 어제와 오늘」, 『2002 만해축전』, 만해사상실천 선양회, 2002, 89면 참조. 이 논문은 사설시조에 대한 여러 통념들을 가장 예리하게 그리고 모범적으로 반영하고 있어 본고를 작성하는데 좋은 참고가 되었음을 밝힌다.
앞으로의 논의도 이 논문에서 거론된 텍스트와 그에 관한 통념적 이해와 해석을 바탕으로 본고의 출발점을 삼고자 한다. 그
렇게 함으로써 사설시조에 관한 여러 선입견이나 오해들이 효율적으로 풀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특정인의 논문에 대한 평가절하나 비방의 의도는 추호도 없으니 양해 있으시기 바란다.
사설시조 텍스트를 그것이 산출된 사회 문화적 맥락과 분리시켜 이해한다면 그러한 통념들은 모두 옳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설시조와 평시조는 각각 계층을 달리하여 産生된 문학이 아니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간밤의/ 자고간 그놈/ 아마도/ 못이져라
瓦冶ㅅ놈의 아들인지 즌흙에 뽐내드시/ 沙工놈의 뎡녕인지 사엇대로 지르드시/ 두더쥐 영식인지 곳곳지 두지드시/ 평생에 처음이오 흉중이도 야롯제라
前後에/ 나도 무던히 격거시되/ 맹서지 간밤 그놈은/ 아 못니저 노라
이 작품은 형식과 격식을 벗어난 사설시조로서 의식이나 태도에 있어서 양반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현실에 대한 태도에서도 遊女의 쾌락적 性을 다루었으니 지극히 세속적인데다가 언어표현에서도 卑俗語를 섞어가며 입담 좋게 해학적으로 노래하고 있으니 앞의 논리에 따르면 양반층과는 거리가 먼 서민계층이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검토해보면 이 작품의 性담론은 소비적 말초적 유락적인 것이어서 민중층의 생산적이고 발랄한 성담론과는 거리가 멀어 서민계층의 작품이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즉 이 작품은 京華士族인 李鼎輔가 지은 것이다. 이 작품을 수록한 4개 가집 중 3개(『악학습령』, 주씨본『해동가요』, 버클리본 『해동가요』)에 이정보가 작자로 표기되어 있고, 후대의 가집인 육당본 『청구영언』 1개 만이 작자 표시를 하지 않았다.
18세기 들어 도시 유흥의 확대에 따라 弄, 編, 羽樂, 界樂 같은 사설시조를 얹어부르는 노래를 李德壽, 李匡德 같은 경화사족이 많이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에 대하여는 남정희, 「18세기 경화사족의 시조 향유와 창작 양상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2002 참조.
이정보의 작품이 僞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설시조의 창작-향유층은 결코 下層의 서민계급이 아니다. 신분적으로 上層인 士族층과 문화 예술적으로 상층인 中人 胥吏 출신 歌客層 서리층이 중심이 되는 가객층의 사설시조 참여는 18세기 후반에 『해동가요』를 편찬한 김수장에 와서야 비로소 처음 확인된다.
따라서 가객층이 참여하기 이전의 사설시조 작품을 만횡청류라 하여 116수를 『청구영언』에 따로 수록한 작품의 존재는 적어도 중인 서리층 중심의 가객층과는 무관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노랫말이나 악곡의 형식이 서민층의 노래와는 무관한 가곡창의 변형태인 것으로 보아 경화사족 같은 도시의 풍류 士族층이 저자거리의 서민층의 노래에서 소재를 취하여 가곡창(대엽조)의 노래로 수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면 서울은 행정도시에서 상업도시로 변모하게 되고 과거와 달리 자유로운 예술과 문화를 즐기는 市井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의 유흥 분위기와 음악적 수요에 맞물려 만횡청류가 산생된 것으로 보이며 그 유래는 오래되어 중서 가객층의 출현 이전에 이미 성립되었던 것이다.
즉 이러한 도시문화의 기류가 도시의 사족층으로 하여금 한시의 창작에서는 민요를 대거 수용하게 되고, 가곡의 창작에서는 저자거리의 노래를 天機論(만횡청류의 발문에서 말하는 ‘自然의 眞機’)에 입각하여 수용함으로써 만횡청류와 같은 사설시조가 산생된 것으로 보인다.
중서 가객층의 사설시조참여는 만횡청류 이후에나 볼 수 있으며, 그것도 사족층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가능했다. 따라서 중서가객층의 사설시조 참여는 역사적 자아로서의 자기 계층의 고뇌나 현실 문제 보다는 예술인으로서 시조활동의 일환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자기 계층의 정체성보다는 그들의 후원자 위치에 있는 사족층의 취미나 기호 혹은 이념에 영합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중심인 것이다. 대부분의 士族層은 평시조를 즐긴 것이 사실이고 향촌의 규범적 士族층은 사설시조를 외면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저자거리(市井)가 있는 도시의 사족층-특히 경화사족층은 그들과는 달랐다. 이덕수, 이광덕, 이정보의 예에서 보듯 사설시조를 적극 향유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사설시조는 원칙적으로 진지한 목소리가 아니고 ‘허튼소리’라는 점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한숨아/ 셰한숨아/ 네 어느 틈으로/ 드러온다
고모장 셰살장 가로다지 여다지에 암돌져귀 수돌저귀 배목걸새 뚝닥 박고/ 龍거북 물쇠로 수기수기 엿듸/ 屛風이라 덜걱 져븐 簇子ㅣ라 대대글 다/ 네 어내 틈으로 드러온다
어인지/ 너 온날 밤이면/ 못드러/ 노라
이 작품에서 빗금(/) 친 것은 사설시조의 각 장은 4개의 통사의미단위구로 이루어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표시다. 이는 사설시조의 중요한 형식틀이므로(이에 대하여는 다음 章에서 詳論) 본고에서 인용되는 다른 모든 작품에도 같은 표시를 할 예정이다. 참고하기 바란다.
에서 보듯이, 삶의 고달픔과 여의치 않음에서 비롯되는 고통스러운 ‘한숨’을 題材로 하면서도 그러한 한숨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언어유희’ 곧 ‘허튼소리’로 표현함으로써 한바탕 웃고 넘기는 風流의 현장에 걸맞는 유희적 텍스트로 향유된다.
즉 ‘話者 中心’발화가 아니라 ‘텍스트 중심’ 발화여서 작자가 陳述에 책음을 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므로 텍스트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匿名의 진술이 흔할 수밖에 없다. 사설시조를 많이 짓고 향유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자 표기가 되어 있는 이덕수, 이광덕의 사설시조가 단 한 편도 전하지 않는 것은 이런 理由와 관련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匿名性 때문에 사족층의 사설시조 창작-향유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설시조가 사변적이지 않고 경건 진지하지도 않은 것은 그것을 산생한 신분 계층의 의식이나 현실을 보는 태도의 차이 때문이라기 보다 詩的 언어 사용 태도 곧 語調의 차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토록 언어사용 태도가 달라짐을 용인할 수 있었던 것은 天機論이나 性靈論에 바탕한 조선후기의 세계관 혹은 미의식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사설시조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평시조의 형식을 마구 逸脫해도 좋은- 그리하여 심지어는 ‘사설시조는 自由詩다’ 박철희(1980), ꡔ韓國詩史硏究ꡕ, 일조각, p.70. 참조. 라고까지 선언하기에 이르는 ‘형식의 自律性’과 관련된 문제다. 그러나 사설시조는 시조와 別種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시조텍스트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사설시조는 시조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는 범위 내에서의 형식적 일탈이 가능한 것이지 그 이상은 결코 아니다. 이에 대한 詳論은 다음 章에서 하기로 한다.
또한 사설시조를 평시조와 변별을 강조하기 위해서 서정이 아닌 辭說調의 서사문학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거나 서양의 근대화 과정에서 생성 발전된 敍事的 散文文學(市民 敍事, 小說)과 견주는 것 장경렬, 앞의 논문, 89면.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어 보인다. 사설시조가 왕왕 市井(저자거리)의 삶의 세계(이것을 서사적 산문문학의 세계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에서 소재를 취해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사나 소설과는 무관하게 서정적으로 표현한 서정시인 것이다. 즉 사설시조는 非서정, 脫서정이 아니라 ‘서정의 확장’인 것이다.
신은경, 「사설시조의 시학 연구」, 서강대 박사논문, 1988, 147면.
마지막으로 사설시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分析 視角의 문제다. 그것은 고전시가를 고전시가 텍스트로 해석하지 않고 현대시를 분석하듯이 대한다는 것이다. 고전시가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조차도 그런 경향을 상당수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시 혹은 현대시조를 논평하는 비평가들이나 창작하는 문인들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시각을 보인다.
이는 과거의 작품을 當代的 의미 중심으로 해석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현재의 期待地平에 초점을 맞추어 現在的 價値 중심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어서 작품의 당대적 의미와는 거리가 먼 엉뚱한 이해로 빠지기 십상인 것이다. 텍스트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고 해석자의 역사성만 갖고 분석한다면, 작품의 당대적 意味는 물론 현재적 意義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미의식의 패러다임이 엄청나게 다른 점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미적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서는 작품의 온당한 해석도 意義의 발견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작품이 놓여 있는 과거의 지평과 우리의 현재적 지평이 융합될 때 올바른 해석과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Ⅱ. 사설시조의 形式과 그 意味
사설시조의 형식은 어떠하며 그 형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사설시조라면 시조 형식으로부터의 脫定形性(자율성)만 떠올리지 그 거대틀은 시조형식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는 정형성(非自律性)에 관하여는 애써 외면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거기다가 형식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심지어 자유시라는 규정까지 나오기도 하고 평시조와는 별개의 미학과 장르적 바탕을 갖는 것처럼 이해해 왔다. 그러나 사설시조는 단 한번도 독자적으로 장르수행을 갖는 예가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시조의 演行이나 창작이 있는 곳에 사설시조가 있었지 단독으로 창작-향유된 적은 없는 것이다. 이는 사설시조가 별종의 장르가 아니라 시조텍스트의 일환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형식이 갖는 의미도 시조로서의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 것이지 그 범위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
사설시조의 이러한 존재론적 位相은 그 형식적 장치에 그대로 구현되어 있다. 즉 시조의 형식적 틀을 그대로 준수하는 측면과 일정 범위 내에서 일탈을 지향하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예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1) 가마귀 거므나다나 해오리 희나다나
황새다리 기나다나 올히다리 져르나다나
世上에 黑白長短은 나 몰나 노라
(2) 가마귀를/뉘라 물드려/검다며 백노를/뉘라 마젼야/희다드냐
황새다리를/뉘라 이어/기다며 오리다리를/뉘라 분질너/르다랴
아마도 검고^희고/길고^르고 흑백/장단이야 일너 무/리오
여기서 확인되듯 (2)의 사설시조는 (1)의 평시조를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그대로 준수하는 측면과 그것을 일정부분 일탈하는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2)는 (1)의 형식과 내용 모두를 典範으로 삼아 모방적으로 재현하면서 일탈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1)에서 보듯 사설시조가 전범으로 삼는 평시조의 형식적 틀은 다음과 같다.
① 통사의미론적 연결고리를 이루는 3개의 章(초․중․종장)으로 하나의 시상을 완결한다.
② 각 장은 4개의 음보(1음보는 보통 3~4음절)로 구성한다.
③ 시상의 전환과 완결을 위해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로 고정시키고, 둘째 음보는 5음절 이상으로 늘여 변화를 준다.
그런데 이러한 3가지 형식적 틀은 지나친 억제 발화여서 절제된 감정을 응축적으로 드러내기에는 적절한 것이지만 말수를 늘여서 재미있게 엮어 짜려면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틀이다.
작품 (1)은 억제발화에 놓여 있지만 내용은 말의 재미를 추구하는 면이 강해서 결국 억제발화의 긴장을
풀고 작품
(2)와 같은 사설시조로 변환함으로써 보다 자연스러운 텍스트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설시조는 위의 세 가지 틀을 대체로 유지하되 다만
②의 틀은 변형하여 4개의 음보라는 제한된 틀을 벗어나 4개의 통사의미 단위구라는 보다 확장된 틀로 구성하되 각 단위구는 반드시 2음보격으로 율격을 짜나간다는 것이다.
즉 평시조의 거대틀(3장으로 완결하는 것, 각 장은 4개의 마디를 지키는 것, 종장 첫마디를 3음절로 하는 것)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세틀(4개의 마디를 음보 단위로 하지 않고 통사의미 단위로 하고 2보격으로 엮어나가는 융통성을 가짐)만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결국 사설시조의 형식적 틀은
① 통사의미론적 연결고리를 이루는 3개의 章(초․중․종장)으로 하나의 시상을 완결한다.
② 각 장은 4개의 통사의미 단위구로 구성하되 각 단위구는 2음보격으로 엮어 짜는 길이의 융통성을 갖는다.
③ 시상의 전환과 완결을 위해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로 고정시키고, 둘째 음보는 5음절 이상으로 늘여 변화를 준다. 사설시조는 종장도 확장될 경우가 허다한데, 이 경우 종장 첫마디의 3음절 준수는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말이 많이 확장되는 환경 속에서도 짧은 마디를 그대로 유지하므로), 둘째 마디의 5음절 이상 유지라는 규칙은 말이 많아지는 환경 속에 있으므로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 대신 둘째 마디는 2음보격으로 엮어나가는 융통성이 허용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④ 종장은 시상의 통사의미론적 완결을 지향한다.
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사설시조의 이러한 형식적 틀의 3가지 원칙에 대하여는 졸고(2001), 「시조의 정체성과 현대적 계승」, <時調學論叢> 제17집, 한국시조학회, p. 57. 전후에서 상론한 바 있다.
그밖에도 사설시조의 초장은 앞의 두 단위구와 뒤의 두 단위구를 同量(음절 지속량이 같음)으로 하려는 형식적 성향을 강하게 보이는데 이는 5장으로 부르는 歌曲唱의 1장과 2장이 時調唱에서 초장으로 통합되고 그 長短의 길이가 동량인 것과 관계된다. 여기에다 초․중․종장 가운데 중장이 길어지려는 경향을 갖고 있음도 사설시조의 형식적 특징으로 추가할 수 있다.
이처럼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틀을 전범으로 삼아 모방적으로 재현하되, 다만 평시조는 주어진 형식적 틀에 맞추어 엄격하게 音步數를 통제하는 억제발화인데 반해, 사설시조는 거대 틀만은 엄격하게 준수하고 미세틀인 음보수는 상당정도 일탈하고 자유롭게 늘여 사설을 많이 주워 섬기고 素材들을 많이 엮어 짬으로써 텍스트 자체의 재미를 느끼도록 하는 확장발화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사설시조를 엮음(編)시조, 습(拾)시조, 좀는시조, 말(사설)시조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설시조의 擴張發話는 어디까지나 억제발화의 범위 내에서의 그것임을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 사설시조가 아무리 평시조의 형식을 일탈한다 하더라도
①의 규칙, 즉 3장으로 시상을 완결해야 한다는 것과
②의 규칙, 즉 4개의 통사의미 단위구를 준수해야 하는 것과
③의 규칙에서 첫마디를 3음절로 시작해야하는 ‘三重의 억제 장치’ 내에서의 일탈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설시조는 ‘억제 속의 확장발화’인 것이다.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이러한 형식상의 변화를 대비해 본다면 가장 큰 차이는 각 장을 4개의 마디로 구성함에 있어서 평시조는 ‘4음보’로 완결함에 비해 사설시조는 ‘2음보격의 연속’으로 엮어나간다는 것이다. 즉 율격상으로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4음보격’을 일탈하여 ‘2음보격 연속체’로 전환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율격미학상 커다란 차이라 할 수 있는데, 잘 알다시피 평시조의 율격양식인 4보격이 창출하는 율동은 動的이기보다는 靜的이고, 경쾌하거나 긴박하기보다는 悠長하고 차분해서 정리된 생각의 깊이나 흐트러짐이 없는 안정된 정서를 드러내기에 적절하다.
그리하여 절제와 여유를 바탕으로 한 깊은 생각이나 분별력을 앞세우는 감정상태의 표현에 적절해서 理念的이거나 敎示的인 語調로 흐르는 경향성이 강한 것이다.
이에 비해 사설시조의 율격양식인 2보격은 단순히 2개의 음보로 연속되기 때문에 호흡이 짧고 경쾌하게 몰아가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이러한 가벼운 律動구조와 빠른 템포로 인하여 비교적 단순한 생각이나 詩想을 直情的으로 표상해 내기에 적절한 步格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생각이나 감정을 무게 있게 엮어 나가기에는 부적절하며 본질적으로 민요적 속성이 강하고 표출하는 정서는 개인적이기보다 집단적 성향이 강한 특징을 지닌다. 율격양식이 갖는 이러한 특징에 관하여는 성기옥, 『한국시가 율격의 이론』, 새문사, 1986, 165~210면 참조.
그러면서도 사설시조의 2보격은 민요의 2보격과는 차이를 갖는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민요의 2보격은 앞에서 설명한 2보격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사설시조의 2보격은 평시조의 4보격에서 胎生되어 그것을 깨트리고 나온 2보격이므로 4보격적 속성도 어느 정도 태생적으로 강하게 깔고 있는 측면도 아울러 지닐 수밖에 없는 점이다.
그만큼 사설시조의 2보격은 4보격과 긴밀하면서도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양면성 혹은 복합성을 띠는 율격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사설시조에 민요적․집단적 성향과 시조 본래의 교시적․이념적․개인적 성향이 모두 포착될 수 있음도 이러한 태생적인 율격양식의 특수성에 基因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설시조의 2보격은 ‘민요조의 2보격’과는 변별되는 ‘사설조의 2보격’이라 命名할 수 있으며 민요조의 2보격과 사설조의 2보격의 차이점에 관하여는 앞으로 더 깊은 논의를 할 예정이며 여기서는 일단 문제 제기로 만족하고자 한다.
다만 현재로서 짧은 생각을 말한다면 전자는 언어적 진술이 생각이나 감정을 길고 깊게 엮어 나가기에 부적절하며, 보다 단순 경쾌 발랄하고 직정적인 표출 성향이 강하다면, 후자는 전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생각이나 감정을 길고 깊게 엮어나가기에 적절하며 비극적 정감의 토로나 심각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평시조보다는 가볍게 처리되지만 민요보다는 훨씬 무게 중심을 가지고 덜 직정적이라는 차이를 지적할 수 있겠다.
, 律格上으로는 단순한 2보격이 아니라 4보격에서 태생된 2보격이므로 ‘4보격성 2보격’이라 규정할 수 있다. 보다 세부적인 양상은 다음의 작품 예에서 확인해보자.
(3) 孔夫子ㅣ/ 사람이시로되/ 依然/ 하늘이시라
義理를 프러내여 五倫을 발키시니/ 至愚한 民氓이 졀로셔 어질거다/ 國太平 民安樂이/ 오로다 聖德이로다
千載後/ 이갓튼 大仁君子/ 또 업슬까/ 노라
(4) 재너머/ 莫德 어미네/ 막덕이/ 자랑마라
내품에 드러서 돌겟잠 다가/ 니고 코고오고 오죰고 방긔뀌니/ 맹서치 모진내 맛기 하 즈즐다/ 어셔 다려 이거라 막덕의 어마
막덕의/ 어미년 내다라 발명여 이로되/ 우리의 아기딸이 고림증 배아리와 잇다감 제 症밧긔 녀나문 雜病은/ 어려서부터 업나니
(5) 새달은 뒷東山말네/ 덩지둥지 둥그러이 도다뜨고/ 잘새는 니만신수풀에/ 풀덕풀덕 나 라들제
외나모/ 다리에/ 혼자가는/ 중아
네 절이/ 얼매나 멀건데/ 暮鍾聲이/ 들리난다
위의 세 작품 모두 ‘辭說調양의 2보격’ 즉 ‘4보격성 2보격’의 율동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4보격의 이념적․교시적․개인적 성향과 2보격의 민요적․집단적 성향의 양면성을 함께 가지고 있으나 그 표출 성향의 정도는 각기 다르게 나타나 있다.
작품
(3)은 유교의 大聖人이신 공자의 聖德을 노래한 것으로 시조 본래의 성향인 이념적․교시적․개인적 성향이 보다 강하게 표출되고 있지만
(4)는 서민적․골계적 표현을 마구 쏟아내어 집단적․민요적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5)는 초장에서 ‘덩지둥지’, ‘풀덕풀덕’ 같은 生動하는 의태어를 섞어 서민적․집단적이지도 않은 중간적 표현을 하고 있고, 종장에서는 ‘暮鐘性’이라는 漢文套語的 표현과 함께 점잖은 마무리를 하고 있어 양측면의 성향이 교묘하게 복합되어 있다. 만횡청류를 비롯한 모든 사설시조는 이처럼 세 가지 양상 가운데 어느 하나로 나타난다고 정리할 수 있다.
Ⅲ. 사설시조의 美學的 특성
평시조의 형식적 틀의 묘미는 4음보라는 짝수의 安定된 율격으로 각 章을 이루는 반면에 3장이라는 홀수의 流動的(非安定的)인 구조로 완결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짝수구조와 홀수구조의 交織이 주는 절묘한 ‘안정적 유동감’이 시조의 형식 장치가 갖는 절묘한 미학이라는 것이다. 특히 시조가 3장이라는 홀수의 動的構造로 짜여 있다는 것은 短型의 定型詩로 주목되는 漢詩의 絶句가 起․承․轉․結의 4行구조로 짜여 있고, 서구의 소네트가 4단구조의 14행시로 안정된 구조로 짜여 있다는 점과 대조적이어서 주목된다. 시조의 3장구조는 절구와 소네트 같은 안정적 4단구조를 절묘하게 응축․변화시켜 동적인 구조로 탈바꿈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시조의 초장이 起에, 중장이 承에, 종장이 轉과 結을 아우르는 대응을 이루는 것이다. 종장의 이와 같은 轉과 結의 통합적 기능 때문에 율격상으로도 변화를 보임은 필연적이다.
앞 章에서 언급한 평시조의 ③의 형식 조건(종장 첫음보를 3음절로 고정시키고 둘째음보는 5음절 이상으로 늘여 변화를 주는 것)은 이래서 생겨난 것이다. 즉 종장을 이처럼 ‘변형 4보격’으로 구조화함으로써 초장과 중장에서의 율격의 규칙적인 흐름은 차단되고 음보의 크기가 변화된 데 따른 긴장을 유발함과 동시에 詩想의 전환과 종결을 동시에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시조의 미학은 이 ‘종장’의 전환과 종결이라는 통합적 기능을 얼마나 절묘하게 살려내느냐에 관건이 달려 있는 것이다. 종장이 그러한 미학적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졸작이 되는 것이다. 종장의 절묘한 전환과 멋드러진 마무리―이것이 시조의 관건이 된다.
평시조의 4음보격 3장구조는 우리문학사가 낳은 가장 절제되고 정제된 양식이어서 아무리 격앙된 생각이나 정서를 표출한다하더라도 그것을 절제없이 무한정 放出해서는 안 된다. 주어진 정형의 틀을 엄격하게 준수하여 고조된 감정을 절도 있게 다스림으로써 단아한 均齊美를 淡白하게 드러내는 데 그 참된 미학이 있다. 졸고, 「시조의 시문학적 특성」, 『현대시학』,1995년 8월호, 현대시학사, 142면 참조.
시조의 절대 다수가 엄정한 정형의 틀을 철저히 준수함은 그러한 절제된 형식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인식하고 공감하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시조는 이처럼 엄정한 형식적 틀을 철저히 준수하는 데서 아름다움의 묘미를 느끼지만 때로는 그러한 틀을 조금씩 벗어나는 데서 보다 더한 미적 쾌감을 향유하기도 한다. 3장 가운데 어느 한 장에 ‘2보격으로 단 한 번’ 辭說이 늘어나는 破格이 일어나는 엇시조 조동일(1978), 「시조의 律格과 變形 규칙」, <국어국문학연구 18집,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p.51.에서는 엇시조의 형식을 定義하여 “2음보가 세 번 중첩되어 6음보가 나타난 곳이 한 군데만 있는 시조”라 했다. 이러한 정의는 通說로 되고 또 타당한 지적이지만 6음보라는 ‘음보’ 단위의 개념 정의는 엇시조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시조의 파격 미학은 평시조의 형식을 일탈하는 데 있고, 그 일탈의 방식은 반드시 2보격으로 늘여엮어 짜는데 있으므로, 엇시조든 사설시조는 2보격을 단위로 하여 그것이 단 한번 늘어나는 파격이 이뤄질 때는 엇시조, 그 이상으로 자유롭게 늘어날 때는 사설시조로 정의하는 것이 일관되고 선명하며 효율적인 정의라 생각되어 본고에서는 이렇게 修正하기로 한다.
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시조는 노래로 연행되기에 소용, 만횡, 弄, 樂, 編, 辭說時調唱 같은 變調의 가락을 통해 ‘놀이의 흥취’를 즐길 수 있어서 반드시 ‘사설’의 형식적 일탈을 동반해야 파격의 미학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의 작품 예 (1)은 평시조의 형식적 틀을 철저히 준수한 편이지만 정감을 절도 있게 다스린 엄정한 표현과는 거리를 갖는 파격의 미학을 보여주는데 이는 語調(언어를 사용하는 태도에서 진지성이 弱化되어 있음)에도 다소 드러나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이 가곡창의 변격인 蔓橫(ꡔ악학습령ꡕ)이나 弄(육당본 『청구영언』)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흥취의 미학이 더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그러하나 風流마당에서 흥취가 한층 무르녹아 高潮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엄격한 형식적 틀을 준수하는 ‘평시조’나 그것을 2보격으로 단 한 번 벗어나는 ‘엇시조’의 일탈 정도로는 파격의 미학을 ‘제대로’ 즐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 (2)에서 보듯 이 작품은 보다 대중화된 가집인 『時調』, 『南薰太平歌』, 『詩餘』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가곡창이 아닌 사설시조창으로 향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보다 자유로운 형식적 일탈을 맘껏 향유할 수 있는 ‘사설시조’의 파격적인 미학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破格의 미학을 즐기는 방법과 정도의 차이를 3단계로 느낄 수 있다. 하나는 작품 (1)처럼 엄격한 형식적 틀을 始終一貫 준수하는 가운데 語調上으로 혹은 樂曲上으로 파격의 미학을 즐기는 것이고, 둘은 엇시조처럼 시조의 엄격한 틀을 단 한번 살짝 벗어나는 선에서 파격을 즐기는 것이다. 셋은 작품 (2)처럼 二重의 형식적 制約(3장으로 완결, 각 장은 4개의 통사의미 단위구로 구성) 속에 놓여 있긴 하지만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4보격의 틀을 벗어나 ‘사설조의 2보격’으로 자유롭게 형식을 일탈해나가는 가장 큰 파격적 미학의 단계를 즐기는 것이다. 결국 사설시조는 일부의 시조가 추구해나가는 파격의 미학 단계에서 그 ‘頂点’에 위치해 있는 시조라 규정할 수 있다.
시조의 이러한 3단계의 파격의 미학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독특한 민족미학이라 할 ‘餘裕에 바탕한 逸脫’ 필자는 최근의 拙著에서 우리의 구비문학 작품을 통해 민족 미학의 이러한 특성을 규명해 본 바 있다. 『한국고전시가의 정체성』,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2 참조.
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 (1)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엄정함과 節制의 미학을 추구하는 평시조의 극단적 옹색함 속에서도 여유에 바탕한 일탈의 미학을 추구하고, 단 한번의 일탈이라는 엇시조의 단발성 파격을 통해서도 그러한 미학을 추구하고, 작품 (2)에서 보듯 아예 율격적․어조적․악곡적 일탈이라는 多面的 일탈을 통해 그러한 미학을 적극적으로 밀어나가는 사설시조의 모습이 모두 그에 해당한다. 이로써 볼 때 사설시조는 시조가 추구하는 ‘여유로움의 미학’을 가장 絶頂에서 보여주는 미학적 특성을 구현하는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작품(4)는 사설시조 가운데서도 이러한 미학적 특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것이다.
시조의 이러한 파격적 미학을 이해할 때 맨 앞에서 인용한 이정보의 사설시조에서 “간밤에 자고간 그놈”이란 표현과 “중놈이 승년의 머리털 잡고……”라는 작품에 보이는 ‘언어폭력’이 어떻게 허용될 수 있는지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시조를 풍류 곧 ‘놀이’로서 즐기는 현장에서 ‘여유에 바탕한 일탈’의 미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용인되는 익명의 ‘허튼소리’이지 작자가 진술에 책임을 져야하는 진지한 발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조가집인 『大東風雅』서문에서 시조를 두고 “내가 일찍이 우리나라 가요를 본 즉 혹 忠孝道德을 노래한 것도 있고, 또한 淫佚褻蕩한 것을 노래한 것도 있는 즉, 충효도덕의 노래는 누가 부른 것이며 음일설탕한 노래는 누가 부른 것인가. 이것이 있게 되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도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한 진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충효도덕을 노래한 계층과 음일설탕한 노래를 부르는 계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분계층과는 無關하게 同一 현장에서 불려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작자가 實名으로 책임을 지는 진지한 발화를 할 경우는 충효도덕을 노래하게 되고, 익명으로 허튼소리를 할 경우는 음일설탕한 노래를 하게 되지만 이것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실명으로 음일설탕한 허튼소리를 할 수도 있고 익명으로 충효도덕을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다. 다만 시조는 연행상황이나 창작-향유의 환경에 따라 진지한 발화가 요청될 경우와 허튼소리가 요청될 경우 혹은 양쪽 모두가 요청될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필요에 의해 이 두 부류가 함께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평시조는 반드시 충효도덕을 노래하고 사설시조는 반드시 음일설탕한 노래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작품 (3)은 사설시조 형식으로 충효도덕을 노래하고, 작품 (1)은 평시조 형식으로 허튼소리에 가까운 어조로 노래하는 예가 그것이다. 단 작품 (3)도 충효도덕을 노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엄정하고 절제된 양식인 평시조로 노래하지 않고 사설시조로 노래했으므로 그만큼 진지성이 떨어지고 허튼소리 사설시조의 거의 대부분이 익명의 허튼소리를 원칙으로 한다고 할 때, 여기서 ‘허튼소리’라는 槪念語에 대해 오해 없기 바란다. 허튼소리는 진지한 발화를 하지 않는 것일 뿐 그 이면에는 삶의 지혜와 비판의 시선, 적나나한 인간의 모습(자연의 眞機) 등이 담겨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가 연행되는 풍류현장에 적절한 노래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작품 (3)을 김천택이 분류한다면 “음왜하여 본받을 바 못되는” 만횡청류에 소속시킬 것이다. 여기서 “음일설탕”하다거나 “음왜”하다는 표현은 사설면에서 법도 여기서 법도란 당대의 기준에 의하면 樂而不淫, 哀而不傷, 怨而不怒함으로써 雅正하고 조화롭고 화평하여 심신을 편안하게 하고 풍속을 교화할 수 있는 음악의 기준을 말한다.
에 어긋난 것도 물론 포함되지만 형식상으로나 악곡상으로 법도에 어긋난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조와 사설시조에 대한 당대의 미학을 바르게 이해해야 온당한 텍스트 해석이나 평가로 나아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특히 주의를 요하는 것은 典故․用事의 당대적 미학에 관한 이해다. 앞에서 예로 든 사설시조 작품 (2)는 (1)을 전고로 삼아 재문맥화 한 것이다. (1)을 先行談話로 하여 그것을 改詞하는 수준에서 (2)를 만들었으니 평시조를 ‘패로디’한 사설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선행담화인 평시조를 그대로 부연설명한 模作으로 보아 창조성이 결여되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정보내용이 너무 명시적․객관적․설명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같은 말을 중언부언하여 표현의 잉여성을 보이며 산문의 한 토막같은 느낌을 준다고 한다. 신은경, 앞의 논문, 125면 참조.
이러한 지적은 사설시조의 미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본다면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당대의 미적 패러다임을 고려하고 본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의 고전시가에서 전고․용사는 서양의 패러디와는 미학적 기저가 다르기 때문이다. 패로디가 기본적으로 원텍스트와의 비판적 거리화를 통한 재문맥화라면 전고․용사는 원텍스트와의 친화관계 형성을 통한 재문맥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미학적 차이에 대하여는 성기옥(1995), 「한국고전시 해석의 과제와 전망」, 이화여대 인문과학대 발표회, 발표요지, p.20.참조.
이러한 미학적 차이는 동서미학의 차이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서구문화는 격렬한 투쟁을 통해 발전해온 변혁적 문화로 개성과 창조, 모험심과 개척력, 비판적 정신과 회의적 태도,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발전해온 문화다. 이에 비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문화는 소농경제와 농업사회를 기초로 하는 문화여서 서구처럼 진취형 문화가 아니라 정치적 이상으로는 안정을, 철학적 이상으로는 中和를 추구하는 보존형 문화여서 ‘禮의 수호’를 중시해온 문화인 것이다. 동서미학의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는 장파(유중하 등 번역),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푸른숲, 1999, 166면 참조.
따라서 작품 (1)과 (2)의 관계는 서구문화에 바탕을 둔 패러디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전고․용사의 作詩方法에 의한 것이기에 獨創性보다는 典範性을 優位에 둔 미학을 깔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2)에서 독창성을 평가의 잣대로 하는 것은 事理에 맞지 않으며, 평시조를 모방적으로 재현한 사설시조의 미학적 지향도 원텍스트와의 친화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설시조의 미학적 특징은 기본적으로 말을 늘여 재미있게 엮어 는 데 있으므로 중언부언 표현의 잉여성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매력이라 할 것이다.
또한 사설시조의 미학은 ‘自然의 眞機’에서 찾을 수 있다(만횡청류 발문에서 마악노초가 한 말). 그 가장 좋은 예가 “가버슨 兒孩들리 거뮈쥴 테를 들고 개川을 往來며……”라는 사설시조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잠자리를 잡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모습이 素材로 쓰이고 있는데 그러나 그 속임수라는 것은 소재일 뿐 주제와는 상관이 없다. 즉 이 텍스트는 ”발가숭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통해 인간세상이란 교묘한 속임수가 지배하는 세계“임을 보여주려 장경렬, 앞의 논문, 88면 참조.
의도한 것이 아니라 개천가에서 발가숭이로 고추를 내놓고 천진난만하게 고추잠자리를 잡고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그 속임수마저도 속임수로 인식되지 않는 그런 동심의 세계-곧 자연의 진기를 그려 보여주려 한 것이다. 동심은 자연의 진기와 가장 잘 통하는 것으로 당대인은 생각했던 것이다.
사설시조는 또한 기본적으로 “허튼소리”여서 너무 심각하게 의미를 받아들이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허튼소리의 이면에 삶의 세계에 대한 풍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풍자보다는 해학 쪽으로 경사되어 있는 게 사설시조의 미학이다. “一身이 사자니 물것계워 못살니로다……”로 시작되는 사설시조도 작품에 등장하는 각종 물것들이 서민층을 수탈․착취하는 양반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읽는다든지 姜明慧(1993), 「抵抗의 미학으로서 辭說時調」, 한국시조학회 발표요지.p.4.
혹은 관료주의와 결부하여 쉬파리를 “보잘 것 없는 권세임에도 불구하고 권세랍시고 휘두르는 소인배”의 알레고리로 지목하고 각종 해충을 “삶을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귀찮은 존재들에 비유한” 장경렬, 앞의 논문, 87면 참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대의 미학과는 거리가 먼 지나친 천착일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쉬파리의 등장은 종장에 나타나 있어 의미의 반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韓愈의 <送窮文>이나 歐陽修의 <憎蒼蠅賦>에 나오는 쉬파리-양반층이 독서할 때 가장 귀찮게 구는 해충-의 맥락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이 작품의 묘미가 가져오는 미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Ⅳ. 맺는 말
사설시조는 시조 텍스트로 존재하며 평시조와 別種이 아니라 胎生的으로 同一 근원에 속하므로 평시조와의 관련 속에서 그 본질과 특성이 해명되어야 함은 自明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논의에서는 평시조와의 表面的 異質性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탓에 그 본질이 상당 부분 왜곡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심지어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여러 속성이나 관습을 깨뜨리면서 ‘낯설게 하기’에 본질이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상섭(1980), ꡔ言語와 想像ꡕ, 문학과지성사, p.56.을 들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왜곡된 이해를 가능한 是正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라 할 ‘형식’의 문제와 ‘미학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사설시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재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설시조는 형식에 있어서 평시조의 거대틀― 초․중․종장의 3장으로 詩想을 완결한다는 것, 각 章은 4개의 마디로 구성한다는 것, 종장의 첫마디는 3음절로 한다는 것―은 그대로 준수하면서, 다만 미세틀에서 평시조의 율격인 4음보를 일탈한 ‘2음보격 연속체’로 전환하여 상당 정도 말수를 늘여 확장함으로써 ‘억제 속의 확장발화’로 탈바꿈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2보격으로 단 한 번만 일탈하는 경우 ‘엇시조’가 되며 그 이상으로 자유롭게 일탈하면 사설시조가 됨을 새롭게 밝힐 수 있었다. 아울러 사설시조의 율격적 틀로 지정된 2보격의 성격은 ‘민요조’의 단순한 2보격과는 달리 ‘사설조’의 2보격을 지향함으로써 민요와 다른 미학적 율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사설시조의 2보격은 평시조의 4보격에서 태생되어 그것을 깨트리고 나온 2보격이어서 4보격적 속성도 원천적으로 배면에 깔고 있기에 ‘4보격성 2보격’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2보격 본래의 민요적․집단적 성향과 4보격인 시조 본래의 교시적․이념적․개인적 성향이 모두 가능한 폭넓은 양식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설시조의 미학은 시조를 향유하는 풍류마당에서 흥취가 고조될 때 평시조의 엄정 단아한 균제의 미학을 일탈하는 ‘파격’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시조에서 그 파격의 미학을 즐기는 방법과 정도에 따라 (1) 평시조의 엄격한 형식적 틀을 始終一貫 준수하는 가운데 語調上으로 혹은 樂曲上으로 파격을 즐기는 것, (2) 평시조의 엄격한 틀을 단 한 번 살짝 벗어나는 단발성 파격을 즐기는 것. (3) 평시조로부터 율격적․어조적․악곡적 일탈이라는 多面的 일탈을 즐기는 것의 3단계가 있음을 살핀 뒤, 사설시조는 가장 큰 파격적 미학의 단계인 (3)의 단계에서 생성된 미학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사설시조는 일부의 시조가 추구해나가는 ‘파격의 미학’ 단계에서 그 ‘頂点’에 위치해 있는 시조라 규정할 수 있는데, 이는 한국의 독특한 민족이라할 ‘餘裕에 바탕한 逸脫’에 바탕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사설시조의 미학적 특성으로 ‘自然의 眞機’를 드러내려는 당대의 미학과 독창성이나 개성보다는 옛것의 典範性을 중시하는 典故․用事의 미학을 존중한 것임을 아울러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