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 들뢰즈의 철학에 내재한 가상현실
차례
서론
Ⅰ. 베르그송_‘잠재적 기억’과 ‘물질로서의 이마쥬’
Ⅱ. 들뢰즈_‘시뮬라크르 이마쥬’와 ‘물질의 운동'
Ⅲ. 디지털 가상현실_특이성을 통한 비트의 전환
Ⅳ. 반투명한 가상현실_운동성의 이마쥬와 다중감각의 주체
Ⅴ. 반투명성과 새로운 신체를 요청하는 디지털 가상현실 체험
결론
서론
오늘날 언급하고 있는 가상현실réalité virtuelle은 인간과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개념으로부터 유발되는 디지털
가상현실이다. 즉 컴퓨터를 매개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창출되는 ‘현실처럼 구성된 가상환경’이자, ‘현실화된
가상환경’이다.
디지털 가상현실은 우리에게 인터랙션과 커뮤니케이션을 미리 가상 체험케 하고 그것이 현실계에서 가능하도록 돕는
역할(비행기 조정 시뮬레이션이나 의학 임상 실험, 아파트 모델 하우스 가상 체험과 같은 경우) 뿐 아니라 유희와 놀이의
측면(디지털 영상 게임 및 테마파크의 시뮬레이션 장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현실’에 깊이 잠입해 있는 ‘또 다른 현실’
이다.
이것(이곳)은 이제 우리의 유용성을 위한 테크놀로지로 인식되는 것을 넘어서 이제 그것(그곳) 자체가 우리의 ‘신체화된
사건’으로 현실 도처에 편재한다.
그것(그곳)은 이미 실재이다.
디지털 시대에 살지 않았던 베르그송과 들뢰즈가 사유한 철학은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어떤 철학보다 명쾌하게 디지털
가상현실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유의 바탕이다.
특히 들뢰즈의 사유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여기서 베르그송으로부터 촉발되고 들뢰즈로부터 완성된 존재에 관한 사유의 눈을 빌어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가상현실과 관련한 문제들을 꼼꼼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디지털 시대의 무수한 세부적 담론들을 꿰뚫어 사유할 수 있는 ‘성찰의 바탕’을 고민해 보기로 하자.
I. 베르그송_‘잠재적 기억’과 ‘물질로서의 이마쥬’
베르그송에게서 이마쥬는 철학을 위한 하나의 단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존재론적이다.
그는 심상, 상상작용을 거친 추상적 영역이나 실재와 별리된 가상의 영역에서 이마쥬를 파악하기 보다는 그것을 존재론
적으로 파악한다.
즉 그에게서 이마쥬란 사물에 대한 주관적 심상이나 관념의 영역도 아니고 사물의 실체를 재현하거나 지시하는 객관적
표상도 아니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이마쥬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은 ‘존재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되기 보다는 다음처럼 ‘존재의
양상 혹은 양태'을 성찰하는 것에 집중된다.
“이마쥬는 관념론자가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존재, 실재론자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덜한 존재,
즉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1)이다.
베르그송이 이마쥬의 존재론을 이처럼 정의한 까닭은 이전까지의 관념론과 실재론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
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관념론자들은 주관에게 주어지는 관념 즉 표상의 확실성만을 인정할 뿐이며,
실재론자들은 주관 밖에 위치한 사물의 실재성만을 인정할 뿐이기 때문에 양측의 입장을 해결하는 방법이 사유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물질matière로서 존재하는 이마쥬이다.
베르그송에게 이마쥬는 이 세상에 현상하는 모든 물질이다.
따라서 “물질은 이마쥬들의 전체”2)이며 물질로 된 이 세상은 곧 이마쥬들의 총체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에게서 이마쥬는 잠재적인 기억mémoire virtuelle으로부터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우리들 지각perception으로 촉발되지 않는 모든 기억은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는 가능태3)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들은 무의식이 아니라 아직 의식화 되지 않은 상태, 의식이 관여하지 않은 상태로서의 가능적 존재인 잠재성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실재이다.
지각으로 촉발되지 않는 모든 기억들은 잠재적 상태에 존재하는 ‘잠재적 실재’인 것이다.
모든 이마쥬들은 지각이 작동할 때 비로소 기억으로부터 건져 올려져 현실화actualisation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이마쥬들은 전적으로 자유로운(우리의 기억과 지각의 열고 닫음 그리고 실행과 실행하지 않음과
상관없이) 잠재성의 존재인 기억으로부터 출발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지각은 기억이라는 잠재성의 존재를 이마쥬로 구체화하는 도구이다.
그런 면에서 지각은 기억과 공존한다.
이러한 기억과 지각의 공존성을 재현하는 베르그송의 원뿔 모형4)을 잠시 살펴보자.
여기서 원뿔은 현재의 지각(꼭지점S)과 과거의 기억(구역 AB, A'B', A'B')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3단계로 간략히 고찰하고 있는 기억의 구역들은 무수히 많은 깊은 수준을 대표적으로 표상한 것이다.
여기서 기억의 수준들은 현재적 지각 S가 맞닥뜨리고 있는 어떤 특정 관심에 따라 응축하면서 그 관심 주변에 모여든다.
관심의 정도에 따라 그 응축의 정도는 달리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이 의식처럼 무수히 다양한 잠재적인 것들이 내부에서 상호침투하며 변화 생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5)
베르그송은 현재적 지각과 공존하고 있는 잠재적 과거의 전체가 기억의 깊이에 따라 혹은 그 포괄성에 따라 늘었다가가
줄었다가 하는 고무풍선과 같은 현상을 지속화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지각과 기억의 공존을 가시화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베르그송의 지속은 연속보다 공존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조차 한다.
여기서 이마쥬는 지각을 통해서 기억으로부터 끌어올려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잠재적 기억으로부터 끌어올려져 이마쥬로 전환되는 현실화의 과정 자체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연구자들에게 디지털가상현실에 대한 연구의 한 주제로 진지하게 성찰되고 있다는 점이다.6)
즉 가상현실 연구에 있어, ‘가상현실réalité virtuelle'을 실재와 대비되는 부재 혹은 허구의 차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잠재'
로 이해하는 것이자, 아울러 ‘가상현실 체험’을 현실화의 과정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가상’의 사전적 의미가 ‘잠재성 혹은 사실과 다름없음'인 것처럼, 가상현실이란 베르그송의 잠재적 기억과 같은 것이다.
기억이란 ‘현실화된 실재'는 아니지만 ‘잠재적 실재réalité virtuelle'인 것이다.
가상과 현실을 부단히 오고가며 둘 사이의 문제를 모호하게 정체화identification시키는 잠재적 상태 즉 잠세태virtualité란
실상 베르그송의 철학을 계승한 들뢰즈에게서 보다 구체화된 것이지만, 그 근원은 위와 같은 베르그송의 존재론적 성찰
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베르그송 철학의 ‘기억’과 가상현실의 ‘가상’은 잠재적 실재라는 공통항으로 묶이는 지점이 된다.
또한 베르그송 철학에서 ‘기억’은 ‘지각’을 통해 ‘이마쥬’로 현실화되고, 가상현실의 ‘가상’은 ‘지각‘을 통해 ‘가상현실 체험’
으로 현실화된다.
물론 가상현실이란 말 자체가 ‘가상이 이미 현실화된 존재’임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경험
될 뿐이다.
즉 지각이라는 ‘가상현실 체험’을 통해서만 현실화되는 것이다.
한편, 베르그송에게서 이마쥬의 존재론은 들뢰즈에게서 시뮬라크르라는 운동성의 이마쥬로 보다 더 구체화되면서
오늘날 가상현실 체험에 관한 풍부한 논의의 바탕을 제공한다.
II. 들뢰즈_‘시뮬라크르 이마쥬’와 ‘물질의 운동’
들뢰즈는 앞서 살펴본 베르그송의 ‘기억과 이미지’에 관한 잠재성과 가능성possibilité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의식을 계승
하고 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사유를 분석하면서 잠재성은 “차이가 분화되면서 현실화되는”7) 방식으로 실존하지만, 가능성은
“실재가 생산되었을 때 그것의 이마쥬를 과거로 투사하는 정신행위”8)로서 존재하는데 그침을 피력한다.
이처럼 들뢰즈의 철학의 핵심은 잠재성에 의미에 방점을 찍는데 있다.
이전의 동일성과 표상의 철학으로부터 소외받았던 잠재성이 베르그송을 이어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서 주요하게 부상
하는 것이다.
그는 잠재성이 이미 실재임을 피력하는 베르그송의 견해를 다음처럼 계승한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실적인 것에만 대립된다.” 9)
베르그송이 설명한 잠재적 기억으로부터 물질적 이마쥬로 현실화되는 과정은 들뢰즈에게서도 매우 주요하다.
특히 들뢰즈는 이마쥬를 ‘현실화된 것’으로 바라보는 베르그송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여기에 이마쥬가 ‘물질의 자격
으로서 벌이는 현실화의 운동의 차원’에 보다 더 주목한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화되는 조건에서 잠재적인 것이며 현실화되면서 그 현실화의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10)
들뢰즈는 한발 더 나아가 베르그송이 바로보는 이마쥬를 시뮬라크르simulacre로 재정의하면서 이것을 무수한 차이를
생성하는 역동적인 “운동-이마쥬image-mouvement”11)로 해석한다.
가상현실을 살피는 우리의 논의에서, 들뢰즈의 철학의 유의미성은 이러한 시뮬라크르 이론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전까지 저평가되었던 시뮬라크르의 ‘복제성'을 긍정적 개념으로 부상시키고 시뮬라크르 이마쥬를 역동성의 존재로
정초해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시뮬라크르는 원래 플라톤에 의해 정의된 개념이다.12)
즉, 원형인 이데아, 이데아의 복제물인 현실, 그리고 현실을 복제한 이마쥬로 나뉘면서 이마쥬 중에서도 가장 하급의 것
으로 평가된 것이 바로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이처럼 플라톤의 형상이론théorie des Idés은 최상의 형상인 이데아라는 원본과 그것과 유사성을 지니는 복제물, 그리고
최하의 시뮬라크르의 순서로 중요도를 매기면서, 원본을 특권화시키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창출한다.
여기서 이데아적 원본의 형상을 물려받은 순수 혈통인 복제물은 유사성의 차원 때문에 후계자의 지위를 견지하지만,
시뮬라크르는 그렇지 못하다.
복제의 복제를 통해서 원본과의 유사성을 상실한 시뮬라크르는 “타락, 곁가지를 함축”13)하는 서자가 될 따름이다.
즉 플라톤에게서 시뮬라크르는 궁극적으로 유사성을 끝없이 위협하며, 부조화, 차이, 비상사성을 유발시키는 하등의
존재일 따름이다.
그러나 들뢰즈에게서 이러한 시뮬라크르는 타락한 서자의 지위를 벗고 새롭게 해석된다.
이데아의 유사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플라톤의 시뮬라크르의 특성 자체가 오히려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긍정적 존재로
부상하게 하는 철학이 들뢰즈로부터 고안된 것이다.
플라톤의 ‘유사성 논리’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허물어뜨리며 새롭게 정체화시킨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다름 아닌 ‘오직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할 따름인 “개념 없는 차이différence sans concept”14)로서의 존재로 변환된다.
즉, 그것은 유사성에 근거하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동일성을 지니는 세계이자 차이라는 동일
자가 스스로를 차이로 만드는 ‘사건의 세계’이다.
차이만이 동일성을 지니는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그 어떤 것도 원형이 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복제물이 될 수 없는”15) 세계를 형성한다.
그런 면에서 들뢰즈에게서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복제물, 모델과 재생산을 동시에 부정하는 긍정적 잠재력'16)을 소유
하게 되면서 모든 이분법적 사유를 일순간에 무너뜨린다.
따라서 들뢰즈에게서 시뮬라크르의 본성은 새로운 원본의 위상을 강탈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를 생성
하는 것에 존재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이마쥬로서의 시뮬라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관건은 오직 차이만을 생성한다는 ‘차이의 반복'17)에
관한 것이다.
그에게서 ’차이를 생성하는 과정인 반복répétition‘은 결국 동일성의 비반복non-répétition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렇듯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동일성이 일자의 동일성이나 전체의 통일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강력한 다양체와 형태
변이의 능력을 위해서 상실되는 그리고 잠재력의 관계들이 서로에게 작용을 가하는 매혹적인 세계”18)로 정초된다.
들뢰즈에게 그것은 모든 이분법적 사유를 무너뜨리는 “긍정적이고 즐거운 사건”19)의 철학인 것이다.
유념할 것은 들뢰즈에게서 ‘차이의 생성’과 ‘사건의 철학’은 시뮬라크르 이마쥬를 ‘운동성의 것’으로 정초시킨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이마쥬, 즉 시뮬라크르는 규정되지 않은 혼돈의 상태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어떤 발생적인 근원의
힘이자, 생성을 지향하는 “가능한 운동mouvement possible”20)이다.
그것은 아직 의미론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무의미’의 상태이지만, 점진적으로 의미를 부여받는 영역으로 계열화되기를
기다리면서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이다.
들뢰즈는 운동mouvement을 “전체 속에서의 질적 변화changement qualitatif dans un tout”라고 정의한다. 21)
그것은 물론, “지속은 불가분의 멜로디의 연속성으로, 과거가 현재 안에 들어와 불가분의 전체를 형성한다.'22)는 이질성
hétérogénité이 연쇄되는 '베르그송의 지속durée의 철학'을 계승한 것이다.
베르그송이 이마쥬를 잠재적 기억으로부터 현실화된 물질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듯이 들뢰즈 역시 이마쥬(=시뮬라크르)
를 현실화된 존재이면서 현실화의 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물질적 존재로서 파악한다.
한편, 들뢰즈에게서 운동성의 시뮬라크르 이미지는 “특이성의 표현의 특질을 지닌 채 지속적으로 변주하고 있는 물질의
흐름”23)이다.
그런 면에서 “운동-이미지image-mouvement와 흐름-물질matière-écoulement은 완벽히 같은 것이다.”24)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의 시뮬라크 이마쥬의 위상과 그 존재론과 관련하여 다음처럼 정리해볼 수 있겠다. :
‘시뮬라크르simulacre = 이마쥬images = 운동mouvement = 물질matière’
III. 디지털 가상현실_특이성을 통한 비트의 전환
이마쥬는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잠재적 기억의 현실화된 물질적 존재’로 정리된다.
즉 현실화 작용, 물질들로 축약된다.
한편, 들뢰즈의 관점에서, 그것은 ‘시뮬라크르, 이마쥬, 운동, 물질’로 정리된다.
우리는 두 철학자의 이러한 관점들을 앞으로 이어질 디지털 가상현실 논의에 있어서도, 다양한 형식으로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구현된 오늘날의 가상현실을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눈을 빌어 바라보는 이 지점에서, 혹자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비물질성의 비트가 만들어내는 디지털 정보가 어떻게 물질적인 이마쥬와 조우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의 베르그송의 이마쥬론에서 우리의 지각이 잠재적 기억으로부터 현실화된 이미지를 건져올리는 것을 검토했듯이,
이 역시 물질이자 현실화된 이미지로 정의된다.
즉 디지털 정보인 잠재적인 디지털 비트 역시 지각을 통해 아날로그 이마쥬라는 물질로 현실화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가상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가상현실은 베르그송의 기억과 같은 공간이며 그것에 대한 체험은 지각이 창출하는 이마쥬의 존재론과 같은 것이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고찰을 위해서 우리는 ‘가상현실을 이루는 디지털 테크놀로지'25)에 대한 이해를 먼저 검토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오늘날 가상현실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한 몸처럼 인식되는 까닭은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전의 어설펐던 형태로
존재했던 가상현실의 이상을 현실의 장에서 극적으로 성취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비물질성의 디지털 정보와 물질성의 이마쥬의 조우에 대한 고찰을 위한 이 장에서, 가상현실을 이루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핵심은 이마쥬뿐만 아니라, 소리, 텍스트 등 어떠한 자료도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수(數)에 기초한 전자적 정보로 전환 가능하다는 점이다.
디지털 어원인 디지트digit가 라틴어로 손가락 혹은 10개의 숫자를 의미하듯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하고 셈을 하듯이 ‘이산(離散)적으로 변화하는 신호’26)로 모든 것을 전환시킬 수 있다.
디지털은 아무런 임펄스가 없는 상태를 0, 임펄스가 가해지는 상태를 1로 인식하는 0과 1의 이진법 체계인데, 이 체계를
통해 어떠한 정보도 숫자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을 둘러싼 기본적인 특성인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 전환 과정,
즉 숫자로 표현하는 수적 재현numerical representation의 과정을 거쳐 프로그램화 해야만 한다.
강연, 음악 연주, 바람 소리와 같은 현실계의 연속적인 아날로그 소스를 프로그래밍을 통해 0, 1 혹은 on, off 등과 같은
2진수, 즉 비트bit로 된 수치로 전환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트로 된 디지털 정보는 당연히 비물질성의 존재이다.
니콜라스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는 “비트가 크기도 무게도 색깔도 없으며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특징을 지녔다”27)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비트는 ‘존재’가 아니라 ‘상태’이며 참 또는 거짓, on 또는 off, up 또는 down, 흰색 또는 검은색처럼 서로
짝을 이루는 상대개념이다.
모든 디지털 매체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비트의 추상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비트의 조합상태가 바로 디지털 세계이며 이 디지털 세계는 결국 “0과 1로 조각된 가상의 세계'28)이자 비물질의 세계
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생산되는 이마쥬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아날로그 자연 풍경 이마쥬를 수적 정보로 입력, 저장한 디지털 비디오녹화기에서 우리가 촬영한 동영상을
다시 재생했을 때 그 움직이는 이마쥬는 어떠한 것인가?
물론 그것은 물질로 현실화된 이미지이다.
구제척으로 그것은 비물질의 디지털 비트가 물질화된 아날로그 이미지로 재생된 동영상 이마쥬인 것이다.
피상적으로 이것은 디지털 카메라 안의 메모리에서 초당 수백만 번 비트 시퀀스가 갱신되면서 입력했던 디지털 정보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동영상 이미지로 순식간에 ‘DA전환’(디지털정보로부터 아날로그정보로의 전환)을 이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가상현실 체험이란 이처럼 간단히 말해 ‘비트가 이마쥬로 전환된 가상현실’에 대한 체험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의 이마쥬 존재론의 차원에서도 검토되었듯이, 비물질적이고
잠재적인 상태로부터 물질적 이마쥬를 불러내는 과정이 인간의 ‘지각’이 작동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에게서 이마쥬를 지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눈, 귀, 몸과 같은 감각으로 대면하는 물질에 대한 경험이다. 특히 들뢰즈에게 있어서 우리의 ‘지각’이란 흐르는 유동체 속에서 실행되는 거의 순간적인 ‘절단coupe’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파악되는 이마쥬란 정지하는 절단면들coupes immobiles이기 보다는 ‘움직이는 절단면들coupes
mobiles’29)로 드러난다.
들뢰즈에게 있어 이미지란 끊임없는 물질의 운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의 논의인 가상현실 체험, 특히 디지털 가상현실 체험은 들뢰즈 식의 ‘움직이는 절단면들’을 지각
하는 경험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그것은 HMD와 같은 영상 디스플레이 장치 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들이 유저user의 시공간인 현실계
에서 작동함으로써 비물질적인 디지털 정보를 다시 물질적인 아날로그적 이마쥬로 전환시켜 놓는다.
즉 디지털 가상현실 체험이란 디지털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필연적으로 현실계에서 가상현실(또는 가상현실의 시뮬라크르 이마쥬)을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가상현실은 여전히 인간 주체의 지각에 의해서 경험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상현실 체험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들뢰즈 식으로 사건의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특이성singularité’으로
부터 기인한다.
특이성이란 ‘개체적이거나 인칭적인 것이 아니라 개체들과 인칭들의 발생을 주도하여 가능하게 하는’ 중성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개별적으로 구체화된 사건 이전의 순수한 사건과 같다.30)
아울러 특이성은 계열들의 각 항들이 우발점point aléatoire 31)(사건의 발생)을 만나 분화를 거쳐 현실화될 때 그 작용을
주도한다.
우발점은 각각 물→얼음, 물→수증기로 변모시키는 0 C와 100 C라는 변환점과 같은 것으로 비교될 수 있는데, 끓는 물이
100 C라는 변환점(또는 임계점)에 이르러 비로소 기화되듯이, 특이성은 계열들의 연속체 속에 숨어서 존재하다가
우발점에 이르러 계열체로부터 솟아오른다.
“현실화의 규칙이란 더 이상의 유사나 한정이 아니라 갈라짐 그리고 창조”32)라는 들뢰즈의 진술에서 엿볼 수 있듯이,
가상현실에서의 현실화 경험, 즉 운동-이마쥬를 대면하면서 관객들은 가상현실 체험이라는 ‘특이성으로부터 유발되는
창조적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특이성을 통한 비트의 전환’이다.
풀어 말하면 비트라는 디지털 비물질이 물질화되는 현실화에 대한 우리의 참여이자, 우리의 지각이 특이성을 통해 작동
하는 사건이 된다.
IV. 반투명한 가상현실 : 운동성의 이마쥬와 다중감각의 주체
디지털 가상현실 속에서 가상과 현실은 그 정체성이 모호하게 뒤섞여 있는 게 다반사이다.
물론 모두가 실재이지만 현실화의 과정 중인 가상과 이미 현실인 존재가 납작하게 들러붙어 있어 구별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가상현실VR과 가상공간CS이 혼성되어 있어 그 경계 자체가 식별 불가능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게다가 매개하는 미디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정되는 이마쥬의 투명성 차원인 비매개성immediacy과 과매개성hypermediacy의 구분마저 모호한 경우도 있다.
그런 까닭은 가상현실 공간 안에 현실화되기 이전의 가상이 현실화의 과정 속에 내재된 운동-이마쥬의 잠재성의 특성
때문이다.
운동-이마쥬가 작동하는 디지털 가상현실의 장은 들뢰즈의 눈을 빌어보면 마치 ‘주름le pli’과 같은 공간이다.
주름은 들뢰즈가 ‘하나이면서 무한한 세계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의 독특한 구조를 새롭게
해석한 개념이다.
즉 이 세계를 선의 무한소인 굴곡, 즉 주름들이 중첩되어있는 연속체로 바라보는 개념이다.
“주름위의 주름은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두 흐름들 또는 인식의 두 흐름들”33)처럼 다양한 연속체이다.
각자의 무수한 주름들은 결코 똑같은 방식으로 접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질적 차이를 지닌
다양체 또는 복수성들multiplicités이 존재하고 있기에 때문이다.
들뢰즈가 바라보는 세계는 주름들로 가득하고 이 주름들 안에는 잠재적 다양체 즉, 복수성들로 가득하다.
들뢰즈의 눈을 빌어 바라보는 우리의 가상현실 역시 주름들과 다양체로 가득하다.
여기서 무수한 주름 속의 다양체 혹은 복수성은 차이가 있는 실재의 자격으로서 현실화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측면에서
투명하지만 반대로 어떠한 양태로 현실화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따라서 필자는 잠재성의 가상을 투명과 불투명의 혼재로 바라보면서 가상현실을 반투명한 실재로 정의한다.
우리가 정의하는 가상현실의 반투명함은 들뢰즈가 정의하는 주름의 세계 뿐 아니라 알œuf과 같은 상태와 공유한다.
그런 까닭은 잠재성의 현실화의 과정 때문인데, 이 현실화의 과정을 알로 비유하는 까닭은 “현실화에는 어떤 법칙이나
규칙이 없기 때문'34)이다.
알의 현실화 과정은 내포량을 분배하고 쪼개며 분화되고 개체화되는 것이다.
알이란 들뢰즈에게 있어 기관들이 분화되지 않은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35)이며 “비생산적이고 비소비적이지만,
욕망 생성의 모든 과정을 등록하기 위한 표면을 제공”36)하는 미분화 단계의 장이다.
그것은 ‘기관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로서의 잠재적 실재의 양태이다.
이러한 불투명(우리의 논의 식으로)하고 잠재적인 존재인 알은 “기관의 조직화와 유기체로의 확장은 물론 계층의 형성
전에 이미 가득한'37) 존재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기관 형성 전에 “이미 운동 중인”38)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재는 운동성이자 운동하고 있는 경
향들39)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가상현실을 검토하는 우리의 논의 식으로 말하면 이러한 주름과 다양체 그리고 기관없는 신체와 알과 같은
공간은 실재라는 점에서 한 없이 투명하지만 현실화에 대해 예측하기 어려운 무한한 잠재적 존재라는 점에서 불투명한
실재인 셈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공간과 비교하는 우리의 디지털 가상현실을 ‘반투명한 실재’로 재정의한다.
반투명한 디지털 가상현실에는 가상으로부터 현실로 이르는 잠재적 존재들의 무수한 운동-이마쥬들로 가득하다.
오늘날 디지털 가상현실이란 컴퓨터 미디어를 사용해서 현실계의 3차원의 이마쥬의 가상적이고 인위적인 환경을 구축
하고 그것에 대한 체험을 가능케 하는 상태나 그에 관한 기술적 장치를 지칭한다.
이러한 기술적인 방식은 3차원 이마쥬를 기본적으로 지각하는 시각은 물론이고 그에 부가되는 청각과 촉각 그리고
나아가 후각, 미각의 차원까지를 아우르는 인간의 오감을 통해 가상을 실제적 차원과 유사하게 경험시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상으로부터 현실에 있는 잠재적 존재들의 무수한 운동들을 체감하려는 유저들의 참여를 통해 무수한 운동
들은 다중감각이 필요한 메타-이마쥬의 형식으로 생산, 소비된다.
텍스트, 이마쥬, 오디오, 비디오 등의 다중 매체가 동원되어 시각은 물론이고, 청각, 후각, 촉각이 결합된 다중 감각으로
이러한 운동들이 경험되기에 이른 것이다.
디지털 가상현실에 일어나고 있는 무수한 운동-이마쥬들과 그것을 대면하는 유저들의 다중감각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
있는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신체 그것도 현실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신체와 관련된 사유에 근거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베르그송에게서는 직관intuition으로 들뢰즈에게서는 정신분열증schizophrénie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간략히 살펴보자.
베르그송에게서 신체는 이마쥬와 더불어 주요한 인터페이스인 셈이다.
그에게서 신체는 ‘생명의 단일성unité de la vie’40)으로서 살아있는 물질이면서 이마쥬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베르그송에게서 신체는 “실제적 행위의 중심”41)을 차지한다.
이 중심에서 지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신체 역시 하나의 물체일 따름이며, 물질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에게서 신체는 모든 물질들이 존재하는 방식인 ‘이마쥬’의 차원으로 함께 이해된다.
이마쥬는 결국 신체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용어가 되면서도, 심리적, 질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하는 우리의 신체와 기억,
지각의 양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를 대변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기억이나 지각이라는 것은 물질이라는 이마쥬 전체로부터 우리의 신체가 받아들이는 활동에 다름
아니다.
결국 신체는 이마쥬와 대면하는 인간주체의 행위 중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베르그송 철학에 나타난 기억과 지각이라는 신체의 활동 중, 지각perception이라는 개념을 다음
처럼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각은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이라는 신체적 감각 기능(sens)으로부터 유발되는 흐릿하거나 명료한, 시끄럽거나
고요한, 비릿하거나 은은한, 또는 달거나 맵거나 하는 식의, 표상적représentatives 감각 혹은 신경생리적 감각과 공유를
하면서도 결코 그것들을 전칭(全稱)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뿐만 아니라 베르그송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감성의 개념인 정념affection42)과 섞여 있기 때문이다. 43)
베르그송에 의하면 주로 ‘지각은 밖으로부터 정념은 내부로부터 세계와 소통’하지만 지각과 정념이 결코 완전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지각은 정념에 오염된 체계이자, 정념은 지각에 섞이는 불순물이다.
베르그송에게서 기억, 지각, 정념의 체험들은 결국 베르그송에게서 신경계는 우리가 우주 속에서 그 전체와 상호작용
하는 가운데서 존재할 수 있는 존재 양태로 주요하게 다루어지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격성personalité, 즉 인격의
존재자이자 동일성의 존재자인 자아(Moi)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자아 혹은 자의식(Moi)은 영속적이고 총체적인 인격성의 존재자이다.
그것은 결코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용인하지 않는 한 덩어리의 ‘생명의 단일체unité de la vie’44)로서 ‘연속적 유동성fludité
successive’을 지닌다. 자아는 지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에게서, 자아가 체험적 시간인 지속 속에서 이마쥬를 대면하는 방식은 ‘직관intuition’으로 가능하다.
그것과 달리 지성은 단지 과학적 추론에나 적합한 능력일 따름이다.
이마쥬의 본질은 본래 역동적이고, 생동적이며 연속적인 존재, 즉 지속과 연관되기 때문에 지성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이
지속을 방해하고 삶과 운동을 정지시킬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에게서 이마쥬는 ‘직관’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서 세계란 ‘지속duree’의 시공간이란 점에서 그 세계가 늘 이질적인 새로움nouveauté hétérogène,
변화évolution 그리고 ‘삶의 약동elan vital'의 연속이 가득한 세계이다.
그래서 나라는 삶의 주체가 지성이 아닌 직관(기억, 지각, 정념 등이 포함된 총체성)으로 그것을 대면할 수 있었다.
한편, 들뢰즈에게 있어 세계란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알’와 같은 시공간이란 점에서 그 세계가 늘 변화와 운동성이 가득한
세계이지만, 주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인 까닭에 세계를 대면하는 주체는 그의 철학에서 더 이상 나라는 주체
로 정의되지 않는다.
미리 전제된 모든 공리와 기관들을 거부해왔던 들뢰즈의 철학에서 주체란 타자의 출현을 통해서 가능했다.
그의 철학에서, 현실과 더불어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 범주인 잠재적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언제나 타자였다.
나아가 그에게 주체의 의미는 익명의 거대한 언표énoncé 덩어리이거나 분열된 자아의 모습으로 걸음을 옮겨 이제는
‘정신분열증 환자schizophrénie’와 같은 차원'45)으로 이동되었다.
그런 면에서 운동-이마쥬라고 하는 메타-이마쥬를 대면하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다중감각의 주체는 들뢰즈의 철학의
관점에서 더 이상 그것에 참여하는 유저의 현실적 주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그 주체란 다름 아닌 현실계의 지층으로부터 별리된 채 기관 없는 신체의 모습으로 알의 양태로 실재하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분열된 자아로서의 주체이다.
들뢰즈 표현을 빌면 그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모습이다.
그것은 비관론이 절대 아니며 긍정적인 가상현실 체험과 관련된 진술을 도래케 한다.
그것은 ‘-이다être’의 영역이 아니라 재현될 수 없고 한계지어질 수 없는 ‘-되다devenir’의 차원인 ‘사건’이 우리와 부딪히는
지점이다.
그것은 또한 “동사 안에 내포된 것으로서”46) 끊임없이 변모하는, 가상현실 체험 안의 우리를 올바로 규정할 수 있게 할
것이다.
V. 반투명성과 새로운 신체를 요청하는 디지털 가상현실 체험
가상이 현실로 현실화되는 과정 자체가 가상현실이고 인간이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가상현실 체험이라고 할 때,
그 곳에는 우리의 신체가 자리한다.
가상현실은 베르그송과 들뢰즈가 언급하는 잠재성이 웅크리고 끊임없이 운동하는 사건의 장이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자기 동일성이 없는 시뮬라크르들이 벌이는 무수히 사건들의 장이다.
사건 발생 이전에 사건의 장은 이미 실재이다.
그것이 잠재성의 공간이지만 언제나 실재라는 차원에서 가상현실은 투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떠한 양태로 현실화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가상현실을 투명과 불투명이 혼재하는 반투명의 실재로 정의한다.
이러한 반(半)투명한 가상현실에 우리의 신체가 개입하는 일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들뢰즈 식으로 언급하면 특이성이
작동하는 사건이 된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사유와 같이 우리의 신체가 기억, 지각, 정념을 통해 나아가 직관을 통해 이마쥬를 대면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또한 들뢰즈의 사유와 같이, 우리의 신체가 ‘운동-이마쥬들’을 체험하는 사건이다.
가상현실은 이미 실재이지만, ‘가상현실에 참여하는 신체의 개입'이라는 하나의 사건 또한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성을
부활시켜 현실을 만들어가는 유의미한 실재이다.
관건은 가상현실에 참여하는 사건(들)에 우리의 신체가 들뢰즈 철학이 야기하고 있는 탈주제척 신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상현실이라는 사건의 장에 개입하는 신체는 더 이상 대상을 객체의 형태로 떨어뜨려내는 이성적 주체로서의 신체가
아니다.
그 신체는 알과 같이 기관 없는 신체이거나 분열된 자아, 정신분열증적 주체로서의 신체이다.
그것은 다분히 현대철학이 야기한 ‘주체 이후의 주체 아닌 주체'인 셈이지만, 이러한 신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가상
현실에 개입하는 우리의 신체가 맞닥뜨리는 가상현실 체험에 관한 논의를 매우 활력 있게 하는 철학적 기반이다.
앞서의 필자의 표현처럼 은유적으로 재정의해보면, 가상현실 체험의 신체는 베르그송의 투명한 신체(지속에 관여하는
체험적 삶의 주체라는 점에서)와 들뢰즈의 불투명한 신체(주체의 위치를 끊임없이 포기하고 타자에 의해 그것이 유동
한다는 점에서)가 함께 어우러진 반투명한 신체이다.
결국 우리의 논의에서, 디지털 가상현실과 디지털 가상현실 체험을 이해하는 관건은 반(半)투명으로서의 가상현실과
반(半)투명으로서의 신체를 정의하는 일이다.
사실 가상현실 연구에 있어서는 투명성transparency과 불투명성opacity에 관한 고찰은 오랜 논란거리였다.
미디어의 존재감이 신체와 적용하는 이마쥬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의 차원이 그것이다.
보편적으로, 미디어의 존재감이 탈각되어 신체의 가상현실 몰입이 가능해지는 차원을 ‘비매개성immediacy’이라 하고
미디어의 존개감이 신체에 과도하게 개입해 가상현실 몰입이 불가능해지는 차원을 ‘과매개성hypermediacy’이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컴퓨터를 통한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가상공간cyber-space은 키보드, 모니터, 외장하드, 화상 카메라,
프린트, 팩스와의 연동을 통한 멀티미디어의 구현 외에도, 여러 창을 동시에 띄어 놓고 다른 유저들과 커뮤니케이션하게
만든 월드 와이드 웹과 같은 장치를 통해 과매개성이 발현되는 장으로 평가된다.
반면에 가상현실VR의 장은 고글과 같은 두상장착화면, 광섬유 데이터 장갑, 대형 스크린, 원격현전을 유도하는 각종
시뮬레이션 장치와 같은 미디어들의 과매개성이 두드러짐에도, 그것들의 존재감이 유저의 몰입을 도와주기 위해 존재
했던 탓에 탈각되어 결국 비매개성의 차원으로 작동하게 된다.
가상현실은 결국 근본적으로 비매개성의 차원을 견지함으로써 투명성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상의 강조점은 가상현실 체험의 실제에서는 여실히 빗나간다.
유저의 몰입을 도와주기 위해 존재하는 무수한 미디어들의 존재감이 완전히 탈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저의 몰입을 최상화시키지 못하는 가상현실 장치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가상현실은 유체이탈의 경험과 같은 몰입적 효과를 거두지 않는 이상 언제나 비매개성과 과매개성의 두 차원
안에서 이동한다.47)
미디어 이론가들에게서 그것은 현실계의 신체가 개입하는 완벽한 가상현실 체험은 불가능하고 언제나 현실계의 존재
감을 동시에 지각한다는 점에서 복합현실Mixed Reality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가상현실의 실재는 몰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차원에서 굳이 언급하면 반(半)매개성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표현대로 반(半)투명성의 차원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디지털 가상현실에 참여하는 우리의 신체 또한 반투명적이다.
가상현실에의 완전한 몰입 자체가 불가능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별리된 가상현실의 경험이 유저의 신체적 정체
성을 계속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리적 촉지각의 문제로부터 인식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현실적 관성을 으그러뜨리며 현실 속으로부터 온 유저의
가상현실으로의 몰입을 방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 신체의 오감 및 생리적 현상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가상현실에의 몰입을 극대화하려는 연구들이48) 최근 지속
되고 있다.
현재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들은 3차원 인터페이스를 실험하고 있다.
이러한 3차원의 인터페이스는 사용자의 컴퓨터 사용을 더욱 쉽게 해줄 것이며 가상현실과 같은 상황 창출을 보다 용이
하게 해 줄 것이다.
가상현실 구현을 위해서는 이제 미디어 장치의 존재감을 더욱 쉽게 망각하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미디어가
간소화되면서 그 기능은 첨단화되고 있다.
가상현실에서는 결국 사용자와 구축된 가상현실 사이의 매개체인 미디어의 간소화를 통해 인터페이스 없는 인터페이스의 세계가 구축될 날도 머지않다는 전망이다.
즉, 가상현실 구현 장치에서는 버튼도 없고, 스크롤바 혹은 아이콘과 같은 도구들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어 현실세계
같은 느낌이 즉자적이고 순간적으로 들게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세계가 사유의 측면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현실계에 가능
해지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가 유체이탈을 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언제나 이상론이다.
다만 그와 같은 이상론에 일정부분 근접해가는 가상현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해진 것은 완벽한 몰입을 통한 가상현실 체험에 대한 투명성(매체적 차원에서는 비매개성)과
새로운 신체(들뢰즈의 사유와 같은)에 대한 인식을 요청하는 가상현실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물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상현실의 원래 출발이 원격현전telepresence이나 유체이탈과 같은 공상이나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소산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진지하게 사유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1989년 가상현실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물론 이전에 가상현실 구축에 대한 시스템 연구들은 있었지만),
제론 레니어J. Lanier가 켈리Kelly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다음과 같은 언급과 함께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지몽(蝴蝶之夢)을 곰곰이 함께 성찰해 볼 일이다.
“가상현실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체를 이용하여, 가상현실에서 선택한 신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신체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상현실에서의 신체는 인간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가상현실에서 여러분은 산맥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은하계나 플로어 위의 조약돌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혹은 피아노... 내가 피아노가 되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일순간에 저 하늘의 혜성이 되기도 하고, 또 얼마 후에 아주 높은 곳에서 여러분의 친구를 내려다보는 혜성보다 더 큰 거미로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49)
“언제인가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는 겉보기에 반드시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만물의 변화인 물화(物化)라는 것이다.” 50)
결론
이 논문은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철학에 기초하여 오늘날 디지털 가상현실을 분석하는 제반 문제의식들을 탐구하는데
집중했다.
이 연구는 다수의 이론가들이 현실을 실재라 정의하면서 동시에 가상을 이와 대비되는 비실재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비판하면서, 이를 수정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두 철학자의 이마쥬의 존재론을 탐구하면서 가상현실의 가상이 이미 실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 가상현실 체험이라는 것이 베르그송에게서 잠재된 기억mémoire virtuelle으로부터 지각을 통해
이마쥬로 현실화되는 과정으로, 들뢰즈에게서 시뮬라크르 이마쥬가 운동하는 현실화의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본론에서 살펴보았듯이, 베르그송은 실재론(또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관점에서, 이마쥬를 물질로
간주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이마쥬론을 계승하면서 시뮬라크르 이마쥬의 운동에 보다 더 집중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상현실은 베르그송의 기억과 같은 잠재적 공간이며, 그것에 대한 체험은 베르그송의 지각이
창출하는 물질적 이마쥬에 대한 체험이자 들뢰즈의 특이성이 창출하는 사건으로서의 운동-이마쥬와 맞부딪히는 경험
임을 알게 해준다.
가상현실 체험은 인간 주체가 필연적으로 현실계에서 경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인간 주체의 지각에 의해서
경험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심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날 가상이 현실화되는 과정, 즉 가상현실 체험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오늘날 가상현실 체험은 비물질인 비트가 현실화를 통해 물질/현실이 되면서 성취된다.
이러한 체험에는, 가상현실(VR)과 복합현실(MR)이 때로는 가상현실과 가상공간이 혼성되어 있어 그 경계 자체가 식별
불가능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게다가 매개하는 미디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정되는 이마쥬의 투명성 차원인 비매개성immediacy과 과매개성hypermediacy의 구분마저 모호한 경우도 있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직관intuition으로 한편으로 들뢰즈의 정신분열증schizophrénie으로 대면하는 세계가 된다.
특히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이다etre’의 영역이 아니라 재현될 수 없고 한계지어질 수 없는 ‘-되다devenir’의 차원인 ‘사건’
이 우리와 부딪히는 지점이다.
또한 이것은 들뢰즈 식의 주름과 다양체 그리고 기관없는 신체와 알과 같은 공간이 실재라는 점에서 한 없이 투명하지만,
현실화에 대해 예측하기 어려운 무한한 잠재적 존재라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디지털 가상현실을 투명성과 투명성이 한데 뒤섞인 반투명한 실재로 재정의하게 된다.
이것은 비관론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세계이다.
그 곳에는 우리의 새로운 신체를 존재한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투명한 신체(지속에 관여하는 체험적 삶의 주체라는 점에서)와 들뢰즈의 불투명한 신체(알과 같은 정신분열증적 주체로서, 주체의 위치를 끊임없이 포기하고 타자에 의해 그것이 유동한다는 점에서)가 함께 어우러진 반투명한 신체이다.
이러한 새로운 신체에 대한 요구는 가상현실(VR)에의 완전한 몰입 자체가 불가능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계에서 벌이는 복합현실(MR)의 경험이 유저의 신체적 정체성을 계속 훼방하기 때문이다.
향후 예측할 수 없으리만큼 급속도로 발전해가고 있는 가상현실의 장에 있어 이처럼, 불투명성으로부터 반투명성,
나아가 투명성으로 전개되어가는 ‘변환에 대한 사유’나 그에 따라 필요해진 ‘새로운 신체에 대한 사유’는 절대적 과제이다.
결국 우리의 논의에서, 디지털 가상현실과 디지털 가상현실 체험을 이해하는 관건은 반(半)투명으로서의 가상현실과 반
(半)투명으로서의 신체를 정의하는 일이다.
가상현실 체험의 신체는 베르그송의 투명한 신체(지속에 관여하는 체험적 삶의 주체라는 점에서)와 들뢰즈의 불투명한
신체(주체의 위치를 끊임없이 포기하고 타자에 의해 그것이 유동한다는 점에서)가 함께 어우러진 반투명한 신체이다.
그런 면에서 제론 레니어의 가상현실에 대한 사유나 장자의 호접지몽에 드러난 사유 자체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베르그송, 들뢰즈의 철학에 근접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베르그송은 가상현실에서의 이마쥬의 존재론과 현실화 과정과 관련한 철학을, 들뢰즈는 가상현실체험에서의
시뮬라크르의 운동-이마쥬와 특이성이 창출하는 사건과 관련한 철학을 통해서 오늘날 디지털가상현실 담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나아가 우리는 두 철학자의 지각 주체에 대한 이론을, 디지털 가상현실 시스템과 가상현실 체험에 대해 분석에 적용함
으로써, 가상현실 체험에서 요구되는 주체의 새로운 신체적 위상을 ‘반투명한 신체’로 제안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베르그송과 들뢰즈는 디지털 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이마쥬의 존재론에 관한 현대적 사유를 생산해냄으로써,
오늘날 첨단의 디지털 가상현실을 설명하는 여러 담론에 관한 철학적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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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