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Christ Our Life)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4)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창조되는 그 때부터 영광 중에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는 그 때까지 우리의 생명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경이로운 말씀이다! 이는 그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기' 위함이다. (사도행전 17:25, 27). 그에게 지으심을 받은 남자와 여자들이, 매일 매일의 생명까지도 주시는 바로 그를 거부하고 무시한다는 것은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리스도의 생명유지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 사람은 결국에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생명의 창조주는 생명을 되찾아주시는 분(사실상 한 분뿐인)이시다. 놀라운 진실은 만약에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는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실' 것이다(시편 103:4). 그리만 되면, 우리의 성경말씀이 약속한바 대로 장차 영광된 어느 날 우리는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생명의 창조주 (The Creator of Life)
현대에 사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지금까지도 과학자들이 언젠가는 실험실에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간절하게 믿고 있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소위 '진화' 라는 신비한 힘이 수 10억년 전에 원시대양의 무생물 미분자들로부터 실제로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공상과학소설의 개념이지 실질적인 과학의 개념은 아니다.
모든 과학적인 증거들은 하나같이 생명은 자연주의적으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반하나님적인 억지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성경의 제일 첫 번째 장은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 창조하시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창세기 1:21). 히브리어(이 절에서는 '생물; creature로 번역 됨)는 nephesh 인바, 이 단어는 그냥 '생명'이라고 자주 번역된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개개의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바로 이 핵심 절에서 히브리 단어 nephesh가 '생령; soul'로 번역되어 있다. 이 두 경우 어느 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생명의 신성한 창조주는 실질적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리스도, 즉 육화이전의 존영원히 살아 계실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명을 창조하셨으며, 특히 이 지구 위에서 생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창조주이심을 의심 없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영적 생명과 죽음 (Spiritual Life and Death)
인간의 생명은 '영과 혼과 몸의' (데살로니가전서 5:23) 생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 이 세상에 죄악을 가져다주고 창조주와의 친교관계도 단절되어 버리자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치명적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경고하였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2:17). 그럼에도 그가 그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7, 19) 하셨다.
하나님이 경고하신바 대로 아담의 영적 생명은 그가 죄를 짓고 자기를 지은 자와의 관계를 단절하자마자 죽게 되었다. 동시에 부패와 죽음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그의 육신에서 작동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930년 후에 실질적인 육신의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5:5).
하지만 생명이 죽은 것은 아담뿐만이 아니었다. '아담 안에서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이…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린도전서 15:22; 로마서 5:12). 이것은 마치 아이들이 정신적 육체적 성질을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유전적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과 같이 아담과 하와에까지 소급하여 물려받게 됨으로써, 그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천적 범죄의 경향까지 물려받았다. 이것은 결국 죄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 영의 본성에 관한한,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다,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우리도 …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1, 3).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죽음의 육신으로부터 구속하실 수 있는 분이신, 한 구주께서 우리한테로 와 계시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으시다!
생명의 구속자 (The Redeemer of Life)
오로지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 분만이 생명을 구속하시고 살리실 수 있다. 창조주는 또한 바로 그 구속자임이 틀림없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에 우리를 죄에서 건지는 사역을 완성할 능력을 가진 자는 하나님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담에 의해서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부터 타락할 인간의 구속을 위한 장엄한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창세 이후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어린 양'이 되어 (요한계시록 13:8, 요한복음 1:29), 온전하게 거룩하고 죄 없는 제물로 봉헌될 운명으로 미리 정해졌던 것이다. 제물이 될 흠없는 양은 두말할 여지없이 어느 누구도 아닌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19, 21).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아름답게 간증하는 그런 경이로운 교류(交流)는 인간의 발상(發想)으로서는 결코 창출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런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자기 자신과 영원한 친교관계에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당신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우리의 죄에 대한 정당한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 값을 당신 자신이 치르셨다.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갈라섰을 것이다.
오로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즉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온전하고 죄 없는 인간(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온 세상의 죄로 인하여 정죄된 죽음의 고통을 짊어질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던 것이다. 과연, 우리 창조주는 우리의 구주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창조사역에 대한 그의 목적을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당신의 권속들을 당신과 영원히 갈려 지내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렇게 된다면 그들을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 걸었던 그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는 반드시 구속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오직 구속자만이 창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속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래서 생명의 창조주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죽어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명의 창조주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Life's Creator)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은 '끝없이' 죽어야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그는 그 자신의 죄 없는 몸으로는 모든 시공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모든 육적인 죄의 무한한 무게를, 그리고 그 자신의 죄 없는 정신으로는 모든 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혼적인 죄를, 그리고 그 자신의 온전한 영혼으로는 모든 인류의 모든 영적인 죄를 감당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헤어져 있던 그 무서운 세 시간 동안 끝없는 지옥의 고통, 그 자체 속에 있었다. 그런 다음 그 십자가형의 무시무시한 육체적 심정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로부터 떠남으로 겪는 끝없는 영적 죽음이라는 고통을 '다 이룬' (요한복음 19:30) 후에야 그의 몸은 온전히 죽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위대한 부활의 기적을 이루셨다!
복음서 저자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이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몸으로 죽어 아담의 죄에 대한 심판이 영혼의 죽음뿐만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뜻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우리의 생명은 몸과 영과 그리고 혼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생명의 이 세 구성요소 모두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과 보전 사역의 대상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일단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세 시간 동안 그의 아버지로부터의 무서운 별리의 고통을 당한 후 (마태복음 27:46), 그리고 그가 그의 몸을 떠나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 '잠'을 잠으로써 죄에 대한 빚을 온전히 갚고, 사탄과 죄와 그리고 사망을 당당하게 이기고, 몸과 영과 혼으로 사망에서 일어나셨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행하였던 그의 위대한 설교 중에서 선포한 ' …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어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24)고 한 내용이 바로 그것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사망은 그를 잡아매지 못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렇게도 확신을 갖게 하였던 틀림없는 증거는 무엇이었을까? 제일 첫 번째 증거는 바로 그 빈 무덤이었다.
제자들 모두는 그가 요셉의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도 역시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를 무덤에 안치하는 것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그 주(週) 첫 날 아침 일찍이 바로 그 무덤에 다시 찾아왔을 때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묵중한 돌이 치워져 있었고, 무덤을 지켜야할 파수 군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찬란한 옷을 걸친 두 천사 (누가복음 24:4)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서 무덤을 떠났다고 단언하였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 말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하려 달려갔다 (아마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고 있었던 것 같다━요한복음 20:4-8).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도 역시 무덤으로 달려와서 직접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요한의 감동적인 진술은 이렇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4-8). 이와 같이 해서 요한은 세마포 수의와 머리수건이 본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안으로 폭삭 꺼져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의 부활된 몸이 수의와 두건을 벗어놓고 빠져나간 것 말고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다고 당장에 인식하였다. 요한은 그렇게 믿었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흔들림 없이 증거 한다. 그러나 그것만 전부가 아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몸을 만져보고, 또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써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셨다' (사도행전 1:3). 비록 오늘날 우리가 그들처럼 그를 보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간증은 확고부동하여 가히 설득력이 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사도 바울은 그를 직접 보았던 자들 중 몇몇의 증언을 상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사도행전 15:3-8).
바울은 그의 제일 처음 보이심(막달라 마리아에게)과, 맨 마지막으로 보이신 (밧모에서 요한에게) 일을, 또한 엠마오로 가는 노상에서 두 제자에게 보이신 일과, 그 밖에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신 일들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거명한 사람들(특히 그를 보았던 500여명 중에 아직도 살고 있던 사람들)은 보통이라면 대개는 그가 잘못 알고 하는 소리라고 비난했음 직하다. 그것은 특히 그들은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서 핍박받고 있었으며, 그들의 목격담을 취소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의 나타나심은 개인들에게, 일부는 집단에게, 어떤 때는 밀폐된 실내에서, 그리고 다른 때에는 열린 노상이나 언덕 위에서 있었다. 그 많은 나타나심이 결코 환영일 수는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환영은 이 모든 나타남과 같이 그렇게 다양한 환경에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목격자들이 다 공범자일 수는 없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자기네의 간증으로 인해서 모두가 다 고통을 받고 있었으면 있었지 결코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목격하였으며, 또 빈 무덤을 보았기에 그의 부활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사도행전 4:3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활 생명 (Our Resurrection Life in Christ)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으로 그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만족하시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온전히 구속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는 우리도 모두 다 부활할 것임을, 그리고 그와 같이 부활의 몸으로 영광 받을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립보서 3:21).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린도전서 15:42).
하지만 이 변화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만 가능하다. 그 때가 되면 모든 신실한 신자(죽은 자 산 자 구별 없이)들은 부활하여 영광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라고 그는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이 현재적인 생명은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기에 더 이상 살 수 없다. 만약에 우리가 그를 믿는 신앙 속에서 그분 앞에 진정으로 나와서 구속이 필요한 길 잃은 죄인으로서의 우리 신세를 고백한다면, 그리고 죽음으로 정죄된 우리의 죄를 그가 대속하신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또한 그의 부활과 우리의 주님으로서 그의 권위를 믿는다면, 그 때에 가서야만 사실상 우리는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말씀만 주목하기로 하자. 바울이 말하기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사실상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부활하시어 영광 중에 그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5,6)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을 우리(이미 우리가 그 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약속 안에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은, 그리스도께서 이 곳에 아직도 계신다면 그가 사셨을 삶과 같은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리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로새서 3:1-3).
영원한 생명 (Everlasting Life)
영광에 싸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된 생명처럼, 약속받은 우리의 부활된 생명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우리는,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영생을 가졌음을 뜻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한테 이렇게 확언해 준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3).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말씀을 주목하라!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이 생명을 빼앗을 수 없음을 뜻한다.
내가 만난 기독교
저는 어릴적부터 부모님께서 교회에 다니셔서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릴적에는 달란트시장이 좋아서 나갔고, 중학교 시절에는 힘든 시기를 거치며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나름 의지를 해나갔습니다. 또한 중학교시절에는
수련회에 자주 다니며, 심적으로 신앙과, 믿음이 강했지만,
점점 나이가 들며 교회가는 횟수가 줄어들고, 이제는 일년에 한번 정도 나갑니다.
어릴적에는 몰랐던, 부패한 기독교의 모습을 보며,
최근에는 하느님의 존재까지 의심하게 되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돈을 중요시하는 교회, 헌금이나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당당히 예배도 못드리는 기독교.. 비리와 세금탈세등 기독교의 안좋은 면을 보게되며
점점 신앙이 의심으로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독교인들과 기독교를 의심하고, 못믿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의 안좋은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현재는 하느님의 존재도 당연시 믿고,
다시 차차 신앙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핑계로 교회는 나가지않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에.. 밥먹기 전 항상 기도하는 습관은 버리지 않고,
항상 지키고 감사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집에 내려가게 되면, 부모님이 주일마다 항시 교회에 가자고 하셔서
차차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기독교를 믿었지만, 세례는 초등학교 5학년때에 받았으며,
중학교당시에도 기독교종교재단인 사립중학교를 다니고,
현재는 이렇게 관동대학교에 재학중에 있습니다.
살면서 기독교는 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있으며,
앞으로도 더욱더 그럴것이고, 현재의 저의 모습에 많이 반성하고 있으며,
더욱더 신앙을 넓히도록 노력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안좋은 모습을 가진 기독교의 모습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나쁜 기독교인, 기독교를 가지고 제3자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인 전체, 기독교 전체를 욕할수 있으니,
행실을 잘해야 하며, 비리나 탈세 등 사리사욕이 목적이 아닌..
순수한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교회에 나가 떳떳히 예배도 못드리고,
돈 많고, 큰 교회의 목사님들이 탈세를 하고 최고급 외제차를 끌고다니며,
권력인 마냥 목사님의 힘을 휘두르고 다니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건 당연 몇몇의.. 극소수의 안좋은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런 기독교인들이 부각되어, 모든 기독교인들을 욕되게 하고 있으니,
고쳐져야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적에 달란트 하나에 목숨걸고.. 수련회가서 열심히 목쉬도록 찬양하며,
집사님들이 해주시는 맛있는 밥도 먹고,
예배가 끝나면 주는 맛있는 간식. 대예배가 끝나면 하는 모둠예배.
이랬던 저의 어릴적 주일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납니다.
나이가 들며, 머리에 점점 생각이 많아지며,
귀찮아하며 교회에 안나간지 오래되었는데,
이렇게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보며 교회에 다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주에 시험이 있는데, 이번주 주일에 한번 나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가서 가족기도와 제 기도좀 하고, 신앙이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