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의 바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바다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세 살적엔가 아버지는 나를 배에 태우고 함께 바다로 가셨다 아버지가 그물을 끄시는 동안 나는 아버지가 요리하시는 냄비에 불을 지피는 것이 유년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아버지에 대한 바다는 바다에서 돌아오시면 친구들과 기울이는 소주잔에 출렁이는 알 수 없는 기억을 지나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바다를 저 수평선 넘어 세계로 꿈꾸어왔고 바다를 언제나 바라보는 소년은 장년이 되어서도 저녁이면 떠오르는 먼 우주의 바닷가 별빛들이 언제나 아버지가 바다에 가면 그리워하는 빛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바다는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고 알 수 없는 많은 물고기 그 물고기를 팔러 잠시 정박하는 항구의 낯선 풍경들
아버지의 바다는 언제나 알 수 없고 다만 아버지가 오랜 세월 후 돌아오셨다는 것
아버지의 바다에서 내가 언제나 저녁이면 고개 들어 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그 영원성으로 내 가슴에 사랑으로 빛나고 있는 것 같다
- 백원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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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넘게 산 내 삶 중에서 주문진에서의 2년, 삼척에서의 5년, 7년간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물론, 평생 반려자를 주문진에서 얻었고, 30년이 넘게 지금도 설, 스승의 날에는 꼭 챙겨주는 제자를 삼척에서 얻은 좋은 기억도 있지만, 내륙에서만 커 온 내겐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준 게 바닷가의 7년입니다.
봉급 4만원 타던 1976년, 퇴근 후 대폿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때, 옆자리의 누가 봐도 뱃사람이 분명한 허름한 옷차림의 손님이 "어젠 풍랑에 그물 한 틀 잃었네"라며 덤덤하게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것을 듣고, 그 손님이 간 후 궁금함에 술집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물이 얼마나 하는데요?" "한 300쯤 할 겁니다." 당시 춘천 대로변의 기와집이 150만원 정도 할 때였는데, 300을 날리고도 담담하게 술잔을 기울이다니?
또, 나무라고는 가로 세로 20cm쯤 되는 목재라면 대들보 삼을 큰 나무로 알았던 내게 30cm X 50cm 크기에 길이는 10m가 넘는 배 용골에 쓰일 나무를 뭉근한 톱밥불에 구워 휘는 광경을 보고, "저게 휘어져?" 하며 놀랐고, 두께 10cm, 폭 60cm, 길이 10m가 넘는 배 옆구리 판자를 보고 그 크기에 또 놀랐습니다.
압권은(이 말은 좀 어폐가 있습니다만) 음력 대보름 날, 소반에 쌀 한 그릇에 굵은 초 한 대 꽂아 켜 놓고 바닷가 백사장에 앉아 시신도 찾지 못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남편을 기리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50명도 넘는 과부들의 모습은 지금도 선히 떠오릅니다.
내륙에서만 살았다면 저런 배포는 볼 수도 없었으니 느끼는 것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바닷가 7년은 내겐 생각할 것이 많고, 배포를 키워 준 7년이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