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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金氏(강릉김씨)
본관(本貫): 강릉(江陵)
시조(始祖): 김주원(金周元)
유래(由來):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조(太祖)대왕의 6세손으로 명주왕(溟洲王)을 지낸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선덕(宣德) 왕이 후계가 없어 군신(群臣) 회의에서 김주원(金周元)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주 왕실에서 북으로 20리 밖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군신회의가 열리는 날 내리는 비로 불어난 관천(關川) 물을 건널 수가 없어 궁궐로 갈수 가 없었다. 이에 군신(群臣)들은 “천명(天命)이라” 하여, 그 대신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곧 원성왕(元聖王)이다.
그 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끝내 이를 사양했다 한다. 그러나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더욱 감복 명주왕(溟洲王)으로 봉하고 명주를 중심으로 삼척(三陟) 울진(蔚珍) 평해(平海)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한다.
이에 김주원(金周元)은 명주성(溟洲城)을 쌓고 영동(嶺東) 일대를 토치하게 되니 후손들이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삼고 그를 시조(始祖)로 해서, 신라(新羅) 김씨(金氏)가운데 가장 먼저 분적(分籍)한 맏집이 된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시습(金時習)
1435(세종 17) ∼ 1493(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 ·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 청한자(淸寒子) · 동봉(東峰) · 벽산청은(碧山淸隱) · 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생 애〕
그의 선대는 원성왕의 아우 김주원(周元)이다.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 · 태현(台鉉)로 전하고 있다. 증조부 윤주(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겸간(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일성(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 선사장씨(仙笑 張氏)이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5세 때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죽고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 왕위찬탈 ’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26세(1460) 때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 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 ≫ 을 엮었고, 29세(1463)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 ≫ 을 엮었다.
31세 때부터 37세까지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 금오신화 ≫ 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 유금오록 遊金鰲錄 ≫ 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 ’ 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 ( 柳自漢 )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 · 양양 ·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 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 관동일록 關東日錄 ≫ 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사상과 문학〕 김시습은 지금까지 ≪ 금오신화 ≫ 의 작자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 · 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뿐 아니라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들도 그의 전반적인 사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으로 주목을 요한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 심유천불(心儒踐佛) ’ 이니 ‘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 ’ 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김상기(金上琦)
1031(현종 22)∼ 고려 중기의 문신. 신라의 왕족이었던 각간 주원(周元)의 후손이며, 아들은 인존(仁存)이다. 1070년(문종 24)에 좌우보궐(左右補闕)을 거쳐 1084년(선종 1)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이듬해에는 호부상서로서 예부시랑 최사문(崔思文)과 함께 송나라에 가서 신종의 상을 조문하고 돌아왔다. 그 뒤 간의(諫議)를 거쳐 1089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1091년 호부상서정당문학(戶部尙書政堂文學), 이듬해는 호부상서로서 권판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權判東北面兵馬事兼行營兵馬使)를 맡았다.
1093년에는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상서호부사 수국사(吏部尙書參知政事判尙書戶部事修國事)에 올랐다. 1095년에 숙종이 즉위하자 수사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감수국사(守司徒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監修國事)로 승진하고 1098년 태부(太傅), 이듬해에 수태부(守太傅)에 올랐다. 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인존(金仁存)
∼ 1127(인종 5). 고려 중기의 문신 · 학자. 초명은 연(緣), 자는 처후(處厚). 신라 선덕왕 때의 상대등(上大等) 주원(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상기(上琦)이다. 과거에 급제해 선종 · 헌종 · 숙종의 삼대에 걸쳐 내시직(內侍職)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보직되기를 간청해 상서예부 원외랑(尙書禮部員外郎)을 거쳐 개성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기거사인 지제고(起居舍人知制誥)에 올랐다. 이어 기거랑(起居郞)이 되었으나, 왕의 뜻에 거슬려 병부원외랑으로 좌천되었다.
시를 잘 지어 1102년(숙종 7)에 요나라 사신 맹초(孟初)의 접대를 맡아 시로써 응접해 그를 놀라게 하였다. 그 뒤 이부낭중 겸 동궁시강학사(吏部郎中兼東宮侍講學士)를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다. 1105년 숙종이 죽자 요나라에 갔다와서 예부시랑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1101년 비서감(秘書監)에 올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뒤에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 상주국(守司徒 中書侍郎平章事上柱國)에 올랐다.
1117년 예종이 청연각(淸 博 閣)에서 연회를 베풀 때, 〈 청연각기 〉 를 짓게 하고,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홍관(洪瓘)에게 이것을 돌에 쓰게 하였다. 1118년 판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判東北面兵馬事兼行營兵馬事)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뒤, 1126년(인종 4)에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이 되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문하시중 감수국사 상주국 판예부사(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門下侍中監修國史上柱國 判禮部事)가 되었다.
1127년에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사(守太傅 門下侍中 判吏部事)에 기용되었다. 학문을 좋아해 늙어서도 책을 놓지 않았고, 그 당시의 조고(詔誥 : 詔書와 諭示文)를 많이 작성하였다.
김영석(金永錫)
1079(문종 33) ∼ 1167(의종 21).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시중(侍中)을 지낸 인존(仁存)의 아들로, 영관(永寬) · 영윤(永胤)과 함께 삼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종 때 음보로 양온서승동정(良 倍 署丞同正)이 되었고, 과거 급제 후 첨사부주부(詹事府注簿)를 거쳐 인 종초 합문지후(閤門祗候) ·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33년(인종 11) 낭중(郎中)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1148년(의종 2)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가 되었고, 이듬해 삼사사(三司使)가 되었으며 1151년 정당문학(政堂文學), 그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154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 판공부사(判工部事)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했다.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를 세 번, 북로원수(北路元帥)를 한 번 역임하면서 잘 다스려 신망을 얻었으며, 일찍이 송나라와 신라의 의서(醫書)에서 기이하고 중요한 것을 뽑아 손수 편찬한 ≪ 제중입효방 濟衆立 茸 方 ≫ 이 전한다.
김영관(金永寬)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신라의 종실인 각간(角干) 주원(周元)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시중(侍中)을 지낸 인존(仁存)이다.
영석(永錫)·영윤(永胤)과 함께 삼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1134년(인종 12) 원외랑(員外郞)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45년에 지공거가 되어 박언유(朴彦猷) 등을 뽑았으며, 1147년(의종 1) 이부상서추밀원사(吏部尙書樞密院使)가 되었고, 이듬해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김자의(金子儀)와 함께 진사 이유창(李愈昌) 등을 뽑았다.
이듬해 지문하성사 판공부사(知門下省事判工部事)에 이어, 참지정사 판공부사(參知政事判工部事)를 지냈으며, 1149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兵部事)가 되었다.
이듬해 판리부사(判吏部事)에 이어, 감수국사 지서경유수사(監修國史知西京留守事)가 되었다. 1151년 수사도 판국자감사(守司徒判國子監事)에 올랐다.
항렬자(行列字)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34 | 秉(병) | 44 | 玄(현) | 54 | 揆(규) |
35 | 演(연) | 45 | 萬(만) | 55 | 夏(하) |
36 | 卿(경) | 46 | 九(구) | 56 | 元(원) |
37 | 振(진) | 47 | 丙(병) | 57 | 斗(두) |
38 | 起(기) | 48 | 寧(녕),衡(형) | 58 | 澤(택) |
39 | 南(남) | 49 | 茂(무) | 59 | 吾(오) |
40 | 來(래) | 50 | 紀(기),範(범) | 60 | 章(장) |
41 | 東(동) | 51 | 庾(유) | 61 | 世(세) |
42 | 猷(유) | 52 | 宰(재) | 62 | |
43 | 成(성) | 53 | 聖(성),重(중) | 63 |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출처] 江陵金氏(강릉김씨)|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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