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군 서울대 병원 입원 국군 부상병 천여 명 학살’
80번째. 마지막으로 탈북해온 국군포로 할아버지 김모 어르신은 중국에 계실 때부터 내게 부탁을 하셨다. '내가 서울에 가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만나게 해줘요'라고.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의 머리에 박혀있던 총탄을 꺼내준 의사의 가족이었다.
생사를 넘나들던 평양병원에서 늘 우수의 찬, 그러나 연민이 진하게 우러나는 눈빛으로 자신을 돌보던 그 의사는 어느 날 나즉히 말하더란다. '나도 남에서 왔소.' 그 의사는 6.25때 납북된 서울의대의 김시창 교수. 대한민국 최초의 뇌전문 의사였다.
어르신은 김시창교수의 가족에게 자신이 본 김시창 교수의 모습을 가족에게 전해주고, 감사인사도 하고 싶다며 만나게 해달라고 여러 번 부탁하셨다. 어렵사리 김시창 교수의 아들을 찾아 그 말씀을 전해드렸고, 3년 뒤인 2014년, 김시창 교수는 공식적으로 납북자로 인정받았다.
(사) 물망초의 존재가 인정받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남들은 모르지만... 알려고도 하지 않고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때로는 폄훼하기도 하지만... 물망초는 그렇게 움직여왔다.
6.25당시 납북된 서울의대교수는 20여명. 6.25후 평양의대가 다시 문을 열 때 교수가 29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0명이 서울의대에서 납북되거나 월북한 의사였다. 이것도 물망초가 밝혀낸 역사적 사실.(동아일보 2013년 5월 3일 자 보도) 서울의대는 6.25 이후에 수업이 어려울 정도로 교수부족에 허덕여야 했다.
그런데도 납북된 서울의대 교수들조차 60년이 넘도록 납북사실을 인정받지 못 했다. 한없이 가벼운 대한민국의 영혼이여... 대한민국의 정체성 혼란은 72년 전인 1950년 6월, 서울대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아니, 72년 전 그날, 서울대병원에서 죽어간 사람 1천 여 명 가운데 이름이 정확하게 알려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기리지도 않는 우리가 북한을 전쟁범죄로, 반인도적 범죄로, 제네바협약 위반으로 제소는 할 수 있을까?
-물망초 박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