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 (100)金奉祖 8형제(下)
金奉祖형제의 현달은 退溪의 학통을 고수하고 그 연원을 후대에 이엇다는 점과 이들 형제들이 대부분 중앙정계를 통해 입신했다는 점에서 학문과 정치의 양면에 걸쳐서 돋보인다. 其實 이러한 양면성은 조선유학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당시의 사회구조는 학문과 정치를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학문분야에서 이들 형제가 펼쳐 보인 성리학의 깊이는 잘 알 수 없다. 그것은 이들이 본격적인 성리학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형제들이 위로는 李滉과 직접 닿고 李滉의 문인인 柳成龍 金誠一 張顯光 등은 물론 鄭逑 등과 사제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의 학문이 退溪학문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조선말 豊山金氏 선조들의 행적을 그림과 글로 남긴 鶴巖 金重休의「世傳書畵帖」중에는 奉祖 형제들의 행적들이 일화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 서화첩을 중심으로 이들 형제들의 행적을 간추려 소개한다.
맏형 金奉祖는 柳成龍의 문인이다.
그는 30세(선조 34년)에 司馬試에 합격했으며 41세때(광해군 5년)에 增廣文科에 甲科로 及第했다. 이에 앞서 광해군 4년때에 그는 鄭仁弘이 李彦迪과 李滉을 배척한 상소에 대해 들고 일어난 嶺南辨誣疏의 우두머리가 되어 선비들을 인솔, 서울로 올라가 복합(伏閤)상소를 올려 退溪학파의 옹호론자로서의 기개를 보였다. 이 상소는 5차례나 이루어졌으나 왕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그는 그 울분으로 頭流山을 올라 울적한 심사를 풀기도 했다. 그 이듬해에 그는 과거에 올랐으며 광해군 9년에는 丹城현감이 되었다.
둘째 金榮祖는 24세에 진사가 됐으며 광해군 4년에 문과에 올랐다. 그후 광해조에는 벼슬을 않고 있다가 인조조에야 출사, 부제학·대사헌·대사간·대사성을 거쳐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른 인물이다. 그는 특히 강직하고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인조 21년에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 배를 타고 가는 도중 마침 큰 바람을 만나 파도가 심했다. 배를 탄 사람들이 모두 겁을 내고 울부짖었지만 그는 홀로 단정하게 선창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金榮祖는 鶴峯 金誠一의 문인이며 그의 사위이기도 했다.
셋째 金昌祖는 1605년 25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얼마 후 광해가 인목대비를 폐한 사건이 일어나자 과거를 포기, 시골에 은거했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의금부 도사, 사옹원(司饔院) 참봉 등을 잇달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남의 잘못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1635년에는 靑巖道察訪이 되었으나 병자호란 후 조선이 청과 강화하자 관직을 버렸다.
넷째 金慶祖는 광해군 1년(1609) 司馬試를 거쳐 宜寧현감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慶尙道權攝??右節度使로 종군하여 국난의 위기에 참여하는 의리를 보였다. 그는 젊은 때부터 기절(氣節)과 국량(局量)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그는 宜寧현감으로 있었다. 이 때 정부군이 가까운 雙嶺에서 패하자 관찰사가 공포에 질려 관동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러자 金慶祖는 칼을 뽑아들고 관찰사 앞으로 나가 용기 ㅇ벗음을 꾸짖고 목을 치려고 했다. 이 때 그의 형 榮祖와 아우 應祖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관찰사는 榮祖에게 달려가 목숨을 구해달라고 애걸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현감으로서 상전인 관찰사에게 칼을 들이댈 만큼 金慶祖의 기절(氣節)이 돋보인 에피소드이다.
다섯째 金延祖는 생김새가 옥같이 깨끗했다고 한다. 23세 때는 마침 안동부사로 부임한 鄭逑로부터「心經」과「近思錄」강의를 들었다.
그 후 문과에 합격 예문관 한림(翰林)으로 뽑혔으나 병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여섯째 金應祖는 旅軒 張顯光의 문인으로 대유(大儒)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광해 5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인조즉위년에 알성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사간을 거쳐 한성부 우윤(右尹)에 이른 인물이다. 그는 특히 덕행과 문장에 능했으며 저서도「鶴沙集」「四禮問答」「山中錄」「辨誣錄」등을 남겼다.
일곱째 金念祖는 벼슬이 果川현감을 거쳐 승지에 이른 인물. 果川현감으로 있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으며 이때 그는 趙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여덟째 金崇祖는 인조 2년 31세 때 增廣문과에 합격했다. 막내인 그가 과거에 합격했을 때 인조임금은 그의 형제들의 현달을 높이 사 이들 형제가 태어난 곳을 五美洞이라 부르게 했다.
동시에 아버지 金大賢에게는 이조 참판을, 어머니에게는 貞夫人이란 직위를 내렸을 정도였다. 1632년에 그는 기주관(記注官)이 되었으나 갑자기 역질에 걸려 아깝게 요절했다.
이처럼 한 뱃속에서 나온 8명의 친형제가 현달한 일은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豊山金氏의 이 신가한 일들은 북부 영남지역에서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들 8형제의 자손들은 현재 각지로 흩어져있다. 안동군 풍산읍 오미동에는 8형제중 奉祖·慶祖·崇祖의 자손들 80세대가 살고 있다.
또한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에는 榮祖·昌祖·應祖 등의 자손들 60세대가 살고 있다. 종손인 金元在씨(78)는 현재 오미동 종가를 지키고 있다.
* 찬고문헌 =「豊山金氏世傳書畵帖」「嶺南人物考」「韓國人의 族譜」
<李夏錫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