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린을 아십니까?
힌트 1: 사람 이름임. 모르겠지? 힌트 2: 러시아 사람임. 힌트 3: 우주 비행사임. 그래도 모를 것이다. 러시아는 1957년에 세계 최초로 유인인공위성(스푸트닉)을 쏘아 올렸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교육 개혁을 추진하여 ‘PSSC 물리’니, ‘CHEM 화학’이니 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개발하였다. 이런 사실은 교육학자들에게는 상식이다. 그런데 그 인공위성에 탑승했던 사람의 이름은? 교육학자건, 누구건,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안다. 그가 가가린이다. 내가 그 이름을 아는 것은 우리 할머니 덕분이다. 나는 그것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알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제기동 정화 여상 근처에서 살았다. 우리는 방 두 칸을 썼다. 주인 집 사람들은 우리에게 두 칸을 내어주고 나머지 두 칸에서 생활하였다. 팔당 수력 발전소에 다니던 정휘순씨는 딸 넷을 낳고도 (포볼 제도가 없었는지) 한번 더 던져, 기어이 스트라이크를 잡아내었다. 우리 식구 여섯 명에, 주인집 식구 일곱 명이니, 그 집은 사람들로 넘쳤다. 상주 인구 이외에 방문객도 많았다. 정휘순씨 부인에게는 이웃 마을에 사는 언니가 한 사람 있었는데, 이 아주머니는 소아마비에 걸린 어린 아이를 대리고 매일 이 집, 아니 우리 집에 왔다. 얼굴이 납작해서 ‘납닥 할머니’라고 불린 -- 납작 할머니가 아님 -- 할머니가 한 분 있었는데, 이 분도 매일 왔다. 그리고 ‘대구 할머니’가 거의 매일 왔다. “신부감이 숙대를 나왔는데, 집안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닌 모양입디더.” 나는 대구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대구 사투리를 심하게 쓰면서 시도 때도 없이 “얄궂대이!”, “얄궂대이!” 얄궂대이를 남발하였다. 이 집에 가서는 저 집 이야기를 하고, 저 집에 가서는 이 집 이야기를 한다. 게다가 엄청나게 잘 난 척하는 스타일에, 딱정떼 스타일이다. 이런 대구 할머니와 ‘영태 할머니’가 거의 싸우지 않은 것은 여지껏 나에게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두 분은 동네 최고의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맹수끼리는 서로 알아본다더니, 두 양반은 서로를 알아보고 상대의 나와바리를 존중해 주었던 것일까?
도라지를 아는가? 알겠지. 그렇다면 도라지 까는 것도 아는가? 여자들이 모이니 수다를 떠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숙녀 분들이 수다를 떨기 위해 모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이 분들은 그 때 도라지 까는 일을 부업으로 하였다. 정휘순씨 부인과 그 언니, 납닥 할머니,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마당 한 귀퉁이에 모여 앉는다. 가운데에는 도라지가 그득 든 다라이가 몇 개 놓여있다. 작업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1 단계에서는 도라지 껍질을 벗기며, 2 단계에서는 껍질 벗긴 도라지를 째서 적절한 굵기로 만든다. 또 남의 집 흉을 보기 위해 들르는 대구 할머니도 칼을 잡고 도와주는 척 했고, 우리 어머니도 집안 일을 하는 짬짬이 할머니를 도왔으며, 아이들도 손을 보탰다. 나도 해 본 적이 있다. 연필 깎는 칼에 고무줄을 칭칭 감아 만든 특별한 칼을 사용했는데, 십 분만 해도 손에 물집이 생기고, 그 이전에 이미 지겨워진다.
정휘순씨의 큰 딸인 숙제 누나는 당시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정도의 나이였는데, 맹랑하게도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곤 하였다. 나는 어느 날 우리 할머니가, 숙제 누나 말을 듣고 나서, “예끼, 이 년!”하고 짐짓 야단을 치면서 크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같이 있던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도 음탕하게 따라 웃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 날 이 분들은 약간 특별한 방문객을 맞이하였다. 남자였다. 도라지를 대주고 걷어가는 남자는 아니었다. 도라지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가지고 왔다. 이 남자는 한 사람을 찾아왔다. 그가 찾은 사람은 조영태였다. 그 때 나는 집에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 온 늦은 오후에 이 사람의 방문에 관하여 들었다. 이렇게 되었던 모양이다.
무슨 묵직한 물건을 든 채 철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도라지를 까고 있는 여자들에게 물었다.
“이 집에 조영태라는 학생이 있습니까?”
영태 할머니는 깜짝 놀라 도라지 까던 일을 멈추고 대답하였다.
“그런데요. 왜 그러지요?”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할민데요.”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할머니. 공부 잘하는 손자를 두셔서 좋으시겠습니다.”
“예?”
“저는 학교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면 경희중핵교에서 나오셨나요?” “예? 아, 그렇습니다. 조영태가 하도 공부를 잘해서요.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 몇 명을 뽑아 이 책을 한 질씩 주기로 하였는데, 조영태가 거기에 들었어요.”
혹시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하고 긴장하였던 우리 할머니는 안도의 숨을 쉬었으며 동시에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할머니 표정을 보고 자신감이 생긴 외판원이 말하였다.
“월부도 됩니다.”
“우리 영태가 공부는 잘하거든요.”
만면에 득의의 환한 웃음을 띤 채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 할머니는 주위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대구 할머니 쪽에는 시선을 더 오래두었다. 대구 할머니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배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이 아저씨 보소. 얄궂대이. 책 팔아 먹을라꼬 별 거짓말을 다 하네. 애고 얄궂대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외판원을 무서워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잘못 말했다가는 영태 할머니와도 좋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 온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면서 세계인명대사전(상, 하권)을 안겨주었다. 사은품으로 고급 돋보기가 들어있었는데, 나와 내 동생들은 사전을 깔고 앉아 돋보기로 종이를 태우기도 하고, 사전을 베고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 할 일이 없으면, 방바닥에 배를 깐 채 엎드려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는 읽어 보기도 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아서 밀러의 항목에는 ‘기막힌 막간(interludes) 광언’이라는 것이 나왔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해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 사전의 제 1 항목이 가가린이다.
요번 달에 중학교에 진학한 작은 조카에게 이미 가방을 선물해 주었으면서도 텔레비전 홈 쇼핑에 나온 학습대사전에 눈이 간 것은, 내가 중학교 때 받은 위의 사전 때문이었다. 내가 조카에게 사 준 이 사전은 130권짜리다. 그러나 나는 옛날 옛적에 내가 받은 사전이 이 사전보다 훨씬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동생들은 그런대로 문화적이고 제법 교육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그 시절, 졸업식이 있으면 주인집 사람들은 우리 집 카메라를 빌려갔고, 저녁이면 주인집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와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 조모와 부모는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에게,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공부를 잘하는 줄 알았고, 최소한 공부에 대한 자신감은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았다.
우리 친지 집안인 윤씨네에는 나와 동갑인 아이가 있었는데, 이 친구에게 나는 이른바 엄친아였다. “영태는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는데, 어째서 너는 밤 낮 이 모양이니?” 나는 방금 중학교 때 통지표를 확인해 보았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의 12년간의 통지표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 놓으셨다. 아버지가 가시니 이런 것도 관리가 되지 않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중학교 2학년 때 것은 보이지 않는다. 조영태의 중학교 3학년 1학기의 학기말 석차는 (63명 중) 21등으로 되어있고, 학년말 석차는 18등으로 되어있다. 1학년 때는 더 나빴다. 1학기말 석차는 23등, 학년말 석차는 37등이다. 심지어 11월 월말 고사는 52 등으로 되어있다. 엄친아는 무슨......
첫댓글 촌구석에서 공부 좀 한다고 서울 중학교로 올려보내졌는데...1차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경희중학교 2차로 들어가서
1학년 첫시험 석차가 21등...그야 말로 혼수상태에 이를만큼 인생 최초 최대의 좌절을 맛봤다.
그런데 그 다음에 성적이 올라갔는냐 하면.... 오히려 꾸준하게..... 안정적인, 하향세....
아, 가가린...어릴때 가가린 이름을 들으면 전화번호부 맨 앞에 이름이 나올거란 생각을 했었다.
흠..가가린은 몰랐어도 마가린은 알았는데~ ㅎ 영태가 할머니 많이 보고 싶겠네 ㅠ
'가가린'은 나도 알고 있었는데 인명사전 첫 항목이란 사실이 새롭다. 할머니, 아버지의 정이 와 닿는다. 그분들의 격려와 칭찬이 52등 조교수를 1 등으로 만들었구나.
가만 있거라. 가가린은 다 아는 모양이로구나. 마가린만이 아니라. 그렇다면, 가가린 다음 항목은 누굴까? 힌트: 스머프에 나옴. ㅋㅋ
영태 거사가 이 글을 왜 썼을까 하는 궁금증만 남았다. 그 심리를 분석하고 싶었다. 과연 가가린을 전하고 싶어서? 아니면 은근한 자기 실력 과시? 아니면 당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스런 회상? 아니면 백과사전 선전? 아니면 카페에 글들을 좀 올리라는 은근한 시위? ... 답은 낼 수가 없다. 영태의 다음 글에서 실마리를 찾아야겠다.
아는 체 하기 위해서임. ㅎㅎ 가가(레이디 가가) -- 가가린 -- 가가멜 --가가위(일본의 실천신학자 맞지?) ㅎㅎ
아뭏든 다음 글을 봐야 알 것 같음. 가가위는 잘 모르는 사람인데... 가가위에 대해 써 보지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