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신불측(不信不測 : 기만과 불예측성으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린다)
왜구의 특징은 기만(欺瞞. 남을 속여 넘김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과 불예측성이다.
왜구 침구 전략으로 두드러진 것은 기만전술인데, (서기 – 옮긴이) 1375년 왜구는 무리들 가운데 노약자들만 태워 싸우지 않고 곧 철수할 것처럼 행동해(굴어 – 옮긴이) 고려군(후기 고리[高麗] 군사 – 옮긴이)의 방비를 허술하게 하도록 한 다음, 은밀히 정예군 수백 명을 고려군 배후로 침투시켜 노략질을 감행했다.
왜구의 이런 기만전술에 말려들어 고려군은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했고(졌고 – 옮긴이), ‘왜구가 온다.’는 소리만 듣고서도 앞을 다투어 달아났다.
『 손자병법 』 에는 “병(兵)은 속임수(詐[속일 사 – 옮긴이])로써 서고, 이(利[이로울 리 – 옮긴이])로써 움직이며 분합(分合. 나뉘었다[分] 모였다[合] 함 : 옮긴이)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구절이 나온다.
왜구가 중앙의 조직적 지지, 지휘, 조종 내지 지시 하에(아래 – 옮긴이) 움직였다는 것은, 왜구의 침구 방식에 이 같은 병법적 전술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나는 왜구의 지휘관들이 『 손자병법 』 을 읽고, 그 책에 나온 병법들을 동아시아를 약탈/침구할 때 써먹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냐는 의문을 품는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 손자병법 』 은 고대인 서기 8세기 때 왜국에 전해졌고, 일본의 지배층은 이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 손자병법 』 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전들 가운데 하나다 – 옮긴이 ). 이 같은 왜구의 전술을 인지하지 못한 결과는 숱한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타난다.
충청도(후기 고리 때의 이름은 ‘양광도’ - 옮긴이)에에 출현한(나타난 – 옮긴이) 왜구의 경우도(왜구도 – 옮긴이) 마찬가지이다. 고려군이 지리산 전투와 황산강 전투에서 각각 승리를 거둠으로써, 경상도 남해안으로부터 내륙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구의 기도(企圖. 일을 꾸며내려고 계획함 – 옮긴이)는 일단 저지된다.
하지만 충청도(양광도 – 옮긴이)의 상황은 달랐다. 왜구의 집요한 침투작전으로 고려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서기 – 옮긴이) 1377년 4월, 왜구는 충청도 ‘해미’를 침구한 데에 이어, 5월에는 기병 100여 기를 동원하여 남양, 안성, 종덕 등 제읍(諸邑. 여러[諸] 고을[邑] - 옮긴이)에 침구했다.
이후, 왜구는 ‘경양’과 ‘안성’에서 노략질을 계속했다. 이때 충청도 도원수 ‘왕안덕’은 왜구의 강한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 머뭇거리면서 부원수(副元帥. 전시에 임명하던 임시 벼슬. 원수[元帥] 다음으로 높은 군대의 통솔자 – 옮긴이) ‘인해’와 양천원수(陽川元帥) ‘홍인계’를 불러 (군사를 – 옮긴이) ‘가천역(加川驛)’으로 퇴각시킨 뒤, 적이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왜구는 고려군의 이러한 기도를 간파하고(꿰뚫어보고/알아채고 – 옮긴이) 방향을 바꾸어 다른 길로 가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왕안덕은 정예군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오히려 왜구의 반격을 받아 4명의 전사자를 내고, 자신도 창에 맞아 부상을 입는다.
이때 왜구가 충청도를 침구한 목적은 고려군을 이 지역으로 유인해 낸 다음, 개경(오늘날의 개성 – 옮긴이)을 급습하기 위함이었다. 왜구의 이 같은 전술은 고려군에게 생포된 (왜구 – 옮긴이) 간첩의 자백에 의해서 낱낱이 밝혀진다.
“우리(왜구들 – 옮긴이)는 이렇게 의논하였다. ‘우리가 만일 양광(충청)도의 여러 고을을 침공하면, 최영이 틀림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올 것이다. 그때 가서 개경이 공허한(텅 빈 – 옮긴이) 틈을 타서 곧바로 들이치면 쉽사리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고 ….”
그 후(뒤 – 옮긴이)에도 고려군은 번번이 왜구의 기만전술에 말려들어 여러 차례 패전을 거듭했다.
안성에 침구했을 때에도 왜구는 고려군을 기만하기 위해 삼(한자로는 ‘마[麻]’ - 옮긴이)밭에 복병을 배치하고, 포로 3 ~ 4명을 농부(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기’ - 옮긴이)로 가장시켜 밭을 매게 하면서 고려군을 속이게 하였다(후기 고리 군사들이 밭 매는 포로들을 보고, ‘여름지기들이 이렇게 마음 놓고 밭을 매는데, 밭 안에 적군이나 해적이 숨어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고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 옮긴이).
수원부사(水原府使) ‘박승직’이 이를 사실로 믿고 아무 의심 없이 관아로 들어갔다가, (관아 안에 – 옮긴이) 매복해 있던 왜구들에게 포위당하기까지(에워싸이기까지 – 옮긴이) 했다.
박승직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단기(單騎. 혼자[單] 말을 타고[騎] 가는 사람 ― 옮긴이)로 탈출했으나(빠져나왔으나 – 옮긴이), 그 밖의 많은 고려군은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충청도에 왜구가 횡행하자, 수원 – 양성 – 안성에 이르는 광범위한(폭넓은 – 옮긴이) 지역은 사람의 자취를 아예 찾아 볼 수 없으리만큼 텅 빈 고을이 되어버렸다.
고려 공민왕 15년 5월 판전농사(判田農寺. 후기 고리의 벼슬 – 옮긴이) ‘설장수’는 그의 상서(上書. 올리는[上] 글[書] → [임금 같은] 웃어른에게 올리는 글 : 옮긴이)에서 왜구의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면밀히 보고하고 있다.
“왜구가 많으면 천백 명으로 떼를 이루고, 적으면 십오명(열다섯 명 – 옮긴이)이 부대를 지어 요망하고 괴이한 묘책을 꾸미고 있는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맑은 날에는 그래도 쳐들어오는 걸 보아가며 적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경계해 대비케 할 수 있지만, 어두운 밤에는 먼 데까지 살펴볼 수 없어서 우리가 전혀(조금도 – 옮긴이) 예측하지 않는 곳으로 나와서 함부로 덤벼듭니다.
(그들은 – 옮긴이) 수가 많으면 허세를 부리며 교란하고, 우리(후기 고리[高麗] 군사들 – 옮긴이)의 병세(兵勢. 군사[兵]의 세력[勢] - 옮긴이)가 나누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습격해 옵니다. (또한 그들은 – 옮긴이) 방어 초소를 피해 바로 민가를 습격하기도 하고, 혹은 먼저 방어 초소를 습격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가 – 옮긴이) 적으면 미리 간첩을 보내 부유한 집을 정탐한 뒤, 약탈하여 관병(官兵. 다른 말로는 ‘관군’. 여기서는 후기 고리의 관군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이 이를 알고 추격할(뒤쫓을 – 옮긴이) 때쯤이면 이미 왜적은 노략질한 물건을 가득 싣고 멀리 달아나 버린 뒤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 옮긴이) (만약 우리가 – 옮긴이) 경계 인력을 철수시키면(거두어들이고 물러나면 – 옮긴이) 다시 쳐들어 와, 군사를 운용하는 게 용이치 않습니다.”
설장수는 “왜구의 음모 술책은 무궁무진하다.”며 “병력이 많을 때에는 서쪽을 공격하는(치는 – 옮긴이) 것처럼 보이다가도, (실제로는 – 옮긴이) 동쪽을 향해 고려군이 분산된 다음에 조용히 공격해 온다.”며 왜구 전술을 기만에 의한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東]을 칠 듯이 말하고[聲] 실제로는 서쪽[西]을 침[擊]’ → 적군이나 적국을 속이며 공격함/기발하게 적을 공략함 : 옮긴이)로 풀이하고 있다.
이처럼 왜구는 작전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필요하다면 첩보전도 격렬하게 활용하는 등, 전략과 전법에서 뛰어난 무력집단이었다. (따라서, 나는 김성호 박사나 왜국[倭國] 학자들과는 달리, 왜구를 ‘원래 장사꾼이었다가 해적으로 바뀐 사람들’로 여기지 않으며, 그들이 ‘고향에서는 군인이었다가, 다른 나라로 건너갔을 때에는 해적이 된 왜인[倭人]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장사꾼이 “작전회의”를 하고 “첩보전”을 하며 “전략과 전법”에 뛰어나던가? 장사꾼이 [군인이어야만 알 수 있는] 병법의 기본 법칙을 써먹을 수 있는가? 백 번 양보한다 해도, 왜구의 우두머리들은 장사꾼이 아니라 군 지휘관이라고 봐야 하며, 졸병인 왜구들도 군인이었다가 장사꾼이 된 사람들이거나, 해적이었다가 군인이 된 사람들로 보아야 한다 – 옮긴이)
왜구의 기만과 불예측성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흥리왜인(興利倭人)’을 꼽을 수 있다. 태종 12년 8월 부산포에 입항한 왜선은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그들의 태도에 대해 부산포 관찰사는 “왜선 17척이 와서 정박하고 있는데, 비록 흥리(興利. ‘이익[利]을 일으킴[興]’ → 장사/무역으로 이익을 얻음 : 옮긴이)를 (근세조선으로 건너온 – 옮긴이) 구실 삼으나, 그 모양이 두렵습니다( 『 태종실록 』 ).”라고(하고 – 옮긴이) 보고하고 있다(보고한다 – 옮긴이).
이들 흥리왜인은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 중국(제하[諸夏]. 좀 더 정확히는 명나라 – 옮긴이), 일본 등지를 왕래하며 삼각무역을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선박을 약탈하거나 변방을 침구하는 왜구로 돌변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 옮긴이) ‘신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처럼 상인과 도적을 오가는 왜구의 특성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행위에는 ‘상도(商道)’라는 것이 있어 최소한(적어도 – 옮긴이) ‘어떤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 왜구이다.
태종 9년 3월에 ‘김을우(金乙雨)’가 잡은 왜인도 스스로 말하기를 “도둑질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무역하러 왔다.” 며 ‘소 사다시게(宗 貞茂[종 정무 – 옮긴이])’ 가 발급한 행장(行狀) 2장을 제시했다.
이에 (김을우가 – 옮긴이) (그 왜인과 함께 온 – 옮긴이) 왜인 20여명을 억류해 놓고 조사했는데, “배 안에 실은 물건은 모두 중국(명나라 – 옮긴이) 물건이고, 또 명(明)나라 정해위(定海衛. 제하[諸夏] 절강성에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벼슬의 이름 – 옮긴이)의 인신(印信 : 관청의 도장 – 옮긴이)이 있어”, 이들을 “도둑질하는 왜구”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태종은 “상선(商船. 장사꾼의 배 – 옮긴이)인지 적선(賊船. 해적의 배 – 옮긴이)인지 분별한 다음 처치하라.”고 명하였는데,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왜인들이 도주하여(달아나서 – 옮긴이) 이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 태종실록 』 ). 이들은 중국(명나라 – 옮긴이)에서 도둑질한 장물을 조선에 팔아 이익을 취하려고 한 약탈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흥리왜인을 가장한 왜구나, 상황이 바뀌면 왜구로 급변한 예는 적잖이 발견된다.
- 비인현 도두음곶 침구사건 :
(서기 – 옮긴이) 1419년 5월 5일 새벽, 50척의 왜구 선단이 갑자기 충청도 비인현 도두음곶에 침입했다( 『 세종실록 』 ).
왜구들은 식량 조달을 목적으로 명나라 절강성(浙江省) 일대로 향하여 가던 중 준비한 양식이 떨어져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조선의 해안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세종실록 』). 하지만 그들의 본래 목적은 조선에서의 약탈이었다.
- 해주 연평곶 침구사건 :
1419년 5월 13일, 도두음곶 침구가 발생한지 불과(겨우 – 옮긴이) 수일 후(며칠 뒤 – 옮긴이), 왜구들은 다시 서해의 해주(황해도에 있다 – 옮긴이) 연평곶을 기습했다( 『 세종실록 』 ). 왜구의 병선 38척은 안개와 어두움을 이용하여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근세조선 초기의 군직[軍職. 군대 안에서의 관직] - 옮긴이) ‘이사검’과 만호 ‘이덕생’이 이끄는 조선 병선 5척을 갑자기 포위하고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우리들은 조선을 목적으로 하여 온 것이 아니다. 중국(명나라 – 옮긴이)으로 향하는 길이다. 단지 지금 양식이 다 떨어져 이곳에 이르게 되었으니, 양식만 준다면 곧 물러나겠다. 전일(前日. 전날 – 옮긴이) 도두음곶에서도 우리는 싸우려 했던 것이 아닌데, 너희가 싸움을 걸어 할 수 없이 응전하였던 것이다( 『 세종실록 』 ).”
왜구들은 자신들이 앞서 도두음곶을 침구한 왜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자신들의 요구대로 식량을 내놓지 않으면 다시 도두음곶에서와 같이 교전 상황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리하여 (근세조선 군사들은 – 옮긴이) 쌀 5섬과 술 10병을 주며 물러가라고 하였으나, 왜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여 (근세조선 군사들이 다시 – 옮긴이) 그 8배(여덟 곱절 – 옮긴이)인 쌀 40섬을 더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왜구가 – 옮긴이) 쌀을 전하러 간 아군을 억류한 채 계속 위협을 가하였다. 이들의 행태는 (무역하는 왜인 장사꾼인 – 옮긴이) 흥리왜인의 성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왜구[倭寇]의 정신과 사상과 행태를 물려받은 왜국[倭國] 정부와 왜국 우익과 왜국 왕실과 그 셋을 따르는 대다수[전체의 99%] 왜국 국민들은 우리 한국인들이 자기들 앞에서 부드럽게 굴면 ‘<조센징>은 때려도 되고, 약탈해도 되며, 모욕해도 된다.’고 판단한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무언가를 ‘양보’하거나, 부드럽게 굴거나, 순하게 굴거나, 예의바르게 굴 필요는 없지 않은가? : 옮긴이)
그렇다면 왜(倭)의 이 같은 말은 사실일까? 그렇지가 않다.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동남부로 항해해 가거나, 한반도(코리아[Corea] 반도 – 옮긴이) 남서해안(충청도/호남 바닷가 – 옮긴이)로 오는 건 항해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원양항해에 나서며 양식을 싣지 않았을 리도 없다. 보급품의 탑재는 항해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구는 애당초 조선을 침략(겸 약탈 – 옮긴이)할 목적으로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출발 전에 약탈 전까지 필요한 ‘침구용 식량’만 (배에 – 옮긴이) 싣고 한반도 해안(바닷가 – 옮긴이)에 들이 닥쳤다. 따라서 회항(回航. ‘배[航]를 돌림[回]’ → 배를 타고 다른 곳을 들린 뒤, 처음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감 : 옮긴이)은 침구 목적이 이루어진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마치 2차대전 시(때 – 옮긴이) (미군의 항공모함이나 군함으로 가는 것까지만 가능한 양의 – 옮긴이) 연료만 싣고 이륙한 가미가제 부대원들을 연상시키는(떠오르게 하는 – 옮긴이) 대목이다.
2차 대전 출격 시, 가미가제 부대원들은 미 함대로 돌진해 자살공격(일종의 자폭 – 옮긴이)을 감행하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듯, 왜구는 침구 목적을 달성한 후에야(뒤에야 – 옮긴이) 뱃머리를 돌렸다. 왜구 침구 방식이 근현대 들어 일본의 침략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의 이 같은 전술은 군사작전의 일환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왜의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구의 만행이 이어지자, 조선 정부에서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에 이르러, (그 주장이 – 옮긴이)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로 구체화 된다.
이 같은 일본의 기만적인 태도는 (서기 – 옮긴이) 1985년 6월(이 무렵에는 전두환이 ‘대통령’이었고, 그의 ‘정부’는 ‘제 5 공화국’으로 불렸다 – 옮긴이) 한일기본조약 체결 20주년을 앞두고 일본 정부가 보여준 행태에서도 그대로 현재화되어(현재화<해서> - 옮긴이) 나타난다.
이날 일본(왜국[倭國] 정부 – 옮긴이)은 한/일 교린 관계를 상징하는 기념우표에 조선통신사 그림을 넣기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재일동포(흔히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으로 불리는 ‘재일[在日] 코리안[Corean]’ - 옮긴이) 지문 날인(당시에는 – 그리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 정부 문서에 한 사람의 지문을 강제로 찍게 하는 조치는 그 사람을 “범죄자”나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뜻이었으므로, 이는 왜국 정부가 재일 코리안들을 ‘범죄자’나 ‘미래의 범죄자’로 여기고 감시한다는 뜻이 담긴 일이었다 – 옮긴이)에 거부하는 동포를 잇따라 연행하는 등 전에 없던 강경 자세를 취했다.
(이제 와 말하면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그 때 한국 정부도 거칠고 세게 나갔어야 했다. 한국 정부도 한국 안에 와서 살던 왜인[倭人]들에게 ‘너희를 믿을 수 없으니, 너희 지문도 우리가 다 찍어서 보관하고 너희를 감시해야겠어.’하고 말하고 그걸 실천해야 했다.
그리고 만약 왜인들이 화를 내며 따지면, 왜국 정부가 재일 코리안들에게 지문 날인을 강요한 사실을 알려주며 “우린 너희 나라 정부가 했던 일을 똑같이 할 뿐이야.”하고 못 박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왜국 정부와 우익은 한국과 한국인을 가볍게 다루지 못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단 말인가? - 옮긴이)
(한 마디만 더 하자. 왜국의 이런 행태는 서른아홉 해가 흐른 지금도 겉모습만 바뀌어서 되풀이되고 있다.
왜국 언론은 이른바 ‘한류’에 대해 말하지만, 왜국 정부는 사도 광산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강요당한 노예노동을 적극 부정한다. 그리고 왜국 국민들은 ‘한국 관광’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들의 나라인 왜국에서는 혐한 서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그리고 “<조센징>을 죽여라!”하는 왜국 우익들의 시위는 최근까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나아가 왜국 정부는 말로는 “한국이 가장 중요한 나라”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이 <다케시마(독도의 왜국식 이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떠들고, 왜국의 『 헌법 』 을 고쳐 왜국을 다시 ‘군대가 있는 나라’/‘[침략]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 이게 ‘왜구의 속임수’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게 ‘왜구의 기만’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여러분에게 묻겠다. 이런데도 이른바 ‘한/일 우호’가 가능한가? 이런데도 서양이 시키는 대로 한국이 왜국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가? - 옮긴이)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기만전술은 현대 들어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대로 드러난다. (서기 – 옮긴이) 1982년 일본 문부성(한국으로 치면 교육부 – 옮긴이)은 역사교과서 왜곡이 현실화되기 전까지 거짓으로 일관해 왔다. ‘오가와(小川[소천 – 옮긴이])’ 문부장관은 “(한반도) ‘침략’을 ‘진출’이라고 고쳐 쓴 것은 저작자 자신이다.”, “일본의 교과서는 어디까지나 민간이 발행한다.”며 시종일관 일본 정부의 간여를 부인한 채 민간에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08년 7월 일본 문부성은 중학교 사회과목 교육 지침서인 「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 에 ‘독도의 영유권이 일본에 있다.’는 문장을 명시함으로써, 전형적인 기만 행태를 보여 주었다.
2001년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 시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郞[소천 순일랑 – 옮긴이])’와 일본 각료들이 마치 작전 계획의 일부인 양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던 것도 이와 같다.
이에 대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반발하자, 일본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화해 제스추어를 취하며 본질을 흐렸다.
(왜국이 일단 – 옮긴이) 정치적 목적을 이룬 뒤에 돌연 한일관계 복원을 시도하는 듯한 모습은 (한국을 비롯한 – 옮긴이) 주변국을 한없이 우롱하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고이즈미의 속셈이 간파되자, 한국은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고[勿], - 옮긴이) 주변국들도 ‘일본 특유의 이중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조차 일본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했을 게 분명하다.
일본의 이 같은 기만적 태도는 한일관계에서 극히 우려스러운 부분으로, 국가간(나라와 나라 사이 – 옮긴이) 신뢰의 근본(뿌리 – 옮긴이)마저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
일본은 오랜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 동안 가해자 역할을 충실히 자임해 왔지만, 어느 순간 마음만 먹으면 ‘가해자 기억’을 모두 삭제해 버리고,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 그 한 가지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倭軍]이 근세조선의 도공들을 잡아 왜국으로 끌고 간 일은 “절대 납치가 아니다. 천대받던 조선 도공들을 ‘해방’시켜 준 일이다! 만약 ‘납치’라면, 왜 그자들은 고향으로 안 돌아간 거냐?”하고 우기고, 2차 대전 때 전쟁터로 끌려간 근대 왜군 성[性]노예들은 “매춘부”라고 낙인찍으며, 역시 2차 대전 때 전쟁터와 공장과 탄광으로 끌려가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한국인 노동자들은 “우리의 신민이니, 우리를 위해 일할 의무가 있는 <징용공>들”이라고 우기며 “우리가 그것들을 잘 먹여주고 잘 대해 줬어. 뭐가 문제야?”하고 악을 쓰는 왜구[倭寇. 다른 이름은 넷우익/재특회/왜국 우익/왜국 국민]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에 반박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면서[그러니까, 동의하고 찬성하면서] 조선 공화국[수도 평양]이 잡아갔다는 이른바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은 툭하면 강조하고 국제사회에 그 일을 알리며 “억울하다!”고 악을 쓰는 왜국 정부를 들 수 있다. 이게 “‘가해자 기억’을 모두 삭제해 버리고”, 이른바 ‘일본인 납치’라는,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일만 강조해서, 그 “이야기에 빠져드는” 일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 옮긴이)
(아래 줄임[‘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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