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혹시나 해서 말인데 넌 역시나 해서
양의 탈을 쓴 고양이거나 살쾡이 운명이면 어쩔 수 없지
아 저기 골목 끝에서 시가 걸어오고 있다
그는 방금 오줌통에 빠졌던 취한 사내다 소개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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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젯밤에 오줌통에 빠졌던 그 사내다
아침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아 나는 또 그립다
함기석!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밤새 그렇게 나를 씹니? 아무튼 여긴 지하도다 나의 숙소
바깥으로 나가니 도로는 꽁꽁 얼어붙었고
강추위에 바지 속의 내 고추도 왕창 쪼그라들었다
찬장에 높게 쌓인 유리그릇처럼 턱은 덜덜덜 떨린다
공터로 가서 오줌을 누려고 바지를 끄르는데
손가락이 얼어서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져서
꺼내기도 전에 줄줄 샌다
아 이게 인생이구나!
뭔가 꺼내기도 전에, 내 오줌에 내가 홀딱 젖는 것
그래도 난 다행이다 저자는 어쩌나
벨트 풀기도 전에 설사가 터진 저 불량품 건달 시인
혹시나 해서 말인데, 그 인간 시집 나오면
썩은 속 달래줄 보은 대추차나 한 대접 대접해줘라
아 저기 고층빌딩 위 살얼음 깔린 하늘에서
아침 해장술에 취한 신은 또 하루치의 햇살 기타를 퉁기고
아 저기 눈 덮인 광장 가득
빡빡머리 해는 떠오르고 새들은 또 햇빛을 물어다 나르고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3.11.30. -
시인은 직업별 연봉 통계에서 늘 최하위를 다투는 직업입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시인의 막강한 경쟁자들입니다. 전업 작가, 그중에서도 전업 시인은 매일 빈곤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꽤 화려하고 매혹적인지 많은 이들이 환상을 품은 채 시를 업(業)으로 삼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와 더불어 사는 삶은 경제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고통 그 자체입니다.
신춘문예 시즌입니다. 돈도 벌 만큼 벌었겠다, 사회적 지위도 높겠다, 이제 시나 써볼까 하는 분들의 연락이 잦아지는 때입니다. 그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씁쓸해집니다. 제가 세례를 받을 때, 신부님이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종교가 제 인생을 꾸미는 또 다른 장식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시를 인생을 꾸미는 아름다운 장식품쯤으로 여기고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끝없이 살을 파고드는 족쇄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