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의 짐승 - 닥터 지바고 / 박미영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짐승은
순백의 자작나무숲 노란 태양 아래 서식한다
반짝 언 호수를 녹이는 눈의 결정(結晶)
사뿐히 그 흰 꽃이며 꽃잎사귀 즈려밟고 와
흰 잔등 구부려 제 부은 발등 핥는다
사랑이라는 위험하디위험한 짐승은
흰 입김 쩍쩍 들러붙는 찬 유리(琉璃)의 습지
발랄라이카 칭칭 울리는 눈보라의 밤을 지나
침엽수림 어둡게 유예된 시간을 건너
제 몸 속 굴을 파고 웅크려 제 붉은 상처 핥는다
사랑이라는 나쁜 이름의 짐승은
모든 날개 떨어진 것들의 가슴에
오래된 질병처럼 흘러내리는 밀랍(蜜蠟)
가속에 가속에 가속이 붙은 제논의 뒷발목
너덜거리는 곤두박질치고 말 달작지근한 모든 근육(筋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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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러시아의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가 남긴
유일한 장편 소설을 영화화한 <닥터 지바고>에 대한
감상으로 설원의 차가운 기억과 사랑의 이미지에
의존해 쓴 작품인 것 같다.
영화는 러시아 혁명 전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적
선택권이 박탈당한 한 지식인과 주변 인물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혁명을 다루고 있으나 시는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혁명의 한 복판 위험한 상황에서 지바고는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라라와의 사랑은 다시 시작되어 타오른다.
기차는 자주 멈추었고 순백의 자작나무 숲 속에서
짐승이 울부짖는데 눈은 계속 내렸다. 그 속에서
‘제 부은 발등을 핥고’ ‘제 붉은 상처를 핥는다’.
사랑은 위험하고 치명적이지만 결국 아름다운 짐승일
수밖에 없다. 숭고하게 지켜내는 과정이 그렇고,
쟁취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칠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기에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은 인류 보편의 주제이지
않은가. 장총을 메고 설원을 걷는 장면, 차가운 하늘로
울려 퍼지던 러시아 전통 현악기 ‘발랄라이카’의
경쾌하고도 애절한 선율이 가미된 모리스 자르의 음악,
이 시대 가뭇없이 지워져 가는 70미리 시네마스코프
영상, <닥터 지바고>는 거장 데이비드 린과 세기의
스타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사의 고전으로 기록될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방대한 스케일과 서사가 압권으로
러닝 타임이 장장 3시간 20분이나 되었다.
66년 3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 의상, 미술,
촬영, 각색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했고, 같은 해 골든 글로브
에서는 작품, 감독, 각본, 음악,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눈 덮인 우랄 산맥 아래의 설원을 기차가 하염없이
달려갈 때는 죽기 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는
것은 절대로 불가한 일이라 생각했다.
<닥터 지바고>뿐 아니라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영화포스터에 70미리 시네마스코프를 내세우고 오스카
트로피를 쫙 펼쳐놓을 때는 트로피 개수를 세면서 우리가
영원토록 가닿지 못할 그들만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타이타닉>이 나올 때도 우리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번에 우리도
그 오스카트로피를 4개나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에 불과하다. 가령 ‘세월호’를
주제로 마음먹고 만들면 역대 아카데미 최다 부문 수상
11개 기록의 <타이타닉>같은 부끄럽지만 감동적인 영화도
충분히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시나리오에서부터
영화기술까지 역량이 부족하여 못할 일은 없으리라.
영화음악도 <닥터 지바고>의 주제가 ‘라라의 테마’를
능가하는 음악이 나올 수 있고, 배우의 자원도 풍부하며
연기 또한 부족하지 않다. 그리고 러시아 설원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서 자작나무숲을 거닐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세계가 그만큼 가까워지고 좁혀졌다.
다시 <닥터 지바고>로 돌아와서, 지금 생각하면 이 영화
(소설)의 소재 자체는 꽤 예민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유리 지바고는 라라와 토냐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밀회를
지속한다. 그 뒤 빨치산에 잡혀 강제 입산을 당한 그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방황하다가 전차에서 내리는
라라를 보고 황급히 뛰어가다 심장마비로 절명한다.
그것으로 위험한 사랑은 마감된다. 영원한 러시아를
상징하는 여성 라라에 대한 사랑, 자연과의 시적 교감,
시대에 편승하고 때로는 낙오하면서 ‘가속에 가속이
붙은 제논의 뒷발목.’ 릴케의 ‘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짐승’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했다’란
구절이 뇌리로 휙 스쳐지나갔다.
/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