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2 - 영 ‘국가폭력 자살’ 수학자 튜링 특별우표 발행 동성애자란 이유로 ‘화학적 거세’ 판결 60년뒤… 우체국 ‘위대한 10명’ 포함 1954년,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은 스스로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한입 베어먹고 목숨을 끊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뒤 여성호르몬을 정기적으로 주사하는 ‘화학적 거세형’을 받은 지 2년 만이었다. 2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영국 우체국이 2012년 2월에 발행할 특별 우표에 담을 ‘위대한 영국인 10명’ 가운데 튜링을 포함시키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는 과거 ‘역겨운 외설’ 죄로 규정된 동성애로 유죄 평결을 받은 튜링을 공식 사면하라는 온라인 청원이 제기되자 이뤄진 결정이다. 이 청원은 올해 6월23일 튜링 탄생 100돌을 앞두고 진행되고 있는데, 올 11월까지 10만명이 서명하면 영국 하원에 논의 의제로 회부된다. 튜링은 24살에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 할 만한 ‘튜링 머신’에 대한 이론 체계를 고안한 천재 수학자였다. 또 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31살에는 영국 암호 해독 부대에 몸담으면서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인 ‘콜로서스’를 만드는 데 주요한 기여를 했다. 당시 이 부대는 콜로서스를 이용해 독일군의 암호체계 ‘에니그마’를 해독했고,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 승리에 기여했다. 스티브 잡스가 택한 애플의 ‘사과’ 로고는 독사과로 자살한 튜링에 대한 추모의 뜻을 담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을 정도로, 튜링은 컴퓨터 역사에 오롯한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반 세기 전 영국 사회는 튜링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를 치욕과 죽음으로 몰아갔다. 최근 온라인 청원서는 “앨런 튜링이 구해내려 애썼던 국가는 되레 끔찍한 절망과 때이른 죽음으로 그를 몰아넣었다”며 “이는 영국 정부와 역사에 치욕으로 남아 있으니, 튜링을 사면하는 것은 당시 같은 법 적용을 받았던 다른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죄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튜링에 대해서만 이런 특별 사면을 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주장 등으로 찬반 의견이 갈리고 있는 상태다. 튜링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사죄 청원 운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노동당이 집권했던 2009년에는 영국 정부 누리집에 튜링에게 사죄하라는 수천명의 온라인 청원이 쏟아졌다. 이에 따라 당시 고든 브라운 총리는 “튜링에 대한 처우는 끔찍한 것이었다”며 정부 차원의 사과 성명을 내기도 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한겨레 20120102 21:0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513071.html
2012 -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굴욕’ 300년 된 수십억원짜리 명품 수십억원짜리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사진)가 전문 연주자들의 음색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훨씬 값싼 현대 바이올린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굴욕을 당했다. 2일 영국 <가디언>은, 눈을 가린 바이올린 전문 연주자들에게 300년 된 스트라디바리우스 등 명품 바이올린과 지난주에 제작된 현대 바이올린을 제각각 연주해본 뒤 음색 등이 더 나은 악기를 고르게 하자 대체로 현대 바이올린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는 프랑스 파리대학 연구팀의 실험 결과로, 과학 전문지인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됐다. 연구팀은 2010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바이올린 경연대회에 참여한 21명의 연주자에게 바이올린 윤곽만 희미하게 보이는 용접용 고글을 씌운 뒤 6개 바이올린을 무작위 순서로 연주해보게 했다. 실험 대상에는 1740년께 만들어진 과르네리 한 대와 1700년쯤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 두 대가 포함됐으며, 나머지 세 대는 현대 바이올린이었다. 러시아의 바이올린 명연주자 바딤 레핀은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노래’를 부르고 과르네리는 ‘말’을 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명품 악기들은 특유의 음색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의외였다. 연주자들은 새 악기와 오래 된 악기를 구분해내지 못했다. 또 연주자 대부분은 새 악기를 선호했고, 스트라디바리우스 가운데 하나를 꼴찌 순위에 놓았다. 명품 바이올린 세 대 값은 1000만달러(약 115억원)로, 나머지 현대 바이올린 세 대를 합친 값보다 100배가량 비싸다. 파리대학 연구팀 클라우디아 프리츠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등은) 아름다운 악기지만 가격은 미친 수준”이라며 “현대 바이올린 제작사들도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한겨레 20120103 20:5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513234.html
2007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첫 출근 2일 오전 9시10분(한국시각 밤 11시10분), 뉴욕 맨해튼 50가의 유서 깊은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 추운 겨울 날씨에 외투를 다져 입은 한국인이 동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위에 무장 경호원들이 그를 에워싸고 함께 걸었다. 렉싱턴애버뉴, 2애버뉴, 1애버뉴…. 20분 뒤 이스트리버 강변의 유엔본부 사무국의 육중한 철제 정문이 열리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이 한국인이 현관에 들어서자 세계 각국 보도진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플래시를 터트렸다. 반기문 (潘基文.62) 8대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 첫날 첫 출근 모습을 역사 에 남기기 위해서다. 바야흐로 한국인 첫 유엔 사무총장 시대가 정 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역대 유엔 사무총장과는 달리 반 총장은 ‘걷 는 총장’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조선
제럴드 포드(Ford) 미 제38대 대통령의 국장(國葬)이 2일(현지시각) 워싱턴의 국립성당에서 전·현직 대통령과 포드 행정부 당시 고위관료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포드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날 유년시절을 보낸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로 옮겨져 포드기념관 옆에 매장돼 6일간의 장례행사를 마친다. 114년 역사의 워싱턴 국립성당에서 국장이 열린 것은 1969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Eisenhower), 2004년 로널드 레이건(Reagan) 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다. /조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1일 오후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서 연말휴가를 마치고 귀경, 연방의사당 로툰다 홀에 안치된 포드 전 대통령을 조문했다. 또 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를 비롯, 헨리 키신저(Kissinger) 전 국무장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Scowcroft) 전 국가안보보좌관 등 포드 행정부의 고위 참모와 각료들, 수천 명의 일반인들이 대형 성조기로 감싼 포드 전 대통령의 관 앞에서 애도를 표했다. 워싱턴=허용범특파원 /조선닷컴 2007.01.0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03/2007010300008.html
- '노점' - '이른 아침' (공중전화 카드) 1976 - 한국의 동양화가 박래현(朴崍賢) 사망 박래현 [朴崍賢, 1920.4.13~1976.1.2] 한국의 동양화가. 호 우향(雨鄕). 평남 진남포(鎭南浦) 출생. 1944년 일본 도쿄[東京]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1940년부터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다분히 일본화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광복 후 여성 특유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설채(設彩)와 면 분할에 의한 화면구성으로 동양화의 새로운 실험을 전개하였다.
1963 - 드골 대통령, 독자적 핵군 창설 선언 [역사 속의 인물] 독자적 핵군 창설 드골 대통령 “프란시알 파라 다세”(Francial fara da se·프랑스는 오직 혼자서 어려운 고비를 넘길 것이다) 자유 프랑스를 재건한 샤를 드골(1890∼1970)은 1963년 오늘 독자적 핵군(핵무기 관련 군대) 창설 선언을 하면서 국민에 외쳤다. 핵무기 개발과 군수산업 개발에 전력해 온 드골은 이날 대국민선언을 통해 다시 한 번 세계를 시끄럽게 한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영국과 함께 핵무기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프랑스는 전쟁이 끝나자 핵무기 개발에서 소외된다. 패전국으로서 자존심이 구겨졌던 프랑스는 핵무기 개발에서조차 뒤떨어지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드골은 상처 입은 국가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독자적인 핵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원자력청을 설치하고 전국 곳곳에 원자력 연구소를 지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다른 나라들의 외교적 압력도 잇따랐다. 미국과 소련의 반대는 물론이고, UN총회에서 프랑스의 핵실험 추진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후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60년 2월, 마침내 드골 정부는 전 세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게 되었다. “위대한 프랑스 만세.” 핵실험 성공 후 드골이 내뱉은 일성이다. 배성훈편집2부장 /매일신문 2013년 01월 0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yy=2013
[오늘의 역사]소련 최초 달 탐사선 발사 지난 1959년 오늘 러시아어로 달을 뜻하는 소련의 무인 우주선 루나1호가 달을 향해 날아올랐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9.01.01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3956
- 조그 1세 (Zog I, 1895~1961)
[역사속 오늘] 조그 알바니아 국왕 폐위 1946년 오늘 알바니아 좌익정부는 '조그' 국왕을 폐위시킨다. /YTN 2009-01-02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0901020204175436&s_mcd=0422
1943 - 스탈린그라드전투 치열 [역사속 오늘] 스탈린그라드전투 치열 스탈린그라드전투가 한창이던 1943년 오늘, 소련군이 나치 독일군을 대대적으로 반격한다. /YTN 2011-01-02 일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1012113275308&s_mcd=0422&s_hcd=
1938 - 캐나다 출신 외과의사 노먼 베쑨 중국행 [책갈피 속의 오늘]加노먼 베순 중국行 “나는 살인과 부패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그 모순을 묵과할 수 없다오. 나는 우리가 태만한 탓에 탐욕스러운 자들이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이들을 살육하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소.” 베순의 의료 활동은 뒷일을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의료요원들을 위한 의학 교재를 집필하고 병원 부속학교까지 세웠다. 그는 의료란 단순히 의사 개개인의 기술이 아닌, 경제 행정 사회적 기반을 통해 시스템적으로 실현돼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미국에 개업했던 병원을 닫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1919년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회의에서 외교고문이 된 후,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하고 각국에 한국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을 벌렸다. 1919년 4월 한인자유대회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하여 국제연맹과 미국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3일간에 걸친 자유토론회를 개최하고 3일째 되는 날 독립기념관으로 시가행진을 주도하였다. 미국 기마순경의 선도를 받으며 한인 150명은 때마침 쏟아진 소나기에 흠뻑 젖은 채 태극기의 물결로 필라델피아 거리를 메웠다. 이승만은 독립관에서 조선독립선언문을 목멘 소리로 낭독하여 워싱턴 주변에 한민족의 독립운동 의지를 드러내었다. http://www.koamhistory.com/home/bbs/board.php?bo_table=000&wr_id=82
1921 - 볼셰비키정권, 반혁명 '백군' 석방 1918년 오늘, 볼셰비키 정권은 러시아의 감옥을 가득 채웠던 '백군'들을 석방한다. /YTN 2009-01-02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0901020204075127&s_mcd=0422
1920 - 미국 금주법 발효 [어제의 오늘]1920년 미국 금주법 발효 ㆍ밀주 판치며 범죄만 늘어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널리 남용되어온 약물을 꼽으라면 단연 알코올(술)이다. 심리적·신체적 중독성 등 그 해악을 의학적으로만 따져본다면 술은 강한 성분의 정신활성 물질에 해당한다. 만약 술이 1900년대 이후에 발견됐더라면 사용은 물론 제조·유통·판매·저장이 모두 금지되는 ‘대량살상무기’의 취급을 받았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술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동반자라는 점에서 다른 약물과 다르다. 관습적으로 용인돼 왔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방된 마약’인 셈이다. 원래 술은 기호품이 아닌 의약품으로 출발했다. 의학을 뜻하는 한자 의(醫)는 침상에 누워 있는 환자를 술로 치료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예부터 술이 육체적·정신적 질환을 치료하는 데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유신모기자 /경향신문 2009-01-01 17:50: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11750265
- 'Chronicles of the Galaxy' 아시모프 [Asimov, Isaac, 1920.1.2~1992.4.6] [오늘의 경제소사/1월2일] <1284> 아시모프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82년 한평생 동안 500여권 이상을 쓴 다작가다. 주종인 공상과학(SF)에서 역사와 정치, 경제, 성서 해설, 셰익스피어와 유머집까지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저작의 대부분이 히트해 한글로 번역된 책자만도 113권에 이른다. 최대 업적은 과학의 대중화. 공포의 괴물로 인식되던 로봇을 인간과 닮은 꼴로 묘사해 어린이들에게 꿈을 안겼다. 영화 ‘아이 로봇’과 ‘바이센테니얼 맨’의 원작자도 아시모프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은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3부작’ 주인공처럼 문명을 구하는 역사심리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런 학문이 없어 가장 유사한 경제학을 택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1884 - 미국의 영화 감독 오스카 미쇼(Micheaux, Oscar) 출생 미쇼 [Micheaux, Oscar, 1884.1.2~1951.3.25] Oscar Micheaux Oscar Devereaux Micheaux (January 2, 1884 – March 25, 1951) was an American author, film director and independent producer of more than 44 films. Although the short-lived Lincoln Motion Picture Company produced some films, he is regarded as the first major African-American feature filmmaker, the most successful African-American filmmaker of the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the most prominent producer of race films. He produced both silent films and "talkies" after the industry changed to incorporate speaking actors. Early life and education http://en.wikipedia.org/wiki/Oscar_Micheaux
브레게 [Bréguet, Louis-Charles, 1880.1.2~1955.5.4] 프랑스의 비행기제작자, 국영항공사인 에어프랑스사의 설립자. 그가 제작한 많은 비행기들이 세계기록을 수립했다. 콩도르세 리세, 카르노 리세, 고등전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브레게 가문 소유의 공업회사인 브레게사에 입사해 전기분야의 수석 공학자가 되었다. 1909년 자신의 비행기를 최초로 제작했으며, 1911년 10㎞ 비행에 대한 속도기록을 세웠고, 그해에 루이 브레게항공기제작회사를 설립했다. 1912년 자신의 수상 비행기를 최초로 제작했고, 1917년 헬리콥터의 전신인 오토자이로(고속 회전비행기)를 설계하고 비행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군용기를 제작했는데, 특히 브레게-XIX기는 주목할 만했다. 1919년 항공운송회사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나중에 에어프랑스사가 되었다. 1927년 브레게의 비행기 중 1대가 최초로 남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을 했고, 다른 비행기는 1933년에 7,200㎞ 대서양 무착륙 비행을 했는데 이 기록은 당시까지의 최장거리 비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군용기를 제작했으며, 그뒤 일련의 대형 4발 수송기를 생산했다. /브리태니커
테레사 [Thérèse de Lisieux, Sainte, 1873.1.2~1897.9.30] 가톨릭 성녀. 본명은 마리 프랑수아 테레즈이며 노르망디의 알랑송에서 출생하였다. 'Therese de Lisieux'는 '리지외의 테레사'란 뜻의 프랑스어이다. 1888년 리지외의 가르멜회(會)에 들어가, 2년 후 서원(誓願)을 하고 1893년 이후 수녀원장 보조수녀로 있었는데, 결핵으로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짧은 수도생활 중 그녀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복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신앙은 밝고 소박하여 가난한 이웃에 대하여는 더없는 애정을 쏟았으며, 순결하고 경건한 생활은 많은 사람들의 애경(愛敬)을 한몸에 받았다. 1925년 '아기예수와 성안(聖顔)의 성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시성(諡聖)되었으며 선교사업의 수호성인이다. 자서전 《영혼의 이야기 Histoire d'une âme》(1898)가 있다. /네이버
- Ernst Barlach - 'Mother Earth II'
- 'Monks Reading... ' - 'The Collector, 1913'
- 'Head from Gustrow Memorial' - 'The Flutist'
1870 - 독일의 조각가, 화가, 극작가 바를라흐(Barlach, Ernst) 출생 바를라흐 [Barlach, Ernst, 1870.1.2~1938.10.24] 독일의 조각가, 화가, 극작가. 북독일의 베델 출생. 함부르크 공예학교와 드레스덴 미술학교에 다닌 후,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였다(1895∼1896). 1906년의 러시아 여행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1910년에 베를린을 떠난 후부터는 슈베린주(州)의 귀스트로브에 정착하여,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는 표현주의 작가로서 신(神)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였다. 처음에는 조각가로서 유명해졌으며, 지상(地上)의 권력에 예속했기 때문에 존재(存在)의 중하(重荷)에 얽매인 인간을 목각(木刻)의 농부소상(農夫小像)으로 표현하였다. 대작으로는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의 전쟁기념상(1930)이 있다. 희극과 시에도 손을 댔으며, 자작(自作)인 목판(木板) 삽화가 든 책을 간행하였다. 희곡으로는 《죽은 낮 Der tote Tag》(1912) 《불쌍한 사촌》(1918) 《참다운 세데문드족(族)》(1920) 《흥수》(1924) 등이 있다. 1933년에 나치스에 의해 퇴폐예술가라는 낙인이 찍히고 제작을 금지당한 후, 고독한 생애를 마쳤다. 유작(遺作)으로 성사극(聖事劇) 《라체부르크 백작》(1951, 사후 발표)이 있다. /naver
1837 - 러시아의 작곡가 발라키레프(Balakirev, Mily) 출생 발라키레프 [Balakirev, Mily (Alekseyevich), 1837.1.2~1910.5.29] 러시아의 작곡가.피아니스트 ·지휘자. 니주니노브고로트 출생. 가난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모스크바로 가서 10세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이어서 모차르트학자인 우뤼비셰프에게 다시 지휘와 악서(樂書)의 지도를 받으며, 카잔대학의 수학과에서 공부하여 시대의 새로운 조류를 터득하였다. 185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가 5인조(新러시아樂派) 결성에 힘썼으며, 무료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예술계 전반에 나타난 혁신운동에 전념하였다. 1870년 이후 정신적 위기에 빠져 음악에서 손을 떼었다가 그 뒤 다시 악계로 복귀하였으나 이전의 지도력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작풍은 동양적 요소와 슬라브 지방색이 강한 낭만적인 개성적 경향을 띠었으며 1860년대에 많은 걸작을 내놓았다. 러시아민요의 화성화(和聲化)도 중요한 공적으로 훗날 차이코프스키 등의 창작에 영향을 끼쳤다. 주요작품에는 교향곡 2, 교향시 《러시아》(1862) 《타마라》(1884), 동양적 환상곡 《이슬라메이》 《러시아 주제(主題)에 의한 서곡》(1859), 《러시아 민요집》(2권) 등이 있다. /네이버
- 'Self-Portrait'
- 'The Hunters at Rest', 1871 -'The Bird-Catcher', 1870
- 'Incorrigible One'
1834 -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페로프(Perov, Vasily) 출생 페로프 [Perov, Vasily Grigorevich, 1834.1.2~1882.6.10] 러시아의 화가. 유형에 처해진 급진 귀족의 서자로서 모스크바의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성직자의 타락을 폭로한 <부활절 마을 십자가 행렬>의 통렬한 풍자로 물의를 일으켰고, 1862~1864년의 유럽 체류 후의 일련의 작품 <트로이카> <들판의 환송> 등에도 사회적 항의의 자세가 역력하다. 크램스코이와 레핀 등의 미술가 그룹이 반관전(反官展)의 '이동파(移動派)'를 결성했을 때, 선배 화가로서 몇 년 동안(1871~1877) 그들과 함께 행동하였다. 도스토옙스키, A.오스트로프스키 등의 초상화도 주요작품으로 꼽힌다. /네이버
조지아 주(State of Georgia)는 미국 주 중 하나로, 영국에 맞서 미국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의 13개 주 중 하나이다. 조지아는 1733년, 13개 주 중 마지막으로 연방에 가입하였다. 또한 1788년 1월 2일 미국의 헌법을 네 번째로 인준한 주이기도 하다. 1861년 1월 21일 연방에서의 탈퇴 및 남부 연합에의 가입을 7번째로 공식 선언하였다. 1870년 7월 15일, 연방에 마지막으로 재가입하였다. 조지아는 미국의 주 중 9번째로 인구가 많으며, 2008년 7월 1일 조사 결과, 9,685,7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100개 카운티 중 14개가 조지아에 속해 있으며, 이것은 텍사스 다음으로 2등이다. 조지아는 '복숭아의 주' 와 '남부의 제국'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애틀랜타가 주도이며,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또한 조지아는 텍사스다음으로 카운티 수가 많은 주이기도 하다. 미국의 39번째 대통령 지미 카터가 이 주 출신이며 현재 주지사는 공화당소속의 소니 퍼듀이다. /위키백과 - Generals Montcalm and James Wolfe
1727 - 영국의 군사령관 울프(Wolfe, James) 출생 울프 [Wolfe, James, 1727.1.2~1759.9.13] 영국의 군사령관.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퀘벡을 탈환할 때 활약했다. 이 승리로 영국은 캐나다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육군중장 에드워드 울프의 맏아들로, 케이프브레턴 섬의 요새인 루이스버그 탈환은 거의 그의 공로였다. /브리태니커
- Court of Lions, Alhambra - Arch, Alhambra, Granada 1492 - 이사벨라 여왕 스페인 통일, 그라나다 왕국 멸망 [책갈피 속의 오늘]1492년 이사벨라 여왕 스페인 통일 15세기 스페인은 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왕국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스페인을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한 왕은 이사벨라 여왕이었다.
- Octavianus - Pericles 플루타크영웅전 로마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플루타크는 영어 발음)의 만년의 작품. 원제명은 《대비열전(對比列傳)》이다.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데모스테네스·키케로와 같이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가로서 서로 유사한 점이 있는 인물들을 대비해가면서 서술했다. 23조(組), 즉 46명의 인물들의 대비적인 전기이며 각 조의 끝에는 원칙적으로 그 두 인물의 비교평론이 서술되었으며, 이 밖에 4명의 전기가 별도로 실려 있다. 없어진 부분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위인들의 훌륭한 언행은 물론, 사악한 인물들의 행동에서도 역설적인 의미에서 독자들에게 윤리적 덕성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 저자가 이 작품에서 의도한 바는 정확한 역사가 아니라 ‘대사업이나 투쟁의 기술(記述)은 타인에게 맡기고, 각 인물들의 마음의 특징에 입각해서 그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근대에 프랑스의 자크 아미요의 완역(完譯)에 의하여 널리 보급되어 고전 연구의 입문서 역할을 하였고, 셰익스피어·괴테·나폴레옹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도 1973년 전 10권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네이버
《태조실록(太祖實錄)》은 조선 태조(太祖) 원년(1392)부터 7년(1398)까지 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태조는 재위 7년 만에 정종(定宗)에게 양위하고 태종(太宗) 8년(1408) 5월에 승하하였다. 그 이듬해(1409) 8월 28일에 태종은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륜(河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유관(柳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정이오(鄭以吾)·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송포(宋褒) 등이 조선에 있어서 실록 편찬이 처음일 뿐만 아니라 시대가 멀지 아니하고 또 당시에 활동하던 인물들이 모두 살아 있으므로 실록 찬수는 시기상조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조 원년부터 정종 2년까지의 사초(史草)를 각 사관(史官)에게 제출하도록 명하는 동시에, 하륜 등으로 하여금 이를 편찬하게 하였다. 태종 10년(1410) 정월부터 하륜·유관·정이오·변계량이 주가 되어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 조말생(趙末生)·권훈(權壎)·윤회(尹淮), 기사관(記事官) 신장(申檣), 외사관(外史官) 우승범(禹承範)·이심(李審)과 함께 《태조실록》 편찬에 착수하여 13년(1413) 3월에 15권을 완성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TREE/YDG_HEJ.jsp?ptype=hej&subtype=01
베사리온 [Bessarion, Johannes, 1403.1.2(8)~1472.11.18] 본명은 Basil Bessarion. 비잔틴의 인문주의자·신학자. 후에 로마의 추기경이 되었으며, 15세기의 문예부흥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423년 수사가 되었다. 1437년 비잔틴 황제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구스가 그를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는 당시 발칸 반도를 침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던 투르크인들에 대항해, 군대 원조를 받고자 비잔틴 교회와 서방교회의 연합을 협상할 목적으로 요한네스 황제와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 페라라와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도시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베사리온은 연합을 지지했으나 다른 비잔틴 교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로마 교회와 계속 친교를 가졌으며, 교황 유게니우스 4세의 총애를 받아 1439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베사리온은 이탈리아에 살면서 로마 역사학회와 고고학회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1442년 유명한 신플라톤주의자이며 스승이었던 게미스투스 플레톤과 함께 그리스 문학과 플라톤 철학 연구를 위하여 피렌체에 ' 플라톤 학술원'(Accademia Platonica)을 설립했다. 1450~55년 볼로냐의 교황청 장관으로 있으면서, 1471년 프랑스 왕 루이 11세에게 갔던 일을 비롯해 외국의 여러 왕에게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당시 매우 학식있는 학자였던 그는 사설 도서관을 지어 많은 그리스어 사본을 소장했고, 학자들을 후원했으며, 직접 저술활동을 함으로써 그리스어와 그리스 학문에 대한 지식을 전파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도서관을 베네치아 의회에 기증했다. 1463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트레비존드의 게오르기오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항해 플라톤을 옹호한 논문인 〈In calumniatorem Platonis〉이다.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그는 이탈리아 철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탈리아 철학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한 뒤 비잔틴의 철학 전통을 받아들였다. /브리태니커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