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강
하나님의 계획(II)
본문 :엡 1:4절
우리 교육제도의 문제점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가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진짜로 공부를 해야 하는 대학에 가서는 공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사실 교육 단계에 있어서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 목표는 대학에 진학했을 때 그 과정을 따라 잡을 수 있도록 기초적인 학문의 틀을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고등학교 교육은 그런 것이 아니라,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입시학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가야하는 것은 이제부터는 전문적인 공부를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공을 정하고 그 전공을 좀 더 깊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 진학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학생들 중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대학에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남들이 다 가는 대학이니 가고 보자는 심정으로 적성에도 맞지 않는 대학을 시험 성적에 맞추어 가는 형편이지요.
게다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했으니 이제는 좀 쉬자는 것이 대부분 대학 신입생들의 생각입니다. 공부는 가능하면 적당히 하고, 시험은 잘 보면 좋은 것이니까 컨닝을 하는 것도 불사합니다. 아니, 누구나 컨닝을 합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이런 식으로 대학 시절을 보내고 사회에 나오면 이번에는 대학시절 내내 배웠던 요령만을 사용하려합니다. 정당하게 실력으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 타협하고 부정을 해서 결과만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에 언제나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는 대학을 가는 것이 고등학교 시절 최대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언제나 방황하게 되어있고, 또 한계에 도달하게 되어있습니다. 목표가 대학진학인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나면 이제는 목표가 상실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높은 목표를 찾아서 그것을 위해 전진해야 하는데, 그 목표가 없어진다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
한국교회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 목표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 목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보가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어냐고 물으면, 천국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 상 받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원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다 보니까 천국마저도 경쟁 체제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시험 공부하듯이 신앙생활도 합니다. 열심히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교회 출석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의 결과들이 쌓여서 천국에서 좀 더 넓은 맨션을 확보하고, 좀 더 커다란 면류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가 단지 천국에 가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천국에서 상 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영적으로 언제나 가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 시절, 1등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 친구가 공부를 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친구는 단지 시험공부만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험기간이 되면 그야말로 예상 문제를 달달 외워서 좋은 성적을 받습니다. 어쩌다 B가 한 과목만 나와도 교수님을 찾아가고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성적을 A로 고칩니다. 그러니 시험 성적은 언제나 1등입니다. 하지만 평소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그의 무식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까 누구도 그 친구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마치 시험공부 하듯이, 이 세상에서 긴장하면서 점수를 따놓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우리 신앙이 목표일 수 없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 천국에서 상 받는 것, 이런 것을 신앙이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분리 될 수 없는 구원과 거룩
오늘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엡 1:4절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자! 이 구절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그래서 자신이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가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어디까지 만들어 갈 작정이냐 하면 거룩하고 흠이 없는 단계까지 만들어 갈 것이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일단의 백성들을 구별하셔서 그의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의 거룩하심 같이 그 백성들 역시 거룩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으로 갑니다.
거기 6절을 읽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나이다.”
자! 본문에 따르면 예정은 한 사람 한사람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일단의 무리들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주셨다는 창세전의 이 약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조건을 충족 시켰습니다.
이것이 오늘 엡 1:4에서 말하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요 17:19입니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리스도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거룩한 것이라는 것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설명하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는 사실상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하는 목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구원과 거룩을 분리하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거룩해 지려는 노력을 하자 보통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지만, 거룩은 천국에서의 상급을 위한 보너스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필수지만 거룩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과 거룩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상 구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라고 하는 실체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들어온 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태는 회복이 불가능하도록 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단의 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에덴에서 추방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 불가능한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거룩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거룩을 연습하게 되고, 거룩해 지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룩이 무엇이냐 하는데 있습니다.
거룩은 이 세상에서 흙을 묻히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이란 근본적으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마귀를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은 우리의 삶에서 흠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증명됩니다.
거룩은 열정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열정으로 거룩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흠이 없어지는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거룩이 좀 더 적극적인 개념이라면, 흠이 없는 생활은 내 삶에서 죄의 흔적들을 지우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우리 삶은 죄로 완전히 물들었기 때문에, 이 죄의 흔적들을 점차점차 지워나가는 것이 거룩의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자기만을 알던 사람이 남을 위해서 배려할 줄 알게 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악을 떨면서 돈을 모으기만 하던 사람이 이 돈을 남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알게 되는 것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죄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것이 바로 거룩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속량하셨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 시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 졌으며, 또 거룩해 질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해질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선택하셔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을 위한 징계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면 굳이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또 다시 죄를 지어도 마침내는 거룩하게 만들 테니까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될 것 아닌가, 뭐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가 파티에 함께 가려고 어린아이를 깨끗하게 씻겨서 좋은 옷을 입혀놓았더니, 금방 옷을 더럽혔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를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힙니다.
다시 갈아 입혔더니 이번에는 아예 흙구덩이 속을 들어가서 장난을 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떻게 합니까?
엉덩이에서 불이 나도록 때리고 나서 다시 갈아입힙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죄를 짓는 일에 빠져들면 어떻게 합니까?
히브리서 12장 6절에 답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때때로 채찍을 드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죄를 짓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슬퍼해야 합니다.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히 12장 8절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왜냐하면 징계를 통해서 우리는 점차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야 무슨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상관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이 무섭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호통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늘이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징계가 있을 때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져 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드시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날마다 우리를 빠십니다.
하이타이를 풀어서 손빨래하듯이, 방망이로 두들기시고 손으로 비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침내 거룩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목표입니다.
거룩의 완성,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입니다.
그 지극히 영광스러운 지경에까지 우리를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감사함으로 따라갑시다. 사랑으로 그 분의 율법을 지킵시다.
사랑은 거룩의 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