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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1915년 3월 26일 ~ 2000년 9월 14일
황순원 문학은 일제 말 언론의 자유가 철저하게 통제되고 한글의 사용이 금지되던 불행한 상황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일본에 협력하고 한글을 버리던 시기, 황순원은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우리말을 지키려는 비장한 각오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문학의 외길을 걸어온 황순원의 작가정신을 이해하는 주요한 디딤돌이 됩니다. 그는 잡문이나 연재소설을 쓰지 않는 작가로 유명했으며, 오직 자신의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결백성으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순수 문학의 작가' 황순원, 그의 순수 문학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초월하려는 예술지상주의가 아니라, 시대가 부여한 문제를 주체적으로 떠안고 치열한 고민 끝에 태어난 문학입니다.
일생을 통해 시 104편, 단편소설 104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7편을 남긴 황순원, 그의 작품은 '순수성과 완결성의 미학' 으로 한국 문학사의 한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나기」,「별」,「목넘이 마을의 개」,「그늘」,「기러기」,「독짓는 늙은이」, 장편「카인의 후예」,「나무들 비탈에 서다」,「일월」등이 있고,『황순원전집』12권이 간행되었습니다.
출생과 시적 서정성의 세계(His Birth and the Lvrical World)
'황고집'의 후손으로 태어나(Born a Descendant of the 'Obstinate Hwang') 1915
황순훤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부친 황찬영(黃贊永)과 모친 장찬붕(張贊朋)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안(齊安), 조선시대 영조 때 일명 '황고집'으로 알려진 효자 집암(執庵) 황순승(黃順承)이 바로 황순원의 8대 방조이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부친(Father Who Distnbute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919
부친 황찬영은 3·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투옥되었다. 당시 만 4세인 황순원은 아버지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어머니와 단둘이 시골집에서 고독하게 지냈다. 만 6세 때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하고, 만 8세 때 숭덕소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로써는 보기 드물게 예체능 교육까지 받을 정도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소학교 졸업 후 정주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곧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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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詩心)이 꽃피던 시절(The Period of Poetic Flowening) 1931~1936
황순원은 1931년 7월 시「나의 꿈」을 『동광(東光)』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일본 동경의 와세다 제2고등학원으로 유학하여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단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고, 이 단체 명의로 27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방가(放歌)』를 펴냈다. 또 1936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 이듬해 5월 두 번째 시집『골동품(骨董品)』을 펴내며 시심을 꽃피웠다.
단편소설 작가로서의 문학적 성숙(Maturing as a Short Story Writer) 1937~1949
소설가로서 '자기 확인의 길'(Ascertaining Himself as a Nover Writer)
1937년 7월 황순원은『창작』제3집에 단편소설「거리의 부사」를 발표하여 소설가의 길로 접어든다. 이후 1940년 첫 소설집「황순원 단편집」을 낸 뒤로 창작한 여러 작품을 발표하지 않다가, 광복이 된 후인 1947년에 장편소설『별과 같이 살다』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48년 두 번째 단편소설집『목넘이마을의 개』를 펴낸다.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사된『목넘이마을의 개』는 해방 전후의 피폐한 삶을 밀도있게 그려낸 소설집으로 평가받는다.
가족, 삶과 문학의 후원자(The Family Members, Patrons of His Life and Literature)
황순원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35년, 평양시절부터 교제가 있던 일본 나고야 금성여자전문 학생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한다. 1938년 장남 동규를 낳고, 그 이듬해 와세다대학을 졸업한다. 1940년 차남 남규, 그로부터 3년 후 딸 선혜, 다시 3년 후 3남 진규를 얻음으로써 3남 1녀의 가장이 되었다. 부인 양정길은 황순원의 삶과 문학의 평생의 내조자로 다복한 가정을 가꾸었고, 장남 동규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한다.
마음의 두 별, 남강 이승훈과 부친 황찬영
(Two Stars of His Heart, Lee Seunhoon alias Nakrang and His Father Hwang Chanyoung)
황순원은 1929년 열다섯 살의 나이로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해서, 건강 때문에 다시 평양의 숭정중학교로 전학하기까지 한 한기를 정주에서 보낸다. 오산중학교에서 만난 남강 이승훈 선생을 보고, 그는 '남자라는 것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라고 느낀다. 성장한 후에도 황순원은 늙을수록 아름다운 또 한 사람의 남자를 발견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온 부친 황찬영이 바로 그분이다. 부친은 그에게 3·1운동 때 같이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의 얘기를 들려준다. '그른데 그 시커멓게 탄 주름잡힌 얼굴이 어뜨케나 환히 터나뵈든디. 그리구 말하는 거라든디 생각하는 게 얼마나 젊었든디, 나까지 다시 젊어디는 것 같드라' (단편소설,「아버지」) 그는 부친에게서 연륜의 미덕을 배웠다.
아버지와 아들(Father and Son)
아버님은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자상한 아버지셨다. 회현동에 살 때 도둑이 심해 내가 아르바이를 해서 처음으로 자랑스럽게 해 입은 양복과 당시 내 음악의 원천이어서 그야말로 애지중지하던 제니스 라디오까지 도둑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수리 관계로 부모님과 동생들이 이층에서 자고 나 혼자 아래층에서 잔 일이 있었다. 잠자다가 깨어보니 머리맡에 인기척이 확실히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놀라 소리를 질렀더니 아버님이 이층에서 소리 지르시며 내려오시면서 방 유리를 깨셨다. 아버님이 내려오셨을 때는 이미 앞문이 열린 채 도둑이 도주한 뒤였고 아버님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황동규의 산문「아버지」(<대산문화> 2000년 겨울) 에서
겨레의 작가(The Writer of the Nation)
작가 황순원의 특징이 되어 있는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 군더더기 없는 구성과 훈기 있는 여운 등은 우리의 전통적 산문 문학에서 낯선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외래적인 것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우리 전통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촉발한다. 당연히 그래야 할,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소홀히 해 온, 모국어의 세련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집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우리의 옛얘기의 정통 전수자이자 활용자라는 사실에서 똑바로 나온다고 생각된다. 기법 상으로는 현대적 세련을 거쳤지만 옛 얘기의 전승과 활용이라는 점에서는 토착적인 것의 주류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깨어 있는 작가의 양심과 침묵으로 대화하는 강의실
"작품다운 작품을 쓰지 못할 바에는 오히려 안 쓰는 편이 낫다는 작가적 양심이 그저 쓰고 싶다는 욕심 앞에 제발 무릎을 꿇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작가의 의식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무의식의 세계를 그릴 때에도 작가는 그걸 분명히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황순원,『말과 삶과 자유』)
강의실에서도 황순원은 학생들에게 과제 발표와 토론을 맡겨 둔 채, 내내 눈을 감고 듣기만 했다. 어쩌다 의심스럽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게 그런 건가?"라며 한 마디 건네지만, 학생의 답변을 길게 요구하거나 옳고 그름을 평가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오는 강의실, 침묵에 가까운 그의 말과 말 사이의 간격에서 작가적 양심과 말없는 열정은 정직하게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첫댓글 진짜 비가 내렸지요..
지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황순원 소나기 명품 작품 입니다.
오래전에 다녀왔는데 옛날 생각납니다.
사진으로 보니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